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화
까맣게 잊고 있었다.
분명 미역과 전복을 구하기 위해서 떠난 길이었는데….
경호의 머릿속에 오늘의 메뉴 레시피가 빠르게 지나갔다.
“근데 뭘 도와달라는 거야?”
그때 운애가 경호에게 질문을 던졌다.
“잠깐만. 우선 저것부터 챙기고.”
경호가 대답을 미루고 세계수 뒤편으로 돌아가 투명한 관이 세계수 나무 기둥과 연결되어 있는 커다란 물통을 꺼내 들었다.
경호를 따라온 흰둥이와 운애가 놀란 눈으로 그것을 쳐다봤다.
-아, 아니! 경호 님. 이게 도대체…. 세계수에 무슨 짓을 하신 겁니까?
“이거 세계수에 문제가 되는 건 아니야. 적당히 헌혈하면 건강에 도움이 되듯이 이 시기에 이 정도 수액 빼는 것은 문제가 없거든.”
“그런데 이게 맛있어? 나무 수액이…?”
나무 수액을 먹을 수 있다는 사실 자체를 몰랐던 운애가 미심쩍어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백문이 불여일견.
경호가 염력으로 세계수의 수액을 조금 떠내 운애가 살짝 벌린 입에 넣어 줬다.
꿀꺽.
“아!”
운애의 입에서 탄성이 튀어나왔다.
시원하다. 상쾌하다. 개운하다.
다 틀리지 않은 듯하면서도 정확하게 표현하기 어려운 맛이었다.
특히나 맛 표현에 아직 서툰 운애로서는 정말 어려운, 복잡미묘한 맛이었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했다.
“우와. 이거 맛있다! 나무에서 나오는 수액이 이렇게 맛있다니.”
“보통 나무가 아니니까. 사실 고로쇠 물처럼 단맛이 강하면 요리에 쓰기 어렵지만 그렇지도 않아서 육수 대신 쓰기에도 좋거든. 물론 건강에도 좋고.”
“그래? 아까도 물었지만 뭐야? 요리 도와 달라는 거였어?”
“아. 이야기 안 했지. 오늘 엄마 생신이라 생일상 차리려고.”
“생일이었구나. 인간에게는 중요한 날이니까. 그런데 내가 도와줄 게 있을까? 난 요리해 본 적이 없는데?”
염력을 사용해서 후다닥 만들 수도 있지만 그러면 확실히 맛이 떨어질 확률이 높았다.
“지금은 고양이 손이라도 빌려야 할 판이거든. 빨리 가자.”
***
“우선 기본으로 전복밥과 전복미역국을 할 거고 전복잡채와 전복버터구이, 전복회에 전복삼계탕을 할 거야.”
오늘의 주제는 ‘전복파티’였다.
전복에서 시작해서 전복으로 끝나는
꿀꺽.
흰둥이와 운애는 경호의 설명을 듣는 것만으로도 침을 꿀떡 삼키며 헤벌쭉거리고 있었다.
“전복은 먹어 본 적도 없으면서 뭘 그리 침을 흘리고 있어.”
“전복 맛은 모르지만, 그냥 듣기만 해도 맛있어 보이는데?”
-경호 님. 버터구이는 무조건 많이 해 주세요! 꼭이요!
요즘 버터요리에 푹 빠져있는 흰둥이가 자신의 의견을 강력하게 피력했다.
“그래. 미역국부터 끓여야겠다.”
우선 오래 끓일수록 맛있는 미역국부터 할 차례였다.
“뭘, 도와주면 되지?”
-경호 님. 뭘 도와드릴까요?
“우선 대기.”
경호가 커다란 솥을 꺼냈다.
그리고 아공간에서 미역과 전복을 꺼내 커다란 대야에 우르르 쏟아 냈다.
“와. 진짜 대박은 대박이다.”
경호 제대로 본 것은 지금이 처음이었다.
역시 놀랄 정도로 질 좋은 전복이었다.
크기는 다 손바닥보다 컸고 마구 꿈틀거리는 것이 아주 싱싱해 보였다.
현무의 몸에서 떨어져 나온 돌미역도 색이 진하고 선명한 것이 역시나 싱싱해 보였다.
