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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환용사의 골목식당-90화 (90/335)

#090화

엘프하면 뾰족한 귀에 가냘픈 몸매, 아름다운 외모가 떠올랐다.

바로 눈앞의 ‘리나’처럼.

그녀의 가슴에 달린 명찰엔 ‘마사지 관리사’라고 적혀있었다.

엘프와 마사지.

어찌 보면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지만 알고 보면 사실 이보다 더 잘 어울리는 조합이 없었다.

드워프가 망치와 쇠를 잘 다루듯, 엘프는 활과 정령을 잘 다뤘다.

그리고 정령을 잘 이용하면 그 어떤 마사지 테크닉보다 피로를 잘 풀어줄 수 있었다.

신화 마도공학연구소의 피로회복실에서 일하는 리나 역시 정령을 다룰 수 있는 엘프였다.

“소장님. 그럼. 따라오세요.”

리나가 마사지룸으로 신 박사를 안내했다.

마사지 베드와 스툴 하나만 덜렁 놓여있는 그런 방이었다.

익숙한 듯 신 박사는 베드에 누웠고 리나도 스툴에 누웠다.

“마사지 시작하겠습니다.”

리나가 손을 들어 마력을 끌어올렸다.

쪼르륵.

주전자에 물 따르는 듯한 소리와 함께 그녀의 손에 물방울 모양을 한 하급 물정령이 모습을 드러냈다.

“거 참 볼 때마다 신기하단 말이지.”

하늘을 날고 불을 뿜어내는 각성자의 시대였지만 정령이란 존재는 여전히 신비했다.

거기에 엘프의 아름다운 외모와 합쳐져 그 신비로움은 배가 됐다.

리나는 그런 신 박사를 보고 환하게 웃으며 물정령의 회복력이 깃든 손으로 그의 두피를 부드럽게 마사지하기 시작했다.

“어으. 시원하다.”

신 박사의 입에서 마치 숙취에 쩌든 상태로 해장국을 들이켰을 때처럼 진심이 담긴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그때였다.

리나의 손끝에서 이질적인 기운이 은밀하게 흘러나왔다.

그 기운이 두피를 타고 신 박사의 몸 안으로 스며들었다.

리나가 환하게 웃으며 물었다.

“시원하세요?”

“정말 피로가 싹 가신다니깐. 그나저나 저번에 소개해준 정령술사 좀 다시 불러줄 수 있을까? 이제 슬슬 실험을 해보려고 하거든.”

“물론 가능하죠.”

“그럼. 내일 데리고 와요. 어느 정도 준비는 돼 있으니까.”

신 박사는 정령을 엘프를 통해 알게 되고는 그 신비로운 존재의 매력에 푹 빠졌다.

계약자의 말에 복종하는 지적 생명체.

거기다 에너지 형태의 모습을 가지고 있어 전투 로봇의 운영에 관여하는 마석에 이식하기도 쉬웠다.

여러 가지 문제점이 발견된 ‘AI’ 운영 프로그램을 대체할 수 있는 완벽한 존재였다.

“리나는 정말 복덩이예요. 정말 고마워요.”

“저야 감사하죠. 사실 실력 좋은 정령술사라 하더라도 고작 돈 좀 더 버는 마사지사에 불과하니까요.”

드워프는 주방도구나 만드는 난쟁이.

수인족은 서커스 하는 무섭게 생긴 괴물.

엘프는 이쁘장하게 생긴 마사지 관리사.

세상의 인식은 딱 이 정도였다.

그렇기에 ‘솔딘’이나 ‘테일러’도 그런 시선을 벗어내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었다.

그것도 인간 사회가 견제하지 않을 정도의 속도로 최대한 천천히.

그것은 여기 있는 ‘리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번 일이 성공하면 ‘정령’이라는 존재가 마사지가 아닌 다른 분야에도 쓰일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되니까요.”

“물론이지. 이런 훌륭한 능력으로 고작 마사지만 하는 것은 재능 낭비라고. 아. 물론 마사지를 폄훼하는 건 아니네.”

“소장님. 정말 감사해요.”

“다음에 우리 집에 한번 놀러 오지. 우리 아내 갈비찜이 끝내주거든.”

