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화
경호는 바로 ‘관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형님! 아니 이 시간에…. 혹시 행운식당에서 한잔하십니까? 제가 지금 갈까요?
역시 우리 ‘관우’는 오늘도 밝았다.
“넌 전화만 걸면 술이냐. 그나저나 어디냐?”
-아. 오늘은 일이 많아서 아직 사무실입니다.
“그럼. 내가 갈게. 이야기할 게 생겼다.”
-형님. 뭔데요?
“금방 가서 이야기해 줄게.”
전화를 끊은 경호가 흰둥이를 데리고 신화길드 사무실로 향했다.
행운식당에서 신화길드 사무실까지는 골목 시작과 끝이었으니까 거리로 따지면 100m도 되지 않았다.
다현도 오지 않았는데 굳이 서두를 필요가 없어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는데 그때 골목 입구 쪽에 웅장한 배기음과 함께 새빨간 람보르기니가 멈춰 섰다.
다현이었다.
“야! 같이 가!”
다현이 날듯이 달려와 경호의 옆에 섰다.
“야. 축하해.”
뭔가 듣기 좋지는 않았지만 경호는 다현이 진심을 담아 이야기했음을 잘 알았다.
“그리고 고마워요.”
그리고 흰둥이를 보며 고개를 숙였다.
경호에게 이야기할 때보다 몇 배는 공손한 말투였다.
뭔가 한마디 하고 싶은 경호였지만 그냥 피식 웃고 말았다.
“그래. 고맙다. 다현아. 네 덕분이야. 10년이라는 긴 세월 네가 엄마 옆에 있어 줘서 정말 고맙다.”
물론 좋은 분위기는 길게 가지 않았다.
퍽!
다현은 이 분위기를 참지 못하고 경호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쿡 때렸다.
분위기 전환을 위해서 툭 때린 거지만 정령계를 구한 용사가 아닌 일반인이었다면 분명 갈빗대 두어 개는 나갔을 정도의 위력을 품고 있었다.
“아아! 좋은 말 하고 있는데. 너는!”
“그런 말 듣자고 한 거 아니야. 엄마는 정말 내 엄마 같아서 그런 거야. 그러니까 그런 소리 마. 그럼. 나 서운하니까.”
어쭈. 이 녀석이 이런 말도 할 줄 아는 애였어?
경호가 눈을 꿈뻑거리고 있자 팔을 잡아끌었다.
“빨리 와. 성원이 만나서 이야기하게.”
***
“이 늦은 시간에 갑자기 무슨 일로 오셨어요?”
성원이 궁금해 죽겠다는 얼굴을 하고선 경호와 다현을 반갑게 맞이했다.
“아. 부탁할 일이 있어서.”
경호가 부탁할 게 있다는 말에 성원의 입이 쭉 올라갔다.
“형님이 부탁하실 일이 있다고요?”
“뭐가 좋아서 그렇게 웃어?”
“저야 형님을 돕는 일이라면 언제나 행복합니다.”
요즘 들어 상태가 더 심각해지는 모양새다.
“근데 뭔데요?”
“실은 엄마가 여기 흰둥이의 도움으로 완치가 됐어.”
“어! 정말요! 형님. 축하드려요!”
진심으로 축하해 주는 성원의 모습에 경호가 피식 웃었다.
“그런데 문제가 있어.”
“그쵸. 흰둥이가 치료했다고 할 수 없으니까요.”
“그렇지.”
“근데 제가 뭐 도와드릴 게 있을까요?”
“엄마가 완치되면서 각성을 했거든. 그래서 그걸 좀 엮어서 그럴싸하게 이야기를 만들까 해서.”
경호의 말에 다현이 추가로 덧붙였다.
“주치의가 신화병원에 종양내과 신태진 과장이거든. 혹시 알아?”
“음. 잘 모르지만 원장님이랑 꽤 안면이 있어서 물어보면 될 거 같아요. 그분도 뭔가 해야하는 건가요?”
“어. 그럼. 그 과장에게 각성하게 되면서 암이 모두 나은 것 같다고 이야기해달라고 해. 대신 유명해지는 것이 싫으니까. 추가로 연구하진 말자고 하고.”
“아.”
“사실 각성으로 나은 것도 아니고. 괜히 연구한다고 뭔가 나올 것도 아니니까. 그러다 언론에서 괜히 달라붙을 수도 있고.”
다현의 말에 별거 아니라는 투로 성원이 대답했다.
“이런 건 뭐. 사실 이렇게 오실 필요도 없이 전화로 이야기하셔도 되는 건데.”
“아니 그것도 그건데. 엄마 완치 축하 파티해야 하지 않겠어? 치킨에 소맥? 경호야. 어서 치킨 좀 시켜 봐. 술은 식당에서 좀 가져오고. 엄마 깨지 않게 조용히 갔다 와라.”
