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4화
-경호 님. 무슨 훈련인데 나무 막대기를 들고 그러세요. 그거 엄청 단단해 보이는데….
흰둥이의 말에 경호가 손에 막대기를 들어 보였다.
“에이. 단단해 봐야 나무 막대긴데…. 뭘.”
물론 경호의 손에 들린 나무 막대기는 그냥 평범한 나무 막대기가 아니었다.
‘의식의 세계’
이곳은 모든 것을 상상과 집중을 통해 만들어 낼 수 있는 곳이었다.
말 그대로 모양은 나무 막대기라도 상상력과 집중력만 강하다면 그것은 신화급 아이템인 용아검보다 더 단단하고 예리할 수 있었다.
“그럼. 훈련을 시작할까? 너도 얼른 신수 모습으로 변신하고.”
-아니 무슨 훈련인데요. 뭔지는 알고 시작해야죠.
“대련. 실전 같은 대련. 그것보다 빠르게 자신의 힘과 기술에 적응할 수 있는 게 없으니까.”
-에휴.
확신에 찬 경호의 말에 흰둥이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애초부터 흰둥이는 싸움을 잘하는 신수가 아니었다.
지구에 오기 전에 주신의 반려견으로 있으면서 싸울 일이 애당초 없었고 지구에 와서도 다른 차원계와 달리 직접 몸을 써야 할 일이 전혀 없었다.
“나도 네가 전투 능력이 떨어지고, 싸우는 것 자체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있어. 하지만 지금부터라도 배워야 하고 좋아하지 않아도 해야 해!”
설득하거나 달랠 시간도 없었기에 경호는 흰둥이에게 강한 어조로 말했다.
-에휴.
“정령계에서 마왕과 싸워서 이기고 결국 침략을 물리칠 수 있었던 것은 단순히 내가 강해서가 아니었어. 정령계의 모든 존재가 하나돼 싸웠기 때문이라고. 악마군단이 쳐들어오고 나서부터는 미르는 단 한번도 전투에 빠진 적이 없었고 하급 정령이라고 뒤에 물러서 있지 않았어.”
경호가 자신을 위해, 지구를 위해 이러는 것을 흰둥이도 잘 알기에 결심을 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경호 님. 알겠습니다. 저도 그 정령계의 수호신에 비하면 부족하지만 돕겠습니다.
경호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환하게 웃었다.
“아니. 걱정하지 마. 내가 미르보다 더 강하게 만들어 줄 테니까.”
정령계에서 얼마나 당했던가!
물론 돌이켜 보면 그로 인해 성장할 수 있었던 소중한 시간이었지만 당시에는 미르가 정령계를 침략해 오는 악마보다 더 악마처럼 보였었다.
원래 사랑은 내리사랑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지구를 위해! 흰둥이를 위해!
경호는 회초리를 들기로 마음을 먹었다.
레벨 7.
흰둥이 스스로 전투형 신수가 아니었기에 사실 레벨업에 크게 치중하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었다.
지구의 수호신으로 지내기에 레벨 6도 차고 넘치는 수준이었기에 딱히 소원을 들어주거나 신앙의 대상이 되면서까지 힘을 키우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정말 만약의 일이지만 마계에서 침략하더라도 사도들의 힘이면 될 거라는 안일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대격변’이후 울피를 포함한 사도와 신수, 정령까지 모두 흩어져 사라졌고 흰둥이 역시 각성자 시스템을 설치하며 생명력도 잃고 레벨도 1로 강등돼 버렸다.
-알겠습니다. 경호 님. 솔직히 지구가 이런 피해를 입은 것은 사실 안일했던 제 잘못이 큽니다. 정령계의 수호신처럼 강해질 자신은 없지만 열심히 하겠습니다.
흰둥이가 새하얀 빛이 번쩍이며 신수의 모습으로 변했다.
7레벨부터는 확실히 강함이 느껴졌다.
이제 눈빛도 더 강렬해지고 주변으로 자연스럽게 흐르는 번쩍이는 뇌전과 더 날카로워진 이빨과 발톱까지 그전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다.
“지금 가진 능력만 100% 흡수해도 울피에게 안 밀리겠는데.”
-그래도 제가 울피처럼 전투 경험이 없어서 이기긴 힘들 겁니다.
“아. 그거 지금부터 지겹게 경험시켜 줄 거니까. 기대하라고.”
경호가 앞으로 달려가며 나무 막대기를 들었다.
그것만으로 흰둥이의 눈동자가 떨리기 시작했다.
경호는 처음부터 제대로 하기로 마음먹었기에 살기를 흰둥이에게 쏘아 보냈다.
-겨, 경호 님!
“뭐가! 경호 님이야! 지금은 그냥 적이라고!”
경호가 코앞까지 다가오자 흰둥이는 신력을 실어 앞발을 휘둘렀다.
하지만 경호에게 타격을 주기에는 너무 정직한 공격이었다.
