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9화
땅개는 흙빛의 구슬을 손에 쥐고 그 안에 담긴 정령의 기운을 조심스럽게 흡수하고 있었다.
-이제 주인님께서도 날 다시 찾으시겠지!
땅개는 기분 좋은 표정을 지으며 더욱 구슬의 기운을 흡수하는 것에 집중했다.
사실 최근 들어 땅개는 우울증에 빠져있었다.
기운이 하나도 없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주인님께서 시키신 세계수 주변의 땅을 일구는 것도 귀찮았다.
자신이 과연 주인님에게 필요한 존재인지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사실 경호에게 있어 땅개는 세계수 성장을 도와주는 좋은 일꾼 정도였다.
하지만 땅개에게 경호는 부모이자 친구이며 주인인 그야말로 세상의 모든 것이었다.
각인(imprinting) 효과.
결정적 시기에 노출된 대상에게 애착을 가지는 현상으로 마치 알을 깨고 나온 오리가 처음 본 대상을 어미로 여기는 것 같은 현상을 일컫는 용어였다.
바로 땅개에게 경호가 그런 애착의 대상이었다.
새롭게 자리 잡은 운디네에게 경호의 관심이 쏠리자 땅개는 엄청난 절망감을 느꼈다.
그렇다고 앞에 나서서 원망하거나 화를 낼 수도 없었다.
그저 극심한 우울증에 빠져 땅속 깊은 곳에서 훌쩍이며 있을 뿐이었다.
-그래! 나도 운디네처럼 상급 정령이 되면 이뻐해 주실 거야!
땅개는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하급 정령이다 보니 생각하는 수준의 한계가 딱 그 정도였다.
그때부터였다.
땅개는 바닥을 파고 파고 또 팠다.
-이게 아니야!
땅의 기운을 담고 있는, 자신이 강해질 수 있는 그 무언가를 찾기 위해.
-이것도 아니야.
그렇게 몇 날 며칠을 쉬지 않고 땅을 파헤친 끝에 땅개는 아주 진한 기운을 머금고 있는 흙빛 구슬을 찾을 수 있었다.
-그래. 이거면 될 거 같아!
그것을 가지고 세계수 아래로 돌아온 땅개는 매일 같이 그 구슬을 만지작거리며 기운을 불려가기 시작했다.
-이 기운을 모두 흡수하면 나도 상급 정령이 될 수 있어. 그러면 나도 운디네처럼 주인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을 거야.
단순한 오해와 억측으로 시작된 일이었지만 그로 인해 빠른 성장을 하게된 땅개였다.
***
늦은 저녁 시간.
다들 돈가스에 맥주 한 잔씩 하고는 기분 좋게 돌아갔다.
다현과 미호는 집으로. 정수는 신화건설이 내어준 기숙사로. 그리고 경호와 흰둥이는 운애를 바래다주러 행운공원의 연못을 찾았다.
“이제 인간의 모습으로도 꽤 오래 있을 수 있네요?”
경호의 말에 운애는 환하게 웃었다.
보고 있으면 기분이 절로 좋아지는 그런 미소였다.
“그러게요. 이제 3시간 정도는 괜찮은 거 같아요. 정령력도 많이 회복했거든요. 그나저나 오늘 돈가스도 너무 맛있었어요. 너무 감사해요. 다음에 이 은혜 꼭 갚을게요.”
피자 한 판으로 암흑마기로부터 목숨도 구해준 운애였기에 경호는 은혜를 갚는다는 그녀의 말을 마냥 웃어넘길 수 없었다.
“네. 꼭 갚아주세요. 그럼. 저도 또 대접하도록 하죠.”
경호도 그런 운애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분명 좋아한다거나 하는 그런 감정은 아니었다.
하지만 경호는 다현과 또 다른 의미로 운애가 좋았다.
‘이상하게 편하고 마음이 간단 말이지. 이상하게.’
경호가 정령계에서 오래 지냈기 때문에 정령의 기운이 그를 편안하게 해주는 것도 한몫하기는 했다.
하지만 단지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특히나 저 환하게 웃는 운애의 얼굴은 보고만 있어도 자기도 모르게 같이 미소가 지어졌다.
-경호 님. 정신 차리세요. 운디네는 이미 연못 안으로 들어갔다고요.
“어엇? 엉?”
흰둥이의 말처럼 운애는 이미 연못 속으로 사라지고 없었다.
“아니 그냥 달빛이 좋아서. 그래서 그랬지.”
머쓱해진 경호가 괜히 하늘을 쳐다봤다.
그러나 오늘은 달빛이 가장 흐린 그믐밤이었다.
-경호 님. 오늘은 그믐밤인데요.
“에이. 꼭 보름달이어야 달빛이 좋다는 그런 선입견에 빠져 살지 말라고. 누구는 겉절이가 맛있고 누구는 김장김치가 맛있을 수 있는 거잖아.”
