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대한민국 명동.
마계침략 2페이즈 돌입 후 극지던전이 생긴 곳은 이곳 한곳만이 아니었다.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랜드마크인 그리피스 공원(Griffith Park)과 일본 도쿄에서 가장 오래된 사찰인 센소지(浅草寺)에도 극지던전이 생겼다.
한미일의 삼국에 생긴 미확인 S등급 던전에 때 아닌 눈치게임이 시작됐다.
먼저 도전하기에는 위험부담이 크고 손 놓고 있을 수도 없는 그런 상황.
가장 먼저 공략을 알린 것은 대한민국이었다.
삼국 중 S급 헌터의 수가 가장 적어 공략이 미뤄질 거라는 모두의 예상을 깬 움직임이었다.
거기다 공략을 도전한 길드 역시 모두가 예상한 ‘피닉스 길드’가 아니었다.
신화 길드 역시 ‘대한민국 3대 길드’라 불리긴 했지만 다들 ‘신화’라는 배경과 막대한 ‘자금’으로 쌓아올린 모래성 같은 곳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그런데….
6시간 37분.
보통 하루 이상이 걸리는 S급 던전을 모두의 예상을 깨고 공략에 성공했다.
별 볼 일 없다고 무시당하던 바로 그 ‘신화 길드’가 대형 사고를 쳤다.
S급을 뛰어넘는 다현의 힘과 솔딘과 파루스가 만들어준 체온유지장치.
결정적으로 경호의 존재를 알 리 없는 미국과 일본은 신화 길드의 공략 소식에 미확인 던전을 지레짐작하곤 공략을 서두르기 시작했다.
***
미국 연방수사국(FBI) 직속 기관인 헌터관리부 대회의실은 뜨겁게 달아올라 있었다.
쾅! 쾅! 콰앙!
“아니 지금 이게 도대체 무슨 망신이야! 일본도 아니고 한국에게 밀렸다는 게 말이나 되냐고!”
관리부국장인 존슨은 주먹 쥔 손으로 연신 책상을 때리며 소리쳤다.
“아우! 진짜!”
존슨은 지금 잔뜩 화가 나있었다.
-미확인 S급 던전 최초 공략! 미국도, 일본도 아닌 한국이 성공하다!
오늘자 ‘USA투데이’의 헤드라인(headline) 뉴스의 제목이었다.
“이것 봐! 이 기사를!”
-미확인 S급 던전 최초 공략! 미국도, 일본도 아닌 한국이 성공하다!
존슨은 책상 위에 있는 USA투데이를 들고 펄럭였다.
“미국이 아시아의 질 떨어지는 노란 원숭이에게, 그것도 일본도 아닌, 한국에게 밀렸다고 떠들어 대고 있다고!”
회의실은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존슨의 인종주의적 사고방식이 병적이라는 것을 모르는 이는 회의장 안에 없었다.
“길드 모두 소집해서 어떻게든 오늘 내로 공략해! 이러다 일본한테도 밀리면 다들 감봉은 기본에 연봉 동결은 옵션으로 가는 걸로 알고! 알았나?”
지 입으로 ‘저 멍청한 옐로 몽키들이 실패하고 전 세계의 눈이 미국으로 쏠릴 때, 시작해도 될 일이다.’라고 말한 지 하루밖에 지나지 않았건만.
발끈거리며 성질만 내는 존슨의 모습에 다들 속으로 뻑! 뻑! 뻑!을 외쳤다.
하지만 헌터관리부에서 존슨 부국장의 말은 곧 법이었다.
“뭐해! 안 움직여? 어! 움직이라고 이 멍청한 놈들아!”
존슨의 분노에 힘입어 1시간이 지나 미국 최강이라고 불리는 드래곤길드의 대표가 대회의장을 찾았다.
드래곤길드 길드장, 볼칸 후커.
보유 S급 헌터만 73명.
자타공인 미국 최고의 길드이자 2년째 세계 랭킹 2위를 고수하고 있는 최강의 길드였다.
“길게 말하지 않겠네. 자네도 눈과 귀가 있으니 알고 있겠지?”
한국의 신화 길드라는 듣보잡이 ‘세계 최초’라는 타이틀을 가져간 것을 모르는 이는 없었기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불을 다루는 S급 헌터 하나에 A급 수준의 헌터 네 명이 들어가서 공략했더군.”
존슨의 말에 볼칸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덧붙였다.
“김다현. 한국의 대표하는 헌터로 작년 기준으로 세계 50위 수준인 인물입니다.”
그러자 존슨이 그런 볼칸을 신기한 눈으로 쳐다봤다.
“아니, 자네. 세계 50위권 헌터의 정보도 알고 있나? 킴대횬? 나는 처음 들어보는 거 같은데?”
