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화
세상에 무언가를 알리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여전히 가장 확실한 방법은 레거시 미디어를 활용한 방법이다.
언론사 기자를 부르고 보도자료를 뿌려 최대한 널리 퍼뜨리는 방법.
증권가 찌라시 같은 것도 생각보다 효과가 있었다.
하지만 요즘엔 그런 방법이 아니어도 다양한 매체가 존재했다.
SNS나 너튜브, 커뮤니티 게시판을 통해서도 마음만 먹으면 충분히 효과를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하면 가장 자연스럽게 소문을 낼 수 있었다.
거짓도 사실인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어느 다현의 팬’으로부터 그녀가 최근 데리고 다니는 새끼 여우가 ‘신수’라는 추측성 글이 ‘레인보우 식스’ 커뮤니티 게시판에 올라왔다.
그러자 순식간에 갑론을박이 펼쳐지며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리고 그 게시물은 또 다른 게시판으로, SNS로 실어 날라졌다.
그러면서 ‘어느 다현의 팬’은 ‘다현의 측근’으로 변했고 나중에는 있지도 않은 ‘다현의 친인척’이 전한 것이라고 변질됐다.
어차피 확인이나 증명이 필요한 글이 아니기에 상관없었다.
그렇게 다현의 애완 새끼 여우가 사실은 신수라는 내용이 몇 시간 만에 대한민국 전역에 퍼지게 됐다.
***
곧 파열이 예상되는 ‘사라지지 않는 던전’ 앞에 많은 이들이 모였다.
우선 1km 정도 떨어진 가장 외각에는 많은 수의 전차와 포병 부대, 그리고 각성자관리원 소속의 던전관리국 요원들이 자리를 잡고 던전의 상태를 계속 모니터링하며 언제든 포격할 수 있는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던전에서 300m 정도 떨어진 곳에는 던전 게이트에서 쏟아져 나올 오크를 막을 인원들이 모여 있었다.
다현과 제니, 비스트, 성원이 가장 전면에 서 있었고 그 뒤로 정수, 호돈을 비롯해 신화길드원 정예 100여 명이 무기를 갖추고 긴장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머리 위 언론 방송사 및 개인 방송용 드론이 어지러이 날아다니고 있었다.
경호와 흰둥이, 운애와 땅개는 그런 드론을 피해 은신한 상태로 그러한 모습을 하늘 위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경호. 정말 몬스터와 말이 통한다고?
“악마랑도 대화하는데 뭘. 오크라면 가능할 거야. 물론 오크 수준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그러게요. 말이 안 통하면 어쩌죠?
운애는 물론 흰둥이까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 어쩔 수 없이 싸워야지. 하지만 우선 대화를 해 봐야지.”
-주인님! 저는 무조건 믿습니다! 오늘도 무조건 잘 될 겁니다.
물론 땅개는 경호를 100% 믿었기에 걱정하기보다 응원을 했다.
“그래. 어떻게든 3페이즈가 늦게 오면 좋은 거니까. 지금 이 속도는 너무 빠르니까 말이야.”
덤으로 이게 성공해야 다현이 내기에서도 이길 수 있었다.
“그나저나 땅개야. 시킨 건 다 했지? 운애도?”
-네엡! 주인님!
-어. 걱정 마. 언제든 발동되게 해놨으니까.
그때였다.
사라지지 않은 던전, 웨이브 던전의 거대한 게이트에 펼쳐진 차원막이 마기를 뿜어내며 불안정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파지지지지직! 파지지지지지직!
그렇게 요란한 소리와 함께 칠흑같이 어두운 차원막이 찢기며 터져 나갔다.
크와아아아아아아아!
동시에 괴성이 터져 나오며 엄청난 수의 오크가 거대한 날붙이를 손에 들고 달려 나오기 시작했다.
보통 던전이나 균열이 파열하면 많아 봐야 수십의 마수가 튀어나오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웨이브 던전은 정말 이름처럼 파도치듯 엄청난 숫자의 오크를 쏟아 냈다.
“지금!”
경호는 그 모습을 지켜보다 얼추 거의 오크가 다 쏟아져 나온 것을 보고는 운애와 땅개에게 신호를 줬다.
-오케이!
-알겠습니다!
우우우우우우웅.
웨이브 던전 앞쪽 바닥에서 진동과 함께 미세한 빛이 일렁이며 제법 강한 정령력이 감돌았지만 수백의 오크가 달려오는 상황이라 그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다.
운애와 땅개가 해가 뜨기도 전에 와서 은밀하게 마법진 작업을 해 놓은 상태였고 그것이 발동한 것이었다.
갑자기 바닥이 진흙탕으로 변했다.
그러자 달리던 오크의 발이 진흙탕에 무릎까지 빠지며 그 자리에서 멈춰 섰다.
크아아아아! 크아아아아아아아!
수백 마리의 오크가 진흙탕에 빠져 허우적거리며 괴성을 지르는 모습은 꽤나 인상적이었다.
