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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환용사의 골목식당-145화 (145/335)

#145화

금발에 밝고 활발한 성격의 리나와 다르게 은발에 차분하고 조용한 성격의 레나는 신 박사 자신조차 놀랄 정도로 좋은 아이디어를 쏟아 냈다.

그런 그녀의 도움이 없었다면 mg-SP라는 이 엄청난 로봇은 절대로 나올 수 없을 거라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레나가 연구실을 찾은 적이 없다고? 아니 그게 무슨 소리야.”

신재용 박사는 혼자 중얼거리다 김현태 연구원에게 다가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미안하네. 내가 독단적으로 일을 처리했던 것은 정말 미안하지만 그런 억지라니. 지금 당장 추적할 수 있는 코드를 알려 주겠네. 하지만 그것을 가지고 이렇게 모함하면 쓰나!”

“박사님. 도대체 무슨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동안 쉬쉬하고 있었지만 연구원들 모두 아는 이야기입니다. 아니 보안 요원들까지 아는 이야기입니다. 지금 연구소에 소장님의 추문이 얼마나 시끄러운지 아십니까?”

“그게 무슨 소리야! 그러면 나는 누구와 로봇을 만들었다는 거야!”

“혼자 만드셨겠지요!”

회의실 분위기가 너무 가열되자 건용이 입을 열었다.

“신 박사는 탈주한 로봇을 서둘러 추적하게.”

“후우…. 네. 알겠습니다.”

건용의 말에 자리에서 일어나던 신재용 박사는 갑자기 어지러움을 느끼며 비틀거렸다.

“소장님!”

조금 전까지 날을 세웠던 김현태 연구원이 놀라 비틀거리는 신 박사의 팔을 부축했다.

“케엑! 켁!”

그때 신 박사의 표정이 검붉게 변하며 심하게 기침하며 각혈을 했다.

“치료팀 당장 불…. 어!”

성원이 소리를 지르다 신 박사의 몸에서 느껴지는 이질적인 기운, 바로 마기에 놀라 멈칫거렸다.

성원뿐만이 아니었다.

다현을 비롯한 정수와 호돈까지 신재용 박사의 몸에서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마기를 느낄 수 있었다.

경호의 전음이 다시금 떠오른 다현이 성원을 보며 외쳤다.

“성원아! 나 경호 좀 보고 올게!”

다현은 급하게 밖으로 뛰어나갔다.

***

수풀로 우거진 북한산 한 자락과는 어울리지 않는 금발의 미녀가 바위에 걸터앉아 있었다.

뾰족한 귀, 창백할 정도로 하얀 피부를 가진 그녀는 신화 마도공학연구소의 피로회복실 실장인 ‘리나’였다.

“S급인 다현이야. 그렇다고 치지만 B급 수준이라는 다른 애들도 뭐 저렇게 강해? 가디언을 쓰더라도 용사를 처리하는 게 쉽지는 않겠는데.”

리나가 앉아 있는 바위 옆으로는 그 바위보다 커다란 은빛 구체 십여 개가 놓여 있었다.

바로 폭주하여 탈주한 mg-SP, 가디언이었다.

가디언을 이용해 다현의 실력을 가늠해 보려고 했었는데 아무런 피해도 주지 못하고 간단하게 파괴되어 버렸다.

예상을 아득히 뛰어넘는 실력에 리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괜히 ‘용사’라고 불리는 인간이 아니었어. 하지만 무조건 성공해야 해.”

리나의 표정이 조금 더 단단하게 굳어졌다.

“어차피 마계에 먹힐 운명인 인간에게 용사 따윈 필요하지 않아. 어차피 그딴 것은 희망 고문일 뿐이니 차라리 없는 게 나아.”

용사.

웃기는 소리였다.

자신이 살던 세상에도 그런 이들이 있었다.

세계수의 사랑을 받는 순수한 존재.

‘하이엘프’라 불리는 특별한 족속들.

마계의 침략에 모두가 ‘하이엘프’를 찾으며 울부짖었지만, 그들은 마을이 불타고 부족들이 멸족하는 상황에서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다 결국 대세가 기울자 항복 선언을 하며 마계로 복속을 택했다.

그렇게 변절한 하이엘프는 마기를 받아들여 새로운 마족이 되었다.

그리고 남은 엘프들은 마족의 먹이나 놀잇감이 되었다.

‘리나’는 제법 재능이 있는 엘프족 전사였다.

그래서 살아남아 악마계약자가 될 수 있었다.

물론 단순하게 계약의 문양만 새기진 않았다.

그들은 그녀의 유일한 혈육이었던 쌍둥이 동생 레나를 인질로 잡아 이용했다.

하루에도 수백 번 마계의 악마 놈을 죽이고 싶었지만.

‘이번 일만 끝내면 동생을 풀어 주마.’라는 약속과 그들이 가끔 보여 주는 동생의 모습에 리나는 악마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이번이 진짜 마지막이다! 용사만 처리하고 동생을 데리고…. 하아.”

