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7화
-말해라.
안 그래도 험상궂은 인상을 가진 은가누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을 하니 그 위압감이 굉장했다.
그런 은가누의 시선 끝에 엉망이 된 악마가 헐떡이고 있었다.
가슴엔 피딱지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고 기괴하게 뒤틀린 팔과 휑하게 잘려 나간 두 다리.
곧 죽을 듯한 모습이었지만 새빨갛게 빛나는 눈동자는 강렬했다.
-네! 주인님! 아가레스가 이곳으로 마계의 거의 모든 오크를 모아 보낸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그때는 지휘할 악마와 마수도 같이 올 거라고 합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가슴에 새겨진 마법진과 최면의 효과가 더욱 강해져서 이제는 은가누의 말이라면 껌뻑 죽는시늉도 하는 상태였다.
은가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게 언제쯤이지?
-정확한 날짜는 다시 알려 주기로 했습니다. 대략 열흘 정도 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만약에 자신이 이렇게 투항하지 않고 정령계를 구한 ‘경호’라는 용사가 이 악마를 이렇게 만들지 않았다면….
그렇게 생각하니 다시 한번 그 ‘경호’라는 인간의 대단함이 새삼 떠올랐다.
원래대로라면 웨이브 물량을 막아 내지 못하고 결국 지금쯤 악마군단이 넘어오고 있었을 것이었다.
그 인간은 가히 인간이라는 한계를 초월한 듯 보였지만 그렇다고 악마군단 전체를 이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정말 마계의 침략을 이겨 내고 마왕을 쓰러뜨릴 수 있을까? 정말?’
물론 정말 그럴 거라는 믿음을 가지고 돕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지구’라는 이곳이 자신이 있던 ‘로나스 대륙’처럼 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은가누가 악마가 갇혀 있는 지하 시설에서 계단을 타고 올라왔다.
지하 시설 위쪽이 바로 자신의 막사였다.
끼익.
입구를 나무틀로 막은 다음 그 위로 침대를 옮겼다.
가끔 찾아오는 관리팀 인원의 시선을 피하기 위한 조치였다.
거실로 나오던 은가누가 멈칫거렸다.
-어, 언제….
“주인도 없는 집에 몰래 들어와서 미안해.”
말과 달리 경호가 얼굴에는 전혀 미안한 감정이 들어 있지 않았다.
“안 그래도 웨이브 던전이 재가동될 조짐이 있다고 하던데? 그래서 지하에 있는 악마 녀석에게 갔다 온 건가?”
-정말이지. 할 말을 잃게 만드는 친구군. 아. 오크랑 친구 하기 싫은 건 아니지?
성격이 아주 시원시원했다.
그게 마음에 든 경호가 피식 웃으며 은가누를 쳐다봤다.
저번에 봤을 땐 마혼의 기운이 빠지긴 했어도 눈빛이 흐렸었는데 지금은 반짝이며 생기가 넘쳤다.
얼라이언스와 호드가 사는 아제로스도 아니고 마음만 맞는다면 오크와 친구가 못 될 것도 없었다.
“자네 같은 눈빛을 가진 오크라면 언제든 환영이지.”
경호가 주먹을 내밀자 은가누가 커다란 주먹으로 가볍게 툭 쳤다.
오크의 친근함을 나타내는 인사법이었다.
“그래. 2차 웨이브는 언제인지 알아냈나?”
경호가 의자에 앉으며 바로 본론을 꺼냈다.
-이렇게 좋은 친구가 생겼는데 그런 재미없는 얘기는 차라도 마시면서 하는 건 어떤가?
“차?”
-녹차 좋아하나?
‘오크’와 ‘녹차’라….
분명 이상한 조합인데 또 묘하게 어울렸다.
경호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오크에게 그런 취미가 있을 줄은 몰랐군.”
-예전에 차를 좋아했었다. 자네가 가져다준 그 음료를 마실수록 정신이 맑아지더군. 예전 인간일 때의 기억이 또렷해지고 그때의 전투 능력도 조금씩 살아나는 중이야. 조장을 비롯한 부족원들도 그렇고.
