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1화
울컥!
비스트는 입안 가득 핏물이 올라왔지만 억지로 그것을 삼키며 달리고 있었다.
“크윽. 제기랄.”
치타로 변한 비스트는 자신이 얼마 버티지 못한다는 걸 느끼고 있었다.
‘이 사실을 기필코 본부에 전해야 한다!’
비스트는 흑천에서 인공 던전을 만든 것을 알려야 한다는 일념으로 포위망을 몸으로 무식하게 뚫고 나왔다.
그 과정에서 몸 여기저기가 찢어지고 구멍이 뚫렸지만, 그는 계속해서 쉬지 않고 달리는 중이었다.
헉! 허억!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그리고 그때.
퍽!
비스트는 엉덩이 부근에서 뜨끔한 기운이 올라오는 걸 느꼈다.
‘젠장.’
자신을 뒤쫓는 다크엘프가 쏜 화살이었다.
거대한 외눈늑대를 타고 달려오는 그들과 거리가 점점 좁혀지고 있었다.
맞설 수도 피할 수도 없는 진퇴양난의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어차피 이렇게 될 거였으면 날아갈 걸 그랬군.’
화살에 맞아 바로 죽을까 봐 시도하지 않았던 방법이었지만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은 법.
점차 뒷다리에 감각이 무뎌지며 무거워지고 있었다.
화살촉에 발려져 있는 다크엘프의 마비 독은 강력했다.
얼마 못 가 결국 비스트가 멈춰 섰다.
아직 회색지대에도 미치지 못했기에 결국 도망치는 것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비스트의 눈빛은 삶을 포기한 눈빛이 절대로 아니었다.
결연한 빛이 어려있는 눈빛을 한 비스트가 마력을 끌어올렸다.
번쩍!
녹색 빛이 터져 나오며 치타에서 거대한 악어의 모습으로 변했다.
현존하는 파충류 중 가장 거대한 ‘인도악어’였다.
“크아아아아아아아아!”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비스트가 땅이 울릴 정도로 커다란 괴성을 질렀다.
***
-겨, 경호 님!
“아, 왜? 나 바쁘니까 조금 있다가 말 시키면 안 될까?”
경호가 몸통만 남은 거대한 뿔돼지를 반으로 가르며 대답했다.
-아무리 그래도 용아검으로 뿔돼지를 해체하시는 건 좀 아니지 않습니까?
“뭐가 좀 아닌데?”
-그래도 신화급 아티팩트인데.
스가악.
마력검기를 일으키지도 않았는데 용아검이 가볍게 움직일 때마다 총알도 쉽게 뚫지 못하는 뿔돼지의 두꺼운 가죽이 갈라지고 강철처럼 단단한 뼈가 살과 함께 절단됐다.
그러면서도 신기하게 피 한 방울 튀지 않았다.
검술도 검술이었지만 누구보다 마수에 대해 잘 알고 있기에 가능한 기예였다.
쓰윽. 쓰으윽.
갈비뼈와 함께 뱃살이 잘려 나왔다.
우리가 흔히 먹는 바로 그 삼겹살 부위였다.
단지 그 크기가 수십 배에 달했다.
경호가 승용차보다 커다란 뿔돼지의 고깃덩이를 그대로 아공간 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걸 본 흰둥이가 입을 쩍 벌렸다.
-경호 님. 그런데 그 아공간은 도대체 얼마나 큰 겁니까?
“나도 정확히는 몰라. 혹시 ‘공간의 악마’라고 알아?”
-혹시 프리엘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경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하더니. 주신의 반려견은 역시나 다르네?”
경호의 말처럼 흰둥이는 주신의 반려견이었기에 우주의 이치와 마계에 대한 정보를 다른 수호신이나 신수보다 더 많이 알고 있는 편이었다.
-그런데 그 악마는 왜요? 악마 공작으로 마왕들을 제외하면 서열도 거의 탑이잖아요.
“어. 그랬지.”
흰둥이는 경호의 대답에 묘한 이질감을 느꼈다.
-그랬다고요?