“에엑! 무슨 엄마 완치 축하 파티를 너, 나, 성원이랑 하는 거냐. 그것도 치킨에 소맥으로.”
전화했을 때도 그러더니 어지간히 술이 먹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슬쩍 보니 성원도 비슷한 눈빛이었다.
기분 좋은 날.
좋은 사람들과 치킨에 소맥 먹자는 걸 굳이 피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특히나 요즘 너나 할 것 없이 다들 바쁘고 힘들었다는 것을 경호도 잘 알고 있었다.
“알았다. 내가 술 가져올 테니까. 성원아. 치킨 시키고.”
그렇게 자정이 다 되었을 때 주문했던 치킨이 왔다.
인원은 겨우 세 명이었는데 치킨은 5개나 도착했다.
“성원아. 1인 1닭이 상식 아니냐? 뭔 치킨을 이렇게 많이 시켰어.”
“수호신님이 넉넉하게 시키라고 하셔서요.”
평소 같으면 구박했겠지만 오늘 가장 고생한 이는 바로 흰둥이였다.
“그래. 우리 흰둥이 고생했는데.”
그렇게 경호가 닭 다리를 몇 개 골라 주니 흰둥이가 꼬리를 흔들며 아주 맛있게 뜯어먹었다.
성원이 소맥을 말아 경호와 다현에게 건넸다.
“자아. 우리 엄마의 완치를 위하여!”
다현이 술잔을 받자마자 건배를 외쳤다.
아무리 봐도 술이 고픈 모양이었다.
“다현아. 나는 모른 척할 테니까. 내일 아침에 와서 네가 좀 엄마 데리고 가 줘. 알았지?”
“알았어. 걱정 마. 나도 엄마가 하루빨리 다 나았다는 사실 알았으면 좋겠으니까. 요즘 많이 힘들어하셨거든.”
오늘 갑자기 쓰러졌기 때문에 특히나 더 그런 마음일 게 뻔했다.
“고맙다.”
“고마우면 한 잔 더!”
“….”
경호는 피식 웃으며 술을 따랐다.
“형님. 오늘 오후에 오크 부족에서 저에게 따로 연락이 왔었습니다.”
“연락? 대화가 통해?”
“연구소에서 통역 장치를 만들었습니다. 생소한 언어라서 그렇지. 어차피 언어적 규칙을 적용하면 되는 거라 어렵지 않다고 하더라고요.”
자신은 몇 년 동안 악마군단이랑 부딪히며 배운 것을 며칠 지나지 않아 뚝딱 만드는 것을 보며 새삼 마도공학의 대단함을 느꼈다.
“사이다는 충분하니 문제없을 거고? 왜 무슨 문제 있대?”
성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통역도 되면서 그쪽 관리팀과 어느 정도 소통이 되니까 이제 순찰도 돌고 하는데 웨이브 던전이 다시 가동될 조짐이 보인다고 합니다.”
수호신과 용사가 악마와 싸워서 다쳤다고 했기에 경호도 어느 정도 예상한 상황이었다.
“아마도 마계에서는 최대한 빨리 오려고 할 거야. 그것도 가장 숫자가 많은 오크를 대동하고. 아마 이번에는 악마도 몇 마리 튀어나올 테니 준비는 해야겠어.”
경호의 말에 소맥을 쭉 들이켠 다현이 물었다.
“저번에 악마군단은 마기 농도가 더 높아져야 온다며. 그래서 오크가 죽여 달라고 넘어오는 거고. 아니야?”
물론 다현의 말이 맞았다.
분명 자신이 그렇게 이야기했으니까.
“대격변 초기도 그렇고 내가 오고 나서도 악마 몇이 넘어왔었잖아. 인간이 저기 달에서 살 순 없지만 엄청난 돈과 기술을 때려 부으면 갔다 올 수 있는 거랑 똑같아. 큰 힘이 들지만 지금 정도의 마기로도 가능은 하지. 분명 저번처럼 오크가 투항하지 않게 하려고 악마가 넘어올 거야.”
“형님. 그럼. 웨이브 던전의 파동 관찰해서 넘어올 거 같으면 신화길드 투입할까요?”
경호가 생각하기로는 넘어오기까지 길어야 며칠이다.
악마가 호랑이고 신화길드의 헌터 수준이 늑대 정도 된다면 자신이 도와서 어떻게든 해볼 만하겠지만 지금 수준은 레인보우 식스급이 아니라면 늑대는커녕 범 무서운 줄 모르는 하룻강아지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경호가 쉽게 이겨서 약해 보일지 모르지만 중급 악마만 해도 멸망급 마수를 가볍게 죽일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에 반해 S급 헌터는 혼자 멸망급 마수와 싸워 이기기 힘든 게 현실이었다.
“우리 성원이가 요즘 아주 자신감이 넘쳐흐르는구나.”
“네에?”