좋은 소식이었다.
지금은 수백 명에 불과했지만 다음번 웨이브만 잘 막아 낸다면 수천수만의 병력을 얻을 수 있었다.
은가누가 물을 끓여 찻잎을 우려내서는 찻잔에 따랐다.
쪼르르르르륵.
2m가 훌쩍 넘는 은가누가 앙증맞은 주전자로 찻잔에 차를 따르는 모습은 가만히 보고 있기 괴로울 정도로 어색한 모습이었다.
-여기 뒤편에 야생 차나무가 자라더군. 입에 맞을 진 모르겠지만.
찻잎을 어디서 구했나 했더니 직접 따서 만든 모양이었다.
이거 먹어도 되는 거겠지?
오크가 찻잎을 따서 녹차를 만드는 것은 상상이 가지 않았다.
후루룩.
생각보다 떫지 않고 맛이 깔끔했다.
“오크에게 이런 재주가 있는 줄은 몰랐군.”
진심이었다.
-입에 맞는다니 다행이야.
“그래. 그럼. 이제 재미없는 이야기를 좀 해 보지.”
-열흘. 열흘 뒤에 마계에 있는 대부분의 오크를 이끌고 올 거라더군. 아마도 수호신과 용사가 크게 다친 것으로 생각해 서두르는 모양이야.
“열흘이라. 생각보다 시간이 없군.”
-저번 같은 일을 막고자 악마와 마수도 제법 건너오는 것 같아.
“그것도 그것대로 문제네.”
-우리가 최대한 돕겠다. 그러니 최대한 투항할 수 있도록 도와다오. 모두 자신의 고향을 악마에게 뺏긴 불쌍한 이들이다. 의미 없는 싸움에 목숨을 잃기엔 아까운 이들이야.
“그럴 생각이다. 그런데 도울 수준은 되는지 봐도 될까?”
경호의 말을 이해한 은가누의 눈이 빛을 뿜었다.
혈사자 기사단장의 모습으로 돌아간 듯한 날카로움이 전신에 은연중에 흘러나오고 있었다.
-큰 소리도 밖으로 나가지 않는 공터가 여기 뒤편에 있다. 그리로 가지.
“그러지. 뭐. 어차피 큰 소리까지 나지도 않을 거 같지만.”
경호가 악마를 어떻게 상대하는지 가까이서 지켜본 은가누였기에 오히려 몸이 더 달아올랐다.
강자와 겨룬다는 게 얼마나 큰 행운인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나저나 나도 참 많이 변했군.’
예전 같으면 절대 먼저 나서지 않았을 경호였다.
하지만 최근 다현과 흰둥이. 은가누까지 먼저 나서고 있었다.
‘이게 최선이다. 그리고 최선을 다해도 쉽지 않은 싸움이야.’
주변에 자신의 경험과 기술을 빠르게 전달하는 것.
세계수와 신수, 정령으로 헌터를 강하게 만드는 것.
그러면서 자신의 정체를 최대한 마계에 숨기는 것.
이것이 최선이었다.
***
꿀꺽.
은가누가 아공간에서 용아검을 뽑아 든 경호를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분명 공터까지 걸어 나오는 모습에서는 빈틈이 곳곳에 보였다.
그런데 이렇게 눈앞에 서니 완전 다른 사람처럼 달라졌다.
‘미치겠군. 인간이 이렇게 강할 수 있다고? 마왕을 죽였다는 말에 설마 했는데 내가 사람 보는 눈이 없었군.’
검을 아래로 늘어뜨리고 비스듬하게 선 자세.
지금도 목과 왼쪽 허리, 오른쪽 종아리 부근에 빈틈이 보였다.
하지만 그 빈틈을 도끼로 노리는 순간 자신의 목이 날아간다.
은가누의 목에 서늘한 감촉이 강렬하게 느껴졌다.
그것은 신호였다.
그 빈틈이 약점이 아닌 사실 함정임을 알리는 본능적인 신호.
