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8화
“호돈. 긴장하지 말고 위치 파악은 도와줄 테니 신체 강화에 더 집중해요.”
다현이 보기 드물게 상냥한 어조로 말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다현이 아직 편하게 성격을 드러낼 정도로 친해지지 않은 호돈과 함께하는 던전 공략이었다.
“이제 마지막이니까!”
“넵. 알겠습니다. 사부.”
사부? 분명 호돈이 다현을 보며 사부라고 했다.
“사부는 무슨. 그냥 누님이라고 불러요.”
다현의 말에 호돈이 고개를 저었다.
“사실 ‘사부님’이라고 부르고 싶은 걸 억지로 참고 있는 겁니다.”
다현과 호돈의 나이 차는 고작 1살이었다.
다현이 너무 늙어 보인다고 사부님 대신 누님이라고 부르라고 했지만, 호돈은 한사코 사부라고 불렀다.
이유는 이랬다.
다현이 신화길드의 비상임 고문이라는 직책에 그냥 이름만 올려놓은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최근 시작한 것이 호돈을 훈련 시키는 것이었다.
지금 신화길드에서 다현을 제외하면 가장 강한 이들은 성원, 정수, 호돈이었다.
성원은 훈련할 시간도 없을 정도로 바빴지만, 재벌답게 엄청난 액수의 보약을 먹어가며 마력을 증가시키고 있었다.
정수는 행운공원에 밤마다 나와 검령이 알려준 것으로 여태껏 착각하고 있는 검술을 매일 같이 연습하고 있었다.
궁수인 성원은 마력 향상만 해도 실력이 늘고, 정수 역시 검술 수련만 해도 실력을 쌓을 수 있지만 호돈은 애매했다.
[비만], 먹어서 살을 찌우고.
[압축], 그 살을 압축시켜.
[연소], 그것을 태워 힘을 내는.
먹고 압축시키고 연소하며 특성 연습은 가능했지만, 방어하며 공격하는 탱딜 포지션인 호돈에겐 실전이 필요했다.
그래서 다현이 나섰다.
귀찮았지만 다현은 안 했으면 안 했지, 맡으면 제대로 하는 성격이었다.
다현의 교육은 살벌했다.
그녀가 완드를 들고 호돈을 때리며 폭발을 일으키면 [압축]과 [연소]로 타격 부위를 강화하여 버티는 것, 그것이 다였다.
지켜보는 사람이 조마조마할 정도의 무식한 방법이었지만 그만큼 효과는 확실했다.
훈련을 시작한 지 4일 만에 호돈은 기절하긴 했지만, 엄지손가락만 한 백염을 막아내는 기적 같은 성과를 나타냈다.
그리고 다현은 기절한 호돈을 보며 성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 성원아. 호돈이 실전 좀 경험시켜주려고 하는데. 공략할 만한 던전 있을까?”
B급 이하 던전은 수요가 많아 공략권을 얻기가 어려운 편이지만 A급 이상 던전은 수요가 없어 공략한다고 하면 오히려 혜택을 주는 편이었다.
특히나 신화길드는 리스폰 던전 소멸 사건으로 헌터본부와 10년간 회색지대에서 출몰하는 ‘A급’ 던전을 연 10회 무상으로 공략할 수 있게 하는 계약을 맺은 상황이었다.
-바로 확인해 볼게요. 그런데 무슨 등급으로요?
“어. S급도 괜찮아.”
-네엣?
S급 던전은 재난종 마수가 보스로 출몰하는 곳이라 상성이 맞지 않는다면 S급 헌터도 위험했다.
그래서 회색지대의 S급 던전은 공략을 하지 않고 파열시켜 화력으로 녹여버리는 전략을 주로 사용했다.
-아. 제가 누님의 존재를 깜빡깜빡하네요. 우리 누님은 S급이 아니라 EX급이신데 말이죠.
“그럼. 알아보고 연락 줘.”
***
“호돈! 조금만 더!”
다현이 칼날표범의 앞발 공격을 막아내고 있는 호돈을 보며 소리쳤다.
“크윽!”
5급 재난종 마수인 칼날표범은 다현에게 위협적인 마수는 아니었다.
지금도 백염을 만들어 놓은 채 여유롭게 지켜보는 상황이었다.
본능적으로 백염의 무시무시한 위력을 느낀 칼날표범이 호돈을 넘어 다현을 공격하려 했다.
“어딜! 너는 나랑 싸워야 한다니까!”
그때마다 호돈이 칼날표범을 온몸으로 막으며 싸움을 이어가고 있었다.
월드 클래스 탱커인 제니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실전을 겪으며 호돈도 육체 강화를 더욱 능숙하게 해냈다.
크아아아아아앙!
계속되는 방해에 짜증이 난 칼날표범이 입을 크게 벌려 호돈을 집어삼키려 했다.
터억!
호돈이 손으로 칼날표범의 위턱과 아래턱을 붙잡았다.
“으으으으으으읏짜!”
