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서리거인? 흐음. 이거 쉽진 않겠는데.”
팥빙수를 먹던 경호가 저 멀리 보이는 서리거인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다현이 신화급 아티팩트를 가지고 있고, 성원과 호돈이 전설급 아티팩트를 가지고 있다고 하지만 저건 쉽지 않은 상댄데. 아, 그러고 보니 정수는 아티팩트를 안 줬네.”
근데 그게 참 주기도 애매해졌다.
정수는 자신의 중국산 검을 철석같이 검령이 봉인된 에고소드로 알고 있는 상태였다.
그런 상황에서 좋은 아티팩트를 구한다고 함부로 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저 검으로는 마력검기를 일으켜도 서리거인에게 박히지도 않을 텐데.”
마력검기가 검의 절삭력을 엄청나게 증가시켜주기는 하지만 검 자체의 품질이 낮아 그 힘을 제대로 발휘하기 어려웠다.
경호처럼 검에 의지를 담을 수 있는 수준이라면 나뭇가지를 들고 싸워도 상관없지만, 이제 겨우 마력검기의 형태를 변화시키는 것에 발을 디딘 정수에게는 차이가 컸다.
-경호 님. ‘서리거인’이면 5급 멸망종인데 이길 수 있을까요?
흰둥이도 모습을 드러낸 서리거인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쉽지 않겠지. 특히나 저놈 마법사야.”
-마법사요?
서리거인은 마수로 분류하긴 하지만, 정확히는 마계의 주민 중 하나였다.
마계(魔界).
악마가 사는 그곳 역시 사실 따지고 보면 인간 세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지배 계층과 피지배 계층이 있었고 가축과 야수가 있는 곳이었다.
마계에서 악마는 지배 계층인 왕족과 귀족이었다.
그 밖에 거인, 뱀파이어, 다크엘프 같은 족속들은 피지배 계층인 백성들이었다.
“그중에서도 마법사가 가장 까다롭거든.”
***
짜악!
“아윽!”
다현이 불이 꺼진 방패를 허망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는 호돈의 등에 등짝 스매싱을 날렸다.
“정신 차려.”
“아, 예. 사부.”
“자아! 아까 말한 거처럼 호돈이 탱 보고 정수가 보조하고 나와 성원이 원딜하면서 상황을 보자고.”
쿵! 쿵! 쿵! 쿵! 쿵!
다현이 외치는 순간 서리거인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발걸음에 땅이 울리고 굉음이 터져 나왔다.
다가오는 서리거인을 보며 정수가 검을 꺼내고 호돈이 방패를 치켜들었다.
“후우.”
암흑거인을 비롯해 거대 마수와 싸움 경험이 있는 다현이야 익숙했지만 호돈에겐 5m 크기의 서리거인은 마치 넘을 수 없는 벽 같이 느껴졌다.
“크긴 겁나게 크네.”
가까이 붙어야 하는 입장에서 한숨이 절로 나오는 압도적인 모습이었다.
서리거인은 ‘오키나와의 최후’라 불리는 사건으로 유명했다.
오키나와에 S급 던전이 파열되며 서리거인 2마리가 튀어나왔다.
이에 수백 명의 헌터가 동원됐지만 실패했고 결국 일본의 전략자산인 경항모까지 파괴되었다.
결국, 일본은 핵폭탄으로 서리거인을 공격했고 오키나와와 함께 최후를 맞이했다.
‘사부와의 훈련으로 강해지긴 했지만, 고작 그 정도로 내가 서리거인을 막아 낼 수 있을까?’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호돈이 다현에게 물었다.
“사부. 제가 저 괴물을 막아낼 수 있을까요?”
“내가 아는 호돈이라면 할 수 있어!”
호돈은 속으로 ‘사부가 아는 그 호돈, 저는 모릅니다!’를 외쳤다.
할 수 없어도 해야만 했다.
호돈 역시 그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쿵! 쿵! 쿵! 쿵! 쿵!
이제 정말 코앞까지 다가온 서리거인이 갑자기 멈춰 섰다.
200m 정도 떨어진 거리.
거대한 서리거인의 크기 때문에 눈앞에 서 있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 #@$%*%&$!!!
알아들을 수 없는 괴성을 지르며 서리거인이 손에 든 완드를 허공에 휘저었다.
“허어. 저게 몽둥이가 아니라 완드였어? 그럼. 마법사? 맙소사.”
정수가 입을 쩌억 벌리며 허공에서 완성되는 거대한 마법진을 지켜봤다.