반대로 단단해 보이는 곳을 공격해야 그나마 목이라도 지키며 싸울 수 있었다.
하지만 빈틈을 알아차릴 줄도 모르는 ‘초짜’라면 모를까 자꾸만 은연중 빈틈으로 시선이 갔다.
그럴 때마다 목이 서늘해지며 굵은 땀방울이 이마에 송골송골 맺혔다.
결국 무기를 들고 상대를 지켜보고만 있을 뿐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경호가 그런 침묵을 깼다.
“그럼. 내가 먼저 갈까?”
타핫.
말이 끝나기 무섭게 경호가 달려왔다.
아니 달려온다고 느낀 순간 시야에서 사라졌다.
‘뭐지?’
그 순간 사라졌던 경호가 갑자기 눈앞에 나타났다.
-억!
경호의 검이 빠르게 가슴을 찌르며 들어왔다.
그래도 다행히 검의 속도는 그렇게 빠르지 않았다.
피하기보다 막고 반격하기로 정한 은가누는 전투 도끼를 들어 찔러 오는 검을 쳐냈다.
아니 쳐내려고 했다.
카강!
어른 팔뚝만 한 두께의 도끼 자루가, 그것도 강철을 제련하여 만든 도끼 자루가 뚝하고 검력을 이겨내지 못하고 부려졌다.
처억.
경호의 용아검이 느릿하게 다가와 은가누의 목에 착하고 붙었다.
크윽.
도끼를 쥔 손아귀가 단 한 번의 격돌을 버티지 못하고 충격으로 찢겨 피가 철철 흘렀다.
-이게 도대체….
경호가 고개를 들어 멍한 눈빛으로 중얼거리는 은가누를 봤다.
졌지만 다른 감정이 얼굴에 담겨 있지 않았다.
단 한 가지.
어떻게? 어떻게 저게 가능한 거지?
궁금해 죽겠다는 표정이었다.
은가누는 날아오는 검에 실린 마력을 느꼈다.
분명 강하지 않았고 빠르기도 그랬다.
검날에 마력검기도 실려 있지 않았다.
그렇기에 가볍게 쳐낼 수 있을 거로 생각했지만 결과는 도끼 자루가 부러지고 그것을 쥐고 있던 손아귀는 찢어졌다.
부러진 도끼 자루는 아깝지 않았고 찢어진 손아귀는 아프지 않았다.
다만 어떻게 이런 공격이 가능했는지 너무나도 궁금했다.
-후우. 정말 대단한 공격이야. 나는 사실 지금도 어떻게 한 건지 상상도 안 가는군.
“궁금해 죽겠다는 표정인데?”
경호가 목에서 용아검을 치우며 물었다.
-지금은 이런 흉측한 괴물이지만 나도 한 나라를 지키는 기사대장이었다. 네 말대로 궁금해 죽겠지만 비전 검술에 관해 물을 정도로 뻔뻔한 놈은 아니다. 다만 무기가 부러져서 더는 겨루기 어려운 것이 좀 아쉽군.
“손은 괜찮고?”
-살짝 따끔한 정도지.
은가누는 손에서 피가 뚝뚝 흐르고 있었지만 별거 아니라는 투로 말했다.
“그럼. 이거 한번 써 볼래? 손에 맞을지 모르겠지만.”
경호가 아공간을 열어 솔딘에게 거의 강탈하듯 가져온 전투 도끼 한 자루를 꺼냈다.
은가누가 쓰던 낡디낡은 전투도끼에 비하면 조금 크기가 작았지만 풍기는 예기는 비할 바가 아니었다.
꿀꺽.
장인은 도구 탓을 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그러한 장인도 명품 도구에 군침은 흘리기 마련이었다.
특히나 은가누는 마계에서 오크로 살아가며 제대로 된 무기를 쥐어본 적이 없었다.
부러진 낡은 전투 도끼도 이번에 웨이브 던전을 넘어오며 겨우 받은 물건이었다.
-이걸 쓰라고?
“그래. 살짝 따끔한 정도라며.”
은가누가 경호가 건네는 전투 도끼를 받았다.
처억.
