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화
단순한 마사지사가 아닌 악마계약자인 리나는 당연하게도 평범한 엘프 이상의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파루스가 악마계약자가 되며 엄청난 수준의 마도공학을 익혔듯이 리나 역시 암살에 필요한 능력을 갖춘 전문 암살자였다.
물의 정령을 다루는 능력이야 ‘엘프’라는 종족 특성으로 사용하는 것이 맞지만 은신과 용독술, 최면, 세뇌, 마도공학 같은 것들을 배웠다.
“다현을 죽이는 건 어렵지 않은데….”
사실 리나는 다현에게 다가갈 수만 있다면 죽이는 것은 어렵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자신의 능력이라면 은밀하게 다가가 독이 묻어있는 단검으로 깊숙이 찌르면 그만이었다.
그렇게만 하면 인질로 잡힌 동생을 살릴 수 있었다.
“하지만 다가가는 것 자체가 쉽지 않단 말이야.”
그렇다고 방법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다가가는 게 어려우면 다가오게 만들면 되는 거니까.”
***
7대 마왕. 아니 정령계를 침략하는 과정에서 바알과 벨페고르가 죽어 이제는 5대 마왕이 된 이들은 서로 치열하게 세력싸움을 하는 중이었다.
그렇기에 당연하게도 사이가 좋지 않았다.
하지만 필요할 경우 아주 조금이지만 서로 연락이라는 것을 했다.
특히나 정령계에서 죽은 마왕 덕에 서로 견제하며 반목하다 위험해질 수 있다는 것을 몸소 느꼈기 때문이었다.
특히나 이번 지구 침략은 더더욱 그랬다.
용사.
마신(魔神)께서 직접 ‘용사’를 언급하며 경고 메시지를 보낸 상황이었다.
루시퍼, 마몬, 레비아탄, 사탄, 아스모데우스.
다섯 마왕의 최측근 악마 귀족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서로 조금씩 연락을 하며 지내는 사이가 되긴 했지만 이렇게 직접 모인 것은 마계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아가레스! 도대체 ‘용사’라는 인간은 언제 처리하는 거지? 아니 우리가 고작 인간 하나에 이렇게 뭉개고 있을 필요가 있기나 한 건가?
날카로운 뿔이 돋아나 있는 검은 색 사자, 마르바스가 외눈박이 노인의 모습을 한 아가레스를 보며 으르렁거렸다.
-고작 인간 하나에게 바알님과 벨페고르님이 죽었다. 벌써 잊은 건가? 멍청한 건 자랑이 아니다. 마르바스.
크르르르!
마르바스가 아가레스를 보며 이빨을 보이며 인상을 썼지만 그뿐이었다.
-걱정마! 오늘 그 ‘용사’라는 계집도 끝이니까.
마왕 ‘사탄’의 3군단장이자 말의 머리를 한 오로바스가 회합에 모인 이들을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오로바스. 그게 무슨 소리지? 지금까지 ‘악마계약자’를 이용한다고 해 놓고 계속 실패만 하지 않았나?
-다른 멍청이들과 날 비교하지 마라. 기분 나쁘니까. 오늘 용사의 목을 치고 곧바로 보물창고를 열 생각이다.
-다른 놈들도 다 그런 소리를 했던 것 같은데?
-이번에는 다르다고. 내가 특별한 선물을 줬거든. 아주 재미있을 거야.
오로바스의 말에 다른 이들의 눈에 살기가 감돌며 붉게 타올랐다.
-이제 곧 인간들의 야들야들한 고기 맛을 볼 수 있겠군.
-다들 하루라도 빨리 맛보려면 준비들 잘 하라고!
***
신화 마도공학연구소는 가디언의 폭주로 대부분의 시설물이 부서져 엉망이었다.
신화건설의 인력이 대거 투입되어 복구하고 있었지만 파괴된 현장은 금방 해결될 수준의 상황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경계 자체는 삼엄했지만 그 범위가 넓어 제대로 되지 않고 있었다.
아니 그렇지 않더라도 이러한 혼란 속에서 경계를 서는 보안 요원 중 조그만 생쥐 따위에게 관심을 주지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것이 비록 초록빛을 띠는 신기한 생쥐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찍! 찍찍!
부서진 건물의 외벽을 타고 들어간 녹색 생쥐는 환풍구를 타고 달리다 멈춰 서서는 그 안쪽을 쳐다보며 잠시 고민했다.
‘여기가 맞는 것 같군.’
비스트가 침투 전에 미리 위치를 확인했던 피로회복실의 탈의실이었다.