“자아. 우선 전복을 까 볼까? 내가 하나 시범을 보여 줄 테니 둘이서 이거 다 깔 수 있지?”
“뭐?”
-네엣?
못해도 전복이 100개는 되어 보였다.
현재의 이 정도 크기의 질 좋은 자연산 전복은 정말 억 소리 나는 돈을 준다 해도 구하기 어려운 양이었다.
아니 대격변 전에도 이정도 양의 자연산 전복은 돈을 준다고 쉽게 구할 수 있는 양이 아니었다.
“자아. 봐 봐.”
경호는 큼지막한 전복을 하나 들고는 다른 손으로 칫솔은 들었다.
“여기 거뭇거뭇한 거 보이지. 이것들을 닦는 거야.”
“이거 원래 검은색 아니야?”
“아니 원래는 이런 색이야.”
팍팍팍팍팍.
경호가 흐르는 물에 전복을 가져가서 빠르게 칫솔질을 했다.
그러자 거뭇했던 전복이 점점 뽀얀 자태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우와. 이게 이렇게까지 하얗게 되는 거였어.”
“자아. 1단계 끝.”
경호가 칫솔을 내려놓고 숟가락을 꺼내 들었다.
“이제 잘 봐. 전복을 보면 한쪽은 둥글고 한쪽은 약간 뾰족하지?”
경호의 말처럼 타원형의 전복은 좌우가 정확히 대칭적으로 생긴 모습은 아니었다.
한쪽은 완만하게 둥그런 모습이었고 반대쪽은 조금 더 뾰족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여기 둥근 쪽은 붙어 있는 쪽이라 숟가락이 들어가기도 어렵고 잘못하면 내장이 터지니까. 여기 뾰족한 곳으로 숟가락을 뒤집어서 넣어 봐. 이렇게.”
경호의 설명처럼 숟가락이 쉽게 들어가 전복이 껍질에서 분리됐다.
“그리고 내장을 빼고 이빨을 빼면 손질 끝!”
경호는 내장을 빼고 뒤집어 작은 이빨과 식도를 분리한 전복을 흰둥이와 운애에게 보여 주며 말했다.
“간단하지?”
“….”
-….
“뭐야? 왜 대답이 없어?”
“경호. 한 번만 더 보여 줘.”
-경호 님. 마력 쓰신 거 아니죠? 아니 그게 그렇게 쉽게 되는 거였나요?
결국 경호는 3번이나 더 시범을 보인 다음에야 전복 손질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흰둥아. 거기 전복 껍데기 좀 가져와 봐.”
-어. 이거 버리는 거 아니에요?
“아니야. 빨리 가져와.”
경호는 흰둥이가 가져온 껍질을 깨끗이 씻고는 커다란 곰솥에 껍질을 넣고는 세계수 수액을 가득 채워 불을 올렸다.
-그 껍질을 삶아요?
“이게 육수로 쓰면 좋거든. 자아. 그럼. 이제 미역국을 끓여 볼까?”
생일상의 주인공이자 가장 중요한 요리가 바로 미역국이었다.
그리고 미역국은 한국 음식 중에 가장 만들기 쉬우면서도 가장 맛을 내기 어려운 음식이기도 했다.
물에 불린 미역이나 생미역을 고기나 해물과 함께 참기름에 볶다가 물을 넣고 끓이기만 하면 되는 세상 간단한 요리였다.
하지만 간단한 요리일수록 미세한 차이가 맛을 좌우하는 법.
그래서 적당히 맛있는 미역국은 끓이기 쉬웠지만 그만큼 맛있는 미역국은 끓이기 어려운 법이었다.
우선 참기름부터 문제였다.
“역시나 중국산 참기름이네.”
물론 중국산 참기름도 나쁘지 않은 제품이었다.
베트남이나 미얀마에서 수입해 오는 참깨로 만든 참기름은 향이나 맛이 더 떨어졌다.
“나쁘진 않지만 국산 참기름에 비하면 한참 떨어지지.”
하지만 국산 참기름에 비하면 중국산 참기름도 많이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었다.
경호가 참깨가 담긴 통을 열어 냄새를 맡았다.
“확실히 고소함이 다르네.”
냄새부터 다른 것이 국산 참깨가 확실했다.