“감탄 그만하고 모두 긴장해!”
다현이 마법진에 시선을 고정한 채 소리쳤다.
“눈보라 공격이야!”
상급 얼음 마법인 ‘블리자드’였다.
마법진을 읽어낸 다현이 소리치자 호돈이 방패를 치켜들었다.
“내가 막을게! 모두 내 옆으로 붙어!”
빛이 허공을 가르며 그려진 마법진에서 거센 바람과 함께 눈발이 날리며, 골프공 크기의 얼음덩이가 이들을 향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쾅! 쾅! 쾅! 쾅! 쾅! 쾅! 쾅! 쾅!
하나하나가 무시하기 힘든 강한 충격을 주었다.
방패가 없었다면 타격이 꽤 있었겠지만, 다행히 방패로 대부분의 얼음덩이를 막을 수 있었고 미처 막지 못한 것은 정수가 검으로 쳐냈다.
“호돈아. 조금만 참아! 성원도 준비하고 있어.”
그렇다고 가만히 당하고만 있을 순 없었다.
성원이 활시위에 손가락을 걸며 고개를 끄덕이자 다현이 완드를 들고 마력을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멸망종 마수에게 어정쩡한 공격은 어차피 통하지도 않았기에 처음부터 백염을 만들기로 한 다현이었다.
서리거인의 공격은 단순하지만 범위가 넓고 밀도가 높아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쾅! 쾅! 쾅! 쾅! 쾅! 쾅! 쾅! 쾅!
그나마 다행인 점은 서리거인도 마법진에 마력을 주입하느라 움직이지 못하고 있다는 점 정도였다.
“조금만, 조금만 더!”
그때 다현이 쥔 완드에서 손가락만 한 백염이 피어올랐다.
우웅! 우웅! 우웅! 우웅!
백염이 진동하며 다현의 마력을 양분 삼아 점점 커지기 시작해 곧 주먹만 하게 그 크기를 키웠다.
다현이 곧장 완드를 옆으로 휘둘러 백염을 날려 보냈다.
서리거인을 향해 바로 쏘아 보내려면 엄청나게 쏟아져 나오는 얼음덩이를 뚫고 가야 하기에 다른 방향으로 백염을 날린 것이었다.
“조금만 더 막아 줘!”
얼음덩이의 공격 범위를 벗어난 새하얀 불꽃이 방향을 틀어 서리거인을 향해 날아올랐다.
백염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력한 마력을 느낀 서리거인이 마법을 멈추고 완드로 그것을 막으려고 했다.
“어딜 막아!”
그때 성원이 방패 뒤에서 나오며 시위에 걸고 있던 마력화살을 쐈다.
쉐에에에에엑! 쾅!
백염보다 훨씬 늦게 출발했지만 먼저 완드를 때린 것은 성원의 마력화살이었다.
완드가 마력화살에 튕기며 서리거인의 가슴이 훤히 드러났다.
크윽!
먼지 같이 작은 새하얀 불꽃이지만 그 안에 담겨있는 기운의 흉험함을 느낀 서리거인이 급히 반대편 팔로 날아오는 백염을 막았다.
사실 막아냈다기보다 가슴 대신 팔을 내어준 것에 불과했다.
콰아아아아아앙!
백염이 폭발하며 엄청난 굉음이 터졌다.
끄아아아아아아아아!
서리거인의 커다란 비명이 굉음을 뚫고 나와 설원을 울렸다.
새하얀 팔뚝이 너덜너덜해질 정도로 찢어지며 물처럼 무색투명한 서리거인의 피가 후드득 흘러내렸다.
서리거인이 완드를 들어 다현 일행을 겨누며 뒤로 천천히 물러났다.
그런 모습을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던 울피가 혀를 내둘렀다.
-카니스 님. 다현의 백염. 제법이네요. 누구 구슬로 만든 지 몰라도 완드도 성능이 좋고요.
울피의 말에 흰둥이가 피식 웃었다.
-그래. 네 구슬로 만든 완드가 큰 몫 하는 것도 있지만, 시스템에 등록된 각성자 중 상위 0.1%인 아이야. 그중에서도 출중한 수준이고.
-그런데 용사님. 서리거인이 백염에 저 정도로 다칠 정도면 굳이 나설 일도 정말 없겠는데요.
울피의 말에 경호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거대한 육체에서 나오는 힘과 마력, 그리고 무시무시한 재생력도 무섭지만. 진짜 골치 아픈 건 바로 저거거든.”