“절대 안 돼. 내가 왜 다현과 울피를 앞세워서 싸우는 건데. 다현이 그만큼 강하기 때문이야. 그런 다현도 중급 악마는 쉽지 않아. 너 저번에 내가 쉽게 이겨서 해볼 만하다고 느낀 모양인데. 길드원 추려서 오크 부족이랑 훈련해 보면 알겠지. 어때? 해 볼래?”
“안 그래도 신수나 정령이랑 계약하고 무기도 좋아지면서 던전 공략으로는 좀 부족한 부분이 있었거든요. 알겠습니다. 제가 추려 볼게요.”
경호는 잘 됐다고 생각했다.
실력이 늘면서 자신감을 얻는 것은 분명 좋은 일이지만 용기(勇氣)가 아닌 만용(蠻勇)이 되면 문제가 터지기 마련이었다.
악마라는 존재는 단순히 자신감이나 숫자의 차이로 이길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다현아. 흰둥이랑 내가 미리 준비하겠지만 웨이브 던전이 터지면 다시 한번 부탁할게. 알았지?”
“자아. 그럼. 웨이브 던전을 위하여! 건배!”
경호가 성원이와 대화할 동안 이미 소맥 몇 잔을 말아 마신 다현은 혀가 점점 꼬여가고 있었다.
“야! 내일 아침에 엄마랑 같이 병원 가려면 적당히 먹어! 아! 진짜!”
“너어! 엄마가 완치된 날에 이럴 거야!”
“엄마 완치된 날이니까 이러지!”
경호가 그런 다현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
“아니. 다현아. 갑자기 왜 병원을 데리고 온 거야? 오늘 검진 날도 아닌데.”
신화병원 로비에 앉은 지숙이 다현을 보며 물었다.
“아. 그게….”
아침에 갑자기 찾아온 다현이 오늘 아침에 갈 데가 있다며 납치하듯 자신을 차에 태우는 다현의 모습에 궁금했던 지숙이었다.
“사실 경호가 있어서 말 안 했는데. 엄마가 각성한 거 같아서. 경호는 모르는 눈치지만 나는 S급 각성자라 예민해서 더 잘 느끼거든.”
그런데 예상과는 너무 다른 이유가 다현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에엑!”
지숙이 너무 놀라 이상한 소리를 냈다.
“놀랐어?”
“아니. 그게 무슨 소리니. 그리고 다현아. 나는 각성자 된다고 헌터니 뭐니 그거 할 것도 아니고 하니 검사 안 받아도 된다. 그냥 집에 가자.”
“나도 알지. 각성자 등급 검사는 헌터 본부 가서 받는 거고. 여기는 엄마 암 검사하러 온 거야.”
“어? 그게 무슨 소리야?”
다현의 뜬금없는 소리에 지숙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각성이라는 게 그냥 짠! 하고 되는 게 아니거든. 그래서 몸도 바뀌고 마력도 생기고 하면서 아픈 사람은 몸도 좋아진다고 하더라고.”
다현이 지숙에게 진실과 거짓을 적당히 섞어서 설명했다.
“그, 그럼….”
다현의 말을 알아들은 지숙의 얼굴에 기대에 찬 미소가 감돌았다.
안 그대로 어제 갑자기 쓰러지고 많이 피곤하기에 경호에게 표시 내지 않기 위해 애를 썼지만 내심 걱정이 많았던 지숙이었다.
“엄마. 그럼. 가 봐요.”
“그래.”
그렇게 지숙은 검사를 받고 나서 진료실에 들어갔다.
주치의이자 아침에 성원과 이야기를 마친 신태진 과장이 지숙을 보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저, 저어 선생님. 결과가 어떤가요?”
사실 성원에게 듣긴 했지만 결과를 보기 전까지 믿지 않았던 태진이었다.
하지만 모니터에 떠 있는 PET CT 이미지는 너무나 깨끗했다.
마도공학 기술로 더욱 발전한 최첨단 진단 장비가 고장 난 게 아니라면 정말 암이 모두 사라진 게 맞았다.
“깨끗합니다. 정말 놀랄 정도입니다. 학…. 아니 축하드립니다. 서지숙 님. 정말 고생 많았습니다.”
‘학계에 보고해서 당장 연구하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성원에게 언질을 받았기에 꾹 참으며 그저 지숙에게 축하의 말을 건넸다.
“물론 암이라는 것은 추적 관찰을 해야 하기에 6개월에 한 번씩은 오셔야 합니다. 아셨죠?”
“선생님. 정말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지숙은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았다.
믿기지 않아 연신 고개를 숙이며 ‘감사합니다!’를 외치며 눈물을 흘렸다.
“아이고. 왜 우세요. 이렇게 좋은 날. 그럼. 6개월 뒤에 뵙겠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선생님.”
“울지마. 엄마.”
다현이 손수건으로 지숙을 눈물을 닦아 주며 눈시울을 붉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