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벌레만도 못한 것들이 감히!’
으드득.
서리거인은 회복이 거의 끝나가는 자신의 팔을 보며 이를 갈았다.
그의 이름은 ‘기간테 모아 프로스트’, 프로스트 부족의 대마법사인 그는 극지던전 차출에 가장 먼저 지원했다.
5번.
극지던전에서 5번의 공격만 막아내면 마왕 ‘사탄’의 암흑마기가 담긴 최상급 완드를 보상으로 준다는 내용에 혹했기 때문이었다.
그 정도면 악마도 탐낼 정도의 훌륭한 보상이었다.
-안 그래도 완드를 바꿀 생각이었는데 잘 됐군.
‘기간테’는 멍청한 마수가 아니었다.
‘지구’가 2페이즈로 막 진입한 상태인 것을 알고 있었다.
또한, 상대인 ‘헌터’의 수준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그랬기에 가벼운 마음으로 적당히 놀아주며 완드나 챙겨갈 생각으로 지원한 것이었다.
그렇게 극지던전에서 벌레들을 기다리고 있던 기간테는 짓눌러 죽이기 위해 가볍게 마법을 날렸다.
그런데 벌레 중 하나가 새하얀 불꽃을 날려 자신의 팔을 너덜너덜하게 만들었다.
‘고작 저따위 벌레들에게 이런 수모를 겪다니!’
방심했다. 그렇다고 이렇게 피를 보다니!
수치스러웠다.
대마법사의 자존심에 큰 상처를 받은 그는 분노했다.
‘그래. 내가 ‘인간’이라는 벌레를 너무 무시하고 있었어. 그럼. 제대로 상대해주지!’
기간테는 자신을 잡겠다며 달려오는 벌레들을 보며 머리끝까지 차오른 분노를 실어 포효했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기간테는 이제 저 벌레들을 아주 자근자근 밟아 죽이겠다고 다짐했다.
***
“정령 하나하나 위험종 수준이니 힘 아낄 생각하지 말고! 혹여나 서리거인이 끼어들 것 같은 느낌이면 성원은 뒤로 빠지면서 거리를 벌려!”
다현이 눈사람처럼 생긴 얼음정령이 가까워지자 성원과 정수, 호돈을 보며 소리쳤다.
그때였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서리거인의 거대한 포효소리가 설원을 가득 채웠다.
“사부! 거인 녀석, 처음부터 끼어들 모양인데요.”
서리거인이 내지른 포효소리에 실린 분노를 절절히 느낄 수 있었다.
그렇다면 최대한 많은 수의 얼음정령을 제거하고 서리거인과 전투를 하는 것이 유리했다.
“공격! 계획대로 우선 얼음정령부터 처리해!”
다현이 청염의 불꽃을 여러 개 피워 올리며 소리쳤다.
“알겠어요. 누님!”
성원도 즉시 활시위를 당기며 마력화살을 만들어 쏘았다.
“정수야! 가자!”
호돈은 방패를 어깨에 밀착시키고는 마력을 불어넣으며 얼음정령을 향해 달렸다.
“네엣! 형님!”
정수 역시 검을 뽑아 들고는 뒤를 쫓았다.
콰아아앙!
성원의 마력화살에 얼음정령 하나가 터져나갔다.
콰앙! 콰아앙! 콰앙! 콰앙!
뒤이어 새파란 불꽃에 얼음정령이 넷이 폭발했다.
쾅!
호돈의 방패돌진에 부딪힌 얼음정령이 폭발하듯 깨져나갔다.
“차앗!”
정수도 마력검기를 두른 검을 날렸다.
카앙.
정수의 검이 얼음정령의 머리를 쪼개지 못하고 튕겨 나왔다.
“으윽.”
엄청난 반발력에 검을 놓칠 뻔했지만, 정수는 이를 악물고 다시 마력검기를 더 강하게 키워 다시 얼음정령의 머리를 후려쳤다.
“이래도 버티나 보자!”
퍼억!
이번에는 얼음정령의 머리가 산산이 부서졌다.
그때였다.
엄청난 마력의 흐름이 느껴졌다.
절로 집중되는 소름 끼치는 마력 파동이었다.
서리거인의 완드에서 새하얀 빛이 뿜어져 나오며 마법진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이번에도 아까 그 마법진이야!”
다현이 마법진을 쳐다보다 소리쳤다.
다시 한번 ‘블리자드’ 마법진을 펼치는 서리거인이었다.
처음에 눈보라와 함께 얼음덩이를 쏟아내던 바로 그 마법진.
그런데 아까와 달랐다.
성원이 점점 커져가는 마법진을 쳐다보며 입을 쩌억 벌렸다.
“누님. 저게 아까 그 마법진이라고요?”