“어쩌다가 내가 그놈을 잡았거든. 그땐 아직 4개 특성 마스터 수준일 때라서 좀 힘들긴 했지만 어쨌든 죽이고 나니까 그놈한테서 작은 구슬 하나가 튀어나오더라고.”
흰둥이가 경호의 말에 입을 쩌억 벌렸다.
-서, 설마 공간의 구슬.
“오. 그것도 알아?”
‘공간의 악마’ 프리엘의 상징과도 같은 물건이었다.
-그럼. 이 아공간이 공간의 구슬의 힘이라고요?
“어. 그래서 꽤나 넓은 편이지.”
-하하하하하하.
흰둥이가 어이없어하는 표정으로 실없이 웃었다.
한참을 웃던 흰둥이가 경호를 보며 혼자 중얼거렸다.
-마계 십대 무기 중 하나인 ‘공간의 구슬’을 고작 아공간으로 쓴다고요?
“못 쓸건 없지.”
-뭐, 신화급 무기로 뿔돼지 정육 하시는 분이니 어쩌면 당연한 거겠네요.
“용도에 맞게 잘 쓰면 되는 거지. 십대 무기든 백대 무기든 무슨 상관이야. 그리고 이게 식재료 보관하면 대박이거든. 절대로 안 상해. 너도 아마 3초 삼겹…. 어?”
그때였다.
“크아아아아아아아아!”
강력한 마력을 품은 괴성이 멀리서 들려왔다.
경호가 고개를 갸웃하며 소리가 들려온 곳을 쳐다보자 흰둥이도 긴장하며 마력 파동을 읽어냈다.
-이거 마수가 아닌 각성잡니다.
“뭐? 누가 들어도 마수 포효…. 음. 저런 포효소리는 처음 듣긴 하네. 뭐지? 우리 가서 구경 좀 할까?”
-어, 경호 님. 귀찮은 건 싫어하시는 거 아닙니까?
흰둥이의 말에 경호가 씨익 웃었다.
“원래 불구경, 싸움 구경이 제일 재미있는 거거든.”
경호가 흰둥이의 목덜미를 잡아 바로 몸을 날렸다.
***
푹! 푹! 푹!
비스트가 변신한 악어는 방어력이 좋은 편이지만 마기가 담긴 화살을 막을 정도로 대단하진 않았다.
비스트는 죽음을 예감했다.
외롭고 쓸쓸한 죽음이었지만 헛되지 않은, 최선을 다한 삶이라는 생각을 했다.
“비스트!”
레이나가 앞으로 나서며 화살이 빽빽하게 꽂혀있는 비스트를 보며 소리쳤다.
“안 그래도 인공 던전의 성과만 보고하기엔 좀 허전했었는데. 아주 고마워. 이렇게 만나지 않았으면 내가 아주 이뻐 해줬을 텐데 말이야. 너무 아쉽네.”
뿌득.
비스트가 이를 갈았다.
“그러게. 이렇게 보지 않았으면 내가 네년을 아주 갈가리 찢어서 삼켜버렸을 텐데. 나도 너무 아쉽군.”
겨우 서 있는 것이 고작인 비스트였지만 레이나를 향한 살기는 정말이지 폭발적이었다.
그러다 문득 자신의 다리에 감겨있는 가죽 주머니가 떠올랐다.
‘그래. 이거! 분명 던전의 열쇠 같은 역할을 했어!’
흐려지는 정신을 부여잡은 비스트가 빠르게 앞발을 뻗어 가죽 주머니를 쥐었다.
그것을 본 레이나가 소리를 빽 질렀다.
“비스트!”
역시나 이것이 정답임을 확신한 비스트가 손에 들린 가죽 주머니를 입에 던져 넣었다.
인도악어.
세계 최강의 치악력을 가진 동물이었다.
거기에 마력이 더해져 더 날카롭고 단단해진 이빨과 더 강해진 턱힘은 견고하긴 했지만 고작해야 던전의 열쇠 역할에 불과한 게이트볼을 바스러뜨리기 충분한 힘을 발휘했다.
“안 돼!”
레이나가 비스트를 향해 달려갔다.
***
경호는 야시시한 옷을 입은 귀가 뾰족하고 키가 큰 이들을 보며 중얼거렸다.
“엘프?”
