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화
비스트.
그는 많이 외로운 사람이었다.
대격변 이후 많은 사람이 그렇게 됐지만 그는 특히나 더 그랬다.
아니 그는 원래부터 그랬다.
천애고아로 보육원에서 자란 그가 성장해서 ‘사육사’라는 직업을 택한 것도 결국 ‘외로움’ 때문일지도 몰랐다.
그러다 사랑하는 여인을 만나 결혼을 했다.
김현아.
그 여인은 비스트의 외로운 삶을 하루하루가 일 년처럼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해 주었다.
행복한 결혼생활 속에 가슴 속 깊숙이 박혀 있던 외로움이라는 가시가 조금씩 지워졌다.
이아현.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천사 같은 딸이 태어나고 비스트는 비로소 외로움이라는 가시를 완전히 뽑아내고 그 빈자리에 행복을 채울 수 있었다.
자신을 사랑해 주는 부인과 항상 웃음을 주는 딸을 보며 비스트는 이런 생각을 했다.
‘내가 이렇게 행복해도 되는 건가?’
그렇게 행복한 시간은 흐르고 흘러 2028년 3월 22일. ‘대격변’이라고 불리는 그날이 왔다.
그리고 그날, 가장 사랑하는 부인은 그의 눈앞에서 종잇장처럼 찢겨 졌고 가장 아끼던 딸은 그의 품 안에서 차갑게 식어 갔다.
살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하지만 마수에 대한 분노가 그런 그를 살게 했다.
가족에 대한 원한과 복수심으로 지금까지 버티며 치열하게 살아왔다.
그리고 치열함 속에 작은 위안이 바로 애지중지하며 돌봐 주고 있는 ‘반려견’들이었다.
주인에게 버림받고 거리를 떠돌던 개들을 걷어서 먹이고 치료하고 애정을 쏟으며 함께한 자식 같은 녀석들이었다.
“잭슨! 마이클! 재키!”
털썩!
기침하던 개들이 피를 토하며 그대로 쓰러지는 것을 본 비스트가 거칠게 소리쳤다.
이제 대충 위치를 알아냈기에 개를 뒤로 물리려고 하던 찰나에 일이 버려진 것이었다.
“다, 다들 물러서!”
서둘러 달려갔지만 이미 검게 변한 혀를 빼물고 죽어 있었다.
“죽인다! 이 악마 같은 년!”
화가 났다.
더 잃을 것이 없다고 생각하며 살아온 지난 3년이었다.
“너희들은 돌아가!”
으득.
비스트가 이를 갈며 몸을 날렸다.
초록빛이 번쩍하며 비둘기로 변한 비스트가 빠르게 날아갔다.
머리에서 김이 날 정도로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비스트는 냉정해지기 위해 노력했다.
‘엘프는 강하지 않아. 정령을 이용하기에 조심해야 하지만 기습만 성공하면 어렵지 않게 상대할 수 있다. 다만 독을 다룰 줄 아니까 조심하자.’
자신은 S급 헌터라고는 하지만 다현 같은 공격형 헌터는 아니었기에 조심 또 조심해야 했다.
눈이 뒤집힐 정도로 화가 난 상태였지만 그냥 달려들 정도로 바보는 아니었기에 비둘기 모습을 한 비스트는 저 멀리 흐릿하게 금발을 한 엘프, 리나가 보이기 시작하자 날갯짓을 멈추며 근처 나뭇가지에 올라섰다.
그리고 곧장 작은 생쥐로 변한 비스트가 기척을 죽이며 리나가 있는 곳으로 조심스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바스락. 바스락.
평소보다 유난히 움직이는 것이 시끄러운 듯했다.
거리는 더욱 좁혀졌다.
운이 좋게도 리나는 비스트가 오는 방향에서 등을 돌린 채 바닥에 무언가 끄적거리고 있었다.
‘운이 좋군.’
하지만 비스트는 자신이 ‘운’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라 생각하고 있었기에 긴장의 끈을 놓치지 않고 있었다.
리나와의 거리는 대략 10m.
10cm 정도 되는 생쥐에게는 꽤나 먼 거리였다.
5m.
다행히도 리나는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1m.
호흡을 고른 비스트의 몸에서 번쩍하고 초록빛이 터져 나왔다.
거대한 사자로 변한 비스트가 앞발로 리나를 끌어안으며 목덜미를 그대로 물어뜯었다.
그리고 그 순간 비스트는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퍼억!
앞발로 강하게 끌어안으며 물어뜯은 리나의 몸이 한순간에 흘러내렸다.
‘물?!’
비스트가 몸을 빼려는 순간.
푸욱.
-크허허허헝!
날카로운 통증이 허리를 찌르고 깊숙이 들어왔다.
