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0화
진화(進化, evolution).
작은 변화, 그것은 우연의 결과로 생겨 난다.
하지만 그것은 삶에 장점, 또는 단점으로 작용하여 그 개체를 더욱 발전시키며, 유전자에 새겨져서 축적된다.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 개체들은 자연의 선택을 받는다.
그렇게 진화는 아주 길고 긴 시간 동안 천천히 이루어진다.
초진화(超進化).
그런데 그러한 모든 조건을 뛰어넘어 아주 강력한 힘으로 강제적인 이루는 진화를 ‘초진화’라고 부른다.
가장 대표적인 초진화의 산물은 바로 ‘각성자’이다.
흰둥이가 지구를 구하기 위해 설치한 ‘시스템’의 힘으로 인간을 뛰어넘는 힘을 가진 새로운 존재들.
또 봉인석과 경호의 도움으로 하급 땅정령에서 진은의 ‘노움’이 된 땅개도 초진화의 주인공이었다.
황금대붕이 된 ‘골병이’ 역시 마찬가지.
그리고 마수의 몸에서 튀어나와 경호가 쫓고 있는 저 푸른빛의 둥그스름한 존재도 초진화의 산물이었다.
***
새로운 능력, 엄청난 육체적 성장 같은 놀라운 변화를 만들어내는 블루캔디.
마족의 암흑마기와 인간의 마도공학이 결합해 만들어낸 기적 같은 물질이었다.
엄청나게 대단한 물건 같지만 사실 블루캔디의 한계는 명확했다.
가장 큰 문제 중 하나는 강한 존재에게는 효과가 없다는 점이었다.
실험 결과 주의종 마수 이상의 마력을 가진 존재에게는 효과가 없었다.
하다못해 상급의 주의종 마수만 해도 효과는 절반 이상으로 떨어졌다.
그렇기에 하는 수 없이 하수로에 서식하는 최하급 마수들을 대상으로 블루캔디를 뿌렸던 것이었다.
만약 그런 문제가 없었다면 동춘도 굳이 이렇게 일을 복잡하게 만들지 않고 어떻게든 각성자에게 먹여 좀 더 쉽게 사회를 혼란에 빠뜨렸을 것이었다.
또한 ‘폭주’라는 그 어떤 장점도 무색하게 만드는 문제점도 존재했다.
하지만 ‘진화’라는 녀석은 항상 생존에 유리하게 변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었다.
코뿔두더지가 블루캔디를 먹었을 때 우연의 우연으로 공격 특성이 아니라 폭주를 억제하는 마력강화 특성이 생기며 새로운 갈래가 생겨났다.
그렇게 다른 마수의 마석을 섭취하며 그 힘을 키워가던 마수는 결국 블루캔디의 기운이 담긴 실험체 사채와 연구원 시체를 먹고 더 강력한 마력강화와 지성이 생겼다.
그때까지만 해도 ‘폭주’라는 시간폭탄의 타이머는 째깍거리며 흘러가고 있었다.
그러다 동춘과 태수를 씹어 삼키고 200알의 블루캔디를 한 번에 흡수하며 엄청난 기운을 흡수하고 ‘초진화’를 넘어 무언가 엄청난 것이 만들어지기에 이르렀다.
‘자아’라는 것을 가진, 지금 경호가 쫓고 있는 바로 그 존재.
바로 마석의 핵 속에서 만들어진, 지금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완전히 새로운 존재였다.
그 존재는 생각했다.
‘살아야 한다! 새로운 몸을 찾아서 더 강해져야 해!’
자신을 잉태시킨 자궁이자 최강의 숙주라고 생각했던 마수가 쉽게 죽어버렸다.
그리고 더 강한 존재들이 자신을 쫓고 있었다.
도망을 치고 있지만, 점점 좁혀지는 거리를 느끼며 쉽지 않음을 느꼈다.
“야! 멈춰봐. 나 그렇게 나쁜 사람 아니야!”
위험했다.
