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2화
육감적인 몸매와 투명할 정도로 새하얀 피부. 매혹적인 붉은 입술.
분명 골목에서 만난 그 여인이 분명했다.
그런데.
“아, 악마?”
그때는 볼 수 없었던 커다란 뿔이 그녀의 이마 양쪽에 솟아 나와 있었다.
마치 숫양의 그것처럼 커다란 뿔이었고 뱀처럼 길다란 꼬리가 엉덩이 쪽에서 뻗어 나와 있었다.
파루스의 중얼거림을 들은 그녀는 활짝 웃으며 자신을 소개했다.
“아, 그때는 제 소개를 깜빡하고 하지 않았네요. 파루스 계약자님.”
“계약자라고? 무, 무슨 소…. 읍읍!”
그녀가 손가락을 들어 ‘쉿!’하고 외치자 파루스를 비롯한 붉은 모루 부족원 모두가 입도 떼지 못한 채 뻣뻣하게 굳어버렸다.
“이제야 들을 자세가 된 것 같네요. 저는 분노의 마왕이자 겁화의 주인이신 사탄님의 제 1군단장 아몬을 모시는 ‘벨리타’라고 합니다.”
벨리타가 자기소개를 마쳤다.
“제법 길었던 제 소개를 끝까지 경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계약자님. 이제 경연에서 이겼으니 보상을 받아가도록 하겠습니다.”
“그, 그게 무슨! 처음부터 속인 거잖아!”
파루스는 뻣뻣했던 몸이 풀리자 벨리타를 향해 소리쳤다.
“저는 도와준다고 했지. 악마가 아니라고 한 적은 없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고 분명 말씀드렸잖아요. 어쨌든 여기 있는 이들의 목숨을 받아가겠습니다.”
보상으로 부족원의 목숨을 받아가겠다는 벨리타의 말에 파루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제가 죽겠습니다! 제발. 다 끝내주세요! 그냥 제가 죽을게요! 제가 잘못했습니다!”
파루스가 부러진 로빈의 검날을 잡아 자신의 목을 향해 힘껏 찔렀다.
아니 찌르려고 했다.
‘어엇!’
있는 힘을 다해 힘껏 찔렀건만 검날이 목에 닿기 전에 손이 멈췄다.
“에이. 보상은 제가 원하는 걸 받아가야 하지 않겠어요. 전 당신이 원하는 걸 줬는데 당신도 그래야 맞는 거죠.”
“제, 제발!”
“그럼. 시작해볼까요. 우선 그 아이는 죽었고.”
“뭐? 로빈! 로빈!”
파루스가 로빈을 흔들었지만 이미 차가워진 그는 호흡이 멈춘 상태였다.
“으아아아아아아아!”
벨리타가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소원을 들어주고 정당한 보상을 받겠다는데 억울해하는 건 드워프나 인간이나 별반 차이가 없네요. 하아. 이거 정말 속상하다니까요. 히잉.”
“저들은 잘못이 없잖아요! 제발! 제발!”
“잘못이 없다고 살고, 잘못이 있다고 죽고 하는 것이 꼭 정답은 아닙니다. 그럼, 세상에 나쁜 놈이 어디 있겠어요. 안 그래요?”
망나니짓을 일삼던 파루스라도 부족이 자신이 불러온 악마로 인해 몰살되는 것은 절대 바라지 않았다.
“난 그냥, 그냥 이들에게 인정받고 싶었을 뿐이라고!”
울먹이며 소리치는 파루스를 보며 벨리타가 해맑게 웃었다.
“아니 그러면 계약이 아니라 노오오오력을 하셨어야죠. 하아. 어쩜 이리도 계약자들은 똑같은 소리를 할까 몰라. 정말 재미없다니까. 자아. 이제 슬슬 지루해지려고 하니까 어서 시작하죠.”
벨리타가 손가락을 딱하고 튕겼다.
“아니야. 하지 마. 그러지 말라고! 그러지 마! 그러지 마세요. 제발!”
파루스는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지만, 그의 의지와는 다르게 몸은 움직이기 시작했다.
싸늘하게 식은 로빈을 밀어낸 파루스는 경연을 지켜보기 위해 모인 부족원들에게 다가갔다.
푸우욱.
검날이 대장로인 하킨의 가슴을 찔렀다.
