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화
‘각성자 시스템.’
모든 힘을 다했음에도 마계의 침략을 막지 못한 흰둥이가 급하게 만들어 낸 시스템이다.
인간의 잠재력을 키우고 마력을 깨닫게 하는 일종의 인간 개조 프로그램.
그 목적은 마계와 싸울 수 있도록 ‘특성’이라는 무기를 인간에게 쥐여 주는 것이었다.
기본 골조는 게임과 같아, 인간은 레벨업을 통해 수련보다 뛰어난 성과를 이룰 수 있었다.
하지만 한계는 분명하게 존재했다.
역설적으로 바로 ‘시스템’ 그 자체가 한계였다.
기본 설계 목적 자체가 ‘최대 다수의 보편적인 전투력’ 향상을 위한 프로그램이다 보니 절대적인 힘을 가진 존재가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단점이 있었다.
흔히 말하는 ‘규격 외’, ‘이레귤러’의 존재가 만들어질 수 없었다.
애초에 시스템으로 성장한 힘이었고 시스템의 허용치인 ‘999’라는 능력치 안에서 강해질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근력-999][민첩-999][체력-999]
힘과 속도, 그리고 그것을 유지하는 체력.
인간의 능력 최대치를 999로 상정한 시스템적인 수치였다.
그렇기에 흔히 알고 있는 슈퍼맨 같은 ‘만화적 영웅’과 달랐다.
날이 잘 선 단검을 든 일반인에게도 죽을 수 있는 존재가 바로 각성자였다.
그렇기에 각성자는 엄청나게 강하긴 했지만 ‘마력’이라는 특수한 힘과 특성이라는 ‘초능력’을 사용하지 않으면 진정한 인간을 초월한 ‘초인’이라고 부르기 힘든 존재였다.
‘아티팩트’가 중요한 이유도 결국 신체적인 능력의 한계 때문이었다.
재수 없게 마수의 꼬리에라도 한 대 잘못 맞으면 죽을 수 있기에 갑옷이나 방패는 필수였고 던전 공략도 파티 사냥이 필수였다.
그런데 그러한 ‘시스템’이라는 프로그램 안에서 레벨에 따라 강제적인 성장을 하지 않은 인물이 있었다.
바로 ‘경호’였다.
그는 시스템이 정한 잠재 능력치의 상한선인 ‘999’까지 레벨에 따라 비례해서 성장한 것이 아니었다.
미르에게 터지고 신수와 구르고 정령과 함께하며 강해졌다.
벽에 도달하면 어떻게든 그것을 뛰어넘었고 뛰어넘기 힘들면 계속 들이받아 그것을 부쉈다.
힘들어 멈추고 싶다는 생각이 하루에도 백번 천번 들었지만 당장 달려오는 악마 군단의 모습에 이를 악물고 뛰쳐나가야 했다.
10년간 살기 위해 강해질 수밖에 없었다.
지구의 각성자처럼 던전에서 마석을 구하기 위해, 돈을 벌기 위해 레벨을 올리며 강해진 것이 아니었다.
피할 수 있는 구석도 없었고 대신 싸워 줄 그 누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살아야, 이겨야 지구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렇게 지구로 돌아온 그의 눈앞에는 폐암 말기의 엄마와 다시금 마계의 침공에 신음하는 이들이 있었다.
지금껏 애써 피해 왔지만 이제 정말 악마 군단의 침략이 코앞이었다.
뚜드드드득. 뚜드드드득.
공중에 떠오른 경호의 몸이 기이한 각도로 틀어지며 관절 부위에서 끔찍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동안 시스템이 억제하고 있던 본래의 힘이 돌아오며 그에 맞게 육체가 변하면서 터져 나오는 소리였다.
환골탈태(換骨奪胎).
흔히 무협지에 나오는 용어로 엄청난 내공과 깨달음을 얻어 그에 적합한 육신으로 변하는 것을 일컫는 것이었다.
커헉! 컥!
이미 혼절한 상태의 경호였지만 허공에 떠서 신음을 토하며 계속 몸이 이리저리 비틀리고 있었다.
-이건 뭐죠?
-주, 주인님! 아니 이게 무슨 일입니까?
운애와 땅개가 흰둥이에게 물었다.
시스템 제한을 풀어내는 마법진을 완료한 흰둥이는 다시 귀여운 포메라니안의 모습으로 변해 헐떡거리고 있었다.
-하아. 하아. 그게…. 설명하자면 좀 긴데. 어쨌든 지금 경호 님은 성장하는 중입니다.
허공에 떠 있는 경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이 범상치가 않았기에 운애와 땅개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찬찬히 그 모습을 지켜보던 운애가 흰둥이에게 물었다.
-혹시 억제되어 있던 힘을 되찾는 중인가요?
-엇?!