신 박사의 초대에 리나가 어색하게 웃었다.

“아. 엘프는 채식만 해서…. 갈비찜은.”

“샐러드도 잘 하니까. 하여튼 다음에 정령술사 분들이랑 한번 초대하지.”

“저야 초대해주시면 감사하죠.”

리나가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

성원과 성준이 지숙 표 콩나물국을 먹고 돌아갔다.

그 후 지숙은 경호에게 재벌 2세 형제와 낮술을 먹게 된 자초지종을 듣고는 다현과 데이트가 피곤했는지 일찍 자러 들어갔다.

“오랜만에 산책 좀 할까?”

사실 경호는 각성 사건 이후 계속 일이 있어 운애와 땅개에게 제대로 된 감사 인사도 못 한 상태였다.

경호는 혈관을 열심히 돌고 있는 술기운을 마력으로 모조리 태워버리고는 흰둥이를 옆구리에 끼고 식당 문을 열고 나왔다.

식당 앞에는 새롭게 마련한 새장이 있었다.

‘과자 주지 마세요.’라는 팻말이 걸린 새장 안에 골병이가 꾸벅거리고 졸고 있었다.

“골병아.”

-으음. 어? 아, 아빵!

경호를 본 골병이가 부리로 새장 입구를 열고 풀쩍 날아올라 그의 어깨에 올라왔다.

세계수가 있는 곳으로 가려던 경호가 흠칫 놀라며 주춤거렸다.

그것을 느낀 흰둥이와 골병이가 경호에게 물었다.

-경호 님. 무슨 일인가요?

-아빵. 왜여?

경호는 흰둥이와 골병이의 말을 듣지 못한 듯 중얼거리고 있었다.

“아니야. 아니야. 이제 고작 3년인데. 그럴 리 없는데.”

그때 흰둥이의 눈앞에 시스템 경고 메시지가 떴다.

[시스템 관리자 알림]

-마기 농도가 높아지며 마계의 차원 침략이 다음 페이즈로 변환되고 있습니다.

-페이즈 전환시 던전과 균열에 큰 변화가 생깁니다.

-경호 님! 경호 님!

“어어? 왜?”

-갑자기 메시지가! 마계의 차원 침략이 다음 페이즈(phase)로 변환되….

“그거 공유해봐!”

경호의 외침에 흰둥이가 시스템 메시지를 공유했다.

그것을 본 경호는 자신의 우려가 맞음을 확인하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제길.”

흰둥이가 경호의 눈치를 살피다 물었다.

-아빵. 화나쪄?

“아니야. 화 안 났어.”

화가 났다기보다 당황했다는 말이 조금 더 정확했다.

-경호 님. 이게 무슨 뜻이죠? 페이즈라뇨? 마계 침략에 단계가 있다는 겁니까?

“맞아.”

-경호 님은 정령계에서 이미 겪어보신 거겠죠?

“최종 페이즈인 4단계까지 겪었지.”

-그럼. 단계마다 많이 차이가 나겠죠?

“지금 이 속도로 침략 단계가 진행되면 100% 지구는 마계에 먹혀 먹이 농장이 될 거다. 나라도 그건 못 막아.”

-경호 님! 어떡하죠?

“지구의 수호신인 니가 나한테 그걸 물으면 어쩌라는 거야!”

-경호님은 마계를 물리친 용사니까 잘 아실 거 아닙니까. 거기다 4단계까지 겪어 보셨다면서요.

경호가 고개를 끄덕이며 예전 미르가 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내가 들은 이야기 중 이런 말이 있었어. ‘마계가 침략하면 마족보다 옆에 있는 동료를 더 조심해야 한다.’라고. 이제부터는 특히나 더 심해지겠지.”

-네엣? 그게 무슨.

예전에 미르가 그랬다.

정령계 같은 차원 행성이 아니라면 마족이 쳐들어올 필요도 없이 삼켜지기도 한다고.

그때 경호는 미르에게 그게 무슨 말이냐며 물었었다.

“정령계와 보통 차원의 행성은 다른가?”

-인간이 사는 지구가 침략을 당한다면….

“하필 예를 들어도 불길하게 ‘지구’야.”

