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2화
“다음으로는 신화길드 이성원 길드장님의 기념사를 듣도록 하겠습니다.”
분위기는 ‘울지마! 울지마!’를 외쳐야 할 것은 상황이었지만 그렇다고 식의 진행을 멈출 수는 없기에 정수는 하는 수 없이 성원을 호명했다.
멋들어진 블랙 슈트를 입은 성원은 서둘러 행거치프를 꺼내 눈물을 닦고 코까지 푸는 만행을 저지르고는 단상 위 탁자 앞에 섰다.
“크흠. 신화길드 하우스 완공을 축하해주시기 위해 찾아주신 신화 그룹의 회장님을 비롯한 임직원 여러분. 또 가족 같은 우리 길드원들. 어, 그리고 취재를 위해 자리해주신 기자분들까지 모두에게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이건용 회장의 축사에 생각지도 않게 눈물을 쏙 뺀 성원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어. 길드 역시 하우스 완공을 기점으로 질적, 양적 성장을 하겠습니다. 그리고 신화학원에 대한 문제 역시 정부와 잘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
중요한 시점에 중요한 자리였기에 성원은 기념사를 충분히 연습해 숙지한 상태였지만 정신이 없어 말이 꼬이기 시작했다.
“아. 또 이곳을 기점으로 위험지역을 탈피해 골목을 활성화해 지역 발전에도 이바지하겠습니다. 그리고….”
프롬프터나 발표문을 따로 들고 있지 않아 한번 꼬이기 시작하니 수습이 되지 않고 머리는 백지처럼 하얗게 돼버렸다.
원래는 신화학원에 대한 진행 상황이나 앞으로의 발전 방향 등에 대해서 자세하게 설명할 예정이었다.
그런 성원을 보며 사회를 보던 정수가 계속해서 수신호를 보냈다.
‘형님! 형님! 누님 소개해야죠! 누님!’
한참을 버벅거리고 있던 성원이 정수의 수신호를 알아챘다.
“아. 그리고 여기 계신 분들에게 자랑하고 싶은 일이 하나 생겼습니다.”
성원의 말에 기자들의 눈동자가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자랑’이라는 말은 곧 ‘기삿거리’라는 말과 같았다.
“능력과 인품을 모두 갖춘 훌륭한 헌터분들이 참 많습니다. 우리 신화길드는 언제나 그런 분들을 영입하여 더 발전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마수로부터 세상을 안전하게 만드는 것에 이바지하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원래 제대로 자랑을 하려면 분위기부터 잘 깔아야 하는 법이었다.
“아까 회장님께서 언급하신 세간의 평가처럼, 저는 저의 노력보다도 좋은 환경, 그리고 기적을 얻은 복이 많은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런 배경과 운만으로는 점점 더 위협적으로 변해가는 마계의 침략으로부터 수많은 사람을 구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성원이 몸을 돌려 단상에 앉아 있는 다현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렇기에, 신화길드는 커다란 위협에 맞서 싸우기 위해 명실상부 대한민국 최고의 헌터를 임원으로 모시고자 합니다. 바로 ‘레인보우 식스’의 레드위치. 김다현 헌터님입니다!”
성원의 말에 기자들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기념식 행사에 참여하는 모습에 다들 어느 정도 예상을 하긴 했지만 이렇게 공식화되니 기자들의 손이 빨라졌다.
특히나 다현은 그동안 프리랜서를 고집했었기에 더욱 큰 이슈였다.
신화길드는 길드원도 많고 자본도 빵빵했지만, A급 이상의 상급 헌터가 적어 항상 다른 대형 길드에 밀리는 감이 없지 않아 있었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달라질 수 있었다.
‘김다현’이라는 이름은 그러기 충분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앞으로 김다현 헌터님과 함께 상급 던전을 공략하며 더욱 발전하는 신화길드가 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전할 소식이 있습니다.”
다현에 이어 또 다른 뉴스거리가 있다는 말에 기자들의 눈이 다시 반짝였다.