흰둥이가 놀란 표정을 짓자 운애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그랬네요. 예전에 엉망으로 변한 경호의 몸을 치유하며 느낀 건데 마나코어의 수준에 비해 품고 있는 힘이 너무 약하다는 생각을 했었거든요. 단순하게 신력과 정령력이 불균형하고 약해서 오는 문제가 아니라…. 맞나요?
-맞습니다. 제가 부족해서 생긴 일이죠. 시스템의 한계가 너무 명확했으니까요. 사실 시스템상으로 최대치의 성장을 한다고 해도 상급 악마도 상대하기 벅찬 수준입니다.
시스템의 한계에 대해서 처음 밝힌 이야기였다.
각성자가 최대로 성장해도 상급 악마를 이기지 못한다니….
-그게 무슨….
-사실 최후의 발악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냥 허무하게 지배당하는 것보다 최대한 마계 침략에 버티다가 죽겠다는…. 대책도 없는 무식한 방법이었죠.
하지만 이제는 방법이 생겼다.
6레벨이 되면서 다시 시스템에 대한 통제권을 행사할 수 있었고 레벨이 더 오르면 시스템의 한계도 더욱 확장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제는 시스템도 더욱 탄탄하게 만들고, 신수도, 정령도 돌아오고 있으니 분명 이길 수 있을 겁….
“끄으으으윽!”
그때 경호의 표정이 일그러지며 고통에 찬 신음이 터졌다.
어긋나 있던 육체와 기운이 하나로 합쳐진다는 것은 생각처럼 간단한 게 아니었다.
-땅개야. 돕자.
-네에?!
-내가 경호의 생명력을 더욱 키울 거야. 어쩌면 육체와 기운이 단순히 합쳐지는 이상으로 성장할 수도 있거든. 다만, 육체가 견뎌 낼 수 없을 수도 있으니까.
-오케이. 알았어요.
물의 정령력이 회복에 좀 더 특화되어 있다면 땅의 정령력은 강화에 훨씬 더 특화된 기운이었다.
운애의 몸에서 수증기가 뿌옇게 일어나더니 그녀의 손바닥 위로 뭉쳐 하나의 커다란 물방울이 됐다.
그리고 그것이 가느다란 물줄기로 변해 허공에 둥둥 떠 있는 경호의 콧구멍과 입으로 들어갔다.
쏴아아아아아아아.
경호의 심장과 마나코어가 그렇게 스며든 운애의 기운에 힘을 얻어 더욱 강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세계수가 뿜어내는 기운이 더욱 빠르게 경호의 몸을 통해 흡수되며 그동안 억제되어 있던 부분이 채워지기 시작했다.
땅개 역시도 흙먼지를 날리며 그 기운을 모았다.
그리고 뿌연 땅개의 기운이 경호의 몸에 씌어 졌다.
태닝을 한 것처럼 피부가 구릿빛으로 변했다.
연신 터져 나오던 경호의 신음이 조금씩 줄어들더니 점점 더 몰아치던 기운도 서서히 잦아들기 시작했다.
“으허.”
경호는 눈을 떴다.
***
‘그래서였구나.’
지금까지 움직이며 뭔가 찌뿌둥하게, 그리고 묘하게 어색했던 이유를 드디어 찾을 수 있었다.
조그마한 마법진이 날아올 때만 해도 ‘이제 좀 더 강해지는 건가?’ 하는 이런 생각에 기분이 좋았다.
‘어엇!?’
엄청 아팠다.
비명과 욕이 자동으로 터져 나왔다.
내 안에 있는 기운이 가슴에 닿은 마법진으로 빨려 들어가며 타올랐다.
그냥 단순하게 뜨거운 느낌이 아닌 영혼이 녹아내리는 그런 엄청난 아픔이었다.
‘아픈 건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10년간 죽을 고비를 셀 수 없이 겪었기에 아픔 따위는 이미 친숙했다. 아니 오늘까지 친숙하다고 착각하고 있었다.
“끄으으으윽!”
신음이 절로 터져 나왔다.
시각, 촉각, 후각 같은 감각이 모두 차단되었기에 내부의 뜨거운 고통이 더욱 생생했다.
그때였다.
뭔가 정확히 표현하기 어려운 시원한 느낌과 함께 전신에 힘이 들어갔다.
그리고 곧장 통증이 확 줄어들기 시작했다.
경호는 모르고 있었지만 운애와 땅개의 기운 때문이었다.
“으허.”
갑자기 호흡이 확 트였다.
눈이 번쩍 떠지고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던 것들이 빠르게 돌아오기 시작했다.
꽤 지쳐 보이는 흰둥이와 흥미로워하는 운애, 초조해 보이는 땅개가 눈에 들어왔다.
꾸우우욱.
나도 모르게 손을 꽉 움켜쥐었다.
