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7화
‘앗!’
다현은 자신이 엄청난 실수를 저질렀다는 걸 깨달았다.
각성자, 특히 자신 같은 S급 헌터가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이 바로 이런 행동이었다.
다현은 서둘러 머리 위에 떠오른 ‘적염’을 끄기 위해 마력을 제어하려 했다.
“어? 꺼졌잖아?”
조금 전, 분명 자신의 머리 위에 적염이 타오르는 것을 느꼈었다.
‘내가 흥분해서 착각했나?’
물론 다현의 착각이 아니었다.
단지 그보다 먼저 운디네의 정령력이 움직인 결과였다.
경호는 등줄기에 소름이 올라오는 것을 느끼며 운디네의 눈치를 살폈다.
다현도 욱하면 무섭지만, 상급 정령인 운디네가 욱하면 이 주변이 정말 박살 날지도 몰랐다.
-괜찮아요? 기분 나쁘셨죠? 원래 나쁜 애는 아닌데. 좀 흥분을 잘….
운디네가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었다.
-아니에요. 경호 님. 제가 아직 인간 세상에 대한 이해도가 떨어져 실수한 거 같네요. 그런데 손을 내밀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요?
-아. 악수라는 건데 손을 잡고 흔들면 됩니다. 악수를 거절당하면 좀 속상하고 그렇거든요. 그냥 외국에서 와서 한국 문화를 잘 모른다는 정도로 이야기하시면 될 겁니다.
경호의 말에 운디네가 다현을 보며 활짝 웃었다.
그리고 다현의 내민 손을 맞잡고는 흔들며 인사했다.
“나는 운ㄷ…. 운애. 내가 한국에 온 지 얼마 안 돼서 문화를 잘 몰라요. 그래서 당신이 누군지도 몰랐고요. 미안해요. 경호 님도 알게 된 지 얼마 안 됐어요.”
경호는 운디네보다 더 긴장하며 지켜보다 나름 잘 대처한 모습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운애. 이름 이쁘네요. 저도 앞으로 운애 씨라고 부를게요.
-경호 님. 이제 편하게 불러주세요. 운애라고. 저도 경호라고 부를 테니. 그렇게 해줄 수 있죠?
경호가 그런 운애를 보며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운애야.
어색하게 전음을 보낸 경호의 볼이 살짝 빨개졌다.
“저야말로 미안해요. 내가 앞뒤 사정도 모르고 갑자기 화를 냈네요. 정말 미안해요. 운애 씨. 아, 그럼.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여러모로 반성한 다현이 고개를 저으며 운애의 나이를 물었다.
나이?
운애는 고개를 갸웃하며 경호를 쳐다봤다.
-37살이라고 해.
액면가는 아무리 많이 잡아도 20대 중반처럼 보였지만 무조건 다현보다 나이를 높게 잡아야 앞으로 일어날 마찰을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을 거 같았다.
“37살이요.”
운애의 말이 끝나자 다현과 미호의 입에서 똑같은 말이 튀어나왔다.
“말도 안 돼! 나보다 많다고?”
“말도 안 돼! 20대 초반처럼 보이는데!”
37살이라고 말하라고 한 경호도 사실 말도 안 된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사실 운애, 운디네의 나이는 사실 3000살이 조금 넘었으니까 37살도 엄청 낮춰 부른 것이었다.
다현이 경호에게 슬쩍 다가가 귓가에 입을 가져갔다.
“경호, 정말 37살이야? 정말?”
“외국 나이라서 만으로니까. 우리나라 나이로 하면 38살이지.”
다현이 입을 쩍 벌렸다.
“미안해요. 아직 한국의 문화…. 아니 솔직히 관계하는 것 자체가 너무 어려워요.”
경호는 무리수를 투척했다.
“운애가 머리를 다쳐서 기억에 문제가 좀 생겼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기억을 찾기 위해 고국인 한국으로 왔다고 하네.”
“아. 아아. 그랬구나.”
다행히 무리수라 생각한 막말이 다현에게 먹혔다.
“그래? 지금은 어디서 사는데? 경호, 너는 아는 거 같던데?”
어디서?
행운공원 연못이라고는 죽어도 말할 수 없었다.
“에이. 무슨 호구조사를 하고 있어. 선보러 나온 것도 아닌데. 안 그래?”
그때였다.
‘어?’
경호는 식당이 있는 골목 저편에서 조금은 이질적인 마기를 느꼈다.
-경호. 저기 밖에 마기가 느껴지는 데?
운애도 느꼈는지 경호에게 알렸다.
강한 느낌은 아니었지만, 마족도 마수도 아닌 묘하게 다른 느낌에 경호는 긴장했다.
