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화
“으. 오늘도 점심 장사 끝!”
유명한 맛집이 되어 점점 바빠지면서 시간이 정말 쏜살같이 지나갔다.
‘아아! 힘숨찐 용사의 한가하고 여유로운 잉여 생활을 꿈꿨는데. 도대체 이게 무슨…. 내 워라벨이….’
지난 일주일이라는 시간은 경호에게 있어 지구로 귀환한 이후 가장 바쁜 한 주였다.
솔딘과 파루스를 도와 세계수를 숨기기 위한 결계 작업도 도와야 했고 다현의 협박성 부탁으로 수련을 가장한 대련도 해야 했다.
심지어 너무 압도적으로 이기면 성질부리면서 삐치기 때문에 더 힘들었다.
거기다 흰둥이의 요청으로 사도급 신수를 찾기 위해 밤마다 지숙의 눈을 피해 식당을 빠져나와 이곳저곳을 돌아다녀야 했다.
예전 같으면 절대 도와주지 않았을 경호였지만 요즘 흰둥이가 지숙의 완치를 위해 애쓰는 모습을 보고 있기에 도와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경호가 바쁘게 움직인 만큼 성과도 나름 있었다.
훨씬 넓어진 동물원 부지에 세계수의 기운을 막아 주는 결계가 완성됐다.
그리고 원래부터 재능충이었던 다현은 몰라보게 강해졌고 그런 그녀가 내리사랑을 실천하며 신화학원의 학생들을 엄청나게 굴리자 그들 역시 빠르게 강해지고 있었다.
그리고 전국 곳곳을 돌아다니며 사도급 신수는 찾지 못했지만 그들의 흔적은 찾을 수 있었다.
-제가 너무 늦었네요.
흔적을 쫓다 보니 경호와 흰둥이는 사도급 신수가 모두 납치됐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러게. 하지만 그놈들도 필요에 의해서 데리고 갔으니 죽이진 않을 거다. 그러니 너무 실망하지 말고.”
도심에서 신수를 납치하는 조직 말고도 더 오래전부터 활동하던 이들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사실 제가 먼저 찾았어야 했는데 그러질 못했습니다. 저보다 더 약해져 있었을 녀석들인데.
도심에서 모습을 변화시켜 숨어 있거나 아니면 울피처럼 마기에 잠식당해 마수들과 경쟁하며 그 강함을 어느 정도 유지한 경우는 사실 소수에 불과했다.
대부분의 신수들은 대격변의 그날, 악마군단과 싸우다 패해 힘을 잃고 인간의 세상 너머에 숨어 힘을 회복하고 있던 중이었다.
“자책하지 말고. 우리가 구해 내면 되잖아.”
-경호 님. 어쨌든 사도 찾는 거 도와주셔서 감사했습니다.
“힘내라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흰둥이는 자신을 따르던 10명의 사도 중 울피를 제외하고는 하나도 발견하지 못한 것에 대한 상실감에 그 후로도 내내 시무룩한 모습이었다.
경호는 구석에 쭈그려 앉아 있는 흰둥이를 보며 전음을 날렸다.
-그 버거퀸 녀석이랑 분명 연관 있을 테니까. 그쪽을 잘 파다 보면 나올 거야. 그러니까 너무 그러지 말고 힘내.
내심 시무룩하게 있는 흰둥이가 신경 쓰이던 경호였다.
-네에.
물론 그런 말 한마디로 크게 위로가 되진 않는다는 걸 경호도 알고 있었다.
그때였다.
“형님! 저 왔습니다!”
텐션이 한껏 올라간 성원이 식당을 찾아왔다.
이제야 좀 쉬나 했던 경호는 둘의 등장에 긴장하며 물었다.
“뭐냐? 그런 밝은 표정으로 오기에는 어중간한 시간인데? 낮술 먹자는 건 아닐 테고.”
경호의 질문에 성원이 손에 들린 종이를 펄럭이며 말했다.
“낮술은 무슨 낮술입니까. 제가 술꾼도 아니고….”
“너 술꾼 맞아. 그런데 낮술 아니고 뭔 일인데?”
“아. 오늘은 이것 때문에 왔습니다.”
성원이 건넨 종이를 받아 본 경호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저번에도 그러더니 이런 건 불법 아니냐? 최소 편법인 듯한데.”
성원이 건넨 종이에는 경연에 대한 내용이 적혀 있었는데 그중에 첫 대결의 주제에 대해서도 적혀있었다.
“다 알려 줄 겁니다. 물론 형님한테 가장 먼저 알린 거긴 하죠.”
“보통 요리경연 프로그램 보면 박스 같은 거에 재료 넣어 놓고 그때 딱 공개해서 막 요리하고 그런 거 아니냐?”
