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2화
찍찍! 찍찍!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캄캄한 지하철 선로.
가시쥐. 철갑지네 같은 최하급 마수들이 선로를 바쁘게 움직이며 먹이를 찾고 있었다.
대격변 이후 인간과 마수는 삶의 터전을 두고 끊임없이 싸우고 있었다.
파괴된 도시를 재건하며 백색지대를 지키려고 애쓰고 있었지만, 흑색지대는 날로 커지고 있었다.
큰 강이나 바다는 이미 마수에게 주인의 자리를 뺏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아직 하늘과 지하는 비교적 잘 지켜내고 있었다.
생명력이 높은 지역일수록 높은 등급의 던전이나 균열이 발생하는 특성 덕분이었다.
그렇기에 생명체가 거의 없는 하늘이나 지하는 지상이나 바다처럼 상급 던전이나 균열이 거의 생기지 않았고, 때문에 최하급 주의종 마수만 몇몇 살아남아 생태계를 이루어 살 뿐이었다.
탁탁탁!
찍찍거리는 소리만 간헐적으로 울려 퍼지던 선로에서 발걸음 소리가 점점 크게 들리기 시작했다.
바로 ‘블랙바인(black vine)’의 다크엘프들이었다.
하급 마수들이 선로 중간중간 붉은 안광을 빛내며 돌아다니다 다크엘프가 뿜어내는 마기를 느끼고 구석진 곳으로 몸을 피했다.
“얼마나 더 가야 종각이지?”
레이나를 대신해 블랙바인을 이끄는 발로이가 마튼에게 물었다.
“이제 동대문을 지났으니 곧 도착입니다.”
“좋아!”
대격변 이후 모두 폐쇄되어 방치된 지하철 선로는 이들에게 도심 한가운데로 이동할 수 있는 최고의 침투로가 되었다.
중간중간 마력 파동을 감지하는 장치들이 설치되어 있었지만, 그 정도는 그 정도는 충분히 피할 수 있는 이들이었다.
목표했던 종각역에 도착하자 발로이가 마튼을 향해 물었다.
“마튼. 제대로 할 수 있겠지.”
“물론입니다.”
발로이가 비장한 표정으로 모두를 돌아보며 말했다.
“끝까지 최선을 다했던 레이나 대전사님의 죽음에 대한 복수와 새롭게 변화된 우리의 존재를 다시 흑천에 각인시키기 위해 이 자리에 섰다! 모두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한다!”
“알겠습니다!”
안 그래도 흑천의 지부 중에 가장 약세를 보였던 블랙바인이었다.
그러다 유일한 악마계약자였던 단장인 레이나가 죽자 흑천과의 연결이 완전히 끊어졌다.
그로 인해 마기를 공급받지 못해 서서히 힘을 잃어가던 상황이었다.
이대로 시간이 더 지난다면 결국 목숨을 잃게 될 것이었다.
“흑천에 다시 신임을 얻어 내가 레이나 대전사님을 대신해 악마계약자가 될 것이다. 그러니 꼭 성공해야 한다! 그리고 절대 죽지 마라!”
남몰래 흠모하던 레이나가 죽고 부족이 흑천에서 버려지자 발로이는 모든 것을 포기할까도 생각했었다.
그랬던 발로이는 블랙바인의 동료들을 보며 정신을 차렸다.
‘어떻게 지구까지 넘어와 이렇게 살아남았는데!’
아직 수중엔 파루스의 인공 던전이 남아있었다.
이것만 성공한다면 다시 계약을 맺고 마기를 공급받아 살아갈 수 있었다.
“꼭 성공하겠습니다!”
“기필코 살아남겠습니다!”
발로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소리치듯 말했다.
“그래! 새롭게 다시 시작하는 거다! 가라!”
마튼을 필두로 커다란 짐을 등에 멘 인원 10명이 지하철 승강장으로 뛰어 올라갔다.
