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빙수.
요즘에는 민트초코, 딸기, 인절미 같은 다양한 토핑이 들어간 빙수가 많았지만, 뭐니 뭐니해도 빙수는 ‘팥빙수’가 최고였다.
“이거 팥이랑 연유만 있으면 바로 팥빙수 각인데.”
눈에 보이는 곳은 온통 하얀 설원이었다.
나의 중얼거림을 들은 미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팥빙수?
“어, 그러니까 팥이라는 곡식이 있는데 그걸 푹 삶으면 쌉싸름하면서 달콤하거든. 그거랑 연유를 곱게 간 얼음에 얹어서 먹으면 정말 끝내주거든.”
설명이 어려워서 미숫가루나 후르츠 칵테일은 빼고 설명했지만 미르는 여전히 고개만 갸웃거렸다.
“그나저나 2페이즈는 던전 안에 계절도 있네.”
분명 그전까지 던전 안은 크기나 깊이의 차이는 있었지만, 모두가 그냥 동굴이었다.
-어차피 이 정도로 추위를 탈 수준은 아니잖아?
“뭐, 그렇지. 한서불침의 단계는 예전에 지났으니까.”
상중하 단전이 조화를 이루며 펄펄 끓는 열기도, 모든 것을 얼리는 추위도 지금의 나에게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저기 오네.”
내가 손가락으로 눈보라가 치는 평원 너머를 가리키자 미르가 고개를 돌렸다.
10m는 될법한 새하얀 피부의 거인이 커다란 검을 들고 쿵쿵거리며 걸어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서리거인’이군.
“그럼. 시원하게 썰러 가볼까?”
나는 아공간을 열어 용아검을 빼 들고 앞으로 달려나갔다.
***
“뭐! 이놈아! 이 아비가 조금 잘 나간다고 칭찬 좀 했더니 정신 나간 거냐! 이 미친놈이!”
쾅! 쾅!
이건용 회장이 시뻘게진 얼굴로 집무실의 책상을 손으로 치며 성원에게 화를 내고 있었다.
그것도 그럴 것이….
연락도 없이 대뜸 찾아와서는 성원이 아침 댓바람부터 폭탄을 터뜨렸다.
“아버지. 저 오늘 오후에 명동 던전을 공략하러 가려고 합니다.”
성원은 나지막하게 말했지만, 그 위력은 건용에게 가히 핵폭탄급이었다.
미친놈. 정신 나간 놈. 주제도 모르는 놈. 겉멋만 든 놈. 놈놈놈. 세상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나쁜 놈이 건용의 입을 통해 튀어나와 성원의 가슴에 박혔다.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온갖 나쁜 놈 소리를 듣던 성원이 건용을 보며 환하게 웃었다.
“이게 진짜 제정신이 아닌 모양이구나. 정신이 나갔어! 지금 웃음이 나와! 웃음이 나오냐고!”
“아버지께서 그렇게 화내는 것을 처음 봐서요. 다행히 제가 아버지에게 그래도 제법 소중한가 싶어 기분이 나쁘지 않네요.”
성원의 말에 안 그래도 시뻘게진 건용의 얼굴이 더 달아올랐다.
“후우. 이 소중한 미친놈아. 그래. 서울 시민을 구하기 위해, 아니면 그냥 인생이 지겨워서 자살하고 싶은 마음 같은 건 아닐 테고. 공략하겠다는 이유나 들어보자.”
건용이 거칠게 심호흡하며 자리에 앉았다.
그의 앞에 서 있던 성원이 여전히 밝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예전에 아버지가 그러셨잖아요. ‘No pain, No gain.’이라고요. 천년만년 ‘돈의 신화’라는 꼬리표를 달고 있을 순 없잖아요. 쪽팔리게….”
뭔가를 얻기 위해서는 고생을 해야 하는 것은 만고불변의 진리였다.
그런데.
“아들. 목숨보다 쪽팔린 게 낫다는 걸 모르는 건 아니지? 그러다 죽으면 무슨 소용이라고.”
“저 안 죽어요. 죽을 자리라면 금송아지가 있어도 발도 내밀지 않았을 겁니다. 아시잖아요. 저 소심한 거.”
알다마다.
건용은 성원이 얼마나 겁 많고 소심한 성격인지 잘 알고 있었다.
스스로 그런 모습을 감추려 애써 화통한 척하기에 그렇게 보이지 않을 뿐이었다.
“다현 양을 데리고 간다고 하지만 뭐가 나올지도 모르는 던전에 들어가는데 안 죽을지 어떻게 장담을 한다는 거냐.”
TV, 라디오, 인터넷.
모든 매체에서 연신 떠들어대는 터라 건용도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분석 불가 S급 던전! 멸망종 마수가 출몰할지도!]
[파열되면 서울의 절반 이상이 사라질 수도!]
[정부 1차 대책회의 결렬! 피닉스길드 공략 포기 선언!]
[침묵하는 무대책 정부. 불안감에 잠 못 이루는 서울 시민.]
긍정적인 내용은 단 한 줄도 없었다.