경호가 예전에 봤던 요리 경연 프로그램을 떠 올리며 말하자 성원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그거 다 뻥이라니까요. 그냥 연출이죠. 물론 저희도 그럴 생각이고요.”
“그래? 그나저나 첫 경연은 ‘면’ 요리네? 이건 누가 정하는 거냐?”
“저희 그룹에 프로그램 담당 부서가 생겨서 그쪽에서 관리해요. 왜요? 다른 거로 하라고 할까요?”
“야. 그러면 그건 진짜 불법이잖아. 그런데 면 요리면 면을 주는 건가? 원래 요리 경연 보면 협찬 브랜드 쓰고 이러던데. 그러면서 어색하게 ‘기성품이지만 정말 맛있네요!’ 같은 대사 한 번씩 날려 주고. 아닌가?”
“형님. 저희는 협찬 없이 진행해서 그런 건 상관없어요. 사서 쓰셔도 되고 만드셔도 되고, 잔치국수여도 상관없고 파스타여도 상관없어요. 다만 무슨 면 요리가 됐든 저희가 제공하는 마수고기를 주재료로 사용하라는 거죠.”
옆에 있던 지숙이 호기심 어린 얼굴로 성원의 말을 듣다 말했다.
“그러면 칼국수 할까? 엄마가 면을 밀 테니까 네가 육수를 내는 거로 해서….”
“잠깐, 잠깐, 잠깐.”
지숙의 말을 경호가 중간에 끊었다.
“엄마가 면을 뽑는다고?”
“왜? 칼국수 괜찮을 거 같은데.”
“당연히 괜찮지. 그런데 이번 대회에 나랑 미호가 나갈 건데? 그러니 면을 뽑아도 나나 미호가 뽑아야지.”
“너랑 미호가 나간다고?”
지숙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이번 대회 규정에는 식당 대표와 관계자 1인으로 경연 참가가 제한되어있었다.
대표는 경호였으므로 추가로 지숙이나 미호 둘 중에 규정상 한 명만 참가할 수 있었다.
“아들. 아직 엄마 칼국수 솜씨 안 죽었어.”
“엄마 실력이야. 내가 잘 알지. 당장 돈가스 때려 치고 칼국수집 해도 맛집으로 대박 날 건데. 뭐.”
“아니 그런데. 왜 엄마랑 안 나가고? 괜히 미호 힘들게.”
“원래 회장님은 직접 뛰는 게 아니라 지시, 감독을 하는 자리잖아요.”
옆에 있던 미호가 지숙의 물음에 생글거리며 답을 했다.
“맞아. 그리고 이번 대회가 신화 소속인 미호 경력에도 도움이 될 테니까. 우리 착한 엄마가 좀 봐줘요. 우리 엄마의 미모를 방송에 뽐내지 못 하는 게 좀 아쉽지만….”
경호가 미호의 경력 문제를 내밀며 농담조로 이야기하자 지숙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알았다. 엄마는 아들이랑 한다고 나름 좋아했는데. 네 말대로 미호가 나가는 게 더 낫겠네.”
“어머님. 감사합니다.”
미호가 환하게 웃으며 팔짝팔짝 뛰었다.
사실 미호가 나가기로 한 것은 신화 소속이나 대회 경력과 무관하게 경호가 부탁한 것이었다.
-엄마가 몸이 좀 약한 편이라 방송 출연을 안 하면 좋겠어.
미호도 지숙과 함께 있으면서 피곤해하는 모습들을 때때로 봤기에 경호가 하는 말의 의미를 알아들었다.
-거기다 방송 출연이라는 것이 심적 부담도 큰일이잖아. 스트레스도 심할 테고. 미호한테도 부담이 되겠지만 엄마 대신 나와 함께 참가해 줬으면 좋겠어.
경호의 갑작스러운 출연 제안은 미호도 생각 못 했던 일이라 조금은 놀란 얼굴이었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오늘 미호의 도움으로 어색한 분위기를 연출하지 않고 지숙의 출연을 막을 수 있었다.
“대신 엄마가 미호에게 칼국수면 만드는 것 좀 가르쳐 줘요.”
“그래. 알았다.”
아쉬워하던 지숙도 이제는 딸처럼 살갑게 지내는 미호에게 면을 뽑는 것을 가르쳐 준다는 사실에 다시 기분이 괜찮아진 듯 보였다.
“엄마. 그럼. 둘이 좀 하고 있어 봐. 나는 성원이와 뒤에 가서 육수 낼 것 좀 구해올게.”
마수고기를 처리하는 공장이 길드 하우스 뒤편에 세워져 있었기에 재료를 구하려면 그냥 가서 받아오면 됐다.
