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화
고급스러운 책상과 가죽 소파가 놓인 사무실이었다.
한 편에 있는 벽장엔 고급스러워 보이는 장식품이 가득 놓여 있었다.
특이하게도 해가 쨍쨍한 낮임에도 창마다 암막 커튼이 쳐 있어 사무실 안은 아주 깜깜했다.
화르르르르르륵.
그때 갑자기 고급스러운 책상 위,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서 검붉은 불꽃이 확! 하고 피어올랐다.
이글거리는 검붉은 불꽃은 불길한 기운을 품고 있었다.
그 불꽃에서 나온 어스름한 빛이 깜깜한 사무실 안을 비췄다.
아까는 어두워서 보이지 않던 것이 보였다.
책상 앞쪽, 바닥에 한 남성이 납작 엎드려 있었다.
자세히 보니 두려운 듯 엎드려 있는 상태에서 몸을 미세하게 떨고 있었다.
“차, 찾으셨습니까?”
긴장한 듯 말을 더듬는 남성은 바로 ‘버거퀸’의 대표, 김동진이었다.
검붉은 불꽃 속에서 산양의 뿔처럼 휘어진 거대한 뿔이 달린 험악하게 생긴 악마 얼굴이 떠올랐다.
-마혼을 넣은 음식은 어찌 되고 있지? 잘 진행되고 있는 것이냐?
악마는 딱히 화를 내거나 특별히 위협적인 말투도 아니었지만, 그 목소리 자체에 죽음의 기운을 내포하고 있었다.
각성자도 아닌 일반인인 동진은 그저 악마의 목소리를 듣고 있는 것만으로도 전신이 벌벌 떨리며 식은땀이 흘러내려 옷을 적셨다.
“그, 그것이 내부 시식에서도 문제가 없었고 신화 그룹의 이성원 길드장도 전혀 모르는 눈치였습니다.”
어찌 됐든 자신이 살려면 무조건 성공해야 했다.
동진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는 상황을 설명하며 고개를 더욱 조아렸다.
-최대한 많은 사람에게 먹일 방법을 찾도록. 그리고 용사의 측근을 포섭해서 마혼을 심어야 한다는 것을 잊진 않았겠지?
“신화그룹과 잘만 손잡으면 가능할 것 같습니다. 다, 다행히 그룹에서 하는 경연도 참가할 수 있게 됐습니다. 거기다 조금씩 그쪽 대표와 친해져 보려고 합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다현의 주변으로 접근할 수 있습니다.”
마계에서도 다현을 죽이는 것은 포기한 상태였기에 주변을 정리하고 마혼을 심는 전략으로 방향을 수정한 것이었다.
거기다가 마혼에 조종당하는 이들에게 완성된 ‘그린 캔디’까지 먹인다면….
아무리 마신도 경계하는 용사라 해도 가까운 지인들에게 무방비 상태에서 당한다면 목숨을 부지하기 힘들 것이 확실했다.
-훌륭하군. 내가 너에게 기회를 준 것은 능력이 아니라 네가 가진 바로 그 ‘욕망’을 높이 평가했기 때문이다. 노력해라. 그러면 악마군단이 도래했을 때 영광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며, 명심하겠습니다.”
동진의 말을 끝으로 마기가 흩어지며 활활 타오르던 검붉은 불꽃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후우. 후우. 후우. 후우.
바닥에 엎드려 있던 동진이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중얼거렸다.
“그래. 어차피 망할 세상이야. 동진아! 어차피 세상은 혼자 사는 거야! 남들이 어찌 되든 그게 무슨 상관인데…. 어차피 세상이 내게 해 준 게 뭐가 있다고….”
어차피 이미 악마에게 영혼을 판, 더 나빠질 것도 없는 인생이었다.
***
“어?”
동진은 손에서 진동하는 휴대폰을 보며 긴장했다.
이성원 길드장.
전혀 예상하지 못한 갑작스러운 전화였다.
-안녕하세요. 김동진 대표님. 전화 괜찮으신가요? 바쁘시면 다시 전화하겠습니다.
“아! 길드장님!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말씀하시지요.”
동진은 자신도 모르게 마음먹은 것보다 더 저자세로 전화를 받았다.
-실은 이번에 삼족우 버거를 먹고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성원의 말에 동진이 긴장하며 침을 꿀꺽 삼켰다.
어제 악마가 이야기했듯 성원은 다현을 공략하기 위해서 무조건 잡아야 하는 동아줄이었다.
