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8화
백염(白炎).
모든 것을 태우는 순수한 불이자 다현이 낼 수 있는 가장 강한 능력이었다.
지금까지 열 번을 시도해서 고작 두 번 성공했을 정도로 성공확률이 낮은 기술이기도 했다.
또한, 성공했음에도 불꽃만 확인하고 바로 탈진해 쓰러져버렸기에 제대로 된 위력도 사실 잘 몰랐다.
다현은 온몸이 타오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백염을 피워내는 데 성공했을 때 느꼈던 그때의 그 느낌이었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그때보다 훨씬, 마치 온몸에 불이라도 붙은 것처럼 뜨거웠다.
휘우우우우우우웅!
마치 휘파람을 부는 것 같은 소리가 머릿속에서 크게 울렸다.
감겨있던 다현의 눈이 떠졌다.
제니가 복부를 부여잡고 쓰러져 있었고 비스트는 암흑거인에게 공격을 받고 있는 중이었다.
그때 다현이 쥐고 있는 마법구에서 새하얀 불꽃이 피어올랐다.
주먹 크기의 새하얀 불꽃.
다현이 그런 불꽃을 쳐다보다 제니를 향해 입을 열었다.
“고맙다. 제니야. 이제 내가 마무리할게.”
제니가 눈을 뜬 다현, 아니 그 앞에 타오르고 있는 새하얀 불꽃을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우웅! 우웅! 우웅! 우웅!
백염이 뿌리고 있는 굵고 강한 파동.
여기 있는 모두가 그 힘을 느끼며 놀라고 있었다.
비스트의 꼬리를 잡고 들어 올리던 암흑거인마저 본능적으로 꿈틀거리며 멈칫할 정도로 강한 힘을 품고 있었다.
‘백염. 정말이지 엄청나구나.’
그것을 만들어낸 다현도 정작 제대로 느껴본 적 없던 힘이었기에 자신이 만든 백염을 보고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거기다 훈련할 때 피워낸 백염은 고작 촛불 정도 크기가 최선이었다.
그런데.
‘어? 어어?!’
훈련 때 피워냈던 백염보다 훨씬 큰 주먹만 한 백염이 생성됐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뭐야! 점점 커지잖아!’
다현이 눈을 크게 뜨고 자신의 오른손에 쥐어진 마법구를 쳐다봤다.
‘설마 이게 다 이것 때문이라고?’
지금까지 다현은 ‘약하니까 아티팩트가 중요하지. 진정한 힘은 그런 거에 의존하지 않아야 하는 거야!’라며 아티팩트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었다.
하지만.
‘이거 물건인데?!’
백염을 만들며 느껴본 바로는 마력을 보충해줄 뿐 아니라 증폭과 안정에도 영향을 미치는 것 같았다.
하나하나가 모두 마법 계열 각성자에게 황금 같은 능력이었다.
다현이 아직도 손에 비스트를 쥐고 주춤거리고 있는 암흑거인을 향해 마법구를 뻗었다.
순간 다현의 앞에 일렁이던 백염이 꺼지듯 사라졌다.
그리고 암흑거인의 몸에서 강렬한 파동이 터져 나왔다.
우웅! 우웅! 우웅! 우웅!
암흑거인이 다현을 향해 손을 뻗으려다 멈칫거리며 동작을 멈췄다.
그리고.
키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엄청난 괴성을 지르며 암흑거인이 부들거리며 떨기 시작했다.
암흑거인의 몸에서 폭발하듯 마기가 뿜어져 나왔다.
“뭐야!”
제니가 놀란 목소리로 소리쳤지만, 다현은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것처럼 마법구에 마력을 불어넣으며 집중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스으으으으으으으으으.
마치 뙤약볕 아래 아이스크림처럼 암흑거인이 서서히 녹아내리고 있었다.
10m 크기의 거대한 괴물이 점점 녹아내리며 작아지고 있었다.
