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화
‘의식의 세계?’
하얀 물감을 뿌려놓은 듯 새하얀, 크기를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끝없이 펼쳐진 공간이었다.
분명 의식의 세계였지만 지금까지 수도 없이 드나들던 그곳과는 뭔가 달랐다.
뭔가 모를 이질감을 느낀 경호가 정신을 집중하자 새하얀 공간이 변하기 시작했다.
“미친! 너 아직도 거기 숨어 있었냐?”
파직! 파지지지직!
새하얀 공간이 일그러지더니 마구 찢어지기 시작했다.
크롸롸롸롸롸롸.
그곳에 짙은 녹색의 거대한 괴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날카로운 이빨이 달린 거대한 입, 악마에게 달린 것 같은 뾰족한 뿔, 거대한 몸통에 강철처럼 단단해 보이는 손과 발, 매의 그것처럼 날카로운 발톱. 그리고 박쥐 같은 거대한 날개까지.
드래곤의 모습을 했지만 여기저기 찢어지고 뭉개진 온전치 못한 모습이었다.
결국 ‘용’의 기운은 그때 경호를 흡수하려고 했던 초진화한 녹색 덩어리가 심장 깊숙이 숨어들어 다시 힘을 키우고 있던 것이었다.
그것도 용의 모습으로.
-조금만 더 있으면 완전하게 용의 모습을 갖추고 널 흡수할 수 있었는데 귀찮게 됐구나.
여기저기 엉망인 좀비 같은 녹색용이 말을 하자 굉장히 괴기스러웠다.
“어이구. 이제 말도 하네.”
-그래. 오늘 널 양분 삼아 부족한 부분을 채우도록 하겠다.
“허. 누구 맘대로!”
경호는 심장으로 신력, 정령력, 마력을 보내 무지갯빛 기운을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아. 지금은 심장을 못 쓰는구나.’
지금까지 심장을 쓸 수 있었던 것은 저 녹색 괴물이 심장 속에 숨어서 경호에게 쓸 수 있게 협조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면서 경호의 힘을 야금야금 눈치채지 못하게 흡수하며 소멸하던 기운을 지금의 모습까지 성장시킨 것이었다.
하지만 경호는 그런데도 피식 웃으며 여유를 잃지 않았다.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의식의 세계는 뇌, 상단전의 힘이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치는 곳이야. 말 그대로 의지, 집중, 신력 같은 힘이 강하게 영향을 미치는 곳이지. 네가 온전한 상태라면 모르겠지만 네 몸뚱아리도 제대로 유지 못 하는 상태로 의식의 세계에서 싸우는 것은 의미가 없어.”
정신력이 곧 힘인 곳이었다.
경호는 시스템 제한이 풀리면서 상단전 역시도 더 강해진 상태였고 의식의 세계에 대해 그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
용이 되다만 녹색 괴물도 엄청난 힘을 품고 있었지만 정상인 몸이 아닌 상태.
결국 의지와 집중 같은 정신적인 힘을 제대로 쓸 수 없는 상태였다.
“한 방에 끝내려고 했는데. 그건 안 되겠네. 뭐. 맞다 보면 정신 차리겠지.”
타앗.
주먹을 가볍게 말아 쥔 경호가 뛰어올라 녹색 괴물의 거대한 대가리를 후려쳤다.
콰앙!
끄아아아아아아아악!
폭탄 터지는 듯한 엄청난 소리와 함께 좀비 드래곤의 턱이 돌아갔다.
“타격감 좋은데!”
***
시간 개념이 정확지 않은 의식의 세계였지만 한참을 때리고 나서야 끝이 났다.
기운이 뭉쳐 만들어진 드래곤이 되다만 괴물은 결국 걸레처럼 엉망이 된 채 가죽만 남기고 쓰러졌다.
아니 걸레 같은 가죽만 남긴 것은 아니었다.
“힘들긴 했지만 이거 수확이 괜찮은데.”
경호의 말처럼 수천수만 대를 때리고 나서야 소멸한 괴물 녀석이었지만 남기고 간 물건은 그런 고생을 충분히 보상해 주었다.
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웅.
의식의 세계를 환하게 비추는 태양 같은 기운이 경호 앞에 떠 있었다.
괴물이 스스로 용이 되기 위해 품고 있던 ‘힘’이었다.
신력, 정령력, 마력을 모두 쏟아 내는 경호의 공격에 두들겨 맞으면서 정화되며 마기가 사라진 순수한 에너지 덩어리였다.
‘어엇?’
경호는 갑자기 심장 박동이 점점 빨라지며 가슴 부위가 점점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마치 심장 안에 숨어 있던 힘이 빠져나간 것을 빨리 채워 넣으라고 재촉하는 것 같았다.