단순한 강화가 아닌 연소를 통해 얻은 폭발적인 기운을 가지고 완력과 육체를 동시에 강화했다.
점점 다물어지던 칼날표범의 입이 서서히 벌어졌다.
연소가 빠르게 진행되며 호돈의 전신에서 연기처럼 김이 모락모락 올라왔다.
“후욱. 후욱.”
거칠게 호흡하며 힘을 짜내고 있는 호돈의 귀에 다현의 외침이 들렸다.
“호돈. 오케이! 이제 뒤로 빠져요.”
지금 이 순간, 그 무엇보다 간절하게 기다리던 말이었다.
호돈이 손을 놓고 빠지자마자 새하얀 불꽃이 그를 지나 벌어져 있던 칼날표범의 입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키아아아…. 끄윽.
백염.
영혼마저 태우는 순백의 불꽃이었다.
그것이 목구멍을 타고 위장으로 들어가 폭발하자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펄쩍 뛰다 그대로 고꾸라졌다.
그리고 그것으로 끝이었다.
S급 던전 공략은 보통 떠들썩하기 마련이었지만 던전 밖을 나온 다현과 호돈을 기다리는 이들은 처리팀 정도밖에 없었다.
이 던전이 처음이 아니었다.
어제 A급 던전을 공략하고 난 후 다음 날인 오늘 새벽부터 나와 S급 던전을 공략하는 말도 안 되는 일을 해낸 것이었다.
심지어 다현이 한 것이라고는 던전 보스인 칼날표범을 향해 백염을 날린 것이 전부였다.
2시간 57분.
비공식 S급 던전 공략 최소시간이었다.
던전에서 나온 다현과 호돈이 호송용 장갑차에 몸을 실었다.
호돈은 사부인 다현의 눈치가 보여 최대한 참고 있었지만 맹렬하게 덤벼드는 수마(睡魔)를 끝내 막아낼 순 없었다.
꾸벅. 꾸벅.
호돈이 금세 고개를 꾸벅거리며 졸기 시작했다.
“피곤하겠지.”
당연하게도 호돈은 상급 던전 경험이 없었다.
경험이 없다는 것은 그만큼 긴장한다는 뜻이었다.
긴장은 힘을 과도하게 쓰게 만들고 그것은 피로감을 증가시킨다.
전문가들이 괜히 ‘힘을 빼고 하라.’고 하는 게 아니었다.
다현은 옆에 있는 목베개를 집어 호돈의 목….
“엇! 잠시만요!”
다현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그 소리에 호돈이 놀라 ‘막아!’를 외치며 펄쩍 뛰어올라 머리로 천장을 강타했다.
쾅!
장갑차가 아니었다면 분명 천장이 뚫렸을 굉음이 터졌다.
“으억!”
“미안. 놀랐어요?”
“으으. 근데 무슨 일 있나요?”
차량이 멈춰 서 있었다.
호돈이 무슨 일인가 싶어 다현에게 물었다.
“친숙한 기운이 느껴져서….”
“친숙한 기운이요?”
“호돈아. 나 여기 내려서 뭐 좀 확인하고 갈게요.”
“네엣? 저쪽은 흑색지대인데요?”
지금 서 있는 곳은 회색지대와 흑색지대의 경계 부근이었다.
마수가 뛰어노는 죽음의 땅.
그런 곳을 들어가는 건 자살행위….
생각을 이어가던 호돈이 다현을 다시 한번 쳐다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부. 다녀오세요. 차량 필요하시면 바로 연락하시고요.”
생각해보니 흑색지대라고 해도 멸망종 마수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한마디로 다현을 위협할 마수는 딱히 없었다.
“그래. 조심해서 가요.”
장갑차에서 내린 다현이 친숙한 기운에 집중했다.
“흠. 저곳인가?”
다현이 바라본 방향은 바로 백마고지가 있는 곳이었다.
***
흑색지대 중에도 마수가 많기로 유명한 철원에서도 가장 중심부였던 백마고지.
이곳은 마기에 미쳐버린 울피로 인해서 언제나 마수의 시체가 산을 이루고 그 피가 강을 만들던 곳이었다.
그런 백마고지의 지배자였던 울피가 사라졌다.
그와 함께 울피가 뿜어내던 신력과 마기가 사라지자 산처럼 쌓였던 마수의 시체가 썩고 문드러져 끔찍한 시독(屍毒)을 뿜어내는, 상급 마수도 접근하기 힘든 독지가 되었다.
스사사사삭. 스사사사사삭.
물론 모든 마수에게 그러한 독지가 금역이 되는 건 아니었다.
암천오공(暗天蜈蚣).
마력검기에도 버티는 단단한 외골격과 강철도 찢어발기는 강하고 날카로운 이빨. 상급 각성자도 한 줌 독수로 녹여내는 강력한 독까지.
1급 위험종이자 독충형 마수 중 가장 강력한 녀석이었다.
거기다 이 거대한 지네는 다른 상급 마수와 다르게 무리를 지어 생활했다.
울피가 사라지고 백마고지는 수십 마리의 암천오공이 득실거리는 마굴로 변했다.