거리도 멀지 않았고 지숙이나 미호 같은 일반인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먼저 나서야 했다.
그리고 여기서 제대로 나설 수 있는 사람은 다현밖에 없었다.
‘다현아. 미안.’
경호는 창밖으로 식당 앞에 주차된 다현의 스포츠카를 슬쩍 보고는 옆에 떨어져 있는 주먹만 한 돌멩이를 염력으로 움직였다.
퍼억.
삐엥! 삐엥! 삐엥! 삐엥!
차량의 경고음에 다현의 고개가 반사적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창밖으로 보이는 자신의 차를 보며 소리 질렀다.
“아악! 뭐야! 어떤 놈이!”
다현은 자기도 모르게 욕이 튀어나왔다.
그도 그럴 것이 전면 엠블럼 있는 하단 부위가 무언가에 부닥친 듯 완전히 찌그러져 있었다.
“엔초야! 아아아아아악!”
망가지면 고치기도 쉽지 않은 올드 슈퍼카였다.
다현이 다급하게 식당 밖으로 나가 자동차를 살폈다.
“어?”
차를 살피던 다현이 고개를 들어 어둑어둑해지고 있는 골목 저편을 바라봤다.
“뭐지. 이거?”
식당 안에선 느껴지지 않았던 마기가 미세하지만 분명하게 느껴졌다.
-그럼. 운애야. 나가 볼까? 저거 처리하고 돈가스 먹자.
경호는 미묘하게 신경을 거슬리는 기운이기는 했지만 강한 기운은 아니었기에 가벼운 마음으로 운애에게 말을 건넸다.
“다들 있어요. 잠깐 나갔다 올 테니.”
***
폐쇄된 지하철.
그곳으로 빌런 조직이 침투해오고 마수가 튀어나오면서 다시 주목을 받았다.
-과연 지하철을 저대로 둬도 안전한 것인가!
언론에서 이 같은 주제의 기사들을 쏟아냈고 여론은 점점 악화됐다.
안 그래도 점차 균열이나 게이트를 통해 넘어오는 마수의 등급이 높아지고 그 빈도도 높아지면서 시민들의 불안이 커지고 있었다.
헌터본부는 그제야 부랴부랴 대책을 세웠다.
-지하철 특임대를 만들어 정기 소탕에 나서겠다.
여론이 조금 잠잠해졌다.
물론 지하철에 생기는 균열을 모두 파악해서 처리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그렇다고 지하철을 모두 매몰시키는 것도 쉬운 방법은 아니었기에 적당히 정기적으로 활동한다고 발표해서 여론 달래기에 나선 것이었다.
하지만 마수는 지하철에만 존재하는 건 아니었다.
찍찍! 찍찍!
가시쥐 같은 소형 마수는 하수구 같은 더 작은 공간에서도 소형 균열을 통해 튀어나왔고 그곳에서 나름의 생태계를 만들어 살아갈 수 있었다.
서울 곳곳에서 파란색 구슬이 하수구 아래로 떨어졌다.
총 10개의 파란색 구슬.
가시쥐. 철갑지네. 무당두꺼비 같은 최하급 주의종 마수들이 구슬이 풍기는 기운에 꼬여 그것들을 먹어치웠다.
그러고는 마치 숙성된 밀가루 반죽이 오븐에서 빵이 되는 것처럼 순식간에 부풀어 오르며 변화하기 시작했다.
분명 그것은 하급 마수였지만 그전과 모든 게 달라진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
***
“어? 마수? 두꺼비? 무당두꺼….”
다현이 멀리 보이는 마수를 보다 입을 쩍 벌렸다.
우엉. 우엉. 우엉.
무당두꺼비 점점 다가오자 특유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해가 넘어가는 시간이라 어두워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대충 보이는 실루엣으로도 그 크기가 옆에 있는 건물 1층보다 높아 보였다.
“저, 저게 저렇게 크다고?”
알록달록한 무늬가 있는 무당두꺼비는 5급 주의종 마수로 분류는 돼 있지만 사실 마수라 부르기도 민망한 녀석이었다.
크기도 주먹만 했고 독성이 강한 것 말고는 특별한 특성도 없어 일반인도 충분히 퇴치할 수 있는 마수였다.
한마디로 독 있는 황소개구리 같은 존재였다.
그런데 그런 마수 같지도 않은 녀석이 다현의 눈앞에 위압적인 존재로 변해 나타났다.
“어쭈. 살 좀 찌워서 체급 높이면 이 누나가 쫄 줄 알았나 본데.”
경호는 식당 앞에서 그런 다현을 보며 피식했다.
-이거 파루스의 암흑마기처럼 뭔가 냄새가 나네. 안 그래?
경호의 물음에 운애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느끼기에도 저 무당두꺼비는 정상적이지 않았다.
