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화
거대했다.
단순하게 거대하다고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거대했다.
거대한 바위섬 같은 등껍질과 시 서펜트와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커다란 뱀머리와 굵고 기다란 목과 꼬리까지.
경호는 흰둥이를 옆구리에 끼고는 현무가 쏘아 낸 독연을 피해 하늘 위로 더 높이 날아올랐다.
“현무라고?”
열심히 수업을 듣는 편은 아니었지만 분명 국사 시간에 봤던 바로 그 ‘현무’의 모습이었다.
-네. 사신(四神) 중 북방의 신이자 물과 겨울을 관장하는 검은 거북 형상을 한 신이죠.
대답하면서도 흰둥이는 의문에 휩싸여 있었다.
‘현무! 현무가 도대체 왜?’
흰둥이는 지구에 있는 그 누구보다 사신(四神), 현무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신수지만 신수가 아닌 격이 다른, 정확히 표현하자면 자연적으로 발생한 반신(半神) 같은 존재였다.
‘정상이 아니다.’
전신에서 짙은 마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애초에 정상이었으면 이곳까지 흘러오지도 않았을 터였다.
경호가 강하다는 것을, 그리고 시스템 제한을 풀어 더 강해졌다는 것을 잘 아는 흰둥이였지만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현무는 지금까지 싸워 온 존재들과는 수준이 달랐다.
지구의 기운을 조율하는 존재이기에 지닌 힘도 엄청났다.
크롸롸롸롸롸롸롸!
현무의 포효에 실린 마기에 피부가 따끔거릴 지경이었다.
“그래 봐야 네 부하 아니야?”
경호의 물음에 흰둥이가 고개를 저었다.
-그게 설명하긴 복잡한데요. 하여간 제 밑이라고 설명하기가 좀 복잡하네요. 쉽게 이야기하면 소속이 다르다고 할까요?
지구의 탄생과 함께 스스로 만들어진 절대적인 존재이기에 주신이 만들어 낸 신수와는 또 다른 존재였다.
후우우우우우웅.
그때 하늘에 떠 있는 경호를 향해 현무의 꼬리가 엄청난 속도로 날아왔다.
가까스로 피했지만 엄청난 크기에 비해 엄청나게 빨라 위협적이었다.
경호가 흰둥이를 묶은 구속의 밧줄을 풀며 말했다.
“흰둥아. 네가 시선 좀 끌어야겠다.”
현무의 상태를 보아하니 마기에 영향으로 이성을 잃은 상태였다.
제압하고 의식의 세계로 들어가서 해결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문제는 덩치가 덩치이니만큼 제압하는 것 자체가 어렵다는 점이었다.
-시선을 끌라고요? 제가요?
경호라면 모를까 자신은 꼬리에 스치기만 해도 사망이었다.
“내가 금방 처리할 테니 조금만 시선을 끌어…. 우왓!”
다시 한번 꼬리가 날아왔다.
휘우우우우우웅!
경호가 몸을 뒤로 날려 피하자 스쳐 간 꼬리가 모래사장을 그대로 때렸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앙!
마치 폭탄이라도 터진 것처럼 엄청난 굉음과 함께 거대한 구덩이가 파였다.
한방 한방에 주변 지형이 변할 정도의 파괴력이었다.
꿀꺽.
그 광경을 본 흰둥이가 마른침을 삼켰다.
“빨리!”
-전복만 캐고 가자고 했으면서!
흰둥이가 본래 모습으로 변해 현무의 얼굴 앞으로 날아올랐다.
거대하게 변한 흰둥이였지만 현무의 눈동자보다 조금 더 큰 수준에 불과했다.
흰둥이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신력이 거슬렸는지.
크롸롸롸롸롸롸롸!
현무가 다시 크게 포효하며 독연을 뿜었다.
-으아아아아아악!
흰둥이가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전격의 기운을 가진 흰둥이기에 엄살을 부리긴 했지만 엄청난 속도로 그것을 피했다.
경호가 그 모습을 보고 바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휘익!
마력으로 몸을 가볍게 하고 바람의 기운을 뿜어내서 움직이는 경호는 이제 정말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날 수 있었다.
특히나 흰둥이의 잔망스러운 깐족거림에 정신이 팔린 현무였기에 이미 경호는 안중에 없었다.
구속의 밧줄.
마력이 공급되면 ‘절대’라고 할 정도의 엄청난 인장력을 가지게 되는 물건이었다.
경호는 그것을 현무의 등껍질의 튀어나온 부위에 단단히 묶었다.
그리고 다시 빠르게 날기 시작했다.
다리, 몸통, 꼬리, 다시 다리, 다시 몸통, 이번엔 목, 다시 꼬리로.
마력을 쏟아부으며 밧줄을 길게 만들어 계속 현무를 감아 가기 시작했다.
얼기설기 묶어 나가는 경호가 더욱 박차를 가했다.
