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화
경호가 현무를 데리고 행운공원을 찾았다.
끼우우웅.
세계수 앞에 선 경호의 손바닥 위에 앙증맞은 거북이 한 마리가 귀엽게 울부짖었다.
물론 경호 손 위에 있는 앙증맞은 거북이는 물과 겨울을 관장하는 북방의 수호자, 현무였다.
크기는 손바닥만 하게 변했지만 현무의 그 존재감은 여전히 행운공원을 가득 채우고 남을 정도로 거대했다.
솨아아아아아.
물방울이 모여들더니 운애가 모습을 드러냈다.
현무가 뿜어내고 있는 강렬한 물의 기운에 운애가 가장 먼저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경호. 그 손위에 거북이는 뭐야? 정령은 아닌 거 같은데? 풍기는 기운이 제법인데.”
운애의 질문에 당황한 흰둥이가 서둘러 답했다.
-아. 운애. 그게 그분은 현무 님입니다.
“얘 이름이 현무야? 특이한 이름이…. 뭐! 현무라고!”
중얼거리던 운애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경호 손바닥 위에서 거북이를 다시금 쳐다봤다.
크기는 작았지만 분명 풍기는 기운은 신력이 맞았다.
그리고 물의 기운과 북방의 찬 기운도 같이 어려 있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상급 물정령, 운애라고 합니다. 아니 북방의 수호자이신 현무 님께 인사드립니다. 그런데 어쩌다가 이리로 오셨습니까? 제가 알기로는 북방, 북극 어딘가에 계신다고 알고 있었는데요.”
운애가 꾸벅 인사를 하며 질문을 던지자 현무가 손가락만 한 머리를 끄덕이며 인사를 받았다.
-그렇지. 그러니까 그것이 어떻게 된 거냐면. 네 말대로 북극해 아래에 살고 있었는데. 그러니까 지구….
“잠깐만. 내가 설명할게.”
경호가 현무의 말을 끊고는 대신 말을 이었다.
분명 실례가 되는 행동이었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여기까지 오면서 경호가 현무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깨달은 것이 하나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말이 느려도 너무 느려!’
이곳까지 날아오며 제대로 된 이야기는 하나도 나눌 수가 없었다.
말의 흐름도 중구난방이었고 느리고도 정말 너무 느렸다.
누군가와 대화를 하는 경험 자체가 수십억 년 역사 속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였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기에 운애의 속이 터지기 전에 경호가 나설 수밖에 없었다.
경호가 운애에게 지숙의 생일을 위해 완도를 간 것과 마기에 잠식당한 현무와 있었던 일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을 마쳤다.
“뭐! 현무 님이랑 싸워서 이겼다고!”
운애가 안 그래도 새하얀 얼굴이 더 하얗게 질려서 물었다.
아니 경호가 강한 거야 하루 이틀 일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사신의 이름은 그 격이 다른 존재였기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아니 정확히는 싸웠다고 하기는 좀 그렇고. 어쨌든 마기에 잠식된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어서 바로 돌아가기보다 이곳에서 완전히 회복하고 돌아가는 게 나을 듯해서 같이 왔지.”
어느새 주변에 모인 신수와 정령 모두가 경호의 이야기를 모두 듣고는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중 가장 맏형이라고 할 수 있는 땅개가 나섰다.
-저는 상급 땅정령, 땅개라고 합니다. 현무 님. 완전하게 회복하실 때까지 이곳에서 편히 쉬다 가십시오.
-고맙군. 그런데 말이야. 저걸 보니 편히 쉬다 갈 수 없겠는데? 왜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고 있는 거지?
현무가 새끼손가락 크기의 앞발을 쭈욱 뻗으며 땅개에게 말했다.
땅개가 놀라서 현무의 앞발을 따라 시선을 돌렸다.
-그게 무슨? 어?
그곳에는 세계수가 자리하고 있었다.
-세계수? 아니 세계수가 왜요?
-역시 저 나무가 세계수였군.
땅개와 현무의 대화를 지켜보던 경호가
-현무 님. 그런데 편히 쉬면 안 되겠다니. 혹시 세계수에 무슨 문제라도 있는 겁니까?
땅개는 물론 운애도 정령력을 흘려주며 정성으로 세계수를 보살피고 있었다.
최근 경호가 드레이크의 심장까지 비료로 주었기에 더할 나위가 없었다.
그런데 왜?
현무는 그런 땅개의 말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더니 고개를 돌려 경호를 바라봤다.
-어떤가? 자네도 저 세계수가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하나?
“좋고 나쁨을 떠나서 충분한가 부족한가를 따진다면 엄청나게 부족한 게 사실이죠.”