새빨간 피가 울컥거리며 흘러나왔다.
“안 돼! 안 돼!”
하킨의 눈동자가 점점 흐려지더니 잠시 후, 무너지듯 바닥에 쓰러졌다.
그렇게 파루스는 검날을 쥐고 부족원을 차례차례 찔러 죽였다.
울고 불며 애원하고 피를 토할 정도로 소리쳐도 소용없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붉은 모루 부족의 족장이자 아버지인 토니의 앞에 파루스가 섰다.
피를 흠뻑 뒤집어쓴 파루스는 쏟아져 들어오는 자괴감과 죄책감에 벌벌 떨며 울고 있었다.
“그럼. 마지막 대화 나누셔요.”
벨리타가 다시 한번 손가락을 딱하고 튕겼다.
“아, 아들아! 아들아!”
굳어있던 토니의 입이 풀리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 아빠. 죄송해요. 잘못했어요. 제가 잘못했어요. 죄송해요. 정말 죄송해요. 제가 잘못했어요.”
파루스는 그런 토니를 제대로 쳐다보지 못하고 하염없이 죄송하다고 잘못 했다고 외치며 눈물을 흘렸다.
그런 파루스를 보며 토니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네가 무슨 죄가 있어. 다 이 아비가 잘못한 거다. 내가 정말 미안했다. 내가 미안해. 아들. 정말 미안하다. 파루스, 내 사랑하는 아들…. 커억.”
푸욱! 푸욱! 푹!
“안 돼! 안 돼! 멈춰! 제발! 제발 멈추라고!”
어김없이 검날은 깊숙하게 박혀 들어갔다.
“크흡. 자, 잘못한 거 없으니 자책하지 마라. 괜찮다. 우리 아들. 이 아비는 괜찮다. 대신 우리 부족을 대표해서 꼭 행복하게 살아…. 컥! 커억!”
“아빠! 아빠! 이 악마 새끼야! 그만하고 나도 죽여! 나도 죽이라고!”
파루스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몸부림을 쳤다.
비틀.
몸부림치던 파루스가 비틀하며 바닥에 쓰러졌다.
푸욱.
“커어억!”
손에 쥐고 있던 검날이 쓰러지며 그대로 파루스의 가슴을 깊숙이 찔렀다.
“크윽. 하. 하핫. 그래. 죽자! 죽어! 크헉.”
파루스를 보던 벨리타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렇게 죽으면 재미가 없잖아요. 흐음. 그래. 재밌는 방법이 떠올랐어요.”
벨리타가 손을 펴서 앞으로 뻗자 마기가 휘몰아치더니 그녀의 손 앞에 투명한 수정이 생겨났다.
“파루스. 원래라면 여기 부족원들은 모두 지옥으로 데려갈 예정이었으나 당신이 10년간 내 밑에서 얌전히 말을 들으며 산다면 이 영혼들을 풀어 드리도록 하죠. 어때요?”
벨리타가 손에 든 ‘영혼석’을 흔들어 보이며 말했다.
“네. 그럴게요! 그러겠습니다!”
파루스는 흐릿한 정신 부여잡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계약은 성립됐습니다.”
***
“제발. 살려주십시오. 저는 죽어도 됩니다. 하지만 저희 부족원, 저희 아버지의 영혼까지 지옥에서 고통받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
파루스가 눈물을 줄줄 흘리며 경호에게 간절하게 말했다.
“그럼. 마계로 끌려갔다가 지구의 빌런 조직에 보내진 건가?”
“또 다른 계약자인 ‘레이나’가 있는 조직이었습니다. 블랙바인이라는 다크엘프 부족이었습니다.”
“갑자기 마계에서 지구로 계약자를 보낸 다라. 계약 기간인 10년까지 얼마나 남았지?”
“이제 6개월 남았습니다.”
“일석이조군. 계약 기간까지 살려둘 마음도 없고 일도 시켜먹고. 그런데 말이야. 그냥 잡일이나 하려고 널 이곳에 내려보내진 않았을 거 같은데. 안 그래?”
“뭐든 말씀드리겠습니다. 절 딱 6개월만 살 수 있게 해주실 수 있습니까? 6개월만, 그래서 영혼석에 깃든 영혼이 안식만 취할 수 있다면 전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파루스는 경호라는 이가 자신이 생각했던 것을 아득히 뛰어넘는 초강자라는 것을 알았다.