“자아! 우리도 서두르자!”
발로이가 크게 소리치자 40여 명의 다크엘프들이 메고 있던 짐을 풀기 시작했다.
***
레드 위치, 김다현.
옐로우 황금거신, 김제니.
그린 비스트, 이용호.
대한민국 최고의 헌터와 인적 없는 골목의 허름한 식당.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지만 어쨌든 이들은 행운식당에 모여 진지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비스트 아저씨. 흑천의 지부에서 인공 던전을 만들었다고요? 아니 아직 게이트 작동 원리 규명도 안 됐는데 인공 던전이라니….”
작은 키에 황금빛 단발머리를 한 20대 초반의 귀여운 여성인 황금거신, 제니가 놀란 눈으로 비스트, 용호에게 물었다.
“아까도 말했지만, 증거물이 없어. 솔직히 목숨만 겨우 건졌거든. 본부에서도 증거 없이 더는 수사할 수 없다고 하더군. 그래서 바로 찾아갔지만 뭐, 종잇조각 하나 남기지 않고 깨끗이 정리했더군.”
다현도 용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정부 측 반응이 이해는 가네. 솔직히 나라도 비스트가 아닌 다른 누가 흑천에서 인공 던전을 만들었다고 하면 헛소리라고 말했을 거니까.”
“해신 언니는 그렇다고 해도 궁귀 아저씨랑 성녀, 걔는 안 온데?”
제니의 말에 용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뭐. 중요한 약속이 있다고 하긴 하던데. 입장이 있으니 괜한 오해를 사긴 싫었던 모양이야.”
용호의 말에 다현이 입을 삐쭉 내밀었다.
“이런 일에 소속을 따져가며 일을 해야 하냐고. 안 그래요?”
소속 없이 자유로운 다현, 용호, 제니와 다르게 해신과 궁귀, 성녀는 본부 소속의 헌터였다.
“뭐. 그렇다고 비난할 순 없지. 어쨌든 둘이라도 믿어줘서 고맙네.”
“여하튼 비스트. 그럼. 정부에서는 증거를 가져올 때까지 손 놓고 있겠다는 거예요? 인공 던전이라는 이 어마어마한 사건을 두고요?”
다현의 얼굴이 조금씩 달아오르는 걸 보니 어지간히 답답한 모양이었다.
“사실 그래서 부탁한 거야. 분명 철원 인근 흑색지대에 은신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거든. 찾는 것 좀 도와줄 수 있을까?”
“사실 나도 비스트처럼 딱히 인맥이 없어서 동원할 수 있는 인원이 없는데. 제니. 너는 그래도 좀 친한 길드 있잖아. 안 그래?”
“나야 프리긴 하지만 여기저기 팀을 만들어서 다니니까. 아는 길드가 꽤 있긴 하지. 언니도 신화길드랑 잘 알지 않아?”
제니의 물음에 다현이 피식 웃었다.
“그게 길드장이랑 친하다면 친한데. 이런 거 부탁하기는 좀 그래서. 제니, 너도 내 성격 알잖아.”
다현이 괜히 ‘독고다이’라고 불리는 게 아니라는 걸 제니도 잘 알고 있었다.
다현은 주고받다 보면 엮이게 되니까 다른 이들에게 부탁하는 것도 싫어했다.
“알지. 우리 언니. 내가 누구보다 잘 알지. 내가 그래서 언니랑 이렇게 친해지기까지 1년도 넘게 걸렸잖아. 그럼. 아저씨. 내가 아는 길드에 부탁 좀 해볼게요.”
“제니야. 고맙다.”
“비스트. 나도 다음에 가서 한번 찾아볼게.”
“그래. 다현이라면 믿을 수 있지.”
한편 경호는 홀 분위기를 살피고 있다 들려온 이야기에 눈을 크게 떴다.
‘뭐! 인공 던전을 만들었다고? 그게 말이 돼?’