심상치 않은 마법진의 모습에 호돈도 소리쳤다.
“누님! 이번엔 방패로 못 막을 거 같아요!”
분명 처음에 그려냈던 마법진과 비슷한, 아니 똑같은 문양이긴 했다.
하지만 서리거인의 완드 끝에서 그 마법진이 순식간에 크기를 키워갔다.
처음 마법진의 지름이 10m 정도였다면 지금은 30m, 아니 지금도 계속 커지고 있었다.
“미친! 이건 그냥 다 죽여 버리겠다는 거잖아!”
다현이 그것을 보고 소리쳤다.
이건 얼음정령이고 뭐고 없이 쓸어버리겠다는 거였다.
“백염을 만들 테니. 다들 최대한 버텨 줘!”
다현은 서리거인의 힘이 생각보다 훨씬 강하다는 것을 깨닫고 즉시 생각을 바꿨다. 아니 바꿀 수밖에 없었다.
다른 방법이 없었다.
급소를 정확히 공격하기 위해 시선을 돌리고 접근하고 방어하고 등등 그런 것을 어설프게 했다가 백염도 피워내지 못하고 얼음덩이에 맞아 눈보라에 묻혀 끝날 수도 있었다.
호돈이 방패를 들고 마법진의 앞에 굳건하게 버티고 섰고 성원과 정수가 다현의 양옆을 감싸듯 섰다.
휘우우우우우우웅!
마법진에서 거센 돌풍이 일어나며 커다란 얼음덩이가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처음 쏟아졌던 얼음덩이가 골프공 크기였다면 지금 쏟아져 나오는 얼음덩이는 야구공보다 컸다.
강철처럼 단단한 얼음덩이가 엄청난 속도로 강한 눈보라와 함께 쏟아져 나왔다.
콰앙! 콰앙! 콰앙! 콰앙! 콰앙!
“커억! 크윽! 아까랑 차원이 다르잖아.”
호돈이 눈보라와 함께 마법진에서 쏟아지는 얼음덩이를 향해 방패를 들어 막았지만, 그 충격까지 모두 상쇄할 수는 없었다.
방패를 든 호돈의 상황이 이러할 진데 다른 이들은 볼 것도 없었다.
순식간에 쏟아져 나오는 얼음덩이 공격에 호돈의 뒤에서 정수와 성원은 튕겨 날아오는 얼음덩이를 가까스로 쳐내고 있었다.
퍽! 퍽! 퍽!
성원도 손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속사를 날려 얼음덩이를 쳐냈다.
캉! 캉! 캉!
문제는 정수였다.
마력검기를 실어 얼음덩이를 쳐내고 있었지만, 검이라는 무기 특성상 방패와 활보다 충격량이 더 컸다.
정수는 점점 무거워지는 손목과 어깨에 이를 악물었다.
“크으윽!”
캉! 캉! 캉!
힘겹게 얼음덩이를 쳐내며 버티던 중 사달이 났다.
챙강!
made in china, 정수의 검이 부러졌다.
“말, 말도 안 돼! 검, 검령이 담긴 에고소드가! 으아아아아아!”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부러진 검을 쳐다보며 소리치던 정수에게 얼음덩이가 그대로 날아들었다.
퍽!
정수의 어깨에 얼음덩이가 꽂혔다.
“크어억!”
부러진 검을 놓치며 휘청거렸다.
“정수야!”
활을 계속 쏘고 있던 성원이 그런 정수의 모습에 순간 멈칫거렸다.
1초 남짓 멈칫거림이 또 다른 문제를 일으켰다.
퍼억!
성원의 어깨에 얼음덩이가 꽂혀 들었다.
“크윽.”
퍽! 퍼억! 퍽!
그다음은 속수무책이었다.
이렇게 양옆이 뚫린 이상 몰아쳐 들어오는 얼음덩이에 다현도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
“제길!”
백염을 피워내는 것을 포기한 다현이 쓰러져 있는 성원과 정수를 호돈의 뒤에 끌어다 놓고는.
“호돈아!”
다현이 방패를 들고 힘겹게 버티고 있는 호돈을 불렀다.
“크윽…. 엇?”
힘겹게 고개를 돌려보니 성원과 정수가 쓰러져 있는 것이 보였다.
“이 둘을 지켜! 내가 어떻게든 해볼 테니!”
다현이 완드를 들고 그대로 튀어 나갔다.
“어! 어엇!”
하지만 튀어 나간 다현을 계속 부르고 있을 순 없었다.
콰앙! 콰앙! 쾅! 콰앙!
“으으으으윽!”
[압축], [연소]가 폭발적으로 일어나며 호돈의 몸에서 연기가 훅하고 뿜어져 나왔다.
호돈은 그대로 성원과 정수 위로 몸을 낮추며 방패를 치켜세웠다.
