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화
“아. 미치겠네. 아. 미치겠네.”
성원이 초조한 얼굴로 연신 ‘미치겠네.’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이윽고 차가 멈췄다.
운전을 하던 정수가 보조석에 앉아 계속 중얼거리고 있는 성원을 보며 말했다.
“형님. 도착했습니다.”
“하아. 미치겠네. 정말.”
“형님!”
정수가 다시 한번 크게 불렀지만 성원은 그저 중얼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하아. 그냥 못하겠다고 할까?”
“혀엉니임!”
정수가 성원의 귓가에 입을 가져가 다시 한번 크게 불렀다.
“아악! 깜짝아! 왜? 뭔데!”
“다 왔다고요. 오늘 보기로 한 약속 장소요.”
성원이 창밖을 보니 어느새 상업지구의 유명한 주점 앞이었다.
화려한 네온사인 덕에 캄캄한 밤임에도 대낮처럼 환했다.
“벌써 도착했어?”
버거퀸 컴퍼니의 김동진 대표를 만나기로 한 장소였다.
-아까 도착했다. 정신 단단히 먹어라. 내 특별히 경호의 부탁으로 따라오긴 했다만 이리 멍청하게 있으면 어떡하잔 거냐.
성원의 품에 흰둥이가 자리 잡고 앉아서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있었다.
“아. 네에. 죄송합니다. 수호신님. 그런데 제가 좀 많이 떨려서요. 정수야. 우리 같이 갈까? 알잖아. 나 거짓말하면 완전 티 나는 거.”
성원은 거짓말을 잘 못 했다.
재벌가 아들이라고 하지만 후계자 수업 같은 걸 받으며 자란 것도 아니었고 사업 수완이 좋은 것도 아니라 그런 쪽으로 능수능란하지 못했다.
아니 애초부터 누군가에게 거짓말해야 할 상황에 놓인 적도, 그럴 필요도 없는 삶을 살아온 성원이었다.
그에 비해 정수는 꽤 거짓말에 능숙했다.
그랬기에 성원은 정수에게 같이 가자고 아까부터 꼬드기고 있는 중이었다.
“형님. 큰형님이 그러셨잖아요. 이상한 낌새를 느끼면 바로 숨을 거라고요. 갑자기 제가 끼면 분명 이상해질 거고 그쪽에서도 뭔가 수작을 부리려고 해도 어려워지잖아요.”
정수의 말이 맞았다.
그렇지 않았다면 경호까지 같이 왔을 자리였다.
“후우. 내가 다 망치는 건 아니겠지.”
“형님. 거짓말이라고 생각하지 마시고 이것도 악마와 싸우는 하나의 전투라고 생각하세요. 거짓말이라고 생각하니 자꾸 나쁜 행동이라고 생각하면서 거부감이 드는 거잖아요. 형님은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라 악마계약자와 싸우러 가는 겁니다. 아셨죠?”
“그런데 너 언제 이렇게 말 잘하게 됐냐?”
성원이 새삼 놀란 얼굴로 정수를 쳐다봤다.
“제가 이래 봬도 신화학원 검술 일타 강사거든요.”
성원이야 여러 가지 일로 강의를 직접 하지 못하고 있지만 다현이나 정수, 호돈은 강사 역할을 하고 있었다.
“아. 강의하고 있었지?”
“그래서 같이 들어가고 싶어도 못 들어가요. 오늘 저녁에도 강의 있어서요. 그럼. 어서 가 보세요. 약속 시간 다 됐어요. 어서요.”
정수의 재촉에 성원은 흰둥이를 조심스럽게 안아 들고는 차에서 내렸다.
깜깜한 밤, 쌩하고 떠나는 차량의 불빛을 한참이나 쳐다보고 있었다.
-야. 안 들어갈 거야?
“아. 들어가겠습니다.”
-대답하지 말고. 너 그 악마계약자 녀석 만나서도 이러면 정말 끝장이야. 알지?
“….”
성원이 이번에는 대답하지 않고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정수도 이야기했지만 오늘 만남에서 삐끗하면 정말 처리하기 어려워지는 거 알지?
신수를 납치해 그린캔디를 만드는 녀석처럼, 마혼을 뿌리는 이 녀석마저 숨는다면 곤란했다.
후우!
성원이 깊게 숨을 몰아쉬고는 주점이 있는 지하로 내려갔다.
고급 주점답게 입구에는 키 크고 잘생긴 각성자가 새까만 양복을 입고 서 있었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김동진 대표와 약속이 있어 왔습니다.”
“혹시 안고 계신 반려동물….”
“흰둥이는 제 가족이라서…. 규정상 못 들어가면 어쩔 수 없이 다른 곳으로 옮겨야겠네요.”
성원의 말에 잠시 멈칫거린 가드가 서둘러 말을 이었다.
“물론 같이 들어가셔도 됩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가장 좋은 곳으로 모시겠습니다.”
가드가 성원의 옆에 서서는 안내를 시작했다.
안쪽 가장 커다랗고 화려한 문 앞에 섰다.
“….”
낯선 경험이었다.
성원은 평소 술을 먹더라도 포차나 횟집을 가는 편이었다.