‘비스트’라는 각성자가 눈앞에서도 찾지 못하게 만드는 은신술은 자신의 계약자인 ‘벨리타’라 하더라도 불가능한 수준의 일이었다.
그리고 거대한 늑대였던 저 작은 강아지 역시 풍기는 기운이 평범하지 않았다.
“그래. 우선 뭐든 말해봐. 너의 가치를 증명하지 않는다면 네 과거가 불행했든 악마의 노예로 살았든 나는 그냥 비스트에게 널 넘길 테니까.”
경호의 냉정한 말에 흰둥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경호 님. 정말요? 비스트에게 넘길 생각도 하신 거예요?
-으이구. 우선 여기서 베팅을 크게 해야 저기서 패를 깔 거 아니야. 너 같으면 ‘내가 무조건 6개월 보호해줄 테니 말 좀 해봐.’ 그럴래?
파루스가 경호의 말에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저는 이곳에서 암흑마기를 배양해서 인공 던전을 가동시키는 배터리팩을 만들었습니다.”
일명 ‘게이트볼’이었다.
경호는 파루스의 말에 깜짝 놀랐다.
‘뭐? 암흑마기를 배양했다고?’
비스트와 종각역의 암흑마기를 겪으며 어느 정도 의심하기는 했지만 정말 인공적으로 만들어낸 암흑마기인 줄은 몰랐다.
‘이거 상당히 위험한 놈인데….’
경호의 눈빛을 살핀 파루스는 즉각 무릎을 꿇고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10년간 마족들 사이에서 눈칫밥으로 버텨온 파루스였다.
어차피 마족에게 걸리면 무조건 사망이었다.
자신이야 죽어 마땅하지만, 아버지와 부족원의 영혼은 어떻게든 구해야 했다.
‘살아남아야 한다.’
그렇다면 경호의 말처럼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야 했다.
“그리고 전 사탄 진영에 국한되긴 하지만 마왕군의 계약자 조직의 계획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 존재는 아마도 제가 지구에서 유일할 겁니다.”
‘뭐? 뭐라는 거야. 얘가.’
“그러니까 니 말은 지금 마왕의 세력이 지구에 여럿 존재한다는 말이야? 그 다크엘프 같은 조직이?”
“제가 붙잡혀 있던 세력이 사탄 쪽이라 그쪽은 확실합니다. 하지만 다른 마왕 쪽도 비슷한 수준일 겁니다.”
파루스의 말에 경호도, 흰둥이도, 솔딘도 놀랐다.
빌런. 그리고 빌런 조직.
사실 사회에선 그냥 각성자 중 질 나쁜 놈들이 모인 힘 쎈 조폭 정도로 취급하고 있었다.
하지만 마족과 관련이 있다면 이건 그거와 전혀 다른 문제였다.
“벨리타가 사탄의 1군단장인 아몬의 오른팔이라 많은 사실을 들어 알고 있습니다. 아몬의 밑에 있던 단체가 블랙바인. 인공적으로 암흑마기를 제조하는 방법도 아몬이 개발한 겁니다. 4군단장까지 있는데 각각 하나의 집단을 관리하고 있습니다.”
정령계에서 싸움으로 마왕 둘을 죽였지만, 아직 다섯의 마왕이 남아 있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지휘하는 12개의 마왕군단.
그리고 그 군단이 관리하는 빌런 집단.
어쩌면 정령계보다 더 안 좋은 상황이었다.
수호신은 힘이 없고 정령과 신수는 거의 사라진 상황. 거기다 각성자는 아직 수준이 너무 낮았다.
“마계의 다른 마왕의 휘하에서도 모두 빌런 조직을 두고 있다면…. 이거 심각한데. 그럼. 그 조직들은 전 세계에 퍼져있는 건가? 사탄의 조직은 한국. 루시퍼의 조직은 미국. 뭐. 그런 식으로?”
경호의 말에 파루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확실하진 않지만 아마도 마왕과 관련된 조직은 모두 한국에 있을 겁니다.”
아니 도대체 왜? 안 그래도 좁아터진 나라에 뭐 대단한 게 있다고?
파루스의 말에 사무실에 정적이 돌았다.
경호가 자신도 모르게 살기를 띠며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지? 한국에 마왕과 관련된 조직이 모두 있을 거라니?”