아까 빨간 머리 인간과 비교할 수 없이 위험한 자였다.
그때 쫓아오는 인물의 강함 뿐 아니라 결함도 느낄 수 있었다.
보통의 존재라면 경호의 그 강함 때문에 그의 몸 안에 존재하는 다른 기운을 느끼기 어려워 그런 결함을 느낄 수 없는 것이 보통이었다.
하지만 경호가 쫓고 있는 존재는 기운의 폭주 속에서 생명을 얻은 존재.
그렇기에 세상 그 어떤 존재보다 기운을 예민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균형이 깨져있다. 그래서 가진 힘에 비해 빈틈이 많아. 그 빈틈만 잘 노린다면, 어쩌면 숙주로 삼을 수 있을 수도 있겠어.’
숙주로 삼아 제대로 뿌리만 내릴 수 있다면 조금 전 그 마수보다 백배 천배 나은 선택이 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이러면 가능해!’
***
“야! 멈춰봐. 나 그렇게 나쁜 사람 아니야!”
엄청난 속도로 날듯이 이동하는 물체를 쫓아 경호가 달렸다.
여전히 옆구리에는 흰둥이가 껴있었고 어깨에는 골병이가 매달려 있었다.
땅개와 운애도 경호와 속도를 맞춰가며 따라가는 중이었다.
경호는 마음만 먹는다면 따라잡아 붙잡을 수도 있었지만 아직 정확한 정체를 몰랐기에 일부러 간격을 유지한 채 관찰하며 천천히 뒤쫓고 있는 중이었다.
‘마수의 몸에서 튀어나온 것이 분명한데….’
그런데 마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아주 순수한 마력과 푸른빛이 뿜어져 나온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특별한 점이 없었다.
물론 그 두 가지만 해도 충분히 특별했지만 말이다.
어느새 쫓다 보니 서울 외곽의 흑색지대에 도착해 있었다.
“어?”
엄청난 속도로 날아가던 물체가 힘을 잃은 듯 속도를 늦추더니 바닥에 축 늘어졌다.
뒤쫓던 경호가 확인하기 위해 가까이 다가갔다.
가까이 다가가 확인한 녀석의 모습은 마치 푸른빛을 뿜어내는 커다란 젤리 같은 모습이었다.
그때 그렇게 강하지 않던 순수한 마력의 농도가 점점 짙어지고 있었다.
“뭐지? 마치 마나코어라도 되는 듯한. 그런 느낌인데.”
하지만 분명 스스로 빛내며 움직이는 생명체였다.
마나코어는 마력을 생성해내고 압축하는 일을 할 수 있었지만 분명 신체의 한 부분일 뿐이었다.
-흰둥아. 너도 이런 거 전에 본 적 없어?
‘블루캔디’라는 신물질이 만들어낸 초진화의 산물이었다.
그러니 흰둥이도 모르는 것이 당연했다.
-경호님. 저도 처음 보는 녀석이네요.
-땅개나 골병이는 당연히 못 봤겠고 운애도 저런 거 본 적 없어?
경호의 물음에 운애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저런 건 나도 처음 보네. 생명체라고 하기에는 생존에 필요한 그 어떤 것도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은 모습인데.
아무리 작은 생명체라도 눈이나 입 같은 기초적인 기관이 달려있기 마련이었다.
그래야 적을 피하고 사냥을 하고 그것을 먹을 수 있으니까.
하지만 운애의 말처럼 저 푸른빛을 뿌리는 존재는 그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냥 꿈틀거리는 주먹만 한 젤리 덩어리처럼 보일 뿐이었다.
이상하게 생긴 건 분명했지만 그렇다고 딱히 위험해 보이지는 않았다.
경호가 푸른빛이 어른거리는 젤리 덩어리에 손을 가져댔다.
출렁.
말캉거리는 느낌이 어릴 적 가지고 놀던 ‘액체괴물’의 느낌이 났다.
“이거 느낌 되게 좋…. 어?”
손안에서 통통거리고 있던 것이 갑자기 스르륵 손으로 흡수가 돼 마법처럼 사라졌다.