경호가 ‘인공 던전’이라는 말에 놀란 그때, 평소와 다른 다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경호야. 혹시 여기 먹을 거 좀 줄 수 있을까? 간단한 거도 상관없으니까 부탁할게.”
인공 던전을 만들었다는 말보다 다현의 평소와 너무 다른 말투에 경호는 더 놀랐다.
“그래. 알았어!”
경호가 준비했던 악마덩굴 열매 피자 3판과 황금꿀을 쟁반에 담아 나갔다.
고소하면서 꼬리꼬리한 독특한 향기가 홀 안을 가득 채웠다.
경호가 테이블 위에 피자를 내려놓자 다현과 제니는 ‘우와’를 외쳤지만, 비스트는 고개를 갸웃했다.
“어? 피자에 햄이나 고기가 없네?”
삼십 대 후반인 용호는 나이에 비해 더 아재스러웠다.
고르곤졸라 피자에서 햄이나 고기를 찾고 있으니.
용호의 말에 경호가 피자에 관해 설명했다.
“죄송합니다. 손님. 대화하면서 가볍게 드실 메뉴를 고르다 보니 고르곤졸라 피자를 하게 됐습니다.”
경호가 난감한 표정으로 사과를 하자 다현이 큭큭거리며 웃었다.
“비스트. 나랑 몇 살 차이도 안 나면서 고르곤졸라 피자 몰라?”
다현의 말에 제니도 한마디 거들었다.
“으. 비스트 아저씨는 이게 얼마나 맛있는데요. 햄이니 고기니 하는 거 들어간 피자보다 이거 더 맛있어요. 아마 여자들이 제일 좋아하는 피자일걸요.”
“고르곤졸라 피자? 이름도 특이하네. 킁킁. 냄새가 약간 꼬릿꼬릿하네.”
“먹어봐요. 그 맛에 먹는 거니까요.”
“그래?”
용호가 피자를 한 조각 손에 들자 경호가 음식 설명을 했다.
“여기 찍어 먹는 꿀은 토종꿀이라 특별히 더 맛있을 겁니다.”
용호가 눈을 동그랗게 뜨곤 경호를 향해 물었다.
“아니 피자를 꿀에 찍어 먹는다고? 아니 무슨 가래떡도 아니고.”
“큭큭큭. 용호 아저씨. 완전 웃겨. 사장님. 죄송해요. 그럼. 잘 먹겠습니다.”
“네. 그럼. 드시면서 말씀들 나누세요.”
아까부터 눈독 들이고 있던 다현과 제니가 손을 뻗어 피자를 집어 들었다.
“다현 언니. 여기 꿀 색깔 좀 봐요. 거의 금색인데요?”
“제니야. 솔직히 여기 내 친구 식당이기도 하지만 진짜 맛이 좋다니까. 애는 좀 비리비리한데 요리는 잘하거든.”
“헐렁한 추리닝이라 그렇게 보이는 거지 몸 좋은 거 같던데요.”
“제니. 너 언제 또 몸매까지 훑어본 거야.”
가벼운 농담을 하며 둘은 꿀을 찍어 입에 넣었다.
그리고 그들의 입에서 농담이 사라졌다.
“어. 어어!”
“언니!”
순식간에 한 조각을 해치운 그녀들이 쉬지 않고 다음 조각을 집어 들었다.
둘의 반응에서 이상함을 느낀 용호도 묘한 표정으로 손에 든 피자를 꿀에 찍었다.
“참나. 피자를 꿀에 찍어 먹다니. 그게 맛있어?”
고개를 갸웃하며 용호가 꿀이 뚝뚝 떨어지는 피자를 한입에 넣고는 씹었다.
“뭐야!”
용호의 반응 역시 다현과 제니의 반응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입에 들어가자마자 터져 나오는 진한 풍미에 순식간에 3판의 피자가 삭제되듯 사라졌다.