날카로워진 경호의 살기에 파루스가 덜덜 떨며 말했다.
“아, 아니. 그, 그게 마왕들에게 계시가 내려왔다고 합니다.”
“계시?”
“마신이 직접 계시를 내려 ‘한국에서 용사가 나와 지구를 구할 것이다.’라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그러니 모두 그 용사를 찾기 위해 혈안이 되어있습니다.”
“뭐? 용사?”
흰둥이와 솔딘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믿고 한국에 모든 조직이 집결해 있다고?”
“마왕들에게 있어 마신의 계시는 절대적 신앙과도 같습니다. 다행이라면 ‘용사’를 찾는 것이 우선이기에 섣불리 수작을 부리진 않을 거라는 점입니다.”
“그래. 대충 알겠어. 아주 좋은 정보였어.”
경호의 말에 파루스가 꾸벅꾸벅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최대한 도움이 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그런 파루스를 보며 경호가 미간을 찌푸렸다.
“쓰읍. 그런데 말이야. 고작 악마계약자 주제에 이런 내용을 어찌 다 알고 있는 거지? 마신의 계시 내용이나 군단장 마다 조직을 운영하는 것은 빌런 조직의 대표도 알지 못할 내용 같은데 말이지. 안 그래?”
그랬다.
흑천에 대한 것은 어떻게 알아낼 수 있다고 치더라도 마신의 계시 내용 같은 고급 정보를 마왕의 계약자도 아니고 군단장 수하의 악마계약자가 알기는 불가능한 내용이었다.
“혹시 이중 첩자 노릇이라도 하려는 거냐?”
경호의 말에 파루스가 고개를 저었다.
“사실 저는 10년간 대장간에서 마족들을 위한 무기만 만들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드워프는 뼛속까지 장인인 이들이었다.
그런 이들을 데려다가 무기를 만들지 않는다니?
“무슨 소리지? 마왕군의 전사라도 됐다는 말인가? 그렇게 보이진 않는데.”
마족과 계약한 노예 중 강한 종족은 가끔 병사로 쓸 때도 있었다.
하지만 대충 봐도 파루스는 전투와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저는 낮에는 대장간에서 무기를 만들었고 밤에는 저의 주인인 ‘벨리타’의 침실로 불려갔습니다.”
밤. 침실. 악마.
경호가 미간을 찌푸렸다.
“설마 그 '벨리타'라는 악마가 서큐버스냐?”
“네. 맞습니다.”
경호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서큐버스 군단과 전투를 벌였던 기억이 경호의 머릿속에 스치듯 떠올랐다.
‘정말 힘든 싸움이었지.’
여러 가지 의미로 정말 힘들고 괴로웠던 싸움이었다.
“특히나 벨리타는 흥분하면 소리 지르며 아무 말이나 뱉는 버릇이 있어서 그때 여러 가지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럴지도.”
서큐버스는 쾌락을 그 모든 것 중 가장 우선시하는 족속들이니 저런 버릇이 있다 하더라도 특별히 새삼스럽지도 않았다.
“그럼. 혹시 지구로 온 것도 실력이 아니라 다른 이유로 온 것이냐?”
경호의 물음에 파루스가 움찔거렸다.
“사실 어느 순간부터 침소에 불려가지 않게 됐습니다. 그리고 점점 벨리타는 절 멀리했습니다.”
“서큐버스라는 족속이 밤일을 끊었다고? 절대 그럴 리가 없을 텐데.”
“그것이 사실은…. 새로운 계약자가 오고 나서 제가 밀려났습니다.”
“더 젊은 드워프가 온 모양이지?”
파루스의 말에 경호도 흥미가 돌아 물었다.
“아니 새로운 계약자는 켄타우로스였습니다.”
켄타우로스는 반인반마의 종족이었다.
아무리 전륜한 드워프라도 이기기 쉽지 않은 상대였다.
“이제 이해가 가는군. 그래. 그럼, 얼마나 쓸 만한지 보도록 하지. 그럼. 솔딘과 함께 여기 앞에 마법구로 화염 마법사가 쓸 만한 물건을 만들어봐. 가능할까?”
드워프 아니랄까 봐 조금 전까지 고개만 푹 숙이고 있던 파루스의 눈을 반짝반짝 빛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