그런 경호의 모습에 흰둥이는 번쩍번쩍 뇌력을 뿜어내며 더욱 현무의 시선을 끌었다.
크롸?
현무가 흰둥이를 물어뜯기 위해 움직이다 이상함을 느꼈을 때는 이미 머리를 제외한 부위가 꽁꽁 묶인 상태였다.
“나이스! 흰둥아!”
경호가 그대로 날아올라 머리까지 밧줄로 감고는 마력을 더욱 강하게 불어넣었다.
드드드드드드드득!
현무가 마기를 뻗어 내며 버둥거리자 순간적으로 땅이 흔들리고 대기가 후끈하게 끓어올랐다.
‘절대’라고 할 정도로 강인한 구속의 밧줄이었지만 당장이라도 끊어질 듯 팽팽해지기 시작했다.
‘애초에 구속의 밧줄로 묶어 둘 수 있는 존재가 아니야.’
경호도 현무를 구속의 밧줄로 묶어둘 수 있을 거로 생각하지 않았다.
단지 아주 짧은 시간.
현무의 의식을 비집고 들어갈 수 있는 정도의 아주 짧은 시간 동안 구속이 필요할 뿐이었다.
경호가 버둥거리는 현무의 머리를 향해 날아올랐다.
크롸롸롸롸롸롸롸롸!
현무가 그런 경호를 보며 마기가 섞인 포효를 내뱉었지만 그뿐이었다.
경호가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현무의 머리에 손을 가져갔다.
우우우우우우우우웅!
신력과 정령력, 마력이 한데 섞여 경호의 손을 타고 현무에게 흘러 들어갔다.
마기가 흘러나와 그런 경호의 기운을 밀어내려고 꿈틀거렸지만 신력이 찍어 내고 정령력이 밀어내며 길을 만들었고 결국 마력이 현무의 의식의 세계에 닿았다.
들어가고자 한다고 들어갈 수 있는 의식의 세계가 아니었다.
그것도 보통의 존재가 아닌 반신급 존재인 현무의 의식 세계였다.
하지만 이미 마기에 오염되어 의식이 흐릿한 상태였기에, 그리고 의식의 세계에 발을 들이는 것에 익숙한 경호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경호와 현무.
둘은 마치 돌이라도 된 듯 그대로 멈춰 버렸다.
***
의식의 세계.
경호에게 익숙한 널찍한 새하얀 공간이었다.
“이거 아주 개판이네.”
하지만 경호가 겪어 왔던 의식 공간과 굉장히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새하얀 공간 군데군데가 찢어져 있었고 그곳으로 마기가 흘러들어오고 있었다.
마치 짙은 황사라도 낀 듯 시야가 뿌옜고 인상이 절로 써지는 매캐한 냄새도 풍겼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현실의 현무와는 전혀 다르게 생긴, 암흑마기로 이루어진 괴물 같은 모습의 존재가 우두커니 자리하고 있었다.
대충 머리처럼 생긴 것에서 쩌억 입이 벌어지며 경호에게 말을 걸었다.
-선한 업을 가진 인간이구나!
-죽여 주마! 죽여 주마! 죽여 주마!
동시에 전혀 다른 목소리, 전혀 다른 내용이 하나의 입에서 동시에 튀어나왔다.
‘아직 영혼이 완전하게 잠식당하진 않았구나!’
하지만 공간의 상태나 풍기는 마기의 양, 현무의 모습을 종합해 볼 때 위태위태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우선 좀 맞자!”
딱히 떠오르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이미 마기에 뒤덮인 현무와 찢어진 공간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마기까지.
이것들을 끊어 내려면 늦기 전에 움직일 필요가 있었다.
빠르고, 과격하게.
어차피 의식의 세계에서는 무식하게 덩치만 큰 마기보다 훨씬 윗줄인 경호였다.
경호의 전신에서 무지갯빛 기운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이미 제한도 사라진 상태였고 의식의 세계에서는 특별히 힘 조절을 할 필요도 없었다.
경호가 마기로 똘똘 뭉쳐진 거대한 현무를 향해 날아올랐다.
콰앙!
무지갯빛 기운이 경호의 주먹에서 뻗어 나와 그대로 현무의 머리를 때렸다.
피하고 막고 할 정도의 공격이 아니었다.
번쩍이면 이미 경호는 사라지고 없었다.
콰앙!
경호의 주먹질에 머리가 돌아갔다.
쾅!
경호가 다시 현무의 다리에 기운을 실어 로우킥을 날렸다.
콰앙! 등껍질을 찍어 내리고. 쾅! 목덜미를 돌려찼다.
흘러들어오는 마기를 흡수해서 신력으로 변환해 찢긴 벽면에 흘려보냈다.
벽면이 서서히 회복되며 넘어 들어오는 마기도 줄어들기 시작했다.