워울프도 그랬지만 엘프 역시 경호는 아는 게 별로 없었다.
사실 얼마 전 TV에 출연한 엘프를 보지 않았다면 지구에 그들이 있는 줄도 몰랐을 경호였다.
-아니요. 다크엘프입니다. 마기를 사용하는 변절자로 마족은 아니지만 그들의 하수인입니다.
마족에 의해 마기에 침범당한 엘프가 아닌 스스로 더 강해지기 위해 마기를 받아드린 엘프였다.
그래서 다크엘프는 강했지만 잔인하고 음험했다.
“그러고 보니 얼굴도 좀 어둡군.”
제법 캄캄한 밤이었지만 경호에게 얼굴색을 알아보는 것 따위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저 초록 악어는 뭐지? 마수도 아니고 그렇다고 그냥 야생동물도 분명 아닌 거 같은데.”
-경호 님. 레인보우 식스의 ‘그린 비스트’일 거 같습니다.
“레인보우 식스면 다현이의 동료라는 거지? 그러면 저 다크엘프들은 빌런 같은 건가?”
흰둥이는 흑천에 대해서는 잘 몰랐지만 지금 비스트와 다크엘프 중 누가 나쁜 쪽인지 정도는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비슷합니다. 경호 님.
빌런.
경호에게는 지숙을 위협하던 그때의 그놈을 떠올리게 만드는 단어였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우선 비스트를 구하자고. 일단은 이쪽이 좋은 놈. 저쪽이 나쁜…. 어? 저게 뭐야?”
경호의 눈에 악어 모습을 한 비스트가 기묘한 형체로 변하는 것이 들어왔다.
***
비스트는 입안에서 생각보다 쉽게 부서지는 금속 구체를 느끼며 날 듯이 달려오는 레이나를 보다가 눈을 감았다.
‘아현아. 아빠가 곧 만나러 갈게.’
3년 전.
비스트는 자신의 품 안에서 차갑게 식어가던 딸아이를 떠올렸다.
그때.
‘어? 어엇!’
비스트는 무언가가 자신의 전신을 강하게 휘감는 듯한 느낌을 느꼈다.
눈을 떠보니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빈 깡통처럼 텅 비어있던 마나코어가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바로 마기였다.
놀란 비스트가 마나코어를 장악하려 하는 마기를 제압하기 위해 힘을 쓰려고 했다.
‘이게 도대체….’
하지만 그 힘은 비스트가 제압할 수 있는 그런 류가 아니었다.
몸이 터질 것 같은 느낌과 함께 비스트는 서서히 의식을 잃어갔다.
놀라기는 공격을 하기 위해 달려가던 레이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엇! 이게 도대체!”
레이나도 빠그작 거리며 비스트의 입안에서 구체가 깨지는 것을 보기는 했다.
그래서 목을 치고 입안에 고인 ‘게이트볼’의 내용물이라도 건지기 위해 달려가던 참이었다.
그런데.
쿠직! 쿠지직!
검은 살덩이 같은 것이 비스트의 입속에서 튀어나오더니 그의 몸을 칭칭 감싸기 시작했다.
비스트도 괴로운지 꿈틀거렸지만 그것이 반항의 끝이었다.
원래도 5m가 넘는 거대한 크기의 인도악어였지만 검은 살덩이 같은 것이 붙으며 그 형체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쿠지직! 뿌득! 뿌지직!
10m는 되어 보이는 크기의 거인의 모습에서 이제 악어의 형체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것은 마치 3살짜리 아이가 찰흙으로 대충 만든 사람 같은 모습이었다.
얼굴도 손도 발도 몸통까지 모두 존재하고 있었지만 일그러지고 뭉개진 기묘한 모습이었다.
“이, 이런!”
하지만 움직임은 빨랐고 그 위력은 굉장했다.
후우웅!
괴물의 손처럼 보이는 부분이 레이나를 향해 날아왔다.
레이나보다 거대한 주먹이 그녀가 피한 자리에 내리꽂혔다.
콰아아아앙!
바닥이 깨져나가며 땅이 움푹 파였다.
피하지 못했으면 그대로 즉사했을 엄청난 위력이었다.