아니 다현뿐 아니라 마혼을 전 세계에 널리 퍼뜨리기 위해서는 성원, 아니 신화그룹의 도움이 꼭 필요했다.
“고, 고민이요?”
동진은 어제 악마와 이야기했을 때보다 지금이 더 긴장될 정도였다.
-네. 그리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래서 연락을 드린 거고요.
갑작스러운 연락, 그리고 뭔가 알 수 없는 결정.
동진은 애써 어색하게 웃으며 성원에게 질문을 던졌다.
“하하. 그게 무슨. 제가 잘 이해가 안 되네요. 결론을 내리셨다뇨? 그게 무슨 말이죠?”
-아. 제가 너무 두서없이 말했네요. 다른 게 아니라 이번 대회의 결과와 상관없이 ‘버거퀸’을 지원하고자 해서요. 지원 방법은 협의해서 정하면 될 것 같고요. 생각해 본 것은 자회사로 편입하는 것도 괜찮고 지분 투자도 좋습니다. 대표님이 원하는 쪽으로 최대한 맞춰 드리도록 하죠.
“네엣!?”
동진이 놀라서 소리를 질렀다.
대박이었다.
대기업, 그것도 대한민국 최고의 기업에서 인수나 투자를 고려 중이란 것이었다.
점점 마계의 침략이 가속화되는 시점에서 요리 경연을 통해 신화그룹의 인정을 받아 해외로 진출하는 방향은 사실 나쁘지 않았지만 너무 오래 걸린다는 문제가 있었다.
그런데 그러한 문제를 성원이 직접 연락해서는 해결해 준다는 상황이었다.
안 그래도 어떻게 하면 성원과 가까워질 수 있을까 어제부터 밤잠을 설쳐 가며 고민하던 참이었다.
-투자에 대해서 싫거나 하신 건 아니시죠?
“아, 아닙니다. 저번에도 이야기드렸던 것처럼 버거로 원조인 미국에 꼭 진출하고 싶었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전 세계적으로 프랜차이즈를 키워 가고 싶기도 하고요.”
빠르면 빠를수록 좋았다.
-좋아요. 그럼. 한번 만날까요? 아버지나 형님은 상대 기업의 물건을 보고 계약하시는 스타일이지만 저는 상대 기업의 대표를 보고 계약하는 스타일이거든요.
“아! 저도 그렇습니다. 어차피 사업이라는 것이 아이템이 좋아야 하기도 하지만 결국 사람이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하하. 그렇죠! 역시 말이 통하는 분이시군요. 그럼. 제가 비서를 통해서 연락하겠습니다. 편한 시간에 편한 곳에서 한번 뵙도록 하죠.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길드장님.”
그렇게 전화를 마친 동진은 주먹을 꽉 쥐고는 큰 소리로 ‘만세!’를 외쳤다.
안 그래도 ‘그린 캔디’를 만드는 쪽에서도 신수 사냥이 막혀 고생하는 중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일이 더 꼬이면 괜히 자신에게 불똥이 튈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럴 때 치고 나가면 나의 성과를 더욱 높이 쳐주겠지.’
이제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
길어야 일 년, 더 빨라진다면 반년.
악마군단이 쳐들어오기 전에 확실히 자리를 잡으려면 인상적인 모습을 더 많이 보여야 했다.
용사를 잡기 위해 덤벼들었던 악마계약자들이 번번이 실패한 것을 똑똑히 지켜봤던 동진이었다.
이동식 던전으로 마수를 소환하려 한 다크엘프. 각성자를 변화시키는 레드 캔디를 만든 빌런 조직. 신화 연구소장을 최면을 걸어 이용한 엘프까지.
힘깨나 쓴다는 녀석들이었고 제법 일도 크게 키우는 것에 성공했지만 결국엔 다현에게 모두 정리가 되고 말았다.
“멍청해서 그래. 멍청해서…. 아무리 헌터와 빌런이 싸우는 세상이라고 하지만 검과 마법이 판치는 판타지랑은 구분해야지. 무조건 힘만 키워서 싸우려고 하니까 이기질 못하는 거 아니야.”
동진은 자신이 세운 계획에 완성된 그린 캔디만 있으면 완벽하게 ‘다현’을 죽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아니 그린 캔디 제조에 실패해도 상관없어!’
어쩌면 순진해 보이는 성원을 비롯해서, 그 옆에 의형제를 맺었다는 경호라는 인물까지 마혼을 제대로 심어 놓는다면 그린 캔디가 없어도 다현을 처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큭큭큭큭큭.