물론 운애와 땅개에 합작한 결과물이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비밀이었기에 오크를 공략하기로 한 다현 쪽에서 마법진에 대한 리액션을 날렸다.
“좋았어! 누님! 미리 준비했던 마법진이 제대로 먹혔어요!”
성원이 이제는 제법 그럴싸한 연기력을 보이며 촬영용 드론을 의식해 일부러 크게 소리치듯 말했다.
“그러네! 그럼. 이제 우리 ‘울피’ 차례인가! 울피야! 부탁한다. 신수의 힘을 보여 줘!”
다현의 연기력은 정말로 끔찍한 수준이었다.
하늘에서 지켜보던 경호가 눈을 질끈 감으며 고개를 저을 정도로 참담했다.
-다현. 대사 연습은 좀 해야겠어.
다현의 품에 안겨 있던 울피도 그녀에게 한마디하며 앞으로 나섰다.
몸에서 붉은 불길이 확하고 치솟더니 집채만 한 크기의 불여우로 변했다.
다현이 그런 울피의 등 위로 펄쩍 뛰어 올라섰다.
평소 같으면 울피가 다현을 좋게 봐준다고 해도 연출하기 어려운 장면이었지만 경호의 협박과 흰둥이의 회유로 이룬 장면이었다.
다현이 여전히 어색한 동작으로 손을 뻗어 오크 무리를 가리키자.
키아아아아아아악!
타이밍을 맞춰 울피가 크게 울부짖었다.
살기 넘치는 울피의 포효소리에 괴성을 지르던 오크들이 조용해졌다.
무대는 완성됐다.
이제 경호가 나설 차례였다.
경호가 마력을 실어 수백의 오크에게 동시에 전음을 날렸다.
전음술(傳音術).
마력에 목소리를 실어 전달하는 방법으로 거리가 멀어질수록, 전달하는 인원이 많아질수록 기하급수적으로 엄청난 마력이 소모되는 기술이었다.
경호 역시 며칠 전 제대로 된 용의 심장을 얻지 못했다면 몸에 무리가 갈 정도의 양의 마력이 됐을 터였다.
-나는 지구의 수호신인 불여우 ‘울피’라고 한다.
초장부터 사기를 쳤다.
당장 전음을 보내는 이도 울피가 아니었고 지구의 수호신은 더더욱 아니었다.
-정신이 좀 드나. 주변을 둘러봐라. 어차피 너희는 죽으러 온 것이다. 너희도 당해 봤으니 알겠지. 너희는 지금 이곳, 지구라는 차원계에 마계의 침략을 쉽게 해 주기 위해 제물로 넘어온 것이다. 애써서 죽을 필요 없다. 우리는 너희가 싸우지 않고 지금 있는 이곳에 정착하길 바란다.
울피의, 아니 경호의 전음이 끝나자 진흙탕에 빠져 있던 오크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퀴에엑! 퀙!”
“끼엑! 께엑!”
돼지 멱따는 목소리로 마계어를 하기에 듣기 거북했지만 어쨌든 오크 떼로부터 흘러나오던 살기가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경호가 다시 전음을 날렸다.
-대표가 있나? 대화라는 것을 나누고 싶은데.
경호의 말에 웅성이던 오크 무리가 조용해지더니 다른 오크보다 머리 하나 정도 더 큰 오크가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는 역시나 돼지 멱따는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대표요! 말하시오!”
원래라면 마계어로 전음을 했다고 하더라도 이렇게 살기가 누그러지며 누군가 나와 대화를 할 정도 진행되기 어려웠다.
아무리 인간이 변화돼 오크가 됐다 하더라도 어쨌든 몬스터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마계에서 보낼 때 악마의 명령에 세뇌되어 살기가 높아진 상태이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다.
하지만 운애와 땅개가 해도 뜨지 않은 이른 시간에 와서 마법진을 만든 것은 단순하게 진흙탕을 만들어 그들의 움직임을 붙들기 위한 작업이 아니었다.
만약 그저 진격을 멈추는 용도였다면 울피와 다현이 제대로 살기를 뿌리며 화염을 일으키기만 해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그렇게 했다면 오크들의 살기가 더 짙어져서 난리가 났을 터였지만.
어쨌든 운애와 땅개는 정화와 치유의 성질을 가진 물의 힘과 응축하고 흡수하는 성질을 가진 땅의 힘을 이용해 침범해 오는 오크의 마성을 지우고 살기를 흡수하기 위해 작업을 한 것이었다.
다행히 운애와 땅개가 한 작업은 세뇌당한 오크의 정신을 원래 상태로 돌릴 수 있었다.
그리하여 오크의 대표자가 대화가 가능한 상태로 앞으로 나설 수 있게 됐다.
대표로 나선 덩치 큰 오크는 로나스 대륙이라는 차원계에서 혈사자 기사단이라는 황실 기사단을 이끌고 악마와 싸우다 사로잡혀 온 인물이었다.