가볍게 피한 경호가 앞발을 휘두르며 비어 버린 가슴에 나무 막대기를 찔러 넣었다.
퍼억!
-끄아아아악!
가슴이 찔린 흰둥이가 비명과 함께 뒤로 튕겨져 날아갔다.
경호와 흰둥이의 크기를 비교하면 말도 안 되는 상황이었지만 단순히 크기만으로 정의할 수 없는 엄청난 힘이 실린 공격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격기 스포츠가 아니었기에 경호는 그대로 따라 붙었다.
그리고 흰둥이는 그런 경호의 모습에 눈만 동그랗게 뜨며 꼼짝 못하고 있었다.
-겨, 경호 님! 저 쓰러졌잖….
퍼억!
경호는 그 입부터 후려갈겼다.
-아악!
“야! 싸우다가 쓰러졌다고 기다려 주는 게 어디 있어!”
퍼억! 퍽! 퍼억! 퍽퍽퍽!
나무 막대기로 흰둥이를 정말 먼지 나도록 때린 경호가 손을 멈추며 말했다.
“오늘 여기서 네가 얻은 힘 제대로 사용할 수 있을 때까지 멈추는 거 없다. 지금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멈춰 주는 거니까. 빨리 일어서.”
-컥. 경호 님. 이러다 저 죽어요.
거친 숨을 내뱉으며 눈물까지 글썽이는 흰둥이를 보며 경호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니. 절대 안 죽어.”
딱!
경호가 손가락을 튕겼다.
-하지만 의식의 세계…. 어! 어어!
조금 전까지 죽을 것 같던 통증이 싹 사라졌다.
놀란 흰둥이가 벌떡 일어났다.
-이, 이게…. 뭡니까? 경호 님?
“내가 그랬잖아. 절대 안 죽는다고. 그럼. 다시 시작할까?”
경호가 무작정 의식의 세계로 들어온 건 아니었다.
‘의식의 세계’에서도 죽음에 이르면 생명을 잃을 수도 있다.
부상을 입거나 체력이 떨어질 수도 있었다.
정신력으로 움직이는 세상이지만 정신도 육체처럼 다치고 약해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경호는 이곳에 들어오기 전 세계수에게 흰둥이의 정신을 계속 각성시켜 달라고 부탁했다.
세계수에게 부탁하는 게 예전 같으면 어려운 일이었지만 이제 용의 심장을 제법 다루기에 이 정도 부탁은 쉬운 일이었다.
그래서 지금처럼 흰둥이가 회복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물론 신력을 이용해 억지로 각성을 시켜 정신력을 유지시키는 거라 나중에 반발력까지 더해 더 큰 타격을 입겠지만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할 문제였다.
엄살도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흰둥이가 다시 몸을 세웠다.
-저도 이제 제대로 합니다!
새파란 뇌전이 흰둥이의 몸에서 줄기줄기 뻗어 나왔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흰둥이는 지금까지 자신보다 상대적으로 약한 마수만 상대해 봤기에 자신보다 강한 상대와 어떻게 싸워야 하는지 몰랐다.
퍼억!
쏟아지는 뇌전 공격을 결계로 튕겨 내며 접근한 경호가 순간 은신으로 몸을 숨긴 채 달려들어 흰둥이의 목을 막대기로 때렸다.
-케에엑!
“이제 한 대 때릴 때마다 충고 한마디씩 해 줄 테니까. 잘 들어!”
몽둥이 한 대에 잔소리 하나.
미르가 경호에게 했던 가르침이었다.
맞는 것도 서러운데 그러면서 동시에 잔소리까지 들어야 하는 형벌과도 같은 교육 방식이었다.
퍼억!
-케엥!
경호는 그대로 달려 뒷다리를 막대기로 때렸다.
“명심해. 상대가 눈앞에서만 싸우자고 덤비지 않는다고! 뒷다리가 비었잖아!”
흰둥이는 몸을 돌리며 뇌전을 쏟아 냈다.
하지만 경호는 다시 가볍게 결계로 빗겨 내고는 다시 가슴을 막대기로 찔렀다.
푸욱
-커엉!
“바보냐? 뇌전 공격이 결계에 막힌다는 걸 봤으면서 또 그렇게 공격하는 건 뭐야? 원소 공격은 물리적인 힘이 약하기 때문에 결계를 뚫기 어려워! 너보다 약한 다수의 존재에 뇌전 공격은 훌륭한 수단이 되지만 너보다 강한 존재에게는 통하지 않는 바보 같은 짓이야!”
다시 일어난 흰둥이가 뇌전의 힘을 앞발에 모아 경호에게 달려들었다.
파악!
하지만 앞발을 휘두르기 전에 경호의 막대기가 먼저 앞발을 때렸다.
다시 노출된 흰둥이의 가슴을 경호는 또 다시 찔렀다.
푸욱!
-케에엑!