그런 와중에 뜬금없는 아들의 공략 선언은 ‘거인’이라 불리는 건용도 흔들리게 했다.
“누님이 던전 내부의 상황을 어느 정도 알아냈습니다. 충분히 공략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
“뭐?”
“물론 정부에서는 이러한 사실을 모릅니다. 제가 목숨을 걸고 덤빈다는 인상을 심어줄수록 무언가를 얻어내기 좋은 법이니까요.”
성원은 혹한의 추위를 가진 던전 내부와 온도조절 장치를 설명했다.
그리고.
“이번 일이 잘되면 헌터학원 설립을 조건 없이 허가해주기로 했습니다. 길드하우스 주변의 위험구역도 상업지구로 변경해 주기로 했고요.”
건용도 성원이 저리 싱글벙글할 정도로 좋은 기회라는 건 잘 알겠다.
‘참 많이 컸구나.’
환하게 웃으며 자신을 보고 있는 성원을 건용이 묵묵히 지켜봤다.
철없이 그저 형에게 지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던 어리광쟁이가 어느새 커서는 목숨을 걸고 미래를 향한 도박을 한다고 자신 앞에 서 있었다.
하지만.
덜컥 겁이 났다.
남들은 모두 자신이 세상 모든 것을 다 가졌다고 부럽다는 말을 했다.
아내를 잃었다.
자식과의 추억도 없었다.
그저 돈, 돈, 돈, 돈, 돈.
가장 많이 가졌지만 가장 많이 비어있는 자신이었다.
“성원아.”
건용은 너무 늦게 돈으로 살 수 없는 게 생각보다 너무 많다는 것을 깨달았다.
“네. 아버지.”
“절대. 절대 죽지 말고. 너 이 자식 이번에도 애비 말 안 들으면 정말 다리몽둥일 박살 낼 테니 그리 알아!”
건용은 성원에게 살아 돌아오라는 소리는 살벌하게도 했다.
말은 거칠었지만, 그 안에 담긴 마음이 너무나 부드러웠기에 성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눈시울을 붉혔다.
“아버지. 오늘 저녁은 같이 먹어요. 내가 금세 다녀올 테니까. 알았죠?”
“그래. 늙은 애비 굶기지 않으려면 서둘러야 할 거다.”
“아버지.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준비할 거 많을 텐데 빨리 나가! 꼴 보기 싫으니!”
세상에서 가장 듣기 좋은 축객령이었다.
***
모든 매체에서 온종일 분석 불가한 ‘극지던전’에 대한 뉴스로 난리였다.
그때 터진 특종으로 모든 채널이 속보를 날렸다.
[긴급! 신화길드, 분석 불가 던전 공략 선언!]
[단독 인터뷰-성원 曰 “누군가 해야 할 일…. 반드시 공략할 것.”]
[속보! 레인보우 식스 ‘위치’ 김다현과 이성원 길드장 포함 4인으로 공략대 편성.]
던전 공략을 위한 모든 과정이 특종이 되어 방송되었다.
군경이 동원되어 통제된 명동의 던전 앞.
전투복을 입은 다현과 성원, 정수, 호돈이 던전을 보며 복잡미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누님. 우리 저녁 먹기 전에 나올 수 있을… 힘들겠죠?”
애써 싱글벙글한 얼굴을 유지하던 성원도 점점 딱딱하게 굳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까짓거 뭐 해보지.”
다현이 피식 웃었다.
“누님만 믿을게요.”
딱딱하게 굳어가던 성원의 표정이 조금은 풀렸다.
하지만 그 옆에 서 있던 정수와 호돈은 여전히 굳은 표정이었다.
“정수야. 표정 풀어. 표정. 호돈이 너도.”
“형님. 오셨어요.”
“형님. 아. 미호도 왔네.”
흰둥이를 옆구리에 낀 경호와 미호가 손을 흔들며 다가왔다.
다행히 호돈은 미호를 보고는 굳어있던 표정이 눈 녹듯 녹아내렸다.
“그러게. 너도 애인 하나 만들지 그랬냐.”
경호가 혼자 걱정이 태산인 표정을 짓고 있는 정수를 보며 옆구리를 쿡 찔렀다.
“저는 그냥 이 검이랑 연애하기로 했습니다.”
검령이 봉인된 에고소드라고 착각 중인 중국제 검이랑 연애라니….
이거 은근 으스스한데?
그래. 옜다.
-흰둥아. 니가 위로 좀 해줘라.
경호의 말에 흰둥이가 잠시 고민하다 정수에게 목소리를 깔아 전음을 보냈다.
-전승자여. 매일 매일 최선을 다하는 모습 보고 있으니. 이번에도 잘 할 거라 믿겠다.
꿈틀한 정수가 눈동자만 굴려 몰래 주변을 살폈다.
‘검령 님께선 항상 지켜보고 계셨구나! 그랬어!’
정수의 눈가가 촉촉하게 변하며 딱딱하게 굳었던 표정에 온기가 감돌았다.
‘하아. 멘탈 관리해주는 것도 이거 보통 일이 아니구만.’
하지만 분명 필요한 일이기도 했다.