당연히 혈통 좋은 세계수의 씨앗을 옮겨 심은 세계수이기에 성장 속도 빨랐고 흡수하고 뿜어내는 기운도 나쁘지 않았다.
그래서 좋고 나쁨을 떠나서 이야기한다고 한 것이었다.
경호는 정령계에서 행운공원에 심은 세계수의 엄마 나무를 떠올렸다.
그 크기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거대했다.
그리고 뿜어내는 기운은 지금 눈앞에 있는 세계수와 비교하기도 민망한 수준이었다.
하지만 경호의 입장에서 세계수를 더 빠르게 성장시킬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렇기에 세계수의 빠른 성장을 위해 정령, 신수를 이곳에서 생활하게 한 겁니다. 세계수는 정령과 신수를 성장시키고 반대로 정령과 신수는 세계수를 성장시키니까요.”
현무가 고개를 끄덕였다.
틀린 말이 아니었다.
‘나와 같은 부류의 존재다.’
실제로 보는 것은 처음이지만 처음 보자마자 현무는 바로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다른 사실도 알 수 있었다.
‘품고 있는 것은 엄청난데 깨고 나오지 못하고 있다.’
세계수가 주신이 균형과 질서를 위해 빚은 존재라는 정도는 현무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저 알고 있는 것과 보고 느낀 것에는 간극이 컸다.
현무는 스스로의 힘과 능력, 그리고 한계에 대해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수십억 년을 살아온 존재였기에 한 치의 틀림이 없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만큼 상대를 평가하는 능력도 뛰어나다고 자부했다.
그래서 지구의 수호신을 봤을 때는 생각보다 너무 약한 능력에 고개를 갸웃하기도 했다.
하지만 ‘경호’라는 인간을 살피고는 놀람을 금치 못했다.
‘깊이를 알 수가 없다!’
신기하게도 신기, 정령력, 마력 모두를 다루고 있다는 것도, 심장에도 특별한 기운이 흐른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우물을 눈으로 보아 그 안에 ‘물’이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지만 그 깊이를 알지 못하는 것과 같은 느낌이었다.
처음 느껴 보는 낯선 느낌이었다.
현무는 단 한 번도 자신이 인간을 상대로 능력을 가늠할 수 없으리라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현무는 세계수를 보며 또 한 번 놀랐다.
‘정말 엄청나다!’
스스로 능력에 자부심이 있던 현무였다.
하지만 그 자부심이 부끄러울 지경이었다.
세계수 역시 자신처럼 기운을 정화하고 세상을 조화롭게 하는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과 큰 차이가 있었다.
‘더 강해. 그리고…. 그리고 아직 어리잖아?’
그래서 품고 있는 진정한 힘을 제대로 쓰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아무리 집중하고 관찰해도 세계수가 품고 있는 힘을 제대로 측정할 수 없었다.
어찌 보면 경호보다 더 놀라운 존재였다.
그래서 경호에게 물었던 것이었다.
저 세계수가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하냐고.
그러자 역시나 경호에게서 부족하다는 대답이 나왔다.
-그렇다면 저 세계수는 얼마나 성장한 것인가? 느껴지기에 어려 보여서 하는 말이네.
“모두 풍기는 기운에 놀라며 감탄하기 바쁜데. 실체를 꿰뚫어 보다니. 역시 대단하시네요.”
-사실 대단하다고 할 정도의 수준은 아니네. 지금도 자네도 그렇고, 세계수도 그렇고 아무리 봐도 그 깊이를 다 알지 못하겠군. 그저 아직 부족함이 있어 제대로 품고 있는 것을 표현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 정도만 느껴지는구만.
그것만 해도 대단한 것이었지만 현무는 그저 고개를 저었다.
“맞습니다. 사실 지금 저 세계수는 걸음마를 떼는 아기 수준이지요.”
정령계의 엄마 나무에 비하면 아장아장 걷는 아기 수준 정도나 될까 하는 수준이었다.
사실 정령계가 마계의 침략을 막아 낸 것에는 경호와 미르의 활약이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은 분명하지만 세계수가 큰 힘을 내지 않았다면 결코 막아 내지 못했을 것이었다.
세계수의 힘으로 대기가 마기에 오염되지 않아 악마 군단의 힘이 약해졌고 반대로 신수와 정령들은 그 힘이 더욱 강해졌기에 마왕을 죽이고 침략을 막아 낼 수 있었던 것이었다.
경호는 그러한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세계수의 성장할 수 있도록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하지만 노력으로도 어쩔 수 없는 한계가 존재했고 최근에는 특별히 신경을 쓰지 않은 것도 사실이었다.
“혹시 세계수를 성장시킬 방법이 있습니까? 그렇게만 된다면 분명 지구가 마계의 침략에서 이기기 위한 좋은 무기가 될 겁니다.”