“요즘 토종꿀이 얼마나 귀한데 남기면 아깝잖아.”
심지어 용호는 꿀이 담겨있던 종지까지 수저로 싹싹 훑어 먹었다.
“사장님. 정말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용호가 고개를 빼꼼 내밀고 있던 경호를 향해 맛있다는 말을 건넸다.
“사장 오빠! 아, 언니 친구분이시니까 사장 오빠라고 불러도 되죠?”
이미 불러놓고 물어보는 제니를 보며 경호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그래 주시면 저야 영광이죠.”
“칫. 이쁘고 어린 게 오빠라고 해주니까 아주 입이 귀에 걸리…. 아. 생각이 또 입 밖으로 튀어나왔네. 친구야. 미안.”
주변 사람들 덕분에 다현에게 사과라도 받을 수 있음에 경호는 감사했다.
“그럼. 사장 오빠. 이거 좀 더 만들어주실 수 있어요? 집에 싸가려고요.”
“물론입니다.”
“얼만데요? 요즘 치즈도 엄청 비싸고 토종꿀은 구하기도 힘든데.”
“아. 공짜입니다.”
“네?”
경호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다현이 동료분들에게 대접하고 싶어서 구한 것들입니다. 당연히 그냥 드려야죠. 그러니 포장하실 분은 이야….”
그때였다.
우우우웅! 우우웅!
빰빰빰빰빰빰빰빰!
띠리리띵띵! 띠리리리리!
갑자기 휴대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웨에에에에에엥!
그리고 들리는 요란한 소리에 모두가 긴장했다.
“TV! TV 좀 틀어주세요!”
용호가 소리치자 경호가 바로 TV 전원을 눌렀다.
역시나 화면에는 뉴스 속보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긴급속보. 서울 섹터 B-4 구역에 미상의 던전 발생!]
[등급 예측 결과 – 재난종으로 판정. 신속하게 대피하시기 바랍니다.]
화면에는 거대한 던전이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그것은 어딘가 모르게 평소에 보던 던전과는 모습이 조금 달랐다.
“어! 어어!”
모습만 다른 것이 아니었다.
던전 주변에는 다크엘프가 무언가를 조작하고 있는 모습도 보였다.
“저거야! 저거! 저거라고. 저게 그 인공 던전이라고!”
그것을 본 용호가 소리쳤다.
“섹터 B-4 구역이면 바로 요 앞 아니에요?”
제니의 물음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섹터 B-4 구역은 경호가 날려버린 흑염마룡의 균열이 나타났던 종각역 부근이었다.
“가자!”
모두 식당을 빠르게 빠져나갔다.
“뭐. 저 정도 헌터 3명이면 위험하진 않겠지.”
재난종 마수 정도는 쉽게 처리할 수 있는 수준의 전력이었다.
“그냥 TV나 보고 있자.”
그때였다.
경호의 눈앞에 시스템 메시지가 번쩍하고 떴다.
[경호 님!]
“깜짝이야! 얘는 갑자기 메시지를 보내고 난리야.”
[어머니와 산책 중인데 지금 여기 분위기가 좀 이상합니다. 갑자기 사이렌이 울리더니 사람들이 막 뛰어다니고….]
“…!”
메시지를 보던 경호의 표정이 굳어지기 시작했다.
[어? 뭐야? 저, 저거? 다크엘프? 경호님! 웬 다크엘프들이 도로 한복판에 던전처럼 생긴 걸 설치하고 있는데요? 아니 저걸 왜 조작하고 있는 거야?]
“뭐? 아니 엄마랑 왜 하필이면 거기에 간 거야!”
경호도 말해봐야 전달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지만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어! 어어! 이거 마력 파동을 보니 곧 던전이 파열할 거 같아요! 경호님! 경호님! 여기 곧 마수가 쏟아진다고요!]
경호가 미간을 찌푸리며 그대로 식당 밖으로 달려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