“죽어! 이 괴물아!”
다현이 그런 암흑거인을 보며 소리쳤다.
화르르르륵. 화르르르르르륵.
녹아내리는 암흑거인의 몸체에서 새하얀 불꽃이 암흑마기를 흡수하며 더욱더 크기를 키워가며 활활 타올랐다.
“이제 정말 끝이지?”
제니가 믿기지 않는 표정으로 묻자.
“저러고 또 살아나면 인정한다. 끄응. 진짜 죽을 뻔했네.”
용호가 대답하며 힘들게 몸을 일으켰다.
타오르던 새하얀 불꽃이 암흑거인을 모두 태우고 메케한 연기를 끝으로 서서히 가라앉았다.
암흑거인이 있던 자리는 새까만 그을음만 남은 채 흔적 없이 사라졌다.
마법구를 들고 있던 다현이 살짝 비틀거렸지만, 연습 때처럼 탈진하지 않고 서 있을 수 있었다.
“다행히 끝이네. 정말로.”
제니가 환하게 웃었다.
“다현아. 고생했다.”
한눈에 보기에도 상태는 엉망이었지만 용호의 표정은 밝았다.
그때였다.
-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
저 멀리서 엄청난 환호성이 들려왔다.
“언니! 드론한테 인사 좀 해! 오늘의 영웅이라고!”
제니에 말에 다현이 피식 웃으며 날고 있는 드론캠을 보며 손을 흔들었다.
“하아. 이제 끝났네.”
사거리 저편 도로에서 마법구를 건넸던 성원과 정수를 비롯한 신화길드 사람들과 만약을 대비해 출동했던 군부대와 경찰, 그리고 목숨 걸고 뛰쳐나온 기자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
“하아. 이거 쪽팔리게.”
경호가 꿈틀거리며 재생하고 있는 괴물을 지켜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나름 정령계에 소환돼 마계의 난다긴다하는 마왕까지 물리치고 용사가 되어 귀환한 자신이었다.
황당하게도 지구도 정령계처럼 마계에 침공당한 상황이었지만 시스템도 존재하고 용사였던 자신도 있으니깐 괜찮을 거라는 막연한 생각을 하며 지금까지 적당히 개입하며 살고 있었다.
“내가 너무 안일했어. 그리고 자만했다.”
지구로 오면서 신력도, 정령력도 쓰지 못하게 됐다.
그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자신은 충분하게 강했으니까. 아니 강하다고 착각하고 있었으니까.
정령계에 있을 때 비해 절반의 절반도 되지 않는 힘으로 너무 자신만만해 하고 있었다.
“더럽게 빠르네.”
벌써 괴물은 거의 회복한 듯한 모습이었다.
그에 반해 마나코어를 쥐어짜 청염검기를 만든 후유증으로 경호는 용아검에 기대어 서 있는 것도 힘들 정도로 상태가 나빴다.
쓰러져 있는 흰둥이 역시 호흡이 점차 가빠지고 있었다.
“이게 뭐야. 큭큭.”
절망적인 상황이 닥치자 갑자기 웃음이 나왔다.
‘도망쳐서 회복하고 와서 다시 싸울까?’
‘흰둥이는 어쩌지? 흰둥이가 죽으면 우리 엄마는?’
여러 가지 쓸데없는 잡생각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사실 지금의 몸으로 도망이나 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하지만 죽더라도 한칼이라도 더 박아넣고 죽을 셈이었다.
그때.
-역시 여기 있으셨네요. 경호 님.
경호의 귀에 기분 좋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솨아아아아.
시원한 물줄기가 경호의 몸을 감싸며 상처를 어루만졌다.
놀란 경호가 돌아보니 운디네가 묘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웃는 것도 찌푸린 것도 아닌 조금 안타까워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고마워요. 운디네.”
완전하게 낫진 않았지만, 피가 흐르던 상처들이 거의 아물었다.
운디네의 특성인 [회복]의 힘이었다.