“모두 저 괴물 녀석을 공격해!”
레이나가 뒤에 있는 조장들에게 소리치며 뒤로 빠지려고 하는 찰나.
푸욱!
“이, 이게.”
섬뜩한 소리와 함께 느껴지는 극렬한 고통에 레이나가 자신의 아랫배를 쳐다봤다.
검은 꼬챙이 같은 것이 배에 박혀있었다.
“도대체. 이게. 크억!”
바닥을 때린 괴물의 주먹에서 꼬챙이 같은 촉수가 길게 뻗어 나와 레이나의 배를 뚫고 들어간 것이었다.
꿰뚫린 부위에서 피가 울컥거리며 쏟아져 나왔다.
“컥! 커억!”
피를 토하며 레이나가 괴로워했다.
쿠어어어어어어!
괴물이 그런 레이나를 촉수로 휘감아 그대로 손에 쥐었다.
그리고 입을 벌려 레이나를 삼켰다.
“아, 안 돼! 으아….”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우적! 우적! 우적!
입에서 피를 뚝뚝 흘리며 레이나를 씹어먹던 괴물의 몸이 꿈틀거리며 더욱 커지기 시작했다.
“레이나 님! 안 돼!”
인상이 날카로운 1조장 발로이가 괴물을 보며 이를 갈았다.
“죽이겠다! 이 괴물!”
바로 뛰어나가려고 하는 발로이를 조원들이 뛰어들어 말렸다.
“조장님! 안 됩니다!”
“놔! 레이나 님! 레이나 님!”
발로이가 몸부림을 치자 3조장 울비크가 화난 표정으로 소리쳤다.
“발로이! 늦었어! 너마저 당하면 우리 조직은 끝이다!”
레이나를 능가하는 전사가 바로 발로이였다.
사실 레이나와 발로이를 제외하고는 실력이 그렇게 뛰어나지 않았기에 지금 상황에서 발로이까지 위험해지면 조직은 끝장이었다.
“우리도 역시 괴롭다. 하지만 애초에 우리의 목적은 인공 던전의 비밀을 외부로 나가지 않게끔 하는 것이었어. 그 목적은 이미 달성했고.”
이미 비스트는 사라지고 없었고 저런 괴물을 상대하는 것은 쓸데없는 전력 낭비였다.
“이미 레이나 님은 돌아가셨다. 그분의 죽음을 헛되게 만들 생각이냐!”
울비크의 말은 냉정했지만 틀리지 않았기에 발로이는 화가 났지만, 숨을 깊이 들이켜며 감정을 추슬렀다.
서서히 흡수를 끝낸 괴물이 그들을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래. 죽음에 대한 빚은 죽음으로 받으면 된다. 가자!”
이를 악다문 발로이가 몸을 돌렸다.
그렇게 다크엘프가 모두 사라지자 얼마 떨어지지 않는 곳에서 흰둥이를 손에 쥐고 있는 경호가 모습을 드러냈다.
“뭐야. 쟤들 무슨 영화 찍어? 왜 저리 비장해?”
-그런데 경호 님. 왜 저들을 그냥 보내주신 겁니까?
경호가 묘한 눈빛으로 흰둥이를 쳐다봤다.
“아무리 지구의 수호신이라고 해도 너무 목숨 차별하는 거 아니야? 저번에 빌런은 죽이지 말라며?”
-지구의 인간과 다른 차원의 존재는 카르마에 끼치는 영향이 다릅니다.
“그래도 저들도 나름의 피치 못할 사정이 있겠지. 난 그냥 ‘비스트’라는 다현의 동료를 살릴 생각이 있던 거지. 처음부터 저들을 어떻게 할 생각은 아니었다고.”
-그래도 위험한 놈들인데.
“쟤들이 세상을 뒤집어엎을 대단한 악당이라면 모를까. 나중에 다시 눈에 띄면 그때 손 좀 봐주지. 뭐.”
쿠어어어어어어!
괴물이 포효와 함께 경호에게 주먹을 날렸다.
경호가 그런 괴물의 주먹을 가볍게 피하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런데 이 암흑마기는 도대체 어디서 튀어나온 거야? 분명 상급악마가 있는 것도 아닌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