그래 봐야 마계의 변절자들이 있는 하이엘프의 영역에서 살아야 했다.

세계수의 따뜻하고 포근한 기운이 아닌 마기의 끈적하고 기분 나쁜 기운을 받으며 말이다.

“악마계약자인 나도 변절자이긴 마찬가지지….”

동생을 살리기 위해서라고 스스로 자기합리화를 하고 있긴 했지만 ‘하이엘프’라 불렸던 쓰레기와 하등 차이가 없었다.

“이런 빌어먹을 상황에 감상에 젖는 것도 사치지. 용사를 확실히 죽일 계획이나 세워야겠군.”

인질이 잡혀 있는 악마계약자인 리나에게 어차피 다른 선택지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

“경호!”

다현이 식당 앞에서 서 있던 경호에게로 달려왔다.

“괜찮아? 다친 곳 없지?”

경호도 멀리서 잘 막아 낸 것을 알았지만 혹시나 하는 맘에 다현의 안부를 물었다.

“어. 그나저나 빨리! 신 박사가 갑자기 쓰러졌는데 몸에서 마기가 풍겨 나오고 있어.”

“뭐!”

“빨리 와 봐!”

다현의 재촉에 경호가 고개를 저으며 그런 그녀를 진정시켰다.

“야. 진정해. 그리고 내가 가면 되겠냐. 내가 뭐라고. 네 눈엔 내가 용사일지 몰라도 다른 이들에게는 식당사장일 뿐이라고!”

“아! 어쩌지?”

전음을 떠올리고 무작정 달려온 다현은 경호의 말에 현실을 깨닫고는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제가 가서 보죠. 환자 보는 것은 경호보다 나을 테니까요.”

갑자기 푸른 빛이 번쩍이더니 하늘색 원피스를 입은 운애가 경호의 옆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아! 운애 씨!”

갑자기 나타난 운애의 모습에 다현이 놀라 소리치듯 불렀다.

“그래. 그러면 되겠네. 가자.”

“어!”

다현이 앞장서고 경호와 운애가 그 뒤를 쫓았다.

***

의료팀이 와서 피를 토하는 신재용 박사의 상태를 살폈지만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특히나 힐러인 김세연 의료팀장은 신재용 박사에게서 흘러나오는 마기를 처리하는 것만으로도 진땀을 흘리는 중이었다.

“길드장님. 박사님의 몸에서 나오는 마기가 너무 강해요! 자칫하면 폭주할 수도 있을 거 같습니다.”

딱딱하게 굳은 표정의 세연이 성원을 보며 다급하게 소리쳤다.

“조금만! 조금만!”

그때였다.

회의실 문이 열리며 다현과 경호. 그리고 운애가 들어왔다.

그들의 모습을 확인한 성원은 비로소 한숨을 돌렸다.

“혹시 제가 좀 봐도 되겠습니까?”

운애가 나서자 세연이 미간을 좁히며 길드장인 성원을 쳐다봤다.

“김 팀장. 그분은 유능한 정령술사 분이세요. 잠시만 볼 수 있게 해주세요.”

“알겠습니다.”

세연이 비켜서자 운애가 마구 몸을 떨며 피를 토하고 있는 신 박사에게 다가가 상태를 살폈다.

-어때?

-살리긴 힘들어. 마기가 이미 골수 깊이 파고들었어. 세뇌당한 듯한데.

운애의 전음에 경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전신에서 풍겨 나오는 마기의 양이 심상치 않았다.

“느껴지기로는 마계의 인물에게 세뇌를 당한 것 같아요. 살리는 건 불가능하고 마기의 폭주를 막아 정신을 잠시 회복시키는 정도만 가능할 거 같아요.”

운애의 말에 회의장의 분위기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신재용 박사.

세계 최고의 마도공학기술자인 그의 죽음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거기다가 마계의 인물에게 세뇌를 당했다니.

그렇다면 지금 ‘가디언’이 사라진 것과 신 박사의 이상한 행동 역시 모두 이해가 갔다.

“후우. 이것 참. 도대체 어디서부터 꼬인 건지.”

건용이 한탄 섞인 말을 내뱉었다.

“김 팀장. 자네 의견은?”

성원의 물음에 세연이 곰곰이 고민하다 대답했다.

“저로서는 폭주를 막아 내는 것도 싶지 않습니다. 지금으로서는 다른 방법이 없는 것 같습니다.”

“운애 씨. 그렇게 해 주세요. 정수야. 너는 지금부터 영상으로 남겨.”

성원의 말에 정수가 고개를 끄덕이곤 폰을 꺼내 들었다.

“시작할게요.”

운애의 손에서 주먹만 한 물방울이 생겨나더니 그대로 신 박사의 몸을 감싸며 돌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물방울이 쪼개져 작은 물방울로 변해 그의 코나 벌어진 입으로 들어가고 나오길 반복했다.