은가누 프란시스.
기사단장이자 소드 마스터였던 그는 실력뿐 아니라 인품도 뛰어나 평소 휘하의 기사를 잘 챙기고 전장에서도 언제나 선두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사선을 넘나들며 싸우던 이였다.
그랬기에 은가누가 마계에 끌려와 힘을 잃고 오크가 되었음에도 기사들의 도움으로 부락을 이끄는 지도자가 될 수 있었다.
-나는 아까 이야기했듯 지구의 수호신인 불여우 ‘울피’라고 한다.
경호의 전음에 진흙탕을 벗어나 앞에 선 은가누가 큰소리로 외쳤다.
“나는 은가누요! 어차피 마계에서 차출된 버려진 몸이고 결국 이 세상을 약탈하며 살다 죽을 운명이요! 그러니 우린 할 말이 따로 없소!”
경호는 은가누의 말에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마기로 인해 몬스터가 야성이 강해지며 지능이 떨어지는데도 저 정도로 말하는 것을 보니 대화가 가능하겠구나.’
조금 어눌하게 마계어를 사용하긴 했지만 충분히 말이 통할 듯싶었다.
-너는 그전에 무엇을 하다 마계로 잡혀 왔느냐?
“황실 기사단장이었소! 지금 건너온 이들 대부분은 그때 따르던 기사들이요! 오크로 변해 그때의 힘과 자긍심은 잃었지만 내 명령은 제법 따르오!”
역시 좋았다.
여러 부락이 섞여 있으면 통제하기도 명령 체계를 세우기도 어려웠다.
-나는 지구의 수호신으로서 너에게 제안을 하나 하려고 한다. 들어보겠느냐.
“무엇이오! 말하시오!”
-지금 당장은 힘들지만 너희를 원래대로 돌려줄 수 있다.
“…!”
경호의 전음에 은가누가 놀라 주먹만 한 눈을 찢어져라 치켜떴다.
“그, 그게 무슨! 우리를 다시 인간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해 준다는 말입니까?”
인간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말에 울피에게 하던 은가누의 말투가 공손하게 바뀌었다.
-‘세계수’에 대해 들어봤느냐?
은가누는 황실의 일원이었기에 고대부터 내려오던 전설에 대해서도 약간의 지식은 가지고 있었다.
“신이 우주의 균형을 위해 만든 존재라 알고 있습니다!”
-지금 이 세상에 ‘세계수’가 자라고 있다. 아직 성장하는 중이라 지금 당장 너희를 원래의 모습으로 돌려줄 수는 없다만 언젠가 가능한 시점이 오면 너희를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회복시켜 주도록 하겠다.
“정말이십니까?”
-그렇다. 이곳도 네가 있던 세상처럼 마계의 위협에 직면해 있다. 가능하다면 너희가 다시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와 이곳에서라도 악마와 다시 싸워 주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털썩.
은가누는 울피를 향해 무릎을 꿇었다.
“끄억. 끄어억.”
그리고 오열했다.
어차피 죽은 목숨이었다.
마계에서는 몸에 심어진 마혼 때문에 죽고 싶어도 못 죽고 반항 한번 못한 채 버러지보다 못한 삶을 살고 있었다.
‘그래! 차라리 죽자!’
이곳에 끌려오며 죽음을 각오하고 오히려 홀가분한 기분으로 넘어온 상황이었다.
하지만 ‘지구’라는 이곳의 수호신은 그런 자신들을 세계수의 힘으로 원래의 모습을 찾게 도와준단다.
거기다 같이 악마의 침략에 맞서 같이 싸우자고 하고 있었다.
은가누는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 채 그렇게 한참을 울었다.
-그래. 어찌하겠느냐?
“하겠습니다! 하겠습니다! 부디 악마놈들과 싸울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인간의 모습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몸 안에 박혀 있는 마혼의 기운만 제거해 주신다면 죽는 순간까지 싸우도록 하겠습니다!”
은가누는 손에 쥔 거대한 전투도끼를 번쩍 들어 올리며 큰소리로 외쳤다.
-좋다. 그러면 지금 넘어온 이들을 잘 인도하여 앞으로 넘어올 이들과 마수를 관리할 수 있겠나. 필요한 물자는 최대한 공급해 주도록 하겠다.
경호의 말에 주변을 살핀 은가누는 멀리서 느껴지는 마수의 기운에 입꼬리를 올렸다.
“저희에게 마수만 자유롭게 사냥할 수 있게 해 주신다면 웨이브 던전을 통해 넘어오는 이들을 관리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언제나 굶주린 채 고된 노동에 시달리던 이들이었다.
먹을 것만 제대로 준다 해도 문제를 일으킬 이들은 거의 없었다.
-알겠다. 그리하도록 해라.
그렇게 최초의 웨이브 던전 파열은 경호와 은가누의 대화로 끝을 맺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