#230화
‘경호는 열외로 치더라도 지구란 참 재미있는 곳이야.’
은가누는 지금 상황이 너무나 웃겼다.
아니 약할 수는 있다.
모두가 다 강할 수는 없으니까.
그렇지만 약하면 눈치라도 있어야 할 거 아닌가?
지구의 각성자는 상대의 힘을 파악할 줄 모르는 건가?
아니 상대를 모르면서 싸운다는 발상을 한다는 것 자체가 모순이었다.
피식하며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어딘지 모르게 경호와 닮은 웃음이었다.
앞을 보니 마나코어에 쥐꼬리만 한 마력을 품은 애송이가 자신을 보고 때릴 맛이 어쩌고 하는 말에 화가 난다기보다 어이가 없었다.
자신만만한 표정이 더 가관이었다.
물론 각성자라는 존재가 특성이라는 특수한 힘을 가진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 하나만 믿고 설치는 부류는 절대로 강하지 않다는 사실도 역시 잘 알고 있었다.
로나스 대륙에서도 그런 얄팍한 잔재주만 믿고 까불던 이들은 모두 자신에게 목이 달아났었다.
친구가 죽이진 말라고 했으니 죽이진 않을 생각이었다.
대신 죽여 달라고 할 때까지 신나게 팰 생각이었다.
***
지훈은 걸어 나오는 커다란 덩치의 오크, 은가누를 보며 웃었다.
오크.
중학생 시절 피시방에 처박혀 수도 없이 죽였던 몬스터였다.
레벨이 좀 오르고 나면 경험치도 주지 않는 그런 몬스터.
그런 하찮은 몬스터가 자신에게 살기를 흘리고 있었다.
등급 측정을 하지 않아 그렇지 이미 A급을 넘어선 자신에게!
아주 제대로 본보기를 보여야겠다고 생각했다.
우우우우우우웅!
지훈의 전신이 은빛으로 변했다.
황금거신이라고 불리는 제니와 같은 특성인 [강철]을 발동시킨 것이었다.
그는 이 특성을 방어가 아닌 공격에 사용해서 최고의 A급 헌터가 되었다.
“아주 곤죽을 만들어 주마!”
쿵! 쿵! 쿵! 쿵!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땅이 푹푹 파이며 지훈이 엄청난 속도로 달려 나갔다.
콰악!
은가누도 그런 지훈을 보며 전투 도끼를 땅에 박아놓고는 주먹을 쥐고는 마력을 끌어올렸다.
혈사자 특유의 붉은 기운이 전신을 감싸서 은은한 빛을 뿌렸다.
콰앙!
지훈의 강철 주먹과 은가누의 커다란 주먹이 부딪히며 마치 폭발하듯 굉음을 터뜨렸다.
쾅! 콰앙! 쾅! 콰앙!
특성으로 강화된 주먹과 혈기를 둘러싼 주먹이 한 치의 물러섬 없이 난타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그래도 대장이라 이건가?’
쉽게 끝나지 않는 싸움에 지훈이 한걸음 뒤로 물러났다.
저런 오크 따위가 자신과 대등하게 겨루고 있다는 것에 짜증이 났다.
“오크 따위가 내 비장의 무기를 꺼내게 만들 줄 몰랐는데. 제법이군.”
지훈은 이번에 신화학원에서 자신의 강철 같은 신체를 변형할 수 있는 [변이] 특성을 얻고는 드디어 날개를 달았다고 생각했다.
이제 자신은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곳으로 날아오를 것이었다.
바로 저 녹색 괴물을 발판 삼아서 말이다.
지훈의 양손이 엿가락처럼 흐물거리더니 커다란 칼날로 변했다.
“자아. 아주 토막을 내 주마!”
타앗!
말이 끝나기 무섭게 지훈이 은가누를 향해 달려갔다.
흐릿하게 보일 정도로 빠른 움직임이었다.
경호는 피식 웃었고 다현은 재밌겠다는 표정이었다.
다만 성원만 불안한 표정으로 입술을 질겅질겅 씹었다.
지훈의 칼날손이 은가누의 목과 가슴을 찌르기 직전 전투 도끼가 움직였다.
퍼억!
아무도 격돌 장면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경호와 다현, 울피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격돌 장면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그저 퍽!하는 소리와 땅에 처박힌 지훈, 그리고 그런 그를 무심하게 쳐다보는 은가누가 원래 그랬던 것처럼 있을 뿐이었다.
커억! 컥!
칼날손이 닿기 직전 도끼를 잡고는 그대로 휘둘러 지훈의 가슴을 후려친 것이 다였다.
특별한 기술도 없었다.
그저 반응할 수 없는 속도로 때린 게 전부였다.
도끼날로 쳤으면 그대로 가슴이 쪼개졌을 일격이었다.
“허억! 헉! 제기랄!”
방심했다! 방심한 거야!