만약 신 박사의 죽음이 리나와 관련돼 있다는 것을 알렸다면 이곳이 이렇게 방치돼있지 않겠지만 현재 그러한 사실은 회의실에서 신 박사의 죽음을 목격한 이들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모르는 사실이었다.
그렇기에 지금도 엉망이 된 가디언 격납고와 연구실 위주로 복구가 한창이었지만 상대적으로 피해가 적은 이 주변은 조용했다.
텅 비어 있는 피로회복실로 들어온 비스트가 번쩍하고 초록빛을 뿜으며 인간 모습으로 변했다.
그리고는 코를 킁킁거리다 미간을 찌푸렸다.
“이 역겨운 냄새는 분명 마기군.”
대격변 이후 대기 중 마기 농도가 높아졌다고 해도 이런 역한 냄새가 날 정도로 진한 마기를 풍기는 곳은 흔치 않았다.
킁킁! 킁킁!
역겨운 마기의 악취에 섞여 흐릿하긴 했지만 분명 또 다른 냄새가 느껴졌다.
그 냄새가 풍겨 나오는 곳을 따라 이동하니 사물함이 보였다.
덜컥덜컥. 콰앙!
잠겨 있는 사물함을 힘으로 부순 비스트는 그 안에서 리나가 입었던 유니폼을 발견했다.
“빙고!”
리나의 체취가 가득 묻어있는 유니폼의 소매를 뜯어낸 비스트가 다시 생쥐로 변해 환풍구로 뛰어들어 모습을 감췄다.
그렇게 정적이 흐르던 공간에 갑자기 사람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내가 비스트처럼 리나의 뒤를 쫓을 순 없지만 비스트는 쫓을 수 있다고 했잖아.”
탈의실 구석에서 흰둥이를 옆구리에 낀 경호가 모습을 드러냈다.
“자아. 그럼. 흰둥아. 이제부터는 이 냄새를 맡고 리나를 찾아보자. 그러면 우리가 비스트보다 먼저 찾아낼 수 있잖아.”
흰둥이 코앞으로 경호가 유니폼을 들이밀었다.
-네? 제가요?
“이 냄새로 리나를 추적하면 되잖아?”
-경호 님. 이 냄새로 쫓으라고요?
“너 개잖아! 그것도 주신의 반려견이라며! 그 정도도 못하는 거야?”
-물론 후각이 좋기는 하지만 따로 훈련하거나 특성이 있는 것도 아닌데 냄새만 맡고 그걸 어떻게 찾아냅니까? 똑같은 인간이지만 인간도 누군 똑똑하고 누구 멍청하고 하잖아요?
“…. 너 마지막 그 말 왠지 나보고 하는 거 같다.”
-에이. 경호님. 그냥 그렇다는 겁니다. 너무 의미 부여하지 마시고요.
경호가 흰둥이를 말없이 노려보다 비스트가 나간 방향으로 서둘러 움직였다.
흰둥이는 속으로 경호의 눈치가 많이 늘었다는 생각을 했다.
***
‘여긴 또 어디야?’
냄새를 쫓아 리나를 찾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지만 비스트의 기운을 쫓는 것은 경호에게 그렇게 힘든 일은 아니었다.
그렇게 뒤를 쫓던 비스트가 멈춰선 곳은 서울 외곽의 위험구역으로 분류된 곳이었다.
아우우우우우우!
녹색 늑대의 모습으로 변한 비스트가 반쯤 부서진 건물의 담장에 올라 길게 포효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도 적막만 흐를 뿐이었다.
‘뭐야?’
허공에 떠서 그러한 모습을 지켜보던 경호가 고개를 갸웃거릴 때였다.
크르르르르! 컹컹! 컹컹!
십여 마리의 커다란 개들이 달려오기 시작했다.
비스트가 원래 모습으로 변해 담장에서 달려온 개들을 향해 뛰어내리자 아주 난리가 났다.
할짝! 할짝!
개들은 비스트의 다리에 몸을 비비고 손을 핥으며 애정을 표현했다.
“그래. 그래. 다들 잘 있었지?”
이 개들은 단순한 떠돌이 개들이 아니었다.
엄청난 힘을 얻었지만 가족을 잃은 비스트가 삶을 포기하지 않고 지금까지 버틸 수 있게 해준 가장 친한 친구이자 가장 충직한 부하, 가장 사랑하는 가족이었다.
십여 마리의 개들을 하나하나 안아주던 비스트가 품에서 작은 천 조각을 꺼냈다.
바로 리나의 유니폼 조각이었다.
“애들아. 이거 냄새 맡아봐. 너희가 좀 도와줘야 할 일이야.”