“그럼. 그럴까?”
‘태양’처럼 떠 있는 기운 역시도 빠져나왔던 본래의 자리, 심장으로 들어가고 싶은 듯 보였다.
경호가 빛을 뿌리고 있는 기운을 향해 손을 뻗었다.
스으윽.
마치 물속에 손을 담그는 듯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곧 그러한 느낌이 변하기 시작했다.
‘으윽.’
제대로 완성되진 못했지만 드래곤이 되려 했던 기운이었다.
불완전하다지만 그 기운이 결코, 작거나 약하지 않았다.
그리고 경호의 몸을 차지하려는 악의는 사라졌지만 그렇다고 기운 자체가 가지는 반발력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뜨겁다! 엄청나게 뜨거워!’
기운이 손을 타고 심장을 향해 빠르게 흘러 들어갔다.
경호는 마치 혈관을 타고 용암이 흘러 들어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아찔했다.
혈관이 타오르는 듯한 엄청난 고통에 의식이 흐려지려 할 때마다 경호는 이를 악물고 오히려 그 고통에 집중했다.
기운이 심장에 자리 잡으면서 진정한 ‘용의 심장’으로 거듭나려는 순간이었다.
이럴 때 정신을 잃으면 자칫 위험할 수도 있었다. 아니 분명 위험해질 터였다.
‘근데 이거 생각보다 너무 강한데!’
그렇게 의식의 세계에서 경호가 심장을 보호하며 기운을 흡수하고 있을 때.
성원과 흰둥이, 운애 역시 현실의 세계에서 경호의 변화에 맞춰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운애! 성원! 우선 경호를 눕히자!
경련이 일어나듯 선 채 몸을 부르르 떠는 경호를 보며 흰둥이가 운애와 성원에게 말했다.
“어. 수호신 님. 형님 맥박이 너무 떨어지는데요!”
일부로 호흡을 길게 가져가면서 기운을 느끼고 있는 경호였지만 외부에서 보기에는 딱 죽어 가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운애! 우선 정령력으로 회복력을 최대한 끌어 올려 줘! 나는 생명력을 불어넣을 테니!
-알았어요.
운애의 손에서 물줄기가 솟구치더니 바닥에 누워있는 경호를 둘둘 감아서는 공중에 띄웠다.
그런 경호를 향해 흰둥이가 진지한 표정으로 앞발을 뻗었다.
후우우우우웅.
흰둥이의 앞발에서 신력이 뿜어져 나와 그런 경호를 감쌌다.
그러자 부르르 떨던 경호의 몸이 점점 안정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창백했던 안색에 혈색이 돌아요! 후우. 그럼. 제가 도울 건 없을까요?”
-속으로 조용히 기도나 하고 있어! 시끄러워서 집중 안 되니까!
경호의 호전에 성원이 유난을 떨자 흰둥이가 미간을 찌푸리며 조용히 시켰다.
“아. 네엡.”
다행히도 이런 흰둥이와 운애의 노력은 실제로 의식의 세계에 있는 경호에게도 도움이 됐다.
‘뜨거워!’
심장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잠들어 있던 엄청난 힘을 흡수해 진정한 ‘용의 심장’으로 거듭나려는 순간이었다.
갑작스러운 변화가 없을 리 없었다.
그때였다.
전신에 시원한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동시에 익숙한 기운이 몸 안에 흘러 들어왔다.
‘흰둥이의 기운, 거기다 운애도 도와주나 보네.’
불로 지지는 듯한 고통이 사라지자 더욱 쉽게 집중할 수 있었다.
‘그래. 거기가 네가 있을 곳이라고!’
기운을 달래며 심장에 더욱 밀어 넣었다.
그러자 들끓던 기운이 안정화되며 서서히 흡수됐다.
심장 역시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다.
‘이거 진짜 ‘드래곤 하트’가 되는 거야?’
운애도 이야기했듯 ‘용의 심장’이라고 다 같은 심장은 아니었다.
‘용’이라는 이름을 가진 종족은 그 수가 엄청나게 많았다.
드레이크, 히드라, 바실리스크 등등.
그런 그들도 아류긴 하지만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었고 용의 권능 중 하나인 ‘용울음’이나 ‘용숨결’도 쓸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아룡(亞龍)족의 심장과 진짜 용의 심장은 큰 차이가 있었다.
바로 ‘무한 성장.’
무한 성장. 그게 뭐 대수라고?
거대한 육체, 강인한 힘, 엄청난 마법 능력 등등 드래곤이 강한 이유야 셀 수 없이 많았지만 무한 성장이야말로 ‘드래곤’이 강한 진짜 이유였다.