“붉은 머리색이 아주 멋진 여성이입니다. 물론 얼굴이나 몸매도 훌륭하고요.”
“아. 여자였나? 자네 또 구미가 당기는 모양이군?”
볼칸의 ‘머리카락’에 대한 병적 페티시와 여성 편력은 기사화될 정도로 유명했다.
다현을 언급할 때 볼칸의 눈빛이 불길하게 번뜩거렸다.
“그래서 꼭 한번 만나고 싶긴 하더군요. 부국장님. 어떻게 저희 길드에서 시원하게 공략해 드릴 테니 자리 한 번 만들어 주시겠습니까?”
볼칸의 말에 존슨이 머릿속으로 계산기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한국의 ‘세계 최초’ 공략이라는 이슈를 누르려면 드래곤길드 정도가 나서야 가능하다. 그것도 볼칸이 직접!’
미국 공식 랭킹 1위의 헌터, ‘드래고니안’ 볼칸 후커.
그가 직접 나선다면 ‘한국’이라는 아시아의 소국(小國)에 짓밟힌 자존심을 충분히 회복할 수 있을 것이었다.
‘다현’이라는 한국 헌터 따위와 자리를 마련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기에 존슨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네. 미국의 이름으로 ‘다현’이라는 헌터를 초청하도록 하지. 대신 자네가 직접 나서주게. 미국의 대표로서 어떤가?”
존슨의 말에 볼칸이 환하게 웃었다.
“뭐. 그렇다면 오랜만에 몸 좀 풀고 오겠습니다.”
***
일본 방위성(防衛省) 내 특별 기관 헌터본부대 사령관인 특장(特將) 스다 마사키(菅田将暉)의 입에서 불이 뿜어져 나왔다.
“이런 멍청한 놈들! 미국도 아니고 한국에게 이런 수치를 당할 바에 다들 할복하고 죽어! 이 버러지들아!”
헌터본부대 특장과 돌격대장 7명이 모인 본부청 특장실은 한겨울 시베리아보다 더 찬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타악!
마사키 특장이 손에 쥐고 있던 신문을 테이블 위로 내던지며 소리쳤다.
“눈깔이 있으며 읽어 보라고! 어!”
테이블 위에 오늘자 ‘요미우리신문(讀賣新聞)’의 헤드라인 뉴스 제목이 눈에 띄었다.
-아시아의 패왕(覇王), 한국의 미확인 던전 세계 최초 공략에 망신살!
비행기, 전차, 군함, 병사, 전략 자산으로 군사력을 평가하는 것은 대격변 이후 의미가 없어졌다.
마계의 침략으로 국가 간의 분쟁이 사라지며 전쟁 발발 위험이 거의 없어진 시대에 군사력을 평가하는 기준은 바로 상급 헌터의 보유 숫자였다.
S급 헌터를 공식적으로 223명 보유하고 있는 일본은 아시아 최강국이었다.
“죄송합니다! 마사키 특장님, 허락만 하신다면 제가 목숨 걸고 공략하겠습니다!”
마사키 특장이 깊게 심호흡을 하며 화를 가라앉혔다.
그리곤 자신에게 허락을 구한 아베 료헤이(阿部亮平) 이등특좌(二等特佐)를 쳐다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 할 수 있겠나?”
7명의 돌격대장들 중 가장 젊은 20대 후반의 료헤이는 최근 일본에서 가장 핫한 S급 헌터였다.
곱상하고 여리여리하게 생긴 외모와 달리 현재 던전 공략과 균열 처리 횟수에서 압도적 1위를 기록하는 중이었다.
“특장님! 저와 라이진(雷神)돌격대면 그깟 조센징 따위도 성공한 던전 따위 충분히 공략 가능합니다! 당장 출동하도록 하겠습니다!”
***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랜드마크인 그리피스 공원(Griffith Park)의 천문대 앞 광장에 기자와 시민들이 모여 엄청난 인파를 이뤘다.
작은 연단이 만들어져 있었고 드래곤을 형상화한 금빛 갑옷을 걸친 드래곤길드의 길드장, 볼칸 후커가 그 위에 올라 마이크를 쥐었다.
언제나 그랬듯 볼칸의 얼굴에 자신감이 넘쳐흘렀다.
“우선 위대한 미국의 시민분들께 사과하고 싶네요. 제가 너무 게으름을 피웠습니다. 저 태평양 건너 조그만 나라에서 들려온 소식을 듣고야 정신을 차리고 이 자리에 섰습니다. 죄송합니다.”
물론 당당한 표정의 볼칸의 얼굴에선 미안함 따위는 자리하고 있지 않았다.
“아쉽지만 ‘미확인 던전 공략’에 대한 세계 최초 기록은 손을 떠났습니다.”
6시간 37분.
대한민국의 신화길드가 기록한 시간이었다.