‘사, 사부!’
뛰쳐나간 다현을 떠올리며 호돈은 이를 악물었다.
***
-경호 님! 참으세요! 지금 가시면 안 됩니다! 아직은 정체를 밝힐 시기가 아닙니다!
“제기랄.”
다현이 몸을 날렸을 때 경호 역시 그대로 몸을 날리려고 했다.
그리고 그런 경호를 흰둥이가 말렸다.
“내 실수야. 저 서리거인, 보통 마법사가 아니었어.”
쉽지 않겠지만 호돈의 방어와 정수의 공격, 성원의 지원이라면 백염을 충분히 피워올릴 테고, 그러면 다현이 끝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변수가 있었다. 그것도 큰 변수가….
-그게 무슨? 보통 마법사가 아니라면 뭡니까?
“대마법사. 부족에서 가장 강한 족속 중 하나지. 그런데 왜? 아니 저런 놈이 뭐 때문에 이런 곳에 들어온 거야!”
그랬기에 서리거인 마법사라면 까다롭긴 하겠지만 그래도 괜찮겠지 라고 생각하며 지켜보던 중이었다.
하지만 대마법사라면 위험했다!
서리거인의 공격에 쓰러지는 다현의 모습이 경호의 눈에 들어왔다.
“저 개….”
경호가 즉시 다현을 향해 몸을 날렸다.
***
“이 덩치만 큰 거인 새끼야!”
다현이 소리치며 앞으로 달렸다.
마법진의 크기가 워낙 커서 쏟아지는 얼음덩이의 범위도 엄청났다.
펑! 펑! 펑!
다현은 완드로 폭발을 일으켜 얼음덩이를 쳐내며 달렸다.
피할 수 있는 것은 피하면서 속도를 냈다.
호돈이 성원과 정수를 끌어안고 방패로 감쌌지만, 저것도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알 수 없었기에 다현의 마음은 급했다.
‘전투 중에 급하게 마음먹으면 안 된다는 건 잘 알지만….’
이 같은 상황에 다현의 [광분] 특성은 최고조로 발동되었다.
분노에 따라 모든 능력치를 최대 1.5배 올려주고 회복력과 저항력도 높여주는 사기적인 특성.
마력 역시 그만큼 빠르게 소모되었지만 이미 그런 것은 안중에 없었다.
타다다다다다다다닥!
빠르게 서리거인을 향해 달려가며 무조건 성원과 정수, 호돈에게서 멀리 떨어지겠다는 생각뿐이었다.
다현이 서리거인에게 가까워지자 바람대로 우박처럼 쏟아지던 얼음덩이가 멎었다.
“자아! 얼음덩이는 멈….”
그때 바닥에서 마법진이 생기며 얼음기둥이 엄청난 빠르기로 솟아올랐다.
퍽! 퍼억! 퍽!
“아악! 큭!”
빠르게 달리던 중이라 다현도 피할 수 없어 그대로 기둥에 맞아 튀겨나갔다.
빠른 속도로 움직이던 다현이었기에 받은 타격도 그만큼 컸다.
쿨럭! 쿨럭!
새하얀 설원에 붉은 피가 확 번졌다.
퉤엣!
다현이 입안에 고인 피를 뱉어내며 힘겹게 일어섰다.
서리거인이 그런 다현의 모습에 입꼬리를 올리며 완드를 휘둘렀다.
“크윽! 제기….”
새하얀 마법진이 다현의 주변으로 빼곡하게 생겨났다.
바닥, 머리 위, 좌우, 앞뒤 할 것 없이 생겨난 마법진에서 얼음기둥이 솟아올랐다.
피할 시간도, 피할 여력도, 피할 장소도 없었다.
다현은 앞에 날아오는 얼음기둥을 향해 완드를 그대로 찔러 넣었다.
콰아앙!
청염이 번쩍이며 커다란 폭발이 일어났다.
얼음기둥이 폭발하며 눈보라처럼 얼음 가루들이 흩날렸다.
카학! 카학! 카학! 카학!
서리거인이 기분 나쁜 웃음을 흘리며 완드를 휘저었다.
마법진이 사라지고 바닥에 죽은 듯 쓰러져 있는 다현이 모습을 드러냈다.
쿨럭! 쿨럭!
기침과 함께 입에서 피가 쏟아져 나오며 잘게 몸을 떨었다.
콰아아앙!
그때 굉음이 울려 퍼졌다.
다현은 힘겹게 굉음이 들린 곳으로 고개를 들었다.
흐릿해지는 시야에 낯익은 뒷모습이 보였다.
‘경, 경호…. 후우. 아까부터 자꾸만 왜 그놈이 보이는 거….’
다현이 희미한 미소와 함께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