“뭐야? 이거 흡수…. 크윽.”
경호는 심장에서부터 느껴지는 엄청난 격통에 신음을 내뱉었다.
커억.
그도 그럴 것이 젤리 형태의 존재가 안착한 곳이 바로 경호의 심장이었다.
강하게 수축하며 전신에 피를 순환시키던 심장이 그 존재로 인해 움직임을 멈췄다.
커억. 컥.
경호가 힘없이 바닥에 쓰러져 벌벌 떨었다.
-아빠!
-경호 님!
-주인님!
-경호!
경호는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아득하게 느껴졌다.
심장이 완전히 멈추고 전신의 근육에 힘이 풀리는 것이 느껴졌다.
이어서 강한 두통이 찾아왔다.
의식이 흐려지는 가운데 경호는 환한 빛을 보았다.
아니 보았다고 생각했다.
‘뭐, 뭐야. 여긴?’
세상이 하얗게 보였다.
“이거. 그런데 갑자기 왜?”
갑자기 변한 환경에 당황했다.
하지만 경호는 곧 자신에게 벌어진 일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주변을 쓱 훑어보다 입을 열었다.
“거기 나와봐. 너냐? 젤리 덩어리.”
경호의 말이 끝나자 바닥에서 푸른빛을 뿜어내는 젤리 덩어리가 쑥하고 솟아올랐다.
그리고는 꿀렁거리며 점점 형태를 바꿔나가기 시작했다.
주먹만 했던 크기가 마구 자라나더니 무언가 형태를 잡아가기 시작했다.
두 다리부터 몸통, 팔, 그리고 머리.
그것은 사람의 모습이었다.
그것도 경호와 한 치의 차이도 없는 똑같은 모습의 형태로 말이다.
단지 다른 점이라면 눈동자가 파랗다는 것 정도였다.
풋.
그 모습을 지켜보던 경호가 피식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웃기나?
“오. 말도 할 줄 아네? 평범한 젤리 덩어리는 아닌 모양이야.”
물론 경호도 평범한 젤리 덩어리가 이렇게 자신의 영혼에 연결하여 의식의 세계로 들어올 수 없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마기도 없고 마력도 특별하지 않아서 만졌던 것인데 그것도 모두 계획된 것일 수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혹시 그 거대한 마수를 조종한 것이 너냐? 그러니까 니가 본체? 뭐 그런 거야?”
경호의 말에 파란 눈의 경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바보는 아닌 모양이군. 그러면 내가 어떻게 할지도 감이 오겠네?
이번에는 경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니 말대로 바보는 아니니까. 그럼. 의식의 세계에서 날 죽이고 이 몸을 차지하겠다는 건가?”
-정답이다.
“맞췄다니 다행이네.”
물론 경호도 이해 가지 않는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어떻게 마수에서 나온 기생충 같은 녀석이 어떻게 의식의 세계로 침투한 거지?”
10년간 정령계에서 별의별 희한한 일을 다 겪은 경호에게 이번 같은 일이 그렇게 특별한 경우는 아니었다.
다만 이렇게 영혼이 깃든 의식의 세계로 다른 존재가 들어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기에 그것이 궁금했다.
-기생충이라. 그래. 맞아. 난 기생충이지. 숙주가 없으면 안 되는 기생충. 그래, 어차피 소멸할 영혼이니 궁금증이라도 풀고 죽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인자한 척하는 잔인함.
인격 형성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영혼이 ‘동춘’이었기에 푸른 눈의 경호도 그러한 성향을 보였다.
-우선 손발은 묶어놓고 시작하도록 하지.
푸른 눈의 경호가 손을 들어 경호를 향해 흔들자 허공에서 굵은 밧줄이 나타나 손과 발을 꽁꽁 묶었다.
경호는 밧줄에 묶인 손과 발을 보며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의식의 세계에서 힘을 쓰는 법은 현실과 완전히 달랐다.