현무가 경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손에서 내려와 세계수 앞에 섰다.
휘우우우우우웅.
그리고는 기운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북방의 수호자이자 물과 겨울을 관장하는 현무였기에 차갑고 습하지만 깨끗한 기운이 소용돌이쳤다.
손바닥만 한 귀여운 거북이의 모습을 한 현무였지만 그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은 절로 움찔하게 만들 정도로 강력했다.
현무의 기운이 깔리며 행운공원 안의 온도가 뚝뚝 떨어져 마치 한 겨울처럼 추워졌다.
절로 입김이 나오는 상황에 경호가 현무에게 질문을 던지려는 찰나.
뜨드드득. 뜨드드드득.
세계수의 뿌리 하나가 바닥을 뚫고 올라와 길이를 늘이더니 뱀이 똬리를 틀 듯 둥글게 말기 시작했다.
그렇게 뿌리가 마치 새집처럼 만들어지자 움직임이 멈췄다.
의도가 분명하게 보이는 움직임이었다.
현무가 그것을 찬찬히 살피더니 경호를 쳐다보며 말했다.
-이 어린 세계수를 성장시키는 것이 바로 나의 새로운 사명이 된 것 같네.
“그래도 괜찮으시겠습니까?”
경호가 염려하는 마음에 물어보니 현무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기 들어간다고 내가 세계수의 밑거름이 돼서 사라지거나 하는 건 아니니 걱정하지 말게. 나한테도 도움이 될 거야. 정확히는 공생 같은 거니까.
그렇게 말한 현무가 뿌리로 만들어진 공간에 들어갔다.
그러자 뿌리가 다시 길게 늘어나며 더 촘촘하게 말리더니 땅속으로 다시 들어가며 사라졌다.
그리고 잠시 후 엄청난 냉기가 세계수를 중심으로 뿜어져 나왔다.
-경호 님. 괜찮은 거 맞는 거죠?
현무가 뿜어내던 기운보다 더욱 차갑고 더욱 거센 냉기에 흰둥이가 놀란 표정으로 경호에게 물었다.
“….”
경호도 알 수 없는 영역의 질문이었다.
‘드래곤하트’ 같은 강한 기운을 품은 물건이나 신수나 정령이 많아지면 세계수 성장에 좋다고 하는 것도 미르의 이야기를 들어 알고 있던 내용이었다.
‘키워 본 식물이라곤 초등학교 때 수확한 방울토마토가 전부인데 내가 알 리가 있나.’
그때 세계수에서 뿜어져 나오던 냉기가 줄어들더니 눈으로 봐도 보일 정도로 나무 기둥의 두께가 두꺼워졌다.
그리고 세계수가 뿜어내는 기운의 양도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늘었다.
“이거 섭섭하구만. 쳇.”
지구로 귀환하고 2달 넘는 기간 동안 경호와 운애, 땅개의 노력으로 세계수는 꾸준히 성장했다.
드레이크의 심장도 거름으로 줬고 땅개가 땅의 기운도 높였다.
물도 중요하기에 운애가 신경 써서 기운을 담아 세계수에 뿌려 주었다.
하지만 그렇게 고생한 2달보다 조금 전 2분 동안의 성장한 것이 훨씬 더 컸다.
-그러게요. 주인님. 괜히 기운 빠지네요.
“이거 괜히 승부욕 생기네. 오늘부터는 평소보다 뿌리는 기운의 양을 늘려 봐야겠네.”
현무와 기운이 비슷한 운애였기에 괜히 더 씩씩거렸다.
어쨌든 결과적으로 잘 풀렸기에 경호는 기분 좋게 웃었다.
그때였다.
우우웅. 우우웅.
-마녀.
다현의 전화였다.
“왜?”
-이제 가면 되냐?
뭘 이제 가면 된다는 거야?
“뭐가? 된다는 거야?”
-뭐긴 뭐야! 생신상 다 차렸냐고!
“으아아아아아아아!”
현무가 뿜어냈던 것보다 더 차가운 느낌이 전신을 감쌌다.
놀란 경호가 서둘러 시계를 봤다.
오후 5시 27분.
“이런 젠장.”
-6시까지 준비한다며!
“절대 안 돼! 7시! 7시에 와!”
-야 이. 미친놈아! 지금까지 뭐 했는데!
북방의 수호자인 현무가 마기에 침식당할 위기에서 구하고 세계수를 성장시키는 엄청난 일을 했지만, 차근차근 설명하기엔 시간이 없었다.
“그럼! 7시! 그때 봐!”
경호가 급히 전화를 끊고는 흰둥이와 운애를 보며 말했다.
“야. 나 좀 도와줘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