단순히 크기가 커져서 이상한 것이 아니라 체내에 있는 마석도 문제가 있어 보였다.
-경호도 느껴지지? 마석이 마치 폭주할 거처럼 끓어오르는 거. 저 정도면 곧 마석이 못 버티겠는데.
그렇기에 블루캔디를 먹어 변태 과정이 끝난 마수는 1시간 즈음 지나면 죽는다.
우엉. 우어엉!
폭주할 듯 끓어오르는 마석 때문에 고통스러운 마수는 평소보다 훨씬 강한 살의를 가지고 있었다.
펄쩍! 펄쩌억!
골목 끝에 있던 무당두꺼비도 다현의 기운을 느끼고는 힘차게 뛰어오기 시작했다.
거대한 크기답게 몇 번 뛰지도 않았는데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그래 봐야 무당두꺼비잖아.”
거대한 몸집은 위협적이긴 했지만, 다현은 걱정하지 않았다.
풍기는 기운이 위험종 수준으로 낮기도 했지만 무당두꺼비는 기본적으로 불에 엄청나게 취약했기 때문이었다.
“개구리는 뒷다리 구이가 그렇게 맛있다는데 두꺼비도 그런지 한번 확인해 볼까?”
화르르르륵.
적염의 불꽃이 다현의 주변에서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우엉. 우우엉.
다현에게 달려들던 무당두꺼비도 십여 개가 넘어가는 새빨간 불덩이를 보고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그러더니 곧장 커다란 입을 벌려 보라색 혀를 길게 내뻗었다.
촤아아아아아아.
갑작스럽고 빠른 공격이었지만.
다현은 베테랑 헌터였다.
손가락을 까닥거리자 둥둥 떠 있던 불덩이들이 날아오는 혓바닥을 향해 빠르게 날아갔다.
펑! 퍼벙! 펑! 펑!
십여 개의 불꽃이 폭발음을 내며 날아오는 혓바닥에 내리꽂혔다.
꾸에에엑. 꾸에엑.
무당두꺼비의 혓바닥은 맹독을 품은 무기이기도 했지만, 맛을 보는 섬세한 감각기관이기도 했다.
당연하게도 무당두꺼비는 펄쩍 뛰며 다시 혓바닥을 회수했다.
보라색 혓바닥이 군데군데 검게 그을렸다.
우엉, 우우엉.
뜨거운지 앞발로 혓바닥을 문지르던 무당두꺼비를 보며 다현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너무 커져서 혹시나 다른 놈인가 했는데. 뭐. 그냥 비만 돌연변이였나 보네. 그럼. 누나가 바싹하게 구워줄게.”
굳이 시간을 끌 필요가 없는 녀석이었기에 다현도 마력을 더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아까보다 훨씬 많은 적염이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다현이 손을 까닥거리면서 십여 개의 적염을 조종하기 시작했다.
아까처럼 그냥 빠르게 쏟아부어 폭발시켜 죽일 수도 있지만 그러기에는 적염의 개수가 많아 폭발이 너무 커질 수 있었다.
‘자칫하면 골목, 그리고 식당까지 피해를 받을 수도 있어.’
다현의 손짓에 하늘로 날아오른 적염이 하나로 뭉치기 시작했다.
하나하나도 사람 머리통만 한 크기였기에 십여 개의 불꽃이 뭉치니 제법 커다랗게 변했다.
다현이 불타는 거대한 공처럼 변한 적염 덩어리를 보며 주먹 쥔 손을 쫙 펴자 마치 그물처럼 적염 덩어리가 얇고 넓게 펴졌다.
그렇게 펴진 적염의 그물이 그대로 무당두꺼비를 덮쳤다.
화르르르르. 화르르르르르.
적염에 휩싸인 무당두꺼비가 괴로운지 심하게 몸부림치며 꿈틀거렸다.
꾸엑. 꾸에에엑.
무당두꺼비의 전신에 불이 붙으면서 시커먼 연기와 함께 역한 냄새가 풍겨 나왔다.
발버둥치며 벗어나려고 했지만 다현의 적염은 그런 무당두꺼비를 찍어 눌러 꼼짝도 못 하게 만들었다.
우우어어엉.
커다란 울음소리와 함께 무당두꺼비의 커다란 눈동자에 푸른빛이 번뜩였다.
그러더니 꿈틀거리던 무당두꺼비의 모습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점액질의 얼룩덜룩한 피부가 일렁거리더니 딱딱한 돌덩이처럼 변했다.
치이이이익.
시간이 지날수록 적염의 불길이 약해지면서 시커먼 연기와 역한 냄새도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런 모습을 지켜보며 다현이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이게 말이 돼? 이게 말이 되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