“앞으로 길드 차원에서 신화 바이오와 새로운 아이템을 만드는 것에 적극적으로 협력하여 나가기로 했습니다.”
형제지간이지만 사이가 썩 좋지 않았던 신화 그룹의 형제들.
그런데 그런 둘 사이에 봄기운이 감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기삿거리가 됐다.
“앞으로 어떤 식으로 협력해 나갈지는 보도 자료를 통해 알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많은 기대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성원이 박수를 받으며 자리로 돌아가자 정수가 진행을 이어갔다.
“그럼. 이것으로 신화 길드 하우스 완공 기념식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연회장이 마련되어 있으니 내빈 여러분께서는 편하게 즐겨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이제부터는 경호가 나설 차례였다.
***
“아들. 정말 안 도와줘도 돼?”
흰둥이를 안고 나온 지숙이 경호에게 다가오며 물었다.
“아니 엄마는 들어가 쉬라니까 왜 또 나왔어요.”
경호의 역정에 지숙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들이 혼자 이렇게 고생하고 있는데 어떻게 쉬니?”
“고생은 무슨. 그리고 나도 이제 각성자라 체력도 좋아지고 해서 끄떡없으니까. 제발 가서 쉬세요. 엄마, 괜히 피곤해하면 그게 더 고생이니까요. 아셨죠?”
계속된 경호의 만류에 지숙이 흰둥이를 안고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형님! 경호 형님!”
성원이 연회장에 들어서며 경호를 불렀다.
“어. 성원아. 이야. 우리 동생. 이제 회장님한테 인정도 받고 형이랑 사이도 좋아지고 다현이도 영입하고. 우리 식당에 와서 죽겠다며 넋두리했을 때가 엊그제 같은데 말이야.”
경호가 웃으며 성원의 흑역사를 슬쩍 꺼냈다.
“에이. 그땐 정말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고요.”
덥석.
성원이 경호를 안았다.
“형님. 고마워요. 그때부터 꼬였던 제 인생이 풀리기 시작했어요. 아버지의 신뢰도, 형과의 화해도, 다현 누님과의 인연도. 그 모든 것이 결국 형님 덕분입니다.”
“으으으. 징그럽게 왜 이래! 훠이! 훠이!”
경호가 성원을 밀어내며 몸을 과장되게 부르르 떨었다.
“형이 말 안 했었나? 남정네 알러지 있다고? 다음부터 그러지 마라.”
“형님. 좋은 걸 어떡합니까. 제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요.”
“내가 잘 아는 병원 있는 데 가서 상담 좀 받아 볼래?”
그렇게 경호와 성원이 시답지 않은 농담을 나눌 때였다.
“동생. 오랜만이야!”
묘하게 귀에 익은 목소리에 경호가 고개를 돌아보니 이건용 회장과 이성준 대표가 연회장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네. 형님. 그때 잘 들어갔죠?”
경호가 성준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자.
“이거 참. 자네는 처음 봤을 때부터 묘한 느낌을 주더니. 언제 우리 첫째랑 형님, 아우 하게 된 건가?”
이건용 회장이 그런 모습에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경호에게 질문을 던졌다.
“아,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우연히 셋이 함께 술자리를 가지게 되었는데 그때 그렇게 하기로 했습니다.”
“아니야. 세상에 그냥 생기는 우연이란 없지. 그날도 아무 이유 없이 만나서 술자리를 가진 건 아닐 텐데. 안 그런가?”
이건용 회장의 말이 맞았다.
그날은 성원에게 어쩌면 인생의 전환점이 되는 순간이었다.
“아버지 말이 맞아요. 저에게 있어 아주 특별한 날이라 형을 데리고 일부러 행운식당을 찾아간 겁니다.”
오랫동안 묵혀두고 있던 나쁜 감정을 털어내고 새롭게 태어난 날이니까.
대충의 사정을 성준에게 들어 알고 있었던 건용은 그런 성원을 흐뭇하게 바라봤다.