생각만 해도 절로 웃음이 나왔다.
“단독으로 용사를 죽인다면….”
그 어떤 악마계약자도 성공하지 못한 일이었다.
“엄청난 힘과 권력을 얻을 수 있을 것이야. 어쩌면 마계 식민지의 총통 자리를 줄지도 모르겠군.”
동진은 자신이 지배하는 지구를 상상하며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
사신과 세계수가 공생하며 엄청난 성장을 이룬 지 보름이 지났다.
보름. 15일이라는 시간은 사실 대공사를 하기엔 너무나 짧은 시간이었다.
그것이 대격변 전이라면 말이다.
대격변 이후 마도공학이라는 새로운 기술이 생기면서 세상은 엄청난 발전을 했다.
‘마석’의 존재가 새로운 에너지원을 만들었고 마수의 부산물과 던전에서 나온 아티팩트는 기술의 성장을 엄청나게 빠르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15일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검은 망치 부족원들과 신화건설 인부들이 함께 작업하여 행운공원을 완전히 환골탈태시켰다.
신화 동물원.
신수를 지키고 세계수를 보호하기 위해 행운공원 자리에 새롭게 지은 동물원이었다.
커다란 건물이나 대단한 구조물은 없었지만 깔끔하게 잘 지어져 있었다.
물론 드워프들이 신화건설 인부들 모르게 비밀 공간들을 여럿 만들어서 신수들이 편히 쉴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며칠 뒤에 날짜를 잡아서 개장식과 함께 대중에게 공개하기로 결정했다.
저녁 11시.
지숙은 이미 잠이 든 늦은 밤이었다.
경호는 돈가스에 맥주 한잔하며 뉴스를 보고 있었다.
“이거 점점 사라지지 않는 던전이 많아지네. 어쩌면 반년, 아니 반년도 안 돼서 ‘웨이브’가 시작될지도 모르겠는데.”
사라지지 않는 던전에 대한 뉴스가 점점 늘고 있는 추세였다.
아직까지 걱정할 정도로 빠르게 늘고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마음 놓고 있을 정도로 여유가 있는 수준은 아니었다.
경호가 한숨을 쉬며 다시 맥주를 입으로 가져가는 그때.
-경호 님! 저 세계수에 잠시 다녀올게요. 아니 같이 가요.
“어? 왜?”
-세계수가 성장하면서 저도 더 빠르게 성장할 방법을 찾은 거 같아요.
흰둥이의 레벨이 높아졌다고 하지만 레벨 6은 결코 높은 수준이 아니었다.
특히나 악마군단이 쳐들어오면 수호신과 세계수의 역할이 크기 때문에 정령계의 미르 수준까지는 아니어도 최소 8까지 레벨을 높이는 것이 좋았다.
하지만 최근 악마계약자의 활동이 확 줄어들고 헌터들의 활동이 많아지면서 경호가 나서서 퀘스트를 수행하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흰둥이가 가끔 나가 동네 한 바퀴 돌면서 퀘스트를 하긴 하지만 크게 카르마를 쌓진 못했다.
“그래? 같이 가지. 뭐.”
경호가 흰둥이와 함께 식당 밖으로 나와 뒤쪽으로 돌아가자 바로 신화동물원 입구가 보였다.
무료로 관람하는 동물원이었지만 그 크기가 엄청났다.
개장까지 며칠 남았지만 깔끔하게 정리가 되어 있었다.
행운공원과 달리 시설물이 있었기에 입구를 지키는 경비원이 있었다.
경호가 흰둥이를 앉고 입구를 향해 걸어가자 경비원이 손을 저으며 나왔다.
“아직 개장 전이라 입장하…. 아. 경호 사장님이셨군요. 안녕하세요. 흰둥이랑 산책하러 오셨나 봐요.”
경비원은 신화길드 소속으로 경호를 알아보고 인사를 했다.
“네. 동물원 한 바퀴 돌고 갈게요.”
실질적인 소유주인 성원의 지시로 경호는 언제든지 동물원에 들어갈 수 있었다.
“네. 그럼. 제가 가로등 켜 놓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수고하세요.”
경호가 동물원 안으로 들어가자 가로등이 켜지며 환해졌다.
동물 우리와 축사들이 길을 따라 둥글게 배치되어 있었다.
그리고 동물원 중앙에는 세계수가 조명을 받으며 멋들어지게 서 있었다.
“오. 세계수 조명발 장난 아닌데? 그런데 흰둥아. 그래서 빠르게 성장할 방법이 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