-그냥 예를 드는 거니까 너무 감정 이입하지 말고 들어봐. 우선 기간산업을 붕괴시키지.

“기간산업을 붕괴시킨다고? 어, 그런데 그냥 대충 예를 드는 게 아니라. 지구를 잘 아는 것처럼 말하네?”

-가장 가까운 차원이기도 하고 우리 정령도 가끔 지구에 가기도 하니까. 물론 용사 소환에 지구의 인간이 걸릴지 몰랐지만.

“그랬냐?”

-그랬지. 하여튼 마계는 보통 1단계는 쉽게 상대할 수준의 공격을 해. 오히려 그때 얻는 마석 같은 마수의 부산물을 가지고 무너진 기간산업을 부흥시키며 더 빠르게 성장하기도 하지.

“아니 왜? 어차피 식민지로 삼을 거면 무차별 공격으로 빠르게 집어삼키는 게 낫지 않나?”

-먹잇감인 대상의 영혼이 고통받을수록 더 맛있는 영혼이 만들어지거든.

“하아. 나쁜 놈들인 건 알고 있었지만, 생각보다 더한 놈들이네. 그래서?”

-1단계에서 마수를 사냥하며 자신감도 얻고 발전도 하는 사이. 마족은 인간에게 은밀히 접근해 계약을 맺지.

“계약이라면? 종속 계약 같은 거 말하는 거야?”

-그렇지. 그러니 마계가 침략하면 마족보다 옆에 있는 동료를 더 조심해야 한다고 하는 거야. 그러면서 계속 차원엔 마기가 쌓여가서 결국 2단계가 오면 더 강한 마수가 더욱더 쏟아져나오고.

“3단계는?”

-마족이 나타나지. 아마 그때쯤이면 이미 거의 끝난 상태일걸. 사분오열로 찢어져서 마계 침략 따위엔 정신이 없거든. 정령계는 서로 배신하거나 갈라서는 일이 없으니 상관없지만, 저차원의 지성체는 죽음이 코앞에 다가와도 각자의 이익을 더 챙기기 마련이니까.

미르의 말에 경호는 뭔가 반박하고 싶었지만 틀린 말이 없었기에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럼. 4단계는?”

-마무리로 7대 마왕들이 나타나서 땅따먹기하는 거지.

그렇게 말했을 때가 정령계가 막 2페이즈로 넘어갈 때였다.

“흰둥아. 정신 바짝 차려야겠다.”

각성 소동 이후 조금 느슨했던 게 사실이었다.

하지만 마계의 침략은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다만 몰랐을 뿐.

-하지만 신화길드를 주축으로 각성자들을 모아서 준비하면 2페이즈도 막아낼 수 있지 않을까요? 지금까지도 잘 해냈잖아요.

사실 흰둥이는 이제 세상이 마계의 침공에 잘 대처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던 참이었다.

상위 정령인 운애와 땅개도 있고 황금거붕인 골병이와 울피도 힘을 찾아가고 있었다.

경호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어. 2페이즈의 조짐이 있기 전까진 말이야.”

경호도 흰둥이의 말처럼 다현과 성원 같은 주변 인물을 성장시켜 그들을 중심으로 각성자들을 모아 마계에 대항하려고 했었다.

-2페이즈가 그렇게 무서운 건가요? 경호 님은 4페이즈도 해결하고 오셨잖아요.

“2페이즈가 무섭진 않아. 마수가 강해 봐야 마수지. 마족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니까.”

-그럼?

“그런데 너무 빨라.”

빨라도 너무 빨랐다.

-빠르다고요?

“정령계에서 2페이즈로 전환까지 12년이 걸렸어.”

-12년이요?

경호가 정령계에 소환된 게 마계의 차원 침략이 일어난 지 10년째 되던 해였다.

그러다 경호가 훈련을 모두 마친 2년 후 본격적으로 2페이즈로 전환됐다.

그랬기에 경호는 지구에 오고 나서 대격변이 3년 전에 생겼다는 소리에 어느 정도 여유를 부렸던 것도 사실이었다.

“후우. 이거 내년쯤엔 마왕 얼굴 볼지도 모르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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