“오늘 기념식이 아니라도 한번 볼까 했었네.”
“네엣! 회장님이 저를 보려고 하셨다고요?”
“자네와 상의하고 싶은 것이 있어서 말이야. 뭐. 그건 같이 고기를 먹으며 천천히 이야기하도록 하지.”
“아니 제가 고기도 손질해…. 아.”
작업대에는 이미 신화F&B 마크를 단 직원들이 정육을 하고 있었고 다른 직원들도 바쁘게 고기를 담아 테이블에 옮기고 있었다.
“고기와 불판을 마련한 거로 충분하네. 이제 나머지는 우리 직원들에게 맡기고 앉지.”
“아. 네. 알겠습니다.”
그런 모습을 티 나지 않게 지켜보던 다현은 내심 놀랬다.
아니 의동생을 자처하는 성원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언제 신화그룹 회장과 신화바이오 대표까지 저리 친해졌는지….
다현이 환하게 웃으며 자리에 앉는 경호를 힐끗 쳐다보며 고개를 저었다.
하여간 알다가도 모를 녀석이었다.
자리에 앉은 경호가 슬쩍 고기를 집으며 말했다.
“그럼. 고기 굽겠습니다.”
이건용 신화그룹 회장, 이성준 신화바이오 대표, 이성원 신화길드 대표, 김다현 신화길드 비상임 고문, 박정수 신화길드 비서실장.
그리고 최경호 행복식당 사장.
경호의 직책도 꽤나 그럴싸했지만, 나머지 다섯과 엄청난 괴리가 있었다.
애써 환하게 웃고 있었지만, 긴장이 되는 건 경호도 어쩔 수 없었다.
딱딱하게 굳은 표정에 고기를 집은 집게가 달달 떨리는 것이 마치 자대배치 첫날 긴장한 이등병 같은 모습이었다.
그런 경호의 모습에 다들 피식거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자네. 나 때문에 긴장한 건가? 나보다 깐깐한 큰놈도 형, 아우 하는 자네가?”
“그게 너무 많은 시선이 느껴지니 긴장을 좀 했나 봅니다. 그럼. 담백한 등쪽 갈빗살부터 굽겠습니다.”
경호가 두툼하게 썰어진 삼족우 갈빗살을 뜨겁게 달궈진 암염 불판에 올렸다.
치이이이이이이이.
고소한 육향이 확 풍겼다.
“오. 육향이 아주 좋구만. 그런데 이 불판은 뭔가? 이런 투명한 빛깔의 돌판이라니?”
눈썰미가 좋은 건용도 경호가 소금을 압축해서 만든 불판을 알아보지는 못했다.
“오늘 연회를 위해 제가 특별히 주문한 불판입니다. 우선 고기 한 점씩 드시면 제가 추가로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역시 자네는 천상 요리사군. 고기를 굽자마자 긴장한 모습이 싹 사라지니 말이야. 그나저나 다현 양. 내가 따로 감사 인사를 하지 않았군 그래. 무리한 부탁이었을 텐데 아들놈의 제안을 들어줘서 고맙네.”
‘람보’의 역할이 컸지만 그러한 사실까지는 알지 못하는 건용이었다.
“아닙니다. 회장님. 이왕 맡게 된 것 열심히 하겠습니다.”
안 하면 안 했지.
다현도 대충하는 성격은 아니었다.
“고맙네. 고마워. 어. 고기가 대충 익었군.”
“네. 다 익었습니다.”
건용의 말에 경호가 웃으며 고기를 한 점씩 앞접시에 올렸다.
“따로 소스나 양념 없이 먹으면 되는 건가?”
암염 불판에서 구워 소금간이 적당하게 베이기 때문에 경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간이 맞을 겁니다. 우선 그대로 드셔보십시오.”
건용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삼족우 갈빗살을 집어 한입에 넣고 씹었다.
“어!”