마치 사랑하는 연인을 대하는 손길처럼 투박하고 거친 거대한 손으로 도낏자루를 조심스레 쓸었다.
티이잉.
손가락으로 도낏자루를 툭 치고는 어금니를 드러내며 웃었다.
-철 자체도 좋지만 미스릴까지 섞여 있다니…. 내가 기사대장으로 있을 때 쓰던 녀석보다 좋은 녀석이군.
도끼도 양날도 섬뜩할 정도로 날이 서 있었다.
“그럼. 다시 붙어 볼까?”
맘에 드는 모양이었다.
-이거 부러졌다고 물어 달라고 하지는 말게. 보시다시피 내가 지금 넉넉한 형편이 아니라서.
피식.
경호가 입을 씰룩이며 웃었다.
“자네한테 준 건데 내가 그걸 왜 물어 달라고 하겠나?”
멈칫.
경호의 말에 은가누가 얼음처럼 굳었다.
“그럼. 똑같이 찌를 테니 막아 봐!”
타앗.
이번은 아까처럼 은신하고 뛰어들지 않았다.
잠시 도끼에 정신이 팔렸던 은가누가 정신을 차리고 달려드는 경호를 제대로 볼 수 있었다.
‘아! 그래서 가벼워 보이는 검격에 그리 무거운 검력이 실려 있었던 거냐!’
경호의 마력은 처음부터 바로 검으로 향하는 것이 아니었다.
허리와 어깨, 그리고 손에 마력이 스며들었다.
그리고 천천히 다가올수록 기운이 허리에서 어깨로, 그리고 마지막 순간에 손에 몰려들었다.
아까와 달리 확연히 느껴지는 기운이었고 그만큼 더 강한 기운이었다.
하지만 은가누는 느낄 수 있었다.
‘아까와 똑같이 막으면 아무리 미스릴이 섞여 있는 무기라 해도 부러진다!’
그리고 고작 손아귀가 찢어지는 정도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은가누가 도낏자루를 강하게 움켜쥐고는 날아오는 검을 향해 휘둘렀다.
“좋군.”
카앙!
경호의 검이 은가누의 도끼날과 부딪히며 불꽃을 튀기며 옆으로 튕겨 나갔다.
거친 숨을 몰아쉬는 은가누의 손에 흐르는 피의 양이 늘어나긴 했지만 막아 낼 수 있었다.
절묘하게 빗겨 쳐서 용아검에 실려 있는 검력을 어느 정도 해소했기 때문이었다.
“도낏자루가 왜 부러졌는지 확실히 느낀 모양이야. 맞나?”
경호의 물음에 은가누가 고개를 끄덕였다.
“비전 검술도 뭐도 아니야. 그저 마력의 중첩, 그리고 집중의 결과이지. 강한 공격은 비전 검술이니 뭐니 그런 대단한 게 필요한 게 아니야. 너도 알 텐데. 어차피 목을 치고 심장을 뚫으면 그 대단하다고 하는 마왕도 결국 죽어. 그게 기사의 검기가 어린 검날이든 필부가 장작 패던 도끼날이든 간에 말이야.”
물론 지금 말을 건넨 경호도, 그리고 경호의 검을 쳐낸 은가누도 중첩과 집중을 써서 이런 위력을 만들어 내는 것이 비전 검술의 경지보다 어렵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두근. 두근. 두근.
하지만 지금 경호의 한마디에 은가누는 형식에 얽매여 있던 자신 안에 무언가가 풀어져 나가는 기분을 느꼈다.
“지금 검격을 막지 않고 빗겨 친 것이 그래서 중요한 거야. 중첩과 집중이 완성되기 전에 끊어 낸 거니까. 그것도 각도를 절묘하게 빗겨 쳐서 말이야.”
처억!
은가누가 다시 어금니를 드러내며 씨익 웃으며 도낏자루를 강하게 쥐었다.
“그럼. 이번에는 들어와 봐! 지금 보고 느낀 걸 나한테 풀어 봐!”
고개를 끄덕인 은가누가 전투 도끼를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