개들의 후각 능력은 인간에 비해 10000배나 뛰어나며 훈련에 따라 그 능력은 더욱 성장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훈련된 개는 완전하게 밀봉한 마약도 찾아낼 수 있고 환자의 체취만으로 질병을 분별하기도 했다.
이 개들 역시 비스트가 특별히 훈련 시켰기에 군견들보다 추적 및 탐색에 있어 더 뛰어난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킁킁! 킁킁!
그렇게 리나의 냄새를 기억한 개들이 고개를 돌려 한 곳을 바라봤다.
“찾았구나!”
컹컹!
개들이 달려가자 비스트는 그 뒤를 쫓아 달렸다.
***
킁킁!
개들이 냄새를 맡으며 북악산 자락을 타고 오르기 시작했다.
비스트 역시 혹시 모를 공격에 대비해 주변을 경계하며 뒤를 따랐다.
하지만 흐릿한 달빛 아래 우거진 숲속은 비스트의 날카로운 감각으로도 흔적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비스트가 유심히 살피고 지나간 나무에 작은 물방울이 맺혀 있었다.
그리고 그 물방울, 하급 물의 정령을 통해 리나는 모든 것을 관찰하고 있었다.
시야 공유.
정령술사의 가장 기본적인 능력 중 하나였다.
북악산 자락을 뛰어오르는 개들과 그 뒤를 쫓는 비스트를 보며 리나가 피식 웃었다.
“역시 비스트의 추적 능력은 대단해. 하지만 이정도는 내 예상 범위 안이라고.”
따악!
리나가 손가락을 소리 내어 튀기자 그녀 주변을 둥둥 떠 있던 반투명한 물방울이 진동하며 뿌연 운무를 뿌리기 시작했다.
“연기만 까는 건 너무 식상하니까….”
작은 유리병을 꺼낸 리나가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조금 더 재미있게 만들어 볼까?”
***
컹! 컹컹!
넓게 퍼져 산을 오르던 개들이 점점 모여들고 있었다.
‘점점 가까워지고 있는 모양이…. 엇!’
뒤를 쫓던 비스트의 눈빛이 더욱 날카로워졌다.
휘잇!
비스트가 전방을 주시하다 낮게 휘파람을 불어 개들에게 멈추라는 신호를 보냈다.
운무였다.
하지만 점차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짙어지는 것을 보니 자연스러운 현상은 아닌 듯싶었다.
‘제길. 달빛도 흐린 숲속에서 짙은 운무까지 더하면 시야는 포기해야 한다.’
엘프는 감각이 뛰어난 종족으로 유명했기에 비스트는 더욱 긴장하며 운무를 향해 걸어갔다.
그때 멈춰있던 개들에게서 이상 반응이 나타났다.
켁! 케엑!
운무에 가까이 있던 개들이 신음과 함께 격한 기침을 해대기 시작한 것이었다.
“잭슨! 마이클! 재키!”
털썩!
기침하던 개들이 피를 토하며 그대로 쓰러졌다.
“다, 다들 물러서!”
비스트가 서둘러 쓰러진 개들에게 달려갔다.
피를 토하고 쓰러져 길게 빼문 혀는 검게 변해있었다.
중독 증상이었다.
“죽인다! 이 악마 같은 년!”
저 멀리서부터 몽글몽글 다가오는 운무는 무릎 높이 정도로 낮게 깔려있었다.
그렇다는 것은 처음부터 자신이 아닌 개들을 노린 것이었다.
“너희들은 돌아가!”
끼잉! 끼잉!
비스트의 말에도 살아남은 개들은 낑낑거리며 자리를 벗어나지 않고 있었다.
주인인 ‘비스트’에 대한 걱정과 죽은 동료에 대한 슬픔 때문에 그런 것이었다.
“어서 돌아가. 아빠가 여기 애들 챙겨서 금방 갈게.”
비스트가 다시 한번 이야기하자 그제야 꼬리를 축 늘어뜨리고는 몸을 돌렸다.
이제부터 개들의 안내가 필요 없었기에 개들이 물러나는 것을 확인한 비스트가 몸을 날렸다.
번쩍이며 비둘기로 변한 비스트가 빠르게 날아갔다.
“그럼. 연락해볼까?”
멀리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경호가 다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거기냐?
전화를 받은 다현이 다짜고짜 ‘거기냐?’를 외쳤다.
“어. 여기야.”
이미 경호의 위치를 추적하고 있는 상태였다.
-3분 안에 갈게.
전화를 끊은 경호가 비스트의 기운이 느껴지는 곳으로 뒤쫓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