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화
“요즘 들어 회색지대에 부쩍 던전이 많이 생기네.”
다현이 던전 게이트 앞에 자신의 애마인 ‘람보’를 세우고는 내리며 말했다.
회색지대.
위험한 마수는 많지 않지만 던전이나 균열 발생 빈도가 높아 사람이 살기는 어려운 곳이었다.
“그러고 보니 S급 던전 솔플은 처음이네. 뭐. 상성도 나쁘지 않고 특별한 이상이 있는 것 같지 않으니까. 수련한다 생각하고 공략하면 되겠지.”
가볍게 이야기했지만 S급 던전은 보스로 상급 재난종 마수가 나오는 곳으로 아무리 다현이 상급의 S급 헌터라고 할지라도 혼자 공략할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심지어 재수가 없으면 멸망종 마수가 나오는 경우도 있었다.
사실 예전 같으면 아무리 대한민국 최고의 헌터라 불리는 다현이라도 절대 시도조차 하지 않았을 일이었다.
하지만 경호와의 대련을 통해 그전과는 또 달라진 다현이었기에 자신이 있었다.
“요즘 던전 공략할 헌터가 모자를 지경이기도 하고.”
도심에서 거리가 멀리 떨어진 흑색지대의 경우는 던전이 발생하면 다량의 미사일을 쏴 게이트 자체를 파괴하거나 일부러 파열을 일으켜 쏟아져 나오는 마수를 군부대를 동원해서 격멸하는 방법을 쓸 때가 많았다.
하지만 백색지대나 회색지대는 그렇게 무식하게 물량을 쏟아붓는 방법을 사용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헌터의 수준도 빠르게 올라가면서 던전이 모자랄 지경이었었는데 최근 양상이 달라졌다.
하루가 멀다고 상급 던전이 엄청나게 생겨나고 있었다.
“아주 마기를 줄줄 뿌려대는구나. 결국 이러다 악마놈들이 넘어오는 것도 빨라지겠네.”
다현도 경호를 통해 던전과 균열이 마수를 보내 인간을 죽이기 위한 것이 아닌 마수를 제물로 마기를 지구에 뿌리기 위한 장치라는 것을 들었기에 최근 상황이 더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 생긴 던전을 두고만 볼 수는 없었다.
완드를 꺼내든 다현이 미간을 찌푸리며 던전의 차원막을 통과했다.
***
던전 공략의 시작은 던전조사국의 정보를 확인하는 것이었다.
-던전 예상 등급 : S급
-출현 예상 마수 : 천둥곰
별거 없는 간단한 정보였지만 던전 공략에서 가장 중요한 정보였다.
상성이 맞지 않는 마수가 던전에 출현하면 아무리 상급 헌터라도 위험할 수 있었다.
“다행히 정보가 틀리지 않았네.”
다현은 차원문이 사라진 던전 안쪽에서 거대한 곰이 다가오는 것을 보며 중얼거렸다.
천둥곰.
콜라를 좋아할 듯한 새하얀 털빛을 가진 거대한 곰으로 강력한 전기를 쏟아 내는 하급 재난종 마수였다.
“자아. 그럼. 달려 볼까!”
마력검기도 튕겨 내는 두꺼운 가죽과 강철도 찢어발기는 괴력을 가진 녀석이라 S급 헌터들도 상대하길 꺼려 하는 마수였다.
하지만 다현의 얼굴에는 묘한 기대감이 걸려 있었다.
경호와 일주일 동안 계속 연습한 새로운 기술을 실전에서 처음 쓰는 날이었다.
크와아아아아아아아!
천둥곰이 던전에 침입한 다현을 감지하고는 크게 표호하며 달려오기 시작했다.
다현이 쥐고 있는 완드 끝에서 주먹 크기의 ‘백염’이 피어올랐다.
예전 같으면 이만한 크기의 백염을 피어올리는 데만 1분 이상 집중해야 했는데 이제는 완드를 치켜듦과 거의 동시에 불꽃이 타올랐다.
휘우우우우우우웅.
다현이 마력을 더욱 끌어올리자 날카로운 바람 소리와 함께 소용돌이치듯 회전하며 새하얀 불꽃이 뾰족한 가시처럼 변했다.
쇄에에에에에엑!
다현이 완드로 달려오는 천둥곰을 가리키자 백염의 가시가 엄청난 속도로 날아갔다.
퍼억!
드릴처럼 빠르게 회전하며 날아간 백염의 가시는 마력검기도 튕겨 내는 단단한 천둥곰의 가죽을 뚫고 어깨 부위에 깊숙하게 박혔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앙!
그리고 폭발했다.
오른쪽 어깨가 완전히 뜯겨 나가 달려오던 천둥곰은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이미 절명한 천둥곰은 폭발의 충격으로 고개는 반대로 돌아가 있었다.
“성공이다.”
다현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사실 지금처럼 변화를 주지 않더라도 백염의 위력은 강했다.