물론 그냥 아공간 안에 보관 중인 재료를 쓰는 것이 더 좋겠지만, 지숙과 미호 앞에서 그걸 꺼내 쓸 수는 없었다.
“그래라. 그런데 어떤 식으로 끓일 건데?”
칼국수 하면 사실 바지락칼국수였지만 멸치, 다시마 육수부터 구하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었고 주재료가 마수고기여야 한다는 규정도 있었다.
“사실 바지락이랑 오징어 같은 거 듬뿍 넣은 해물칼국수가 정석이긴 하지만 불가능하니…. 닭칼국수 스타일로 끓이려고.”
“그래. 그것도 맛있겠네.”
“그럼. 갔다 올게.”
***
“오. 공장이 엄청 커졌네?”
공장 앞에 선 경호가 전보다 훨씬 커진 모습에 눈을 크게 떴다.
“네. 형님. 그때보다 배는 커졌습니다.”
사실 공장을 찾은 것은 천종원의 골목식당 촬영 때문에 두어 번 온 것을 빼면 처음이었다.
“이게 ‘천종원의 골목식당’이 뜨면서 주문량이 꽤 늘고 있거든요. 거기다 아직까진 저희가 독점이니까요.”
운애가 세계수 잎사귀로 만든 정화수를 널리 알리기는 이른 시기여서 마수고기는 이곳에서만 만들어 독점 판매를 하는 상황이었다.
그렇기에 아직 국내, 그것도 많지 않은 주문량이었지만 공장은 그전보다 배는 커진 상태였다.
거기다 증축까지 진행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공원도 그렇고 공장에, 학교, 공방까지 이거 계속 늘려 나가면 주변 회색지대를 다 사도 모자라겠는데.”
경호가 혀를 내두르며 말하자.
“안 그래도 그룹 차원에서 돈은 거의 무한대로 지원해 주는 상황이라 계속 넓혀가고 있긴 한데. 진짜 이러다가 땅이 모자랄 지경이에요.”
“헐. 돈이 모자라서 땅을 못 산다는 이야기는 들어봤어도 땅이 모자라서 못 산다니…. 너 좀 낯설고 재수 없다.”
성원의 앓는 소리에 경호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나저나 칼날타조 있지?”
“네. 안 그래도 칼날타조 물량을 늘리는 중이에요. 이게 순살치킨으로 썰어서 튀기면 티도 않나고 맛도 괜찮아서 판매가 조금씩 늘고 있는 추세거든요.”
사실 칼날타조보다는 아무래도 드레이크 랩터가 맛도 더 진하고 영양도 풍부했지만 괜히 문제가 될 수도 있었다.
“그럼. 칼날타조 잡뼈랑 다릿살 좀 줘.”
“네. 그럼. 들어가시죠.”
공장 안은 더 엄청났다.
처음 방문했을 때 만해도 작업 중인 드워프 숫자도 얼마 되지 않았는데 지금은 아주 바글바글했다.
“비밀유지가 필요한 공정은 드워프가 맡아서 하고요. 마기와 독기 제거가 끝난 고기 손질은 이제 사람들을 구해서 하고 있어요.”
드워프가 많이 늘었다고 하지만 그래봐야 한계가 있었다.
그렇기에 비밀유지가 필요한 마기와 독기를 제거하는 공정에만 투입되고 있었다.
경호는 공장을 성원과 함께 둘러보고는 질 좋은 칼날타조 고기와 뼈를 양손 가득 얻을 수 있었다.
“야. 넌 또 왜 따라와?”
“칼국수 먹으러 가야죠!”
“안 바쁘냐?”
“형님. 봉투 주세요. 제가 들어 드릴게요.”
“됐네.”
그렇게 투닥거리며 경호와 성원이 다시 행운식당으로 돌아가고 있을 때였다.
우우우우우우우웅. 끼이이이익!
새빨간 람보르기니까 공장 안으로 들어와 경호와 성원 앞에 섰다.
짙은 선팅 때문에 운전자가 보이진 않았지만 둘은 충분히 누가 차에서 내릴지 예상할 수 있었다.
“뭐냐?”
“누님?”
시저 도어가 위로 올라가며 다현이 밖으로 나왔다.
“경호! 나 완전 이상한 일 겪었어!”
아니! 또 뭐가?
경호는 속으로 ‘나도 지금 완전 이상한 일 겪는 중인데!’를 외치고 있었다.
“사람은 보통 만나면 인사라는 걸 하는 데 말이야.”
“지금 인사가 중요해!”
“아니 중요하진 않지만 이게 이렇게 화낼 일은 아니잖아. 후우. 그래. 뭐가 이상한 일인데?”
경호는 치솟는 짜증을 한숨으로 살짝 가라앉히고는 친절하게 이유를 물었다.
“아니. 내가 오늘 던전에서 보스를 잡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