찔린 데 또 찔린 흰둥이가 바닥에 쓰러져서 고통에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동작이 커! 앞발에 뇌전의 힘을 실은 것은 좋지만 ‘나 앞발로 공격하겠소!’라고 소문낸 것과 마찬가지 상황을 만들면 어쩌라는 거야! 차라리 뇌전을 눈앞에서 터뜨려 시선을 끌고 앞발로 공격하는 게 훨씬 낫겠다.”
-아직 그런 전투적인 감각이 떨어지는 건 어쩔 수 없….
“세상에 어쩔 수 없는 일이 어디 있어.”
경호가 나무 막대기로 쓰러져 있는 흰둥이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말했다.
“걱정 마. 될 때까지 할 거니까!”
***
“아들? 아니 뭐하는데 그리 땀을 많이 흘렸어? 아니! 희, 흰둥아!”
지숙이 가게로 들어오는 경호를 보다 품에 안겨 있는 흰둥이를 보고 깜짝 놀라 달려갔다.
“아니. 흰둥이 어디 아프니?”
역시 흰둥이를 가장 아끼는 지숙은 예리했다.
흰둥이가 딱히 아파 보이는 모습이 아니었다.
다만 의식의 세계에서 워낙 시달렸기에 엄청나게 피로한 모습이었는데 사람도 아닌 개의 피로한 모습을 보고는 그것을 알아차린 지숙이었다.
“아니 왜? 그냥 좀 피곤해 보이는 거 같긴 하던데.”
-으으. 경호 님. 좀 피곤한 게 아니라 죽을 거같이 피곤합니다.
물론 흰둥이의 말은 경호에게만 들렸을 뿐이었다.
“아니 눈동자에 힘이 없잖아. 이거 봐라.”
지숙이 초점이 흐릿한 흰둥이의 눈동자를 보며 말하자.
끼잉. 끼잉.
-아니 절 이해해 주시는 분은 역시 어머님밖에 안 계시네요.
흰둥이가 앓는 소리를 내며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그도 그럴 것이 시간상으로 30분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의식의 세계’에서는 체감상 거의 반나절 동안 경호에게 두들겨 맞았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레벨업하면서 강해진 힘과 능력을 어느 정도 다룰 수 있게 됐지만 세계수의 신력으로 강제 각성된 정신은 지칠 대로 지친 상태였다.
거기다가 반나절 동안 이어진 거의 구타에 가까운 대련은 단순하게 정신적 피로감만 준 게 아니었다.
맞으면 몸도 아프지만 마음도 같이 상처나 듯.
흰둥이 역시 실력 향상을 위한 훈련임을 잘 알고 있었지만 무자비한 폭력에 살짝 상처를 받은 상태였다.
그런 상태에서 지숙의 따뜻한 말 한마디가 기폭제가 돼 흰둥이의 눈물샘을 터뜨렸다.
-야. 진짜 우냐? 수호신이나 돼서 우는 거야?
흰둥이의 눈물에 당황한 경호가 전음을 날렸다.
-살기가 실린 공격을 이렇게까지 맞아 본 거 처음이거든요. 경호 님. 아픈 것도 아픈 거지만 솔직히 좀 무서웠습니다.
그런 면에서 어쩌면 경호는 유리한 부분이 있었다.
10년이라는 왕따 기간 동안 수없이 당했던 육체적, 정신적 폭력이 그런 경호의 정신력을 강하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아이고. 우리 흰둥이가 눈물을 다 흘리네. 아들! 너 밖에서 흰둥이 괴롭힌 거 아니지?”
뜨끔.
의도는 좋았지만 결과적으로 괴롭힌 것은 맞았기에 경호는 자신도 모르게 움찔했다.
“맞네. 맞아! 야! 너도 눈물 쏙 나게 엄마한테 혼나 볼래?”
지숙의 잔소리에 경호는 서둘러 변명을 늘어놓았다.
“아니 그냥 요즘 흰둥이가 밤늦게 너무 돌아다니니까. 조심하라고 이야기한 거지.”
“너 이런 강아지도 미물이라고 막 너무 뭐라 하면 안 돼. 잘 봐. 흰둥이도 다 알아듣고 눈물 흘리잖아. 어서 사과해.”
흰둥이를 보며 ‘미물’이라 하는 지숙의 말에 경호가 피식했다.
‘아니. 지구 수호신한테 미물이라니!’
어쨌든 경호는 어색한 표정으로 흰둥이를 보며 말했다.
“미안. 네가 밤마다 산책을 그렇게 좋아하는지 몰랐어. 내가 걱정돼서 혼낸 거니까 이해하고. 대신 내일부터는 걱정하지 않게 나랑 매일 나갔다 오자. 알았지?”
-으악! 매일이라뇨! 경호 님!
흰둥이가 지숙의 품에서 경기를 일으키듯 몸을 부르르 떨자.
“신기하네. 엄마 말처럼 다 알아듣나 봐. 좋아서 몸을 막 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