‘그걸 또 그런 식으로 비유하시네.’라며 흰둥이가 중얼거렸지만, 경호는 애써 못 들은 척하며 이젠 제법 커다랗게 자란 세계수를 향해 걸어갔다.
“그런데 요즘 들어 땅개가 통 안 보이네.”
그전에는 행운공원에 오면 가장 먼저 반기던 존재가 바로 땅개였다.
그도 그럴 것이 계약 관계로 묶여있는 정령이었기에 주인인 경호를 반기는 것이 당연했다.
“흰둥아. 땅개가 나한테 서운한 거 있고 그런 건 아니겠지? 사실 요즘 내가 운애를 많이 찾긴 했잖아,”
-운애를 많이 찾긴 한 정도가 아니라 운애만 찾으셨죠.
흰둥이의 지적에 경호가 머릴 긁적이며 변명 아닌 변명을 했다.
“아직 세상 돌아가는 걸 잘 모르기도 하고. 그러니까 적응하라고 찾아온 거지.”
-경호 님. 그렇게 따지면 땅개가 운애보다 세상 돌아가는 걸 더 모르는 편입니다.
“달빛이 참 좋….”
흰둥이의 묵직한 돌직구성 발언에 경호는 괜히 하늘로 고개를 돌리다 묘한 기운을 느꼈다.
“…어?”
-어? 경호 님!
묘한 기운이 느껴진 곳은 세계수 뿌리 아래쪽이었다.
“땅개니? 땅개야!”
경호가 부르자.
파아앗.
잠시 후 땅개가 흙을 파헤치고 밖으로 나왔다.
“어! 땅개야!”
구슬의 힘을 흡수한 땅개는 중급 정령으로 진화를 한 상태였다.
-주인님! 제가 뭘 찾았습니다!
땅개의 목소리에서 마치 무슨 자랑거리가 있는데 참고 있는 듯한 그런 느낌의 우쭐함이 느껴졌다.
경호가 그런 땅개를 위해서 맞춤형 질문을 던져줬다.
“지금 그 밑에 은은한 기운을 뿌리고 있는 그것을 말하는 것이냐?”
-네. 그렇습니다. 주인님.
경호는 땅개가 ‘특수한 광물이라도 찾았나?’ 싶었지만 괜히 궁금한 척, 모르는 척하며 받아주었다.
-주인님. 실은 제가 정말 우연히 이것을 찾았습니다. 한 번 보시지요.
땅개가 다시 구멍 아래로 내려갔다 올라왔다.
그런 땅개의 손엔 주먹만 한 흙색 구슬이 하나 쥐어져 있었다.
-경호 님. 저건 봉인석 같은데요?
“땅개야! 이걸 어디서 구했어? 이거 봉인석이잖아?”
땅개를 만나면 사극톤으로 이야기하던 컨셉까지 까먹을 정도로 경호도 놀란 상태였다.
-그래서 정말 제가 갈 수 있는 곳이라면 모두 돌아다니며 뒤졌습니다. 그리고 수천 미터 지하에서 이것을 찾았습니다. 주인님. 저도 이것을 이용해서 성장하면 운디네처럼 상급 정령이 될 수 있을까요?
그래서 며칠간 땅개가 보이지 않았던 것이었다.
사실 최하급 정령이었던 땅개가 운디네 같은 상급 정령이 되는 것은 불가능했다.
물론 봉인석이 없다는 가정하에서.
봉인석.
상급 정령이 소멸하기 전 자신의 힘을 모두 봉인해놓은, 영물의 내단과 같은 성질의 것이었다.
그중에 땅개가 들고나온 것은 바로 땅의 상급 정령인 ‘노움’의 봉인석이었다.
하지만 기대에 가득 찬 눈망울에 땅개를 보며 경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불가능한 일은 아니야.”
-주인님! 정말이요!
“하지만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일이기도 하지.”
봉인석을 흡수한다면 하급 정령도 상급 정령이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여기엔 ‘봉인석을 제대로 잘 흡수한다면.’이라는 단서가 붙는다.
어린아이가 밥을 한 번에 100그릇 먹는다고 어른이 되지 못하는 것과 같은 뜻이었다.
100그릇은커녕 몇 그릇을 넘기지 못하고 배탈이 날 게 분명했다.
그렇다고 속성이 다른 운애가 땅개를 도와주기도 어려웠고 정령력이 거의 사라진 경호가 도와주기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네가 찾은 봉인석은 귀한 물건이 맞으나 그것을 온전히 흡수하기에는 많은 시간이 걸리는 일이야. 적어도 3년은 걸릴 거야.”
하급 정령이 3년 만에 상급 정령이 된다는 것만 해도 말도 안 되는 일이었지만 땅개는 경호의 말에 실망하고 말았다.