경호는 참깨를 한 움큼 잡아 그릇을 바치고는 꾹 움켜잡았다.
꾸드드드득.
저온압착법으로 기름을 만들면 채산성이 떨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보통 고온으로 볶아서 기름을 짜지만 사실 순수하게 맛과 향을 위해서는 저온압착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지금 경호가 하는 방법이 바로 수제 저온압착법이었다.
또옥. 또옥.
참깨가 경호의 손을 통해 기름으로 변해 그릇에 떨어져 내렸다.
그렇게 참깨 한 통을 모두 짜내 한 그릇의 참기름을 만들었다.
경호의 엄청난 악력은 기름을 짜는 압착 기계보다 훨씬 수율이 좋았다.
-대박. 엄청 고소한 향이네요.
“그러게. 그냥 참기름에 간장 넣고 비벼 먹어도 맛있겠네.”
경호가 짜낸 참기름의 향기에 전복 지옥을 맛보던 흰둥이와 운애가 반응했다.
‘역시 향기부터 완전 다르네.’
이제 진짜 미역국을 끓일 차례였다.
경호가 자신이 직접 짠 참기름을 냄비에 두르고는 물로 깨끗이 씻은 돌미역과 전복을 큼직큼직하게 썰어 넣었다.
냄비에 미역과 전복을 넣자마자 고소한 향기가 주방 전체를 가득 채웠다.
치익. 치익. 치익.
“운애!”
“아직 전복 멀었는데.”
“흰둥이한테 다 맡기고 와.”
운애가 환한 표정으로 전복 지옥에서 벗어나 경호에 다가왔다.
“응. 왜? 맛볼까?”
이제 시작한 물도 붓지 않은 미역국을 보며 입맛을 다시는 운애의 모습에 경호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맛은 무슨. 이 국자 잡아 봐.”
경호가 기다란 실리콘 국자를 쥐여 주자 운애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길고 긴 운애의 삶에서 최초로 국자를 잡는 역사적 순간이었다.
“어엇!”
“이것 봐 봐.”
경호가 운애의 손을 같이 잡아서는 천천히 미역과 전복을 저으며 볶았다.
“이렇게 하면 돼. 어렵지 않지? 긴장하지 말고.”
낯선 경험에 살짝 긴장하던 운애가 경호의 가르침에 고개를 끄덕였다.
“응. 해 볼게.”
“오케이. 이거 미역 색이 녹색에서 진한 검은 빛이 돌 때까지 오래 볶으면 더 맛있으니까 부탁해.”
“알았어.”
경호는 바로 다음 요리를 준비했다.
전복밥.
이것 역시 어려운 요리는 아니었지만 잘못하면 비릴 수 있는 까다로운 요리였다.
“흰둥아. 내장 따로 모아 놓은 거 가져와 봐.”
-버리는 거 아니에요?
“전복은 이빨 빼고 버릴 게 하나도 없어. 아니 그 이빨도 먹는 사람도 있을 정도니까.”
경호는 흰둥이가 가져온 내장을 참기름을 두른 냄비에 넣어 볶다가 물에 씻어 놓은 쌀을 함께 넣어 볶았다.
그렇게 적당히 볶다가 끓고 있는 전복껍질 육수를 넣었다.
그리고는 냄비 뚜껑을 덮었다.
냄비밥.
불 조절을 까딱 잘못하면 타기 십상이지만 제대로 밥을 짓기만 하면 밥맛이 아주 좋았다.
“흰둥아. 잘 돼가?”
-이제 한 30개만 더 까면 끝납니다.
이제 흰둥이도 거의 전복 까기의 달인, 아니 달견이 되어 가고 있었다.
“그럼. 까는 도중에 냄비에서 고소한 냄새가 구수하게 변하기 시작하면 이야기 좀 해 줘.”
-네엣?
“너 저번에 인간보다 후각이 수만 배 좋다며. 알았지?”
-네에. 그러죠.
수만 배 좋은 후각을 고작 냄비밥 짓는 것에 쓸 줄은 몰랐던 흰둥이가 입을 삐죽 내밀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 닭을 삶자.”
식당이라 화구가 많아서 다행이었다.
미역국에 육수, 냄비밥까지 지금도 3개의 화구가 동시에 돌아가는 중이었는데 아직도 할 요리가 태산이었다.