“죽인다! 죽여 버릴 거야! 감히…. 이 버러지 같은 새끼가!”
지훈이 실핏줄이 터져 빨개진 눈을 들어 은가누를 노려보며 소릴 질렀다.
-버러지? 그냥 도끼날로 칠 것을 내가 실수했군. 실력도 없는 새끼가 방심했다고 착각하는 꼴은 정말 보기 역겨운데 말이야.
번역 장치는 고장 나지 않았기에 지훈은 은가누의 말을 그대로 들었다.
뿌드득.
부러질 정도로 이를 간 지훈이 몸을 일으켰다.
“으아아아아아악!”
칼날손이 다시 변이를 일으켰다.
엿가락처럼 쭉쭉 늘어난 양손이 3m 넘게 낭창낭창하게 길어지더니 쇠못이 잔뜩 박힌 채찍처럼 변했다.
‘갈기갈기 찢어 죽여 주마!’
강철 채찍은 마력검기도 튕겨내는 강도를 가지고 있었고 날카롭게 돋아나 있는 쇠못은 독기까지 품고 있었다.
자칫하면 자신을 위험하게 할 수 있기에 한 달 동안 강철 채찍을 다루는 것만 훈련한 지훈이었다.
살아 있는 뱀처럼 허공을 날아간 강철 채찍이 은가누의 몸을 휘감기 직전.
후웅! 후우웅!
은가누의 손에 들린 전투 도끼가 새하얀 빛을 뿌리며 허공을 갈랐다.
그리고 강철 채찍은 그 새하얀 빛에 여기저기 잘려 나갔다.
후두두두둑.
“끄아아아아악!”
특성이 풀리며 양 팔꿈치 아래가 잘려 나간 지훈이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쓰러졌다.
전투 도끼가 머금은 마력강기에 잘린 강철 채찍도 살덩이로 변해 바닥에 군데군데 떨어져 있었다.
“의료팀 불러! 당장!”
정부에서 이곳에 파견한 인원 중 의료팀이 있기에 성원이 서둘러 외쳤다.
한심했다.
긴장했던 자신이 한심했고 이런 인간을 자신의 아래에 두고자 했던 것이 한심했다.
‘이런 놈들을 성장시켜서 지구를 지켜야 한다는 게 더 문제지. 아. 생각하니 정말 환장하겠네.’
그런 생각을 하니 성원은 머리가 지끈거리는 느낌이었다.
잠시 후 달려온 의료팀이 서둘러 지훈과 바닥에 떨어져 있는 살덩이를 챙겨 이송했다.
그렇게 의료팀이 빠져나간 자리엔 정적이 감돌았다.
그때 은가누가 마력강기를 거두고는 입을 열었다.
-살기 어린 공격에 나도 힘을 완전히 뺄 수 없었기에 어쩔 수 없이 강공을 펼쳤다. 진심으로 다치게 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유감이다.
여기 있는 이들 모두 번역 장치를 달고 있었기에 은가누의 말을 들었다.
-아니다. 잘했다. 내가 그랬잖아. 죽이지만 말라고. 정말 잘 참았다. 잘 참았어.
경호가 그런 은가누에게 전음을 보내 괜찮다며 달랬다.
한편, 마력검기를 우습게 튕겨 내는 지훈의 강철 채찍이 잘려 나가는 모습을 본 나머지 아홉 명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지훈의 복수? 저런 괴물에게?
웃기는 소리였다.
사실 지훈은 여기 있는 나머지 팀장 모두와 겨룰 수 있을 정도로 강했다.
그런 지훈이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하고 양팔이 잘려 나간 상황이었다.
그저 고개를 숙이고 눈알만 데굴데굴 굴렸다.
놀란 것은 아홉 명의 팀장만이 아니었다.
‘그런데 오크가 저렇게 강하다고?’
성원은 경호에게 분명히 이곳의 오크에 대해 들었었다.
다른 세상에서 황실의 친위대 기사였던 실력자라고.
하지만 정말로 무서운 게 선입견이었다.
오크.
게임에서 슬라임 다음으로 약한 몬스터인 오크였다.
그래서 지훈과 싸울 때 긴장까지 했던 성원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그렇게 경호와 다현을 제외한 모두가 혼란스러워하고 있는 그때 울피가 나섰다.
화아아아악!
불길과 함께 거대한 불여우의 모습으로 변했다.
-지금이야! 친구!
경호가 은가누에게 전음을 날렸다.
-수호신이시여!
처억!
바닥에 전투 도끼를 내려놓은 은가누가 양손을 높이 들며 울피를 향해 크게 외치고는 그대로 바닥에 엎드려 고개를 조아렸다.
동시에 주변에 있던 다섯 조장도.
-수호신이시여!
은가누처럼 바닥에 엎드려 고개를 조아렸다.