-3년…. 3년. 후우. 그렇군요. 주인님.
“땅개야. 그렇게 급하게 상급 정령이 되고 싶은 이유라도 있는 것이냐.”
경호의 사랑을 받기 위해서.
상급 정령이 되면 운애처럼 사랑받을 수 있을 거 같아서 그런 것이었다.
왠지 이유를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땅개는 경호에게 그렇게 말하고 싶지는 않았다.
-강해져서 주인님께 도움이 되는 존재가 되고 싶어서 그렇습니다.
경호가 그런 땅개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어 주었다.
“땅개야. 지금도 충분히 잘해주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고 천천히 기운을 흡수하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주인님.
그렇게 경호가 가고.
봉인석을 쥐고 떠나는 경호를 바라보던 땅개의 눈망울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기 시작했다.
‘분명 실망하신 거야. 3년이라니…. 너무 늦어! 어서 강해져야 세계수에 힘을 더 불어 넣어줄 수 있고 운디네처럼 주인님 곁에서 같이 싸울 수도 있을 텐데.’
결국 땅개의 눈에 맺혀 있던 눈물이 넘치며 주르르 흘러내렸다.
‘내가 약해서, 내가 부족해서, 내가 모자라서 그런 거야!’
사실 바로 봉인석을 이용해 상급 정령으로 진화할 방법이 전혀 없는 건 아니었다.
대신 소멸할 수도 있는 위험한 방법으로 봉인석을 체내에서 녹여 흡수하면 급격한 진화를 이뤄낼 수 있었다.
경호도 이 방법을 알고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 쉽게 될 것을 굳이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땅개에게 모험을 시킬 필요가 없어 말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눈물을 줄줄 흘리던 땅개가 손에 쥔 봉인석을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이걸 더 빠르게 흡수할 방법이 없을까?
손에 든 봉인석을 뚫어지게 쳐다보던 땅개가 손에 쥐고 있던 봉인석을 꿀꺽 삼켰다.
-커억!
땅개의 눈이 뒤집히며 몸이 부르르 떨렸다.
-꺼어어어어어억!
땅개의 몸 안에서 정령력이 요동치며 폭발할 듯 마구 날뛰기 시작했다.
운애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물 밖으로 나와 몸부림치며 쓰러져 있는 땅개를 발견했다.
-아니! 이게 무슨…. 경호!
운애는 즉시 행운식당을 향해 달려갔다.
막 식당에 들어가려는 경호를 발견한 운애가 큰 소리로 불렀다.
-경호!
“아이! 깜짝이야! 어? 운애?”
-땅개가. 땅개가.
“땅개가 왜?”
-죽어가고 있….
운애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경호의 신형이 사라졌다.
***
“땅개야!”
경호가 쓰러진 땅개를 부르며 몸을 흔들었지만 이미 정령력의 폭주로 완전히 의식을 잃은 상태였다.
“제길. 이미 봉인석을 꺼내기엔 늦었어. 그러면…. 흰둥아!”
이미 흡수되기 시작한 봉인석을 빼내기는 늦은 상황이었다.
-땅개 이 녀석도. 우와. 앞뒤 재지도 않고. 완전 골 때리네.
“우선 날뛰는 정령력 좀 안정화시켜 줘! 이렇게 된 거 흡수시키는 수밖에 없으니까.”
봉인석이 깨지며 담겨 있던 힘이 분출되고 있는 상황에서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저 최선을 다해 그 힘을 흡수시켜 어떻게든 하급 정령인 ‘땅개’를 ‘노움’으로 만들어야 했다.
거품을 물고 부들부들 떨고 있는 땅개 위에 올라탄 흰둥이가 앞발에 신력을 모아 폭주하려는 기운을 조절하고 있었다.
-경, 경호 님. 이제 저는 한곕니다!
“운애야! 나 좀 도와줄 수 있을까?”
경호가 뒤편에서 땅개를 지켜보던 운애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래. 도와줄게. 내가 뭘 하면 되지?
“운애. 혹시 정령력으로 여기 있는 땅정령의 폭주를 막아줄 수 있을까?”
땅개를 다시 한번 찬찬히 훑어본 운애가 고개를 저었다.
-힘들 거 같아. 같은 정령력이면 어느 정도 가능할 거 같은데 나는 물이고 얘는 땅이라서 불가능해.
예상은 했지만 역시나 불가능했다.
‘가능할까? 지금 이 상태로?’
정령계에서의 수준이라면 봉인석의 힘을 힘들이지 않고 흡수시켜 땅개를 노움으로 성장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거의 없다시피 한 수준의 정령력을 가고 있었다.
‘그래도 우선 해보자!’
경호가 운애를 보며 말했다.
“운애야. 나한테 정령력 좀 넣어줄래? 이거 잘하면 가능할 거 같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