경호는 냉장고에서 닭을 꺼내 지방을 잘라 내고는 그대로 냄비에 담아 육수를 부어 끓였다.
전복 껍질과 세계수 수액이 들어간 육수는 충분했기에 마늘, 대추, 인삼 같은 것은 따로 넣지 않았다.
30초 만에 경호는 다음 요리로 넘어갔다.
6시 10분.
다현에게 이야기한 7시까지는 1시간도 남지 않았다.
“제기랄. 아직 잡채 시작도 안 했는데. 아. 미역국.”
경호가 운애가 아직도 저으며 볶고 있는 미역의 상태를 살폈다.
짙은 검은색으로 변한 미역이 한눈에 봐도 제대로 볶아졌음을 알 수 있었다.
“잘했어. 고마워.”
“다행이네. 나도 재미있었어.”
뿌듯한 표정을 짓는 운애를 보며 경호가 엄지를 치켜세우고는 육수를 부어 넣었다.
이제 정말 시간이 없었다.
경호도 정말 빠르게 움직였다.
지금까지 요리사처럼 움직였다면 이번에는 각성자, 용사의 움직임이었다.
타다다다다다닥!
전복, 당근, 양파, 버섯, 부추를 도마에 올리고 눈에 보이지 않는 속도로 재료를 손질했다.
당면 역시 물에 불리지 않고 그대로 끓은 육수에 넣어서 삶았다.
그렇게 당면을 끓이는 동안 썰어 놓은 재료를 하나하나 소금을 조금 쳐서 참기름으로 볶아 냈다.
“좋아!”
생각보다 더 색감이 살아 있게 잘 나왔다.
당면을 건져서 참기름과 간장을 뿌려서 무쳐 놓고는 버터를 꺼냈다.
그때.
-경호 님. 고소한 냄새 속에 구수함이 섞여서 나고 있습니다.
“오케이.”
경호가 냄비 가까이 코를 가져가 냄새를 맡았다.
흰둥이의 말처럼 구수한 냄새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대로 불을 끄고 뜸을 들였다.
그리고 프라이팬에 벌집 모양으로 칼집을 넣은 전복을 통으로 넣고는 버터를 듬뿍 넣었다.
치이이이이이익.
버터의 고소한 향과 참기름의 향을 누르고 주방을 가득 채웠다.
참기름이 입맛을 돌게 하는 가벼운 고소함이라면 버터의 고소함은 침이 고이게 하는 묵직한 고소함이었다.
-경호 님! 드디어 다 깠습니다!
“그래. 수고했어. 쉬어.”
사실 흰둥이가 발가락 사이로 숟가락을 끼워 전복을 까는 것 자체가 묘기에 가까운 일이었다.
-저어. 저 버터구이 하나만 먹어 보면 안 될까요?
이제 거의 다 익은 전복버터구이였기에 경호는 하나를 집어 건넸다.
쩝. 오독. 쩝쩝. 오독오독.
흰둥이는 자동적으로 눈을 감으며 처음 먹어 보는 전복버터구이의 맛을 음미했다.
부드러우면서도 오독오독한 모순적인 식감과 달달하면서도 고소한 맛이 입 안 가득 퍼졌다.
“어때?”
-우와. 이거 정말 대박. 맛도 맛이지만 식감이 아주 환상이네요.
“이제 회만 썰어 내고 접시에 담으면 되겠다.”
7시까지 20분 정도 남은 상태였다.
우우웅. 우우웅.
-마녀.
경호가 다현의 전화를 받았다.
-다 됐어?
“대충.”
-야! 죽을래. 이제 엄마도 배고프다고 하셔서 지금 갈 거야! 대충 말고 완벽하게 해 놔. 아니면 정말 죽는다.
“알았다고.”
전화를 끊은 경호가 음식을 마무리했다.
이제 정말 담기만 하면 끝이었다.
하지만 뭔가 아쉬웠다.
생일상은 만족스럽게 준비됐지만 뭔가 부족한 느낌이었다.
“아! 그래! 그러면 되겠다.”
7시가 다 되는 시간이라 밖은 제법 어두웠기에 충분히 가능할 것 같았다.
“행운공원에 잠깐만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