“하하하하하하하하.”
그리고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지구로 건너와서 항상 느꼈던 미묘한 어색함이 사라졌다.
아니 오히려 새로운 어색함이 생겼다.
‘힘이 더 강해졌다.’
아직 신력이나 정령력은 부족하여 균형이 깨져 있기는 했지만 전체적으로는 정령계에서보다 더 강할지도 모를 정도로 힘이 넘쳤다.
다리에 힘을 줘서 가볍게 뛰어올랐다.
쒸이이잉!
날카로운 바람 소리를 내며 빠르게 바닥에서 멀어지는 모습을 보며 피식 웃었다.
‘이런 기분 오랜만이네.’
정령계에서 신수들과 뒤엉켜 놀던 시절엔 순수한 육체적인 힘만으로 달리기 시합도 하고 씨름도 했었다.
단순하게 정령계의 풍부한 기운 덕에 그런 줄 알았는데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이야호!”
가볍게 50m 가까이 떠오른 경호가 다시 빠르게 떨어지기 시작했다.
일부러 마력을 하나도 끌어올리지 않고 땅에 착지했다.
쿠우우웅!
발목까지 땅에 파고들 정도였지만, 신체에 전혀 무리가 가지 않았다.
강해진 것은 육체만이 아니었다.
마나코어에 가득 차 있는 마력을 슬쩍 깨웠다.
화아아아아아악!
마치 폭발이 일어나던 엄청난 기운이 전신에 휘몰아쳤다.
마치 폭주가 일어난 듯한 엄청난 기세였다.
하지만 육체가 강건해지면서 그러한 기운을 온전히 감당할 수 있게 되었다.
휘우우우우우우우웅!
경호를 중심으로 기운이 휘몰아치자 공원 전체가 그 힘에 떨릴 정도였다.
운애와 땅개는 물론 어느 정도 예상한 흰둥이조차 놀라서 입을 쩍 벌렸다.
‘기운이 최소 2배, 아니 3배는 강해졌다. 육체 역시 이미 인간을 초월해 상급 악마 수준의 육체야!’
강해질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그 예상을 아득히 넘어서는 경호의 힘에 흰둥이가 입을 쩌억 벌렸다.
“좋군.”
경호가 기운을 다시 갈무리하고는 간단한 소감을 말했다.
“고맙다. 흰둥아.”
경호의 말에 흰둥이가 고개를 저었다.
-이제 겨우 본래의 힘을 찾은 건데요. 아니 신력과 정령력은 아직도 부족한 편이고요. 다 제가 부족했던 탓입니다.
“그래. 그래도 부족한 편치고는 잘했어.”
흰둥이는 괜히 겸손하게 대답했다며 후회했다.
“그래도 그때 시스템을 만들지 않았다면 이미 마계의 식민지가 되었겠지. 이제야 이야기하는 거지만 정말 잘했다. 목숨을 걸어야 했을 정도로 쉬운 일이 아닌데 말이야.”
이번엔 경호도 진심이었다.
덕분에 인류가, 엄마가 살아 있을 수 있었다.
“그리고 운애, 땅개도 고마워. 중간에 도와준 게 너희들이지?”
-도움이 됐다니 다행이네.
-주인님. 고마워하실 필요 없습니다. 주인님이 이렇게 좋아지신 것만 봐도 전 행복합니다.
경호가 땅개의 과한 충성심에 피식하다 주변을 훑어보며 흰둥이에게 물었다.
“아까는 몰랐는데 이렇게 구경꾼을 많이 깔아 놨었어?”
경호의 말에 흰둥이가 뜨끔한 표정을 지었다.
-역시 알아보시네요. 운애와 땅개도 눈치채지 못하던데.
흰둥이의 말에 운애와 땅개도 고개를 갸웃했다.
흰둥이는 행운공원에 단순히 외부 결계만 친 것이 아니었다.
-모두 나와.
흰둥이의 말에 공원 담벼락 아래 빽빽하게 심어진 수풀 사이에서 작은 강아지와 고양이, 거북이, 사슴, 두꺼비, 뱀 같은 동물이 슬금슬금 나오기 시작했다.
거의 100여 마리에 달하는 엄청난 수였다.
“신수?”
-경호 님이 지구를 구할 용사라는 것을 직접 보여 주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결계로 몸을 숨기고 지켜보라고 했습니다.
따로 말은 하지 않고 있었지만 경호를 향한 신수들의 눈빛에는 ‘신뢰’가 묻어 나오고 있었다.
“그래. 그런데 이 신수들을 다 어쩌려고? 여기가 동네 공원이지 동물원은 아니잖아?”
유기 동물도 적당해야지 이 정도면 정부에서 처리하러 나올 수준이었다.
-그래서 이곳을 동물원으로 만들어 달라고 할 생각입니다.
“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