누가 보면 씹지도 않고 놀라는 헐리우드 액션이라고 비난할 정도의 빠른 반응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입안에서 한번 씹자마자 갈빗살이 녹아 없어져 버렸다.
고소하지만 느끼하지 않은 육즙과 풍부하고 깊은 육향만 남아 여운을 주고 있었다.
먹어보지 않았다면 절대 존재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의 극에 다다른 맛이었다.
건용의 반응에 다른 이들도 앞접시에 놓인 고기를 집어 서둘러 입안에 넣었다.
그리고 똑같이 ‘아!’하며 짧은 탄성을 내뱉었다.
“자네 도대체 고기에 무슨 짓을 한 건가? 아니 도대체 이 불판은 뭔가?”
“암염입니다.”
“암염? 돌소금을 이야기하는 건가?”
“맞습니다. 인연이 있는 드워프 부족이 있는데. 운 좋게 광산에서 질 좋은 암염을 조금 발견했다고 해서 제가 불판으로 만들어 달라 부탁했습니다. 고기 질도 질이지만, 요리라는 것이 재료와 도구, 정성까지. 그 세 박자가 맞아야 맛이 나는 것이니까요.”
“오오. 달궈진 암염에서 소금기가 배어 나와 고기에 간도 맞추고 풍미도 더 해진 것이로군.”
“그렇습니다.”
건용이 잘 구워진 삼족우 갈빗살을 한 점 더 먹고는 역시나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내가 그래도 아직 사람 보는 눈이 있는 거 같군. 자네를 처음 봤을 때부터 심상치 않다고 생각했네. 뭔가 대단한 것을 감추고 있는 느낌이라고 할까?”
건용의 말에 경호는 뜨끔했지만 애써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봐주시니 감사하지만 전 그저 골목식당에서 일하는 평범한 노총각일 뿐입니다. 회장님.”
경호의 말에 성원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에이. 형님도 이제 평범한 수준은 아니… 어엇?”
파직!
뭔가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느껴지는 마력파동.
“어? 뭐야?”
“어라? 이건?”
경호를 제외하고 가장 수준이 높은 다현과 성원이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누님. 분명 균열 같긴 한데. 마력파동이 이상한데요?”
각성자들은 마력파동을 느끼고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기감이 뛰어나고 마력이 높을수록 당연히 그 능력도 좋았다.
“나도 이런 마력파동은 처음인데. 균열처럼 굉장히 불안정하면서도 날카로운데 균열은 아닌 거 같아. 딱히 균열 조짐이 보이는 것도 아니고.”
최고의 베테랑이자 S급 각성자인 다현도 생소한 기운이었다.
“누님. 그럼. 이 마력파동은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거죠?”
경호가 아무것도 없는 하늘을 쳐다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아니 벌써? 벌써 2페이즈에 진입했다고?’
행운식당 문이 열리고 흰둥이가 경호에게 뛰어왔다.
앙앙!
귀엽게 꼬리를 흔들며 달려온 흰둥이가 경호에게 물었다.
-경호 님! 이 마력파동은?
-2페이즈가 시작됐다. 흰둥아.
경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눈앞에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시스템 전체 알림]
-마계의 차원 침략이 두 번째 페이즈로 변환되었습니다.
-던전과 균열에 변화가 생깁니다.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각성자 모두에게 보이는 전체 알림이었다.
“어? 누님. 이게 무슨 소리예요? 페이즈 변환이라니?”
다현도 놀란 표정을 짓기는 마찬가지였다.
“나도 모르지.”
그때였다.
하늘에서 지금까지는 다른, 처음 느끼는 그런 마력파동이 느껴졌다.
균열과 비슷한 느낌이었지만 또 달랐다.
“엇! 어엇!”
다현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파열이야! 피해!”
하늘이 갑자기 갈라지더니 3급 위험종 마수인 ‘얼음고치’가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으아아아아악! 마수다!”
“얼음고치야!”
균열의 조짐도 없이 파열되는 2페이즈 대표 균열인 ‘투명균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