키큭! 키크큭!
그때 땅속에서 꿈틀거리는 기운을 느낀 암천오공이 땅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콰악! 콰악! 콰악!
커다란 이빨로 단단한 돌덩이도 부숴가며 땅을 파내던 암천오공 한 마리가 멈칫거렸다.
콰아아앙!
그 순간 어두컴컴한 주변이 환하게 밝아지며 커다란 소리와 함께 새빨간 화염이 땅속에서 솟구쳤다.
키에에에에엑!
땅을 파헤치던 암천오공이 괴성을 지르며 튀어나와 펄떡거렸다.
이미 머리는 반쯤 박살이 나서 뇌수가 흘러내는 모습이었다.
크르르르르르르르.
폭발로 커다랗게 뚫린 땅속에서 살기가 묻어나는 거친 포효소리와 함께 울피가 모습을 드러냈다.
신력을 흘리는 존재의 등장은 백마고지를 가득 채운 암천오공을 자극했다.
키큭! 키큭! 키큭!
길이만 5m에 칼날처럼 날카로운 다리는 100쌍이 넘는 암천오공이었다.
스사사사삭. 스사사사사삭.
수백 개의 가시 같은 발이 빠르게 움직이며 울피를 향해 달려왔다.
물론 그런 암천오공도 힘을 되찾은 울피에게 그리 위협적인 존재는 아니었다.
-안 그래도 웅크리고 있느라 찌뿌둥했다고!
울피가 달려나가며 앞발로 가장 먼저 튀어나오는 암천오공을 후려쳤다.
퍼어억!
키에엑!
강철보다 단단한 외피도 울피의 앞발에 박살이 났다.
퍽! 퍼억! 퍽!
그렇게 10여 마리가 울피의 앞발에 박살이 났다.
하지만 던전이나 균열 속 마수와 달리 흑색지대에서 살아가는 마수는 생태계를 이루고 있었다.
한 마디로 지금 울피에게 달려든 암천오공은 가장 약한 부류로 그의 힘을 알아보기 위해 던져진 미끼 같은 역할이었다.
키큭! 키크큭!
먼저 달려든 암천오공보다 족히 두 배는 큰 거대한 지네가 달려들기 시작했다.
울피가 생각보다 강하다고 느꼈는지 한 방향으로 오는 것이 아닌 주변을 둘러싸서 서서히 조여들고 있었다.
-내 앞발만 피하면 이길 거로 생각한 거냐? 참나!
알아듣지도 못할 마수였지만 울피가 입꼬리를 올리며 신력을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화르르륵! 화르륵!
새파란 불꽃이 울피 주변으로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키크큭! 키크큭!
여우불이 피어오르자 암천오공이 날뛰기 시작했다.
독충형 마수에게 가장 상극의 힘이 바로 신력으로 일으킨 불이었다.
울피에게 달려들던 암천오공들이 슬금슬금 뒤로 물러나던 그때.
키아아아아아아아아아!
백마고지 꼭대기에서 날카로운 비명 같은 소름 끼치는 괴성이 울려 퍼졌다.
그 괴성에는 진득한 마기가 실려있어 울피는 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저놈이 대장인가? 규격 외로 성장한 녀석이군.
몸을 치켜세우는 거대한 지네가 울피의 눈에 들어왔다.
흘리는 마기도 강렬했지만 30m는 족히 돼 보이는 무지막지한 크기도 시선을 끌었다.
대장의 포효에 뒷걸음질 치던 암천오공들이 울피를 향해 다시 달려들기 시작했다.
울피는 그런 암천오공을 보며 여우불을 날리기 시작했다.
퍼엉! 펑!
새파란 여우불이 암천오공을 때리자 강렬한 폭발과 함께 기다란 몸통이 터져나갔다.
키에엑! 키엑!
머리가 터진 이들은 그 자리에서 움직임을 멈췄지만, 몸이 중간에 잘려나간 이들은 끝까지 울피에게 달려들었다.
물론 울피는 그런 암천오공들을 가볍게 앞발로 제압했다.
암흑마기에 잠식당했을 때도 백마고지 일대를 제패했던 울피였다.
아무리 떼로 달려든다지만 이런 위험종 마수 따위는 울피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키아아아아아아아!
백마고지 정상에서 울피를 내려다보던 우두머리 암천오공이 분노 섞인 포효와 함께 달려들려고 할 때였다.
콰아아아아아앙!
새하얀 불꽃이 우두머리 암천오공을 때리며 폭발했다.
끼아아아악!
괴성을 지르며 몸에 붙은 백염을 끄기 위해 백마고지 정상에서 거대한 몸을 이리저리 구르기 시작했다.
-뭐야?
울피가 놀란 눈으로 암천오공을 보다 문득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암천오공을 죽이느라 느끼지 못했던 기운이었다.
-이거 내 여우구슬과 똑같은 기운인데?
여우구슬은 분명 땅속 보금자리에 있었다.
-이거 뭐야? 나와 똑같은 불여우라도 나타난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