그렇게 신 박사의 내부로 들어간 물방울은 검붉은 기운을 담은 채 밖으로 나와 운애의 손길에 다시 맑아져서 다시 몸 안에 들어가 검붉은 기운을 담아 나오길 몇 번 반복했다.

“크윽.”

검붉은 피를 토해 내던 신 박사의 입에서 피가 멎고 신음이 흘러나왔다.

새까맣게 빛나던 그의 눈동자가 제빛을 되찾았다.

“이게 무슨? 아니 여기는?”

바닥에서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주변을 살피던 신 박사가 힘겹게 몸을 일으키다 건용을 비롯한 이들을 보고 놀라 물었다.

“회장님! 아니 여긴! 무슨 일이지요?”

그는 기억을 잃은 듯했다.

“자네 아무런 기억도 나지 않는가?”

건용의 물음에도 신 박사는 자신의 모습에 놀라 제대로 대답을 못 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처음 보는 곳에 쓰러져 있는 것도 충분히 이상했는데 입고 있는 옷은 온통 검붉은 피로 칠갑이 되어 있는 상태였다.

거기다 이곳에 있는 이들도, 거기다 그들이 짓고 있는 표정도 다 이상했다.

신 박사는 똑똑한 사람이었다.

“저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겁니까? 제 마지막 기억은 ‘리나’라는 피로회복실 실장에게 마사지를 받으며 정령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 것…. 아.”

바닥에 털썩 주저앉은 신재용 박사는 자신의 상태를 살피다 건용을 쳐다보며 다시 말했다.

“검붉은 피며 심장이 뜨끔거리는 것이며. 지금 저의 몸 상태로 보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네요. 회장님. 이야기해 주십시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하아. 이거 정말 미치겠군.”

건용이 깊은 한숨을 쉬다 물었다.

“정말 그 뒤로 기억이 하나도 없나?”

건용의 질문에 신 박사가 아닌 운애가 대답을 했다.

“골수에 박힌 마기를 일시적으로 흩어 냈기에 마기가 지배하고 있을 때 겪은 일은 기억하지 못하는 겁니다.”

운애의 말에 신 박사는 자신의 상태와 이곳의 분위기를 바탕으로 상황을 추론해 냈다.

“골수에 박힌 ‘마기’라…. 가디언이 완성됐겠군요. 그리고 그것을 누군가, 아니 ‘리나’라는 인물이 탈취했고요. 필요 없어진 저는 이렇게 바보같이 당해서 죽는 거고요.”

“안타깝지만 그렇다네.”

“몇 기입니까?”

“열넷. 마력을 다룰 수 있는 킬러 로봇 열넷이네.”

“결국 마력을 다룰 수 있는 킬러 로봇을 만들어 냈군요. 그러고도 멍청하게 이렇게 일을 망치다니….”

신 박사는 자조 섞인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뭔가 방법이 없겠나? 가디언의 숨겨진 약점 같은 거 말일세.”

“후우. 회장님. 제 기억을 살릴 수 없습니까? 분명 그러한 약점이 존재할 겁니다.”

건용을 비롯한 모든 이들의 시선이 운애를 향했다.

“음. 흩어 놨던 마기를 다시 골수에 몰아넣으면 됩니다. 대신 그러면 다시 발작을 일으키거나 폭주할 수도 있습니다.”

운애의 말에 신재용 박사가 무언가를 결심한 표정으로 물었다.

“어차피 죽을 목숨 아닙니까?”

“그렇지만….”

“부탁드립니다.”

마기를 정령력으로 강제로 뽑아내 흩어 놨기에 다시 마기를 주입하면 몇 배는 더 고통스러울 게 분명했다.

“흩어 놨던 마기가 더욱 발작하며 많이 아플 겁니다.”

“부탁드립니다.”

운애가 손을 뻗어 자신의 힘으로 흩어 놨던 마기를 다시 풀어 주었다.

그러자 각성자가 아닌 이들도 느낄 수 있을 정도의 마기가 신 박사를 향해 맹렬히 달려들었다.

“커억! 컥!”

신 박사의 눈동자가 다시금 검게 물들었다.

몸을 부들부들 떨던 신 박사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커어억. 구동핵에 정령의 기운으로 움직일 수 있는 코드를 심어 놨습니다. 그렇기에 리나가 조종할 수 있는 것이고요.”

세뇌된 기억이 아닌 리나가 시킨 제대로 된 기억을 떠올린 신 박사가 마지막 힘을 쥐어짜서 말했다.

“그녀가 죽이고자 한 인물은 바로 다현 헌터님입니다. 분명 용사인 다현을 죽이면 다 끝난다고 말했…, 컥. 커억!”

신 박사가 그대로 피를 토하며 바닥에 쓰러졌다.

그리고 그것이 그의 마지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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