흰둥이 역시 물줄기가 감싸며 호흡이 훨씬 안정적으로 변했다.
키아아아아아아아!
마수를 섭취하며 회복하던 괴물이 운디네의 등장을 알아차리고 괴성을 질렀다.
다행히 아직 완전히 회복한 것은 아니라 바로 촉수를 날리거나 하진 않았다.
-강한 녀석이네요.
사실 청염검기에 당해서 그렇지 훨씬 더 강한 녀석이었다.
“운디네. 미안한데 저 좀 도와주실래요?”
-물론이죠. 그럴 마음이 없었다면 이렇게 찾아오지도 않았겠죠.
“고마워요.”
-저 괴물을 같이 공격할까요?
운디네는 괴물의 마기를 느끼고 쉽지 않음을 느꼈지만 그렇다고 그냥 두고 볼 수는 없었다.
“아니요.”
경호가 운디네의 물음에 고개를 저었다.
운디네의 힘은 꽤 강했지만, 아직 저 정도 괴물과 싸울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상성도 좋지 않았다.
기본적으로 암흑마기는 불 속성에 약했다.
또 정령은 마기에 취약하기에 자칫 암흑마기에 오염되면 ‘악마덩굴’ 때처럼 흑화해서 폭주할 수도 있었다.
경호가 고개를 저으며 운디네에게 부탁했다.
“싸우는 건 제가 할게요. 운디네는 저에게 정령력을 좀 불어 넣어주시겠어요?”
경호의 말에 운디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푸른색 긴 생머리가 살랑거리는 그녀의 모습은 정말로 신비로운 느낌을 풍겼다.
-정령력이요? 제가 그 힘을 불어넣는다고 하더라도 금세 흩어질 텐데요? 아니 인간에게 기운을 직접 불어넣으면 위험할 수도 있어요.
“아. 제가 왕년에 정령력을 좀 사용해봤었거든요.”
미르에게 신력과 정령력을 키우고 사용하는 법을 배웠다.
처음에는 인간의 몸으로 신력과 정령력을 다루는 것이 힘들었지만 나중에는 미르보다 더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었던 경호였다.
-그렇다면 이것으로 저번에 빚은 갚은 거로 쳐요.
빚?
경호는 운디네의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강화도에서 악마덩굴에 사로잡혀 있던 것을 구해준 일은 세계수가 있는 ‘행운공원’에 살며 물을 뿌려주는 거로 대신하기로 했었는데.
“그거라면 이미 충분히….”
-피자 얻어먹은 거요. 그거 아직 못 갚았잖아요. 제 정령 인생에 처음으로 대접받은 음식인데요.
눈물까지 흘리며 맛있어했던 운디네의 모습이 경호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아. 그거요.”
경호가 고개를 끄덕이자.
쏴아아아아아아아.
푸른빛이 감도는 물줄기가 경호의 몸에 스르륵 감기며 그 힘이 전신에 스며들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진한 정령력에 경호는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이제 괴물도 거의 회복이 끝나가고 있었기에 경호도 집중하기 시작했다.
청순하고 맑은 느낌의 운디네처럼 정령력도 맑고 깨끗했다.
경호는 회복과 보호에 탁월한 능력을 갖춘 그 기운을 심장에 둘러 단단히 보호했다.
그러고는 아까와 마찬가지로 경호는 마력을 끌어올려 기운을 정제하고 압축하기 시작했다.
아까와 다른 점이 있다면 심장에서 마력을 정제, 압축하더라도 운디네의 정령력으로 보호함으로써 고통스럽지 않다는 것이었다.
한 번의 정제와 압축이 순식간에 끝나고 적염이 피어났다.
다시 두 번의 정제와 압축이 추가되며 청염이 타올랐다.
그렇게 경호는 심장 안에서 타오르는 청염을 여섯 번 더 정제와 압축을 더 반복했다.
“크으으윽. 역시 백염은 쉽지 않네.”