그와 동시에 공터를 둘러싼 수백의 오크들이 전투 도끼를 내려놓고 크게 소리쳤다.
-수호신이시여!
오크의 외침에 ‘혈사자의 숲’이 쩌렁쩌렁 울렸다.
그리고는 수백의 오크가 바닥에 머리를 조아렸다.
공터 가운데 우뚝 선 거대한 수호신과 그를 둘러싼 바닥에 조아리고 있는 수백의 오크.
제법 분위기가 났다.
-내가 가장 아끼는 인간, 다현에게 묻겠다.
“질문하십시오. 수호신님!”
다현이 울피의 물음에 한쪽 무릎을 꿇고는 대답했다.
‘오! 좋아! 다현마저 연기가 늘다니!’
연출을 담당한 경호는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지켜보다 겨우 한숨을 돌렸다.
-너는 저 오크와 싸워서 이길 수 있겠느냐?
울피의 질문에 모두 침을 꿀꺽 삼켰다.
“이기긴 어렵지만 지지도 않을 것 같습니다.”
-네 녀석도 그렇게 생각하느냐?
울피의 물음에 은가누가 고개를 들어 대답했다.
-승부를 장담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울피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죄인처럼 서있는 아홉 명의 팀장을 보며 말했다.
-어리석은 인간이로다. 곧 평화의 시대는 끝이 난다.
뭐? 평화의 시대?
아홉 명의 팀장의 머릿속에 물음표가 떴다.
요즘 던전과 균열이 줄어들긴 했지만 평화의 시대라고 불리기엔 너무나도 위험한 세상이었다.
지금 같은 평화가 얼마나 지속될 것 같나? 수호신인 내가 직접 나서는 이유? 수익이 나는 사업이 아님에도 신화학원을 차리고 공방을 운영하는 이유? 여기 오크들이 이리 강함에도 긴장하는 이유? 그런 이유도 모르고 그저 자신의 영달을 위해서 살아가는 무지한 인간. 지구가 멸망하고 나서도 그러한 삶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냐?
지구가 멸망한다고? 아니 왜?
마도공학으로 세상은 더 살기 좋아지고 있는데?
-이제 곧 악마군단이 넘어온다. 악마에 대해서 무지하니 또 좋은 마석이나 부산물을 얻을 수 있는 기회라고 좋아할지도 모르겠구나.
울피의 말처럼 경호와 다현, 성원처럼 직접 악마를 겪어 보지 못한 이들은 절대로 이해하지 못할 이야기였다.
-한 가지 더 묻겠다. 악마와 싸운다면 이길 수 있겠느냐?
은가누가 울피의 질문에 고개를 조아리며 답했다.
-악마는 크게 마왕과 그 밑으로 악마 귀족, 그리고 상급, 중급, 하급 악마가 있습니다. 하급 악마라면 어쩌면 이길 수 있을지 모르지만 중급은 여기 있는 모두가 덤벼도 쉬운 상대가 아닙니다.
“뭐!”
은가누의 말에 아홉 명의 팀장은 분위기도 모르고 놀라 소리를 질렀다.
물론 수호신의 눈빛에 바로 다시 고개를 숙였다.
-지구의 주인은 너희 인간임을 잊지 마라. 수호신이나 신수, 정령. 여기 있는 오크가 지구를 너희 대신 지켜주지 않는다는 걸 명심 또 명심해라!
울피가 다시 작은 새끼 여우로 변해 다현의 품에 안겼다.
오늘 경호가 계획했던 장면이 모두 끝이 났다.
“생각보다 잘 나왔을 거 같은데.”
경호가 혼자 중얼거리고 있자 옆에서 아직 얼떨떨한 표정으로 지켜보던 성원이 물었다.
“형님. 뭐가 잘 나와요?”
“아. 오늘 내 입봉작 찍은 날이거든.”
“네엣?”
“그런 게 있어. 내가 사무실 가서 이야기해 줄게. 넌 어서 쟤들부터 처리해.”
성원은 형님이 이야기한 ‘입봉작’이 뭔가 궁금했지만 상황 정리가 우선이기에 고개를 끄덕이며 남은 팀장들에게 갔다.
“다현아. 수고했다. 울피도.”
경호가 다현에게 다가가며 엄지를 치켜세웠다.
퍼억!
그리고 다현의 등짝 스매싱이 시원하게 경호의 등에 작렬했다.
“아야. 넌 잘했다는 데도 때리고 그러냐!”
“몰라! 이거 진짜 전 세계에 뿌릴 거야? 아. 진짜!”
“원래 유명인이면서 뭘. 하여튼 정말 잘 했어.”
한 번 더 다현을 칭찬한 경호가 하늘을 올려다봤다.
그리고 그곳엔 은신을 한 채 카메라를 들고 있는 흰둥이의 모습이 흐릿하게 보이고 있었다.
그런 흰둥이를 향해 경호가 따봉을 날리며 피식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