제대로만 먹히면 재난종을 넘어 멸망종 마수를 죽일 수 있는 엄청난 위력을 가진 기술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백염을 마수에게 제대로 먹이기 쉽지 않다는 게 문제였다.
그런 면에서 백염은 실전에서 사용하기 좋은 기술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다연의 백염이 제 역할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경호나 다른 동료들의 도움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단점이 이번 경호와의 수련 중에 확실하게 드러나게 됐다.
경호를 위협할 만한 공격 수단은 백염뿐이었는데….
경호는 다현이 날려 보내는 백염을 모두 흘려 내거나 튕겨 냈다.
백염의 열기와 폭발력은 가공할 수준이었지만 파고드는 힘이 약했기에 경호에게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때부터 다현은 자신의 최고 기술인 ‘백염’을 변화시키기 시작했다.
그리고 일주일간의 결과물이 바로 이것이었다.
백염추(白炎錐).
‘새하얀 불꽃 송곳’이라는 뜻으로 다현이 직접 이름 붙인 기술이었다.
회전력이나 모양을 유지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다현에게 불가능할 정도로 어려운 컨트롤은 아니었다.
후우우우우우웅!
다현은 조금 전보다 더 강하게 마력을 주입했다.
그러자 완드에서 백염이 튀어나오더니 ‘백염추’ 모습으로 변했다.
그렇게 다현의 주변으로 다섯 개의 백염추가 그녈 호위하듯 둘러쌌다.
“후우. 지금으로는 다섯 개가 한계네.”
조금 숨을 한번 크게 쉰 다현이 그대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이 벼락 맞은 곰탱이들. 다 죽었어!”
***
쿠아아아아아아아악!
던전의 보스였던 우두머리 천둥곰이 단말마를 지르며 가슴에 커다란 구멍이 난 채 쓰러졌다.
“이놈까지 21마리. 후우. 30분 만에 클리어는 좀 힘드네.”
남들이 들으면 사기 치지 말라고 화낼 정도의 공략 기록이었다.
아니 애초에 1인이 S급 던전을 공략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었다.
그런 면에서 다현은 천둥곰의 부속물 중에 가장 값이 나가는 쓸개와 마석을 수거하면서 경호를 떠올렸다.
‘으…. 미워 죽겠는데 알면 알수록 미워할 수 없는 녀석!’
다현은 사실 경호만 보면 화가 났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지만 어릴 적부터 다현은 친구가 없었다.
부모가 없다는 이유로 시작된 따돌림 때문이었다.
어리지만 알 거 다 아는 아이들이었고 부모들도 나서서 다현이를 멀리하라고 가르쳤다.
처음에는 그런 상황에 마음에 상처를 많이 받았지만, 다현 역시도 그런 그들에게 괜히 애쓰지 않고 마음의 문을 닫아 버렸다.
자존심 강한 다현이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렇게 다현은 누가 괜한 시비만 걸지 않는다면 그냥 있는 듯 없는 듯 지냈다.
물론 예쁘장한 외모에 도도해 보이는 행동으로 따돌리는 와중에도 꼭 시비를 거는 녀석들이 있었다.
다현은 따돌림은 당할지언정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 싸웠다.
남학생들과 힘에서 밀리면 물고 뜯는 한이 있어도 지지 않으려 애를 썼다.
그러다 중학교에서 크게 싸우고 전학 간 곳에서 경호를 만났다.
마치 자신의 초등학교 시절을 보는 것같이 답답한 녀석이었다.
괜히 마음이 쓰였다. 그래서 도와줬다.
그런데 이 녀석은 부모가 없는 자신을 이상하게 보지 않았다.
낯선 경험이었다.
지금까지 다른 이들이 자신을 보는 시선에는 언제나 측은함이나 불편함이 같은 감정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경호만큼은 진심으로 자신을 친구로 대하고 있었다.
그리고 좀 우습지만 경호를 도와주고 함께 먹은 떡볶이는 정말 맛있었다.
이 떡볶이 때문이라도 이 녀석과 친하게 지내야 할 것 같을 정도로.
그렇게 절대 열리지 않을 거 같았던 자신의 마음이 다시 열렸다.
그렇게 자상한 오빠 같다가, 또 챙겨 줘야 할 것 같은 동생 같기도 하다, 어떨 땐 묘한 감정이 느껴지기도 한 그 녀석이 갑자기 사라졌다.
처음에는 걱정하는 마음이었다.
몇 년이 지나자 미워지기 시작했다.
그러다 엄마 같은 지숙이 아프다는 이야기에 원망하기 시작했다.
10년 만에 녀석이 돌아왔다.
정말 반가우면서도 화가 났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빨리 왔으면 지숙이 괜찮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나중에 경호가 정령계로 소환되어 마계 침략을 막고 돌아왔다는 이야기에 그동안 품고 있던 원망도 많이 씻겨 내려갔지만 지금도 보면 불쑥불쑥 화가 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10년간 악마 놈들이랑 싸웠으면 좀 더 독해져서 왔어야지. 으이구.’
경호가 하는 행동을 보면 다현은 여전히 답답한 구석이 많았다.