최근엔 아예 행운식당만 가는 상황이라 이런 주점에서 술을 먹어 볼 일이 거의 없었다.
마음만 먹으면 이보다 더 고급 주점도 마음껏 다닐 수 있지만 그럴 필요도, 생각도 없는 성원이었다.
‘안 그래도 긴장되는데. 장소까지 어색하네.’
똑똑.
가드가 가볍게 노크를 했다.
그러자 문이 열리면서 환하게 웃으며 동진이 직접 문을 열고 나왔다.
“아이고. 오셨습니까. 길드장님. 반갑습니다. 들어오시죠. 어. 귀여운 강아지도 데리고 오셨네요. 와아. 정말 귀엽네요. 제가 한번 안아 봐도 될까요?”
동진이 흰둥이를 향해 손을 뻗자.
-어디 감히 악마계약자 따위가. 성원아. 나 건들면 저놈 손모가지 끊어 버린다.
안 그래도 요즘 저기압이던 흰둥이가 나오기 싫었지만 어쩔 수 없이 나온 자리였다.
흰둥이의 짜증 섞인 전음에 성원이 놀라 말했다.
“아, 아니. 그게 우리 개가 낯가림이 좀 심해서요. 처음 보는 사람이 안으려고 하면 물지도 몰라요.”
“에이. 이렇게 조그만 강아지가 물어 봐야 아프지도 않을….”
동진이 손을 흰둥이에게 뻗으며 말했다.
으르르르르르르.
하지만 흰둥이가 그런 동진을 보며 덩치에 맞지 않는 깊은 낮은 저음으로 으르렁거렸다.
날카로운 송곳니가 입 밖으로 쓰윽 삐져나왔다.
손을 뻗어 흰둥이의 목덜미를 쓰다듬으려 했던 동진이 놀라 손을 거뒀다.
“하하하. 정말 낯가림이 심한 아이네요.”
“그렇죠? 좀 별난 구석이 있는 아이라서요.”
동진이 어색하게 웃으며 말하자 성원도 고개를 끄덕이며 멋쩍게 웃었다.
-성원이 너도 별난 구석 있는 개한테 한번 물려 볼래? 앞으로 말 골라서 잘해라.
흰둥이도 경호나 지숙에게나 고분고분했지 그도 어디까지나 지구의 수호신이자 주신의 반려견인 존재였다.
“그럼. 편히 앉으시죠.”
흰둥이의 협박에 움찔한 성원은 고급스러운 가죽 소파에 앉으면서도 불편한 마음이 가득했다.
사실 성원은 정말 순수하게 그냥 편하게 식사나 하면서 친해지자는 정도로 말을 건넨 것이었다.
물론 속마음은 악마계약자임을 알 수 있는 증거를 잡기 위함이었지만 표면상으로는 어쨌든 그랬다.
그런데 성원의 의도를 그대로 이해할 수 있을 정도의 순수함이 동진에게는 없었다.
그렇기에 당연하게도 접대를 떠올린 그였다.
그렇기에 어젯밤 정수를 통해서 약속을 잡은 동진은 접대 자리를 마련하기까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해야 했다.
성원에 대한 정보가 너무나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신화길드의 마스터이자 신화학원의 설립자이며 최근 들어 최고의 주가를 달리고 있는 인물이라는 것은 동진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접대라는 것은 그러한 눈에 보이는 정보는 별로 쓸모가 없었다.
평소 먹는 술이나 음식, 여성 취향이나 좋아하는 명품 브랜드 같은 것이 중요했다.
돈이 많은 재벌이라고 뇌물이나 여자를 싫어하는 남자는 없다는 것이 이 자리까지 어렵게 올라온 동진의 깨달은 삶의 이치였다.
그런데 첫 만남부터 성원은 남달랐다.
‘개를 데리고 왔다고? 이런 곳에? 아니 왜?’
지금까지 수많은 이들을 접대해 봤지만 아무리 아낀다고 해도 이런 술자리에 반려견을 데리고 오는 인물은 처음이었다.
순간 동진의 머릿속에 수많은 생각이 번쩍였다.
‘정말 동물을 좋아해서 데리고 온 건가? 아니면 특별한 취향이 있는 변태?’
혹시나 싶어 안아 보겠다고 했는데 성원이나 개나 보이는 반응이 꽤나 각별해 보였다.
그래서 동진은 성원의 진심에 대해 더 알 수 없게 됐다.
그러나 동진의 복잡한 심사와 다르게 성원이 흰둥이를 이곳에 데리고 온 것은 흰둥이를 각별하게 좋아해서도 아니고 변태적인 취향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흰둥아. 성원이가 그냥 가면 아마도 무조건 마혼에 절어서 오거나 아니면 세뇌나 최면 같은 거 걸릴 거니까. 좀 같이 가 줘.
이 같은 경호의 부탁에 흰둥이는 툴툴거리면서도 성원을 따라온 것이었다.
짝짝!
자리 앉기 바쁘게 동진이 손뼉을 쳤다.