그러므로 아무리 강한 존재라고 해도 의식의 세계가 익숙하지 않다면 아무런 힘도 사용할 수 없기 마련인데.
‘제법 능숙하네.’
그런 면에서 푸른 눈의 경호가 보인 기술은 제법 익숙한 모습이었다.
-너만큼이나 강한 인간을 두 명, 그리고 수십의 시체와 수백의 마석을 섭취했다. 그로 인해 가히 천족과 마족, 용족 같은 상위 종족에 맞먹는 능력을 갖춘 존재가 되었지. 단지 숙주가 완성되기 전에 죽어버려 아쉽지만 너 같은 꽤 쓸 만한 육체를 찾았으니 위안이 되는구나.
뭔가 다 결정된 듯한 말투에 경호는 웃음이 터지려 하는 것을 애써 참았다.
“이야, 우리 기생충 씨는 계획이 다 있구나. 내가 몰랐네. 그런데 천족과 마족, 용족 같은 상위 종족이란 말이지. 그 정도의 기운을 가지고 초진화를 겪는다고 도달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닌데 말이야. 우습네. 자화자찬이 아주 가관이야.”
-네놈이 인간 중에 조금 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고 나에게 훈계를 하려 하는구나.
“조금 강한 힘이라….”
-강하다는 건 인정하마. 하지만 멍청하게도 네 기운은 조화롭지 못해 무너져 내리고 있다. 당장 폭주해도 이상하지 않을 수준이더군.
그것은 맞는 말이었다.
10년간 신력과 정령력, 마력을 고르게 길러오다 갑자기 신력과 정령력이 거의 사라져버렸다.
당연하게도 균형이 깨졌고 경호는 그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품고 있는 마력의 절반도 제대로 쓰지 못 하는 상황이었다.
물론 그것만으로도 힘이 부족하지 않을 정도로 강하긴 했지만 그래도 점점 상황이 나빠지고 있어 걱정하던 참이었다.
-나는 모든 힘을 조율할 수 있는 존재다. 초진화를 계속 겪으며 다양한 기운을 받아들이고 흡수하고 변형시키는 능력을 갖추게 됐지. 어차피 폭주로 죽을 몸뚱이. 내가 잘 쓰도록 하마.
“아니 그러면 내가 널 여기서 쓰러뜨리고 너의 능력을 흡수하면 지금의 불균형도 해결할 수 있다는 말이네. 안 그래?”
경호가 해맑은 미소와 함께 질문을 던졌다.
크하하하하하하하하.
푸른눈의 경호가 몸까지 뒤로 젖히며 광소를 터뜨렸다.
-느끼고 있겠지만 의식의 세계는 결코 지내기 좋은 곳이 아니야. 처음 겪어본 너는 지금 호흡하는 것만으로도 벅찰 텐데. 아닌가? 그런데 손발까지 묶인 상태로 날 쓰러뜨리겠다고? 웃기지도 않는 소리를 하는군.
“손?”
경호는 손을 들어 어깨를 붕붕 돌리며 뭐가 문제냐는 듯 물었다.
-어? 어엇!
이어서 발도 들어서 발목을 흔들었다.
“발?”
어느새 꽁꽁 묶었던 밧줄은 바닥에 풀어져 있었다.
-어, 어떻게 그걸….
의식의 세계.
이곳은 결코 지내기 좋은 곳이 아니었다.
익숙하지 않다면 말이다.
하지만 경호에게 ‘의식의 세계’는 아주 익숙한 공간이었다.
미르가 잠든 시간에도 수련을 쉬면 안 된다며 찾아오는 공간이었으며 상급 정령들이 정령술을 가르치기 위해서 주로 이용하던 공간도 역시 의식의 세계였다.
처음에는 숨도 쉬기 힘든 괴로운 공간이었지만 나중엔 경호 스스로 의식의 세계로 들어가 휴식을 취했을 정도로 친숙하고 익숙한 곳이었다.
“누가 처음 겪어봤데? 야! 여기가 내 본진이야. 인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