경호가 손가락으로 거인이 흘린 피가 떨어져 있는 곳을 가리켰다.
-어! 용사님, 저건 얼음정령 아닙니까?
눈과 얼음이 가득한 대지에 서리거인의 피가 떨어지자 투명한 무언가가 솟아 나오고 있었다.
마치 눈사람을 얼음조각으로 만들어 놓은 듯한 모습이었다.
“정령계에서도 2페이즈에 진입하고 마계의 주민인 뱀파이어, 다크엘프, 거인 같은 녀석들이 던전이나 균열을 통해 넘어오기 시작했거든.”
흡혈을 통해 불멸에 가까운 생명력을 유지하는 뱀파이어.
하지만 정령계에서는 흡혈할 존재가 많지 않아 위협적이지 않았다.
종각역에 나타났던 그런 허접한 변절자들과 격이 다른, 마신의 마기를 받아들인 이들로 어둠에 완전히 동화될 수 있는 진정한 다크엘프.
하지만 신수가 가진 ‘신안(神眼)’ 특성 때문에 그것도 크게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오크나 오우거, 트롤 같은 몬스터 역시 신력이나 정령력에 약했기 때문에 정령계에서 크게 힘을 쓰지 못했다.
“세계수를 섬기며 그 은총을 받은 엘프가 정령을 다룰 수 있듯이 세계수의 뿌리에서 태어난 거인족은 능력에 따라서 정령을 만들어 낼 수도 있어. 바로 저렇게.”
거인에게는 팔이 찢어지며 살짝 흘러내린 피에 불과했지만, 워낙 거대했기에 흘린 피의 양은 결코 적지 않았다.
그렇기에 피를 흡수한 대지에서 솟아 나온 얼음정령의 수가 수십은 되어 보였다.
“그럼. 이제 어떻게 상대하나 지켜보자고.”
***
“누님. 저, 저게 뭡니까?”
백염에 거인의 팔이 터져나갈 때만 해도 성원은 생각보다 약한 서리거인의 모습에 승리를 확신하던 참이었다.
“그래. 얼음정령. 바보같이 내가 저걸 까먹고 있었다니….”
헌터를 동원하는 수준으로는 불어나는 얼음정령을 막아낼 수가 없어 결국 오키나와를 핵공격으로 지도에서 지워버려야 했다.
헌터본부에서 ‘레인보우 식스’에게만 공개했던 군사기밀 중 하나였다,
“서리거인의 피에서 얼음정령이 생성되거든. 하나하나 중급 마수에 맞먹는 힘을 가지고 있고.”
수십 마리의 얼음정령이 찢긴 팔에 회복마법을 쓰고 있는 서리거인을 보호하듯 둘러싸고 있었다.
“누님. 참나! 저 얼음정령 상대하는 것만 해도 벅차겠는데요. 거기다 피를 쏟을 때마다 저런 얼음정령이 튀어나온다면….”
“그래. 회복하지 못하게 단번에 죽여야 해!”
그렇다면 방법은 ‘백염’.
그것도 서리거인의 급소인 머리나 심장을 노려 공격하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걸로 저 괴물을 한 방에 죽일 수 있을까?’
피가 쏟아져 나오고 얼음정령이 늘어나고 다시 회복하고 하는 패턴이 반복된다면 결국 불리한 것은 자신들 쪽이었다.
질문에 회의적인 대답만 머릿속을 가득 채웠지만, 어차피 다른 방법은 없었다.
퍼억!
다현이 한숨을 쉬고 있는 성원의 어깨를 주먹으로 때렸다.
“아악! 누님! 아파요!”
“벌써 진 거 같은 표정 짓지 마. 어차피 죽이지 못하면 죽어. 알고 있지?”
“네. 누님. 알겠습니다!”
“방법은 하나야. 백염.”
다현이 호돈과 정수를 가리켰다.
“우선 정령을 공격하다 서리거인이 끼어들 기미가 보이면 호돈이 방어해주고, 정수는 최대한 빠르게 주변을 돌면서 공격을 이어가.”
쉽지 않은 주문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성원이 너도 정령을 공격하다 서리거인이 움직이면 원거리에서 머리를 공격해. 나는 최대한 빠르게 백염을 만들 테니까.”
“알았어요. 누님!”
다현의 말에 모두 목청 높여 대답했다.
“그럼, 가자!”
다현이 크게 소리치자 방패를 든 호돈이 가장 먼저 서리거인을 향해 달려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