성원이 그런 그의 행동에 의구심을 가질 때 닫혀 있던 문이 열리며 모델급 몸매에 배우급 미모를 갖춘 여자 대여섯 명이 줄지어 방으로 들어왔다.
“어! 어어!”
성원은 자기도 모르게 바보처럼 입을 쩍 벌리고 당황한 채 어어! 거렸다.
-성원아. 바보 같으니까 입은 좀 닫고.
오죽하면 지켜보던 흰둥이가 지적할 정도였다.
‘이, 이런! 여기 평범하게 술만 먹는 곳이 아니었구나!’
그제야 순수한 데다 눈치까지 없는 성원도 이 주점의 성격을 알게 됐다.
동진이 들어오는 여자를 눈으로 쭉 훑어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특별히 말을 해 놔서 그런지 역시 물이 좋….”
“김동진 대표님. 정말 실망했습니다.”
갑자기 성원이 실망했다고 말하자 문을 열자마자 흰둥이를 봤을 때처럼 다시 한번 멘붕이 왔다.
‘뭐가? 여성 취향이 남다른가? 충분히 예쁜 애들인데?’
동진이 전혀 감을 못 잡고 있자 성원이 다시 입을 열었다.
“사업 파트너로서 이런 접대는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지요. 그렇다면 저는 오늘 즐거운 마음으로 가볍게 놀고 가겠습니다. 그리고 대표님과도 가벼운 관계가 되겠지요.”
“….”
“제가 약속을 잡아서 한 번 뵙자고 한 것은 대표님의 생각이 마음에 들어서입니다. 저와 마음이 맞겠다. 그래서 좀 더 무겁고 깊게 알아 갔으면 좋겠다. 그런 마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식의 자리라니 정말 실망했습니다.”
“아! 다들 나가! 나가!”
성원의 말에 동진이 줄지어 선 여자들을 보며 소리쳤다.
그러자 한껏 몸매를 부각하며 서 있던 이들이 놀란 얼굴로 우르르 밖으로 나갔다.
“길드장님 죄송합니다. 제가 길드장님의 순수한 의도를 오해했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동진이 허리를 반으로 접으며 말했다.
“하아. 제가 정확히 표현하지 않고 그냥 술이나 한잔하자고 약속을 잡은 잘못도 있지요.”
성원은 마음 같아서야 아까 여자들이 들어올 때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싶었다.
하지만 이곳에 온 이유는 진정 동진과 친분을 쌓고 교류하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나가시죠. 제가 가장 좋아하는 장소에서 제 진심을 보여 드리고 싶습니다.”
“이번에는 기대해도 되겠습니까?”
“물론입니다.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성원의 질문에 동진이 손을 싹싹 비비며 말했다.
***
그렇게 동진이 마련한 차를 타고 이동한 곳은 버거퀸 본점이었다.
밤 10시.
장사를 마치고 정리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기대해도 좋다고 하신 곳이 이곳입니까?”
“길드장님과 처음 만난 곳도 이곳이고 저에게 가장 의미 있는 공간도 이곳입니다. 그래서 이곳으로 모셨습니다. 맥주에 어울리는 요리는 제가 직접 만들어 대접하겠습니다. 요즘 경연을 위해서 연습하고 있는 메뉴가 있거든요.”
성원이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질문하자 동진이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둘이 매장으로 들어가자 청소를 하던 직원들이 반사적으로 인사를 했다.
“어서 오세요! 버거퀸입니다!”
“어서 오세요! 버거퀸입니다!”
그러다 들어오는 동진을 보며 다시 인사를 했다.
“대표님! 아니 오늘 약속 있다고 저희끼리 마감하라고 하셨….”
매니저가 동진을 보며 묻다 옆에 있는 성원을 보고는 말을 멈췄다.
약속 상대가 성원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아니 강북에서 가장 유명한 주점 예약하시고는 왜 이곳에 오신 거지?’
약속 장소를 알고 있던 매니저는 지금 상황이 이해되지 않아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다. 자아. 마감은 내가 어떻게든 알아서 할 테니 지금 모두 손에 쥔 거 놔두고 퇴근해. 일 분이 지나도 남아 있는 사람은 더 일하고 싶다는 뜻으로 알고 창고 정리시킬 거니까 그렇게 알고.”
동진의 말에 순식간에 매장이 비워졌다.
“자아. 그럼. 들어가시죠.”
저번에 버거를 만들었던 메뉴개발실로 성원을 안내했다.
“아까 그곳보다 더 넓고 환하고 좋네요. 그쵸?”
동진이 성원에게 자리를 권하며 애써 농담을 던졌다.
“하하하. 그러네요. 아까 거기는 담배 냄새 때문에 별로더라고요.”
동진은 성원의 표정이 많이 풀어진 것을 보고 내심 다행이다 싶었다.
만약에라도 그가 기분이 상해 버거퀸에 대해 지원하기로 한 것을 철회하기라도 한다면 자신은 당장 악마에게 끌려가 영원히 지옥 불에 구워질지도 몰랐다.
“길드장님. 잠시만 기다리시면 간단하게 먹을 안줏거리를 만들어 내도록 하겠습니다.”
“그거 좋지요. 그럼. 기대해 보도록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