긴장하면 몸이 굳어지고 실력을 발휘하기 어려워 실수가 터질 수 있었다.
문제는 항상 그런 실수로부터 시작됐다.
기자들이 벌떼처럼 모여 군경이 모여 통제하고 있는 구역 바깥에서 뭐라도 건지기 위해 난리를 부리고 있었다.
성원이 주변을 싹 둘러봤지만 역시 건용이나 성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이성원 길드장님! 지금 심정이 어떻습니까?”
“무모하다는 이야기가 많이 나오고 있는데 따로 준비하신 게 있습니까?”
“한 말씀만 해주세요!”
어떻게든 기삿거리를 만들기 위해 기자들이 목청이 터져라 소리쳤다.
그런 그들을 보며 성원이 크게 외쳤다.
“아버지! 저녁 먹기 전까지 다치지 않고 무사히 나오겠습니다!”
엉뚱하지만 진심이 절절히 담긴 외침에 시끄럽고 혼란스럽던 분위기가 잠잠해졌다.
다현이 품에 안겨있는 울피를 경호에게 건넸다.
“초코바 조금 이따 하나 먹이고. 그리고 품속에 있는 거 좋아하니까 나 나올 때까지 좀 안고 있어. 알았냐?”
우리도 들어갈 생각이거든요.
“걱정하지 말고 무사히 공략하고 나와. 알았냐?”
“그래. 저녁에 시원한 맥주나 같이 마시자.”
“알았다.”
호돈 역시 미호에게 가볍게 입을 맞추며 어색하게 고백했다.
“살아 돌아오면 우리 약혼식 하자.”
호돈의 갑작스러운 약혼식 발언에 미호의 눈이 커다래졌다.
그리고 곧 눈물이 글썽거리기 시작했다.
“알았으니까. 알았으니까. 안 돌아오면 나한테 혼나. 흐윽. 알았지. 오빠. 흑흑. 꼭, 꼭 돌아와야 해!”
결국 눈물을 쏟으며 말하는 미호를 보며 호돈이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모두 인사를 마치자 성원이 다현과 정수, 호돈을 돌아보며 말했다.
“자아. 짐 챙기고 모두 출발하죠!”
그렇게 담담하게 일렁이는 차원막을 통과해 들어갔다.
“경호 오빠. 어?”
눈물을 애써 참으며 그 모습을 지켜보던 미호가 옆을 돌아봤다.
“아니 어디 갔지?”
분명 조금 전까지 옆에 있었던 경호가 보이지 않자 미호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
덜덜덜덜덜!
성원의 온몸이 마치 경련이라도 난 것처럼 덜덜 떨렸다.
입장한 지 1분도 지나지 않은 상황이었다.
“우와. 정말 영하 120도네요.”
“성원아. 이거 고장 난 거 아니지?”
다현 역시 입술이 파랗게 질린 상태였다.
그런 그녀의 손에 들린 온도계는 영하 127도를 가리키고 있었다.
“으으. 신화 마공연구소에서 이번에 특별히 제작한 거라 정확할 거예요.”
성원의 말처럼 온도계는 고장 나지 않았다.
울피가 예측한 게 정확히 맞아떨어졌을 뿐.
“형님. 으으으. 이런 던전은 정말 처음이네요.”
몰아치는 눈보라 때문에 마력을 끌어올려도 시야가 30m를 넘지 않았다.
거기다 어딜 봐도 순백의 눈만 가득할 뿐 방향도 알 수 없었고 마수 같은 적의 움직임도 확인하기가 어려웠다.
영하 127도의 혹한은 아무리 마력을 사용해서 초인적인 능력을 낼 수 있는 이들이라고 해도 버티기 힘든 수준의 추위였다.
“이 정도면 적염은 제대로 역할을 하지도 못하겠네.”
다현은 매서운 추위에 혀를 내둘렀다.
정말 이 사실을 미리 알지 못했다면 힘의 피닉스라고 하는 양아치 놈들도 얼마 버티지 못하고 얼음덩이로 변했을 게 분명해 보였다.
다현은 모두를 돌아보며 소리쳤다.
“자아. 체온유지 장치 작동하고 움직이자!”
다현의 말에 다들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듯 가슴에 손을 얹었다.
전투복 안에 입은 사슬갑옷에 달린 마석이 있는 위치였다.
우우우우웅!
마석에 마력을 불어넣자 사슬갑옷이 달아오르며 마치 거짓말처럼 추위가 가셨다.
추위 말고도 눈보라에 흐릿한 시야나 푹푹 빠지는 설원 자체도 문제였지만, 덜덜 떨리던 몸이 풀린 것만 해도 다들 표정이 밝아졌다.
경호가 그런 그들을 보며 옆구리에 끼고 있던 흰둥이와 울피를 보며 말했다.
“그럼. 눈밭에서 얼마나 잘 싸울지 구경이나 해볼까?”
무지막지한 눈보라가 몰아쳤지만, 사방에 결계를 친 경호는 흥미로운 눈으로 극지던전에 첫발을 디딘 그들을 관찰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