총 아홉 번의 정제와 압축.
일곱 번째부터는 슬슬 통증이 올라오며 아홉 번째에선 극심한 통증에 자칫했으면 불꽃이 소멸할뻔했다.
“후우. 후우.”
정령력으로 보호하지 않았다면 시도조차 할 수 없는 수준의 위험한 행동이었지만 결국 성공할 수 있었다.
휘우우우우우우우우우웅!
휘파람 같은 소리가 경호의 머릿속에서 울렸다.
그러곤 손에 쥔 용아검에서 새하얀 불꽃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청염을 뛰어넘는 최강의 불꽃을 두른 검기.
바로 ‘백염검기(白炎劍氣)’였다.
용아검이 백염검기에 휘감겨 활활 타올랐다.
키에에에에엑!
그 기운을 느낀 괴물이 마구 몸부림을 치며 수십 개의 촉수를 쏘아 보냈다.
청염검기로도 녹여버렸던 촉수였다.
경호는 날아오는 촉수를 지켜보다 백염검기를 두른 용아검을 가볍게 휘둘렀다.
용아검의 궤적에 따라 날아오던 촉수가 먼지처럼 흩어져 버렸다.
끄에에에에에에에엑!
“더 해봐!”
괴물은 괴성을 지르며 다시 수십 개의 촉수를 쏘아 보냈다.
가볍게 날아오는 촉수를 향해 검을 겨누는 것만으로 그것들이 증발하듯 사라졌다.
끼에에에에에에에엑!
“더 해보라고!”
용아검을 휘두르며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가는 경호를 피해 괴물이 뒤로 조금씩 물러났다.
“왜? 도망이라도 가려고?”
경호가 그런 괴물을 향해 용아검을 쭉 뻗자 새하얀 백염검기가 쏘아져 나갔다.
끄에에에에에엑! 끄에에엑!
반달형의 백염검기가 선로를 휘저으며 괴물을 토막 내고 불태우며 날아다녔다.
거대했던 괴물이 조각조각 찢어져 나가며 점점 존재 자체가 지워져갔다.
크악! 크아아아아아아악!
마지막 남은 암흑마기의 덩어리가 발악하듯 날아와 장막처럼 펼쳐지며 경호를 덮쳤다.
아니 덮치려고 했다.
하지만 경호의 검이 더 빨랐다.
푸욱!
경호가 휘두른 용아검이 번들거리는 암흑마기의 새까만 핵을 관통했다.
끼에에에에에엑!
암흑마기의 핵이 소멸하여 사라졌다.
“후우. 이거 힘드네.”
털썩.
경호가 괴물의 최후를 확인하고는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운디네의 능력으로 회복했지만 이미 한계상황이었기에 사실 정신력으로 겨우 버텨낸 경호였다.
-괜찮으세요? 경호 님.
경호가 솔직하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요. 괜찮은 정도는 아니네요. 그래서….”
-네. 말씀하세요.
운디네가 고개를 끄덕이자 경호가 한숨을 푹 쉬더니 입을 열었다.
“마지막 부탁이 있는데요. 저기 흰둥이랑 저 좀 행운공원까지 데려다주시면 안 될까요?”
-음. 그러면 다음에 피자 한 판 더 어때요?
“한 판에 콜라까지. 그럼. 부탁드릴….”
경호가 스르륵 눈을 감으며 옆으로 쓰러졌다.
터업.
쓰러지는 경호를 붙잡은 운디네가 가만히 그를 쳐다봤다.
영혼이 맑은 사람이라 운디네는 처음부터 경호가 마음에 들었었다.
“고생하셨어요. 경호 님.”
기절한 흰둥이까지 안아 든 운디네가 엉망이 된 주변을 쓱 훑어봤다.
“살짝 정리는 하고 가야겠네.”
경호를 안아 든 운디네가 전투의 흔적이 역력한 선로를 향해 물줄기를 뿜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