숨이 턱하고 막히는 통증에 비스트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보이는 금발의 엘프, 리나가 새하얀 이를 드러내며 섬뜩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초면에 백허그는 실례잖아? 안 그래?”
비스트는 리나를 공격하기 위해 마력을 끌어올렸다. 아니 끌어올리려고 했다.
크어어억!
하지만 마력 대신 신음이 터져 나왔다.
독이 섞인 운무를 피했다고 생각했지만, 이곳까지 오면서 비스트도 모르게 다섯 종류의 극독에 중독된 상태였다.
소량의 독이기 때문에 마력으로 억누르며 리나에게 접근했지만 결국 독이 발린 단검에 찔리자, 몸 안에서 억눌려 있던 독들이 들끓으며 결국 폭주해 버렸다.
“마력을 더 끌어올리면 죽을 거야.”
리나의 피식 웃으며 비스트에게 죽음에 대해 경고했지만 그는 발악하듯 마력을 끌어올렸다.
하지만 마력이 움직이는 속도보다 리나의 단검이 더욱 빨랐다.
푹! 푹! 푸욱!
-커억! 컥! 커억!
거대한 녹색 사자, 비스트가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중독이 심해지며 마력이 흩어져 변신도 풀린 상태였다.
리나가 단검을 허리에 차며 양손에 기운을 끌어올렸다.
정령력이 그녀의 손을 통해 주변으로 퍼져 나갔다.
구우우웅! 구우우우웅!
요란한 소리와 함께 빛이 번쩍였다.
늦은 저녁에 수풀이 우거진 곳이라 잘 보이진 않았지만 둥그스름한 거대한 은빛 물체였다.
“그럼. 용사를 잡으러 가 볼까?”
수풀 속에서 떠오르던 은빛 구체도 빠른 속도로 날아올랐고 그것을 조종하던 리나의 모습도 어느새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
-엇! 경호님! 저기!
옆구리에 끼고 있는 흰둥이가 말하지 않더라도 경호 역시 날아가는 가디언의 모습을 봤다.
“제길! 눈치챈 모양인데?”
비스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의아했지만 경호는 가디언을 쫓아 날아오르며….
“어! 어어!”
경호는 서둘러 바닥에 착지했다.
-비, 비스트.
흐릿한 달빛 아래 바닥에 쓰러져 죽어 가는 비스트의 모습이 드러났다.
은신은 이미 풀린 상황이었다.
가디언을 쫓아가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경호는 다현에게 급하게 전화를 걸었다.
“어! 지금 가디언이 북악산 동쪽 능선을 타고 날아갔어! 비스트가 리나에게 당해서 응급조치하고 갈 테니 조심해!”
뚝.
다현의 말은 듣지도 않고 그대로 끊은 경호는 비스트의 몸 상태를 확인하고는 인상을 썼다.
“이거 지금까지 살아 있는 게 더 기적인 상황인데….”
자상을 입은 옆구리가 벌어져서 내장이 보였다. 하지만 그 상처는 양호한 편이었다.
전신에 흐르는 마나회로가 가닥가닥 끊어져 있었고 마나코어는 당장이라도 깨질 듯 불안한 상태였다.
거기다 여러 종류의 독기가 전신에 퍼져 서로 간섭을 일으키며 폭주하고 있는상태였다.
커억! 컥!
비스트는 몸을 펄떡이며 검붉은 피를 토했다.
“흰둥아. 힘 좀 써 줘.”
경호와 수호신이자 신수인 흰둥이가 할 수 있는 일은 확연하게 달랐다.
‘치료’라는 행위에 있어서 그것은 더 극명하게 갈렸다.
수호신이자 신수인 흰둥이는 신력을 이용해 질병을 치료하거나 생명력을 회복시키는 능력이 뛰어났다.
반면 경호는 마력과 독기를 다루는 능력이 뛰어났다.
흰둥이가 경호의 부탁에 앞발을 뻗어 신력을 불어넣었다.
비스트의 핏기없이 창백한 피부에 혈기가 돌며 조금 진정되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비스트의 내부는 계속해서 망가지는 중이었다.
경호는 양손을 뻗어 한 손은 심장에 다른 한 손은 배꼽 아래 붙었다.
“비스트가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네. 흰둥아! 부탁한다!”
경호는 먼저 심장에 대고 있는 오른손에 마력을 모아 흡력을 이끌었다.
심장을 통해 폭주하는 독기를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크윽. 제법 독하네.”
마왕군과 싸우며 독이란 독은 다 겪었던 경호였다.
만독불침의 수준은 아니어도 웬만한 독은 끄떡없는 수준이었다.
거기다 경호의 체내로 들어온 독기를 즉시 경호의 심장이 게걸스럽게 먹어 치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동시에 신력과 정령력, 마력을 생산해 내기 시작했다.