진짜 ‘용’의 심장은 태어나자마자 주변 기운을 빨아들이며 호흡을 시작한다.
그래서 드래곤은 ‘해츨링’이라는 백 년 남짓한 시기에 어떤 기운을 흡수하며 성장했는가에 따라 화룡이 되기도 하고, 수룡이 되기도 하고, 마룡이 되기도 했다.
그리고 해츨링 단계를 벗어나 웜급과 에인션트급을 나누는 가장 큰 기준 역시 나이였다.
이렇듯 드래곤이라는 종족은 강함의 기준이 종류나 기술, 능력이 아닌 ‘나이’인 아주 특별한 종족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가능한 이유가 바로 무한 성장 때문이었다.
보통의 생명체는 전성기라는 것이 존재했다.
가끔 그런 것을 넘어서는 특별한 존재가 나타나긴 하지만 일반적으로 90대 노인이 20대 청년과 싸워 이기기 어려운 법이었다.
하지만 드래곤이라는 존재는 90대 노인이 20대 청년을 가볍게 짓밟아버릴 수 있었다.
쉽게 말해 드래곤은 죽기 직전이 가장 강한 존재였다.
경호가 놀란 이유도 마찬가지였다.
지금 심장 스스로 기운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그 양이 엄청나게 많지 않았지만 분명한 것은 스스로 의지를 가진 것처럼 주변의 기운을 빨아들이며 심장으로 흡수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하단전인 ‘마나코어’를 성장시킬 때 마나호흡을 하듯 심장 스스로가 그런 일을 하고 있었다.
‘이게 바로 숨만 쉬어도 강해진다는 건가?’
지금도 흰둥이와 운애가 자신을 도와주기 위해 불어 넣어 준 기운을 심장이 빨아들이고 있었다.
이제는 의식의 세계를 나갈 시간이었다.
***
-어억! 이거 신력을 불어넣고 있는 이상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는데!
-저의 정령력도 마찬가지예요!
물줄기에 감겨 둥둥 떠 있던 경호의 상의가 갑자기 부풀어 오르더니 터져 나갔다.
군살 없이 단단해 보이는 상체가 드러났다.
그리고 가슴 중앙, 심장이 있는 부위로 물줄기, 정확히는 운애의 정령력과 흰둥이의 신력이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지금 우리 형님, 괜찮은 거죠!”
성원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소리쳤다.
-그냥 조용히 기도나 하라니까!
흰둥이가 그런 성원을 타박했지만 이러한 상황이 당황스럽긴 흰둥이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때 서서히 심장으로 빨려 들어가던 기운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심장이 있던 부위에 짙은 묵빛의 용문양이 문신처럼 새겨졌다.
그리고 감겨있던 경호의 눈이 번쩍 뜨며 동시에 공중에 둥둥 떠 있던 경호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야. 엉덩…. 응?”
경호가 엉덩이를 문지르며 놀란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흰둥이와 운애, 성원을 돌아보며 물었다.
“왜? 그런 눈으로 보는 건데?”
“형님. 도대체 뭡니까? 이번엔 또 뭔데요? 아니 뭘 하면 옷이 찢어지면서 가슴에 갑자기 그런 문신 같은 게 생기는 건데요?”
문신? 뭔 문신?
경호는 성원이 자신을 손가락질하며 문양에 대해 묻자 고개를 숙여 가슴을 쳐다봤다.
“어? 어어? 뭐야. 이거!”
가슴에 정말 용머리처럼 생긴 문양이 문신처럼 새겨져 있었다.
깜짝 놀란 경호가 손으로 쓱쓱 문질렀지만 당연하게도 지워지지 않았다.
“이거 뭐, ‘용의 심장’ 인증 마크 같은 건가?”
경호가 피식 웃으며 중얼거리자.
“엇! 형님. 그럼, 이제 용숨결 같은 것도 할 수 있는 거예요?”
‘드래곤’하면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용의 숨결’이라 불리는 드래곤 브레스였다.
“음. 아마도?”
성원이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경호를 쳐다보며 말했다.
“형님. 한 번 가볍게 보여 주시면 안 돼요?”
“야! 내가 무슨 불 뿜는 차력사냐!”
그런데.
-경호. 나도 보고 싶은데. 어차피 살짝 보여 주는 건 결계 때문에 외부에서 보이지도 않을 텐데.
운애가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입가에 미소까지 띠며 이야기하자 경호도 더는 거부하기 어려웠다.
“에휴. 어쩌다 차력쇼까지 하게 된 건지.”
경호가 한숨을 쉬며 심장 속에 잠들어 있는 새로운 힘, 용력(龍力)을 깨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