여기저기 터지고 찢긴 마기에 물든 현무를 보던 경호가 아공간을 열어 용아검을 꺼내 들었다.
“핵은 내가 잘라 줄 테니. 나머지는 스스로 해결하라고!”
-인간이여. 고맙다.
-크억! 크어억! 죽이겠다! 죽이겠다!
마구 날뛰며 독연을 뿜고 꼬리를 내리치는 현무였지만 거의 이성을 잃고 마구잡이로 움직이는 수준이라 피하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경호는 그러한 공격을 가볍게 피하며 용아검에 무지갯빛 검기를 둘러 그대로 뛰어올랐다.
그러곤 현무의 머리에 그대로 검을 찔러 넣었다.
푸욱!
찔러 들어간 용아검의 끝에 무언가 걸리는 느낌이 있었다.
이 일을 벌인 근본 원흉인 마기의 ‘핵’이었다.
스걱!
무지갯빛 검기에 핵이 반으로 쪼개졌다.
경호가 검을 회수하고 뒤로 물러나자 검은 마기로 둘러싸인 현무의 내부에서 새하얀 빛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화아아아아악!
그리고 그 빛이 마기를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
-현무라니! 현무라니!
흰둥이가 여전히 돌처럼 굳어 있는 현무를 보며 중얼거렸다.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존재가 바로 사신이었다.
‘비교하자면 세계수 같은 존재인 그들마저 마기에 오염되다니.’
사신의 존재는 만물의 기운을 조절하는 ‘세계수’와 같은 존재였다.
그런 존재가 이렇게 마기에 당하다니.
그나마 마기에 완전히 오염된 상태가 아닐 때 발견한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다른 신들은 괜찮을지 걱정이네.’
청룡, 백호, 주작.
나머지 사신(四神)들이 괜찮을지 그것도 걱정이 되는 흰둥이였다.
하지만 찾고자 한다고 쉽게 찾을 수 있는 존재도 아니었다.
그렇게 따지면 정말 운이 좋았다.
만약 오늘 전복 따러 오지 않았다면 정말로 큰일 날 뻔한 상황이었다.
‘우연이라고 하지만 어쨌든 정말 다행…. 어!’
흰둥이는 자신을 압도하는 어마어마한 신력이 현무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을 느꼈다.
동시에 짙게 뭉쳐 있던 마기가 순식간에 타오르며 그대로 사라져 버렸다.
후우우우우우우.
현무의 머리에 손을 대고 있던 경호가 눈을 뜨며 깊게 숨을 골랐다.
-경호 님! 잘 끝났습니까?
“직접 물어봐.”
-네?
그때 마기가 모두 사라져 원래의 모습, 검은 광택이 도는 거대한 뱀의 모습을 한 현무가 눈을 떴다.
-흐음. 놀라운 힘을 지닌 인간과 지구의 수호신이라…. 우선 고맙다고 말하고 싶군. 정말 고맙다.
현무의 말에 흰둥이가 인사를 했다.
-지구의 수호신, 흰…. 카니스 디 루푸스입니다. 처음 뵙네요. 북방의 수호자, 현무 님.
그 연륜이나 지닌 역할을 존중하기에 흰둥이가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카니스 디 루푸스. 존재에 대해서 알고 있었지만 보는 건 처음이로군. 지구를 위해 애쓴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네. 정말 고맙네.
-그렇게 생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 봐야 결국 마계의 침공을 막지 못했습니다. 오늘 이 일도 크게 보자면 결국 제가 지구를 제대로 지키지 못해서 일어난 일입니다. 죄송합니다.
한쪽은 고맙다고 하고 한쪽은 죄송하다고 하는 묘한 상황이었다.
그런 모습을 지켜보던 경호가 현무에게 말을 건넸다.
“이곳에 오래 있으면 마계에 소식이 갈 수도 있습니다. 우선 자리를 옮기시죠. 몸을 숨길 만한 장소가 있으니 자세한 이야기는 거기서 하도록 하죠.”
-그런데 이곳은 인간이 사는 곳이 아니고. 나 또한 기운을 숨기고 있었는데 어떻게 찾은 건가?
현무의 물음에 경호가 ‘아!’하고 탄성을 뱉었다.
“전복! 미역!”
-전복? 미역?
경호가 이곳을 오게 된 이유를 간단하게 설명했다.
-그거라면 도와줄 수 있겠군.
쿵. 쿵. 쿵. 쿵.
현무가 완도의 해변으로 걸음을 옮기더니 신력을 뿜어내며 수백 미터에 달하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우르르르르르.
정말 우박이 쏟아지듯 몸에 붙어 있던 온갖 해양 생물들이 우르르 쏟아졌다.
워낙 커다란 덩치였기에 그 틈새에 끼어 있던 문어나 물고기도 튀어나왔다.
“흰둥아! 주워!”
경호가 아공간을 열며 소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