경호는 그 세 가지 기운을 이용해 메말라 부서지기 직전인 마나코어를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깨질 듯 불안한 마나코어를 신력으로 감싸고는 정령력, 그중에서도 회복력이 가장 우수한 물의 정령력을 따로 뽑아 가닥가닥 끊어져 있는 마나회로를 통해 흐르게 만들었다.
처음에는 끊어져 있는 마나회로로 흘러가지 않았지만 경호가 계속 신력으로 끊어진 마나회로를 회복시키며 물의 정령력을 부드럽게 밀어 넣자 어느 순간 회로에 기운이 돌기 시작했다.
그러자 비스트의 온몸에서 시큼한 냄새가 풍기는 검은 땀방울이 흘러나왔다.
경호가 비스트의 심장을 통해 독기를 대부분 흡수해서 처리하긴 했지만 깊숙이 박혀 있는 미세한 독기까지 모조리 빨아들이지 못했다.
마나회로에 기운이 돌자 남은 그런 독기가 자연스레 스며 나온 것이었다.
엉망이 된 비스트의 내부가 죽지 않을 정도로 나아졌다.
하지만 여전히 옆구리는 내장이 비칠 정도로 크게 벌어져 있는 상태였다.
“너도 저 정도 상처는 힘들지?”
-상급 물정령인 ‘운애’라면 가능할지도 모르겠네요.
내상을 겨우 다스려 애써 살려 놓은 비스트가 외상으로 죽게 생겼다.
“외상에는 똥약인…. 억! 그래! 똥약!”
무의식 간에 중얼거리던 경호가 서둘러 아공간을 열어 작은 주머니를 꺼냈다.
그리고 그 속에서 푸른색 환약을 꺼내 들었다.
마지막 남은 ‘똥약’이었지만 아깝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먹어야 할 비스트가 걱정되는 경호였다.
“두 번째니까 좀 나을 거야.”
정신을 잃은 비스트는 경호의 말을 분명 듣지 못했지만 잠시 몸을 부르르 떨었다.
벌어진 입에 ‘똥약’을 밀어 넣자 물처럼 변해 목구멍을 타고 스르륵 넘어갔다.
약력이 갑자기 몰려 오히려 독이 될 수도 있기에 경호가 신력, 정령력, 마력을 뽑아내 터져 나간 옆구리를 보호했다.
그때였다.
“끄어어어어어어억!”
그의 입이 벌어지며 죽어 가는 사람처럼 묵직한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경호의 목소리는 비스트의 비명보다 더 컸다.
“정신 차려! 기절하면 안 돼! 기운을 최대한 몸 안에 흡수해!”
“커억! 커어억!”
하지만 비스트는 여전히 정신을 제대로 차리지 못한 상태였다.
“흰둥아! 정신 좀 번쩍 나게 만들어 줘!”
-네엣?
“백만 볼트!”
경호의 말에 흰둥이가 앞발을 서로 살살 비볐다.
자칫 너무 강하게 전격을 날리면 정신을 차리는 것이 아닌 정신이 나가 버릴 수도 있었기에 조심해야 했다.
-갑니다!
흰둥이가 번쩍이는 앞발로 비스트의 관자놀이를 짚었다.
파지직!
비스트의 초록색 머리카락이 번쩍하며 삐죽거리더니 부스러지며 사라졌다.
“커어어어억!”
그와 동시에 감겨있던 비스트의 눈이 번쩍 뜨였다.
“겨, 경호 씨?”
순간 비스트는 자신의 상황을 떠올렸다.
리나를 쫓아왔고 그녀의 계략에 빠져 싸우다 죽을 위기에 처했다.
아니 분명 죽는 것이 분명한 상황이었다.
“끄어어어어어어억!”
묵직한 기운이 몸 내부를 휘돌고 있었다.
마치 가슴을 불로 지지는 듯한 극렬한 통증이 일어나고 있었다.
하지만 그 통증 이면에 기운이 움직이며 내부가 진정되고 외상이 회복되는 것이 느껴졌다.
‘이, 이거….’
비스트는 바보가 아니었다.
그리고 똥약의 기억은 쉽게 잊을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경호 씨가 그때 저를 살렸던 바로 그 은거기인이셨군요.”
경호가 비스트의 흔들리는 눈빛을 보며 끄덕였다.
잠시 후 비스트의 흔들리던 눈빛이 가라앉았다.
“경호 씨. 저는 괜찮으니 서두르세요. 다현이 위험합니다. ‘리나’라는 엘프 은신이나 독을 다루는 능력이 보통이 아닙니다.”
경호가 보기에도 비스트는 이제 위험한 고비는 넘긴 상황이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오늘 일 마무리하고 식당에서 같이 치맥이나 하시죠.”
비스트가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이자 경호가 몸을 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