“그래서 전 오늘 세계 최단 시간 공략이라는 기록을 손에 쥐고자 합니다. 이들과 함께라면 3시간, 아니 2시간도 가능하리라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볼칸이 소개한 이들은 모두 드래곤길드 특임대의 조장들로 모두가 세계 20위 안에 드는 랭커들이었다.
“그럼. 다녀와서 다시 인터뷰하도록 하겠습니다. 모두 잠시만 기다려주시기 바랍니다.”
볼칸이 그 말을 끝으로 4명의 특임조장과 함께 거대한 극지던전의 게이트 앞으로 이동했다.
“모두 짐과 장비를 최소한으로 챙겼지? 이번 공략은 첫째도 속도, 둘째도 속도다! 무조건 앞만 보고 달린다! 알았나!”
“넵! 알겠습니다!”
전의를 다진 볼칸은 앞장서서 일렁이는 차원막을 통과해 들어갔다.
이곳에 있는 그 누구도 알아보진 못했지만 던전 위쪽에는 마계어로 ‘한빙(寒氷)’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
저체온증(hypothermia).
심부 체온이 35도 이하로 떨어진 상태를 말하는 의학 용어로 처음에는 피부가 창백해지다 입술까지 청색을 띠게 된다.
그러다 점점 심해지면 졸음이 쏟아지고 말이 어눌해지며 반응이 적어지다 결국 의식이 흐려지며 죽음에까지 이르게 된다.
덜덜덜덜덜덜덜!
금빛의 화려한 갑옷은 진작에 눈보라에 파묻혀 그 화려한 모습이 사라진 지 오래였다.
“이, 이런 제, 제기랄!”
차원막을 통과하자마자 불어닥친 혹한의 추위와 앞이 보이지 않는 눈보라에 볼칸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지금까지 던전은 모두 동굴과도 같은 형태였기에 당연히 보온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았다.
아니 오늘은 공략 속도를 빠르게 하려고 최소한의 방어구를 착용한 상태라 보온에 더 취약한 상태였다.
패닉에 빠진 것은 특임조장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길드장님! 길드장님!”
최고의 공략 효율을 위해 당연히 각자의 임무가 정확히 나눠져 있었다.
특임대 3조장 빌리는 탐색이 주특기였다.
“미쳤어. 이 던전은 미쳤다고.”
벌벌 떨리는 손으로 장비를 조작하던 빌리는 [-117도]라고 표시되는 액정을 확인하고 중얼거렸다.
몰아치는 눈보라로 시야를 확보하지 못해 본대를 놓친 빌리는 서서히 굳어가는 다리를 억지로 끌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때였다.
크아아아아아앙!
거대한 뭔가가 날아왔다.
설호의 앞발이었지만 빌리는 그것을 알아차리기 전에.
퍼어억!
“끄아아아아아악!”
날카로운 발톱에 목덜미가 찢어져 숨이 끊어졌다.
그렇게 여기저기서 포효와 비명이 난무했다.
“뭐야! 뭐냐고! 빌리! 제임스! 론! 루이스!”
이미 설호(雪虎)의 먹잇감이 된 특임조장들의 대답은 당연히 들려오지 않았다.
덜덜덜덜덜덜덜덜덜덜.
볼칸은 온몸을 벌벌벌 떨였다.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것은 인간의 두려움을 자극하고 공포에 빠지게 만든다.
그것은 ‘드래고니안’이라 추앙받는 ‘볼칸 후커’라는 세기의 초인이라도 예외일 수 없었다.
처음 겪어보는 지독한 추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감. 아무도 느껴지지 않는 고독감. 실패에 대한 두려움. 미지의 적에 대한 공포.
이 모든 것이 볼칸을 떨게 만들었다.
“으아아아아! 으아아아아아아!”
처음 느껴보는 감정의 소용돌이에 볼칸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드래곤 브레스’처럼 입에서 불을 뿜어내는 볼칸은 이글거리는 화염을 입에 머금고 소릴 질렀다.
화르르르르르!
불길이 주변을 치솟았지만 휘몰아치는 눈보라에 금세 사그라 들었다.
하지만 번쩍이는 불꽃은 설호에게 좋은 이정표가 되어주었다.
크아아아앙. 크르르. 쿠아아앙.
3마리의 설호가 사방에서 볼칸을 향해 공격해 들어왔다.
“으아아아아아…. 케에에엑!”
머리가 으스러지고 허리가 꺾였다.
미국 최강 헌터 ‘드래고니안’ 볼칸의 비참한 최후였다.
27분.
볼칸을 마지막으로 공략대 전부가 사망까지 걸린 시간이었다.
그의 말처럼 세계 최단 시간 공략에는 실패했지만, 세계 최단 시간 공략 실패에는 성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