애초에 자신이라면 경호처럼 정체를 숨기며 답답하게 뒤에서 힘들게 도와주지 않았을 거였다.
우선 가까운 이들에게 비밀을 지키라고 하고 빠르게 필요한 것들을 나눠서 실력을 키우고 그에 맞춰서 마계의 침략을 막을 전략을 세웠을 텐데 경호는 그런 면에서 너무 답답했다.
하지만 이번에 함께 일주일간 수련하면서 그런 마음도 많이 지울 수 있었다.
일주일이라는 시간 동안 치고받고 싸우면서 수련만 한 것은 아니었다.
지난 10년간 있던 일 중에 아직도 못 한 수많은 이야기가 있었고 그런 이야기를 서로 나누는 시간이 되기도 했다.
그러면서 그렇게 단순한 상황이 아니었다는 걸 다현도 더 많이 알게 됐다.
얼마나 많은지 파악도 되지 않는 악마계약자는 도처에 깔려 있었고 그들이 사고를 칠 때마다 몰래 도우며 수습해야 했다.
자신의 정체가 마계에 알려지면 지구를 지배하기보다 파괴하려 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었다.
그 때문에 경호는 자신의 힘을 마음껏 사용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 이야기를 듣고 다현은 경호의 입장도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됐다.
또 그 밖에도 약해진 흰둥이도 성장시켜야 했고 흩어진 신수들도 찾아야 했으며 사라진 정령들이 살아갈 수 있는 환경도 만들어야 했다.
그리고 세계수를 마계에서 눈치채지 못하게 성장시키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거기다 드워프나 워울프의 능력을 활용해 각성자를 더 강하게 만들기 위한 방안도 마련했고 이제는 마수고기까지 활용해 각성자의 수준을 높이기 위해 노력 중이었다.
답답하게만 봤던 경호가 사실 마계의 침략을 막기 위해 가장 열심히 움직이고 있었다.
“후우. 하여간 미워하려고 해도 미워할 수가 없다니까. 그럼. 이제 대충 다 챙겼으니 나가 볼…. 어?”
이 세상 그 누구보다 던전을 많이 공략해 봤다고 자부하는 다현이었다.
“뭐야. 왜 보스를 잡았는데 던전을 유지하는 마기가 그대로인 거지?”
던전은 마지막 보스를 잡거나 소환 마법진의 핵을 부수면 입구에 차원막이 펼쳐지며 던전을 유지하는 마기가 붕괴돼 사라진다.
이건 특수한 던전이라도 예외가 없는 절대적인 법칙이었다.
그런데 지금 예외가 생겼다.
다현은 한참 동안 던전을 샅샅이 탐색했지만 마수는 없었다.
“이거 갇힌 건 아니겠지?”
다행히 입구로 가니 차원막이 펼쳐져 있어 꼴사납게 공략이 끝나 아무것도 없는 던전에 홀로 갇히는 일은 면할 수 있었다.
그 길로 다현은 람보를 몰아 바로 경호를 찾아온 길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던전 보스를 분명 잡았는데도 던전이 붕괴되지 않고 그대로 있더라니까!”
다현의 말에 성원이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이 있어 서둘러 인터넷을 검색했다.
“누님. 혹시 이런 건가요?”
성원이 다현에게 폰을 들어 보이며 물었다.
-전 세계적으로 늘고 있는 사라지지 않는 던전. 한국에도 나타났다!
다현이 처음이 아닌 모양이었다.
“어. 그러니까 내가 공략한 던전도 사라지지 않더라고.”
경호나 성원은 그동안 눈코 뜰 새 없이 바빴기에 세계적으로 사라지지 않는 던전이 생기고 있는 줄도 모르고 있었다.
물론 경호는 지금 처음 들은 내용이었지만 사라지지 않는 던전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마계 새끼들 완전 미쳤네. 이걸 벌써 한다고?”
경호가 굳어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역시 알고 있네. 뭔데 그래? 심각한 거야?”
“형님. 이 던전이 극지던전보다 더 위험한 겁니까?”
경호의 반응에 다현과 성원이 긴장하며 물었다.
“위험한 거로 따지면 극지던전이 훨씬 위험하지. 사실 저 던전은 그런 종류의 던전이 아니거든.”
“아. 그러면 다행이네요. 이제는 드워프제 아이템이 많이 풀려서 사실 극지던전도 거의 피해 없이 막고 있으니까요.”
“그러게. 그럼. 저 던전은 어떻게 없애는 건데? 보스를 죽여도 안 없어지고 소환던전처럼 던전 핵이 있는 것도 아니던데?”
다현과 성원의 질문에 경호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거 못 없애. 봉인할 수는 있는데. 미르 수준의…. 아니 흰둥이가 훨씬 더 강해져야 봉인할 수 있을 거야.”
“네엣?”
“뭐? 던전을 못 없앤다고?”
상상도 못 한 경호의 답변에 둘 다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 저건 사실 던전이 아니라 문이거든. 마계에서도 이제 슬슬 쏟아붓겠다는 뜻인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