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8화
“상태가 많이 안 좋은 거 같은데.”
신수는 기본적으로 식사라는 개념이 없는 존재다.
물론 신력이 부족하여 흰둥이처럼 음식을 먹는 경우는 있다.
그것도 어디까지나 마기나 독기를 제거한 것을 먹는 것이다.
“저러니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지. 쯧쯧.”
경호가 맨드릴을 뜯어 먹는 불여우를 보며 혀를 찼다.
마기에 취약한 신수가 저렇게 마수를 마구잡이로 섭취하면 마기가 뇌수에 박혀 이지가 흐려지게 될 수밖에 없었다.
“저걸 어쩌지? 흐음.”
경호는 사실 불여우가 살짝 맛이 갔다고 하길래 기회를 봐서 여우구슬을 슬쩍 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불여우라는 녀석이 생각보다는 강해 보여 슬쩍 가져가기는 쉽지 않아 보였다.
어쨌든 저런 상태로 놔둘 수는 없었다.
‘자칫하면 마수로 변할 수 있다.’
흰둥이는 아직도 놀라서 입만 쩍 벌리고 있었다.
“너도 저런 상태인 건 몰랐던 거야?”
-울피가 원래는 살짝 왔다 갔다 하는 그런 수준이었거든요. 그래서 제가 힘을 기르면 신력을 이용해서 정신 차리게 만들려고 했는데….
경호가 보기에는 흰둥이가 지금보다 몇 곱절은 더 강해진다고 해도 제정신으로 돌려놓기 쉽지 않아 보였다.
“뭐, 어쨌든 한번은 부딪혀 봐야겠네. 아직 어느 수준인지 그냥 봐서는 모르겠으니까.”
경호의 말에 흰둥이가 화들짝 놀라 바지 끄덩이를 잡고 늘어졌다.
-아니 좀 더 관찰을 해보고….
“그냥 봐서 알 수 없으니까. 그렇지.”
경호가 은신을 풀지 않은 채 최대한 기척을 감추고 불여우를 향해 천천히 다가가기 시작했다.
***
쩝! 우걱! 우걱!
불여우는 여우불에 그을린 맨드릴의 살을 씹어 삼키고 뜨거운 피를 들이키며 살기를 더하고 있었다.
그런 불여우의 꼬리가 쫑긋 올라갔다.
경계할 때 나타나는 습관이었다.
크르르르르르.
불여우가 백마고지 아래쪽을 쳐다보며 낮게 으르렁거리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생각보다 더 예민한데. 은신을 쓰고 기척까지 최대한 줄인 상태로 접근한 거였는데.”
불여우 주변에 여우불이 생기기 시작했다.
맨드릴을 공격할 때보다 더욱 새파란 색을 띠는 불꽃이었다.
“거기다 바로 ‘청염’까지.”
새파란 불꽃이 완성되자마자 곧장 경호를 향해 날아들었다.
퍼버벙! 퍼벙! 퍼엉!
엄청난 폭음과 함께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리고 그 연기 안에서 짜증 섞인 경호의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야, 상대가 말하고 있는데 바로 선빵 먼저 날리는 건 좀 너무한 거 아니냐?”
연기가 걷히자 새하얀 결계를 두른 경호의 모습이 드러났다.
키이이이이이익!
멀끔한 경호의 모습에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불여우가 털을 곤두세우고 마기를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참나. 신수가 신력이 아닌 마기를 뿜어내다니. 아주 막장이구만. 그래. 니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한번 해보자.”
휘익.
말이 끝나기 무섭게 경호의 모습이 사라졌다.
불여우가 흠칫 놀라며 몸을 틀었지만.
퍼억!
이미 경호의 주먹이 불여우의 옆구리에 작렬한 후였다.
주먹엔 마치 글러브를 낀 거처럼 새하얀 마력이 두껍게 감싸고 있었다.
케에엥!
신음성과 함께 불여우가 그대로 날아가 바닥에 처박혀 한참을 굴러갔다.
경호는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며 입꼬리를 올렸다.
“이거 마지막에 내 기운을 슬쩍 흘렸네. 이지는 상실해도 전투 감각은 본능적으로 남아 있는 건가?”
경호는 정령계에서 귀환한 후 처음으로 싸우며 슬쩍 미소를 지었다.
크르르르르르.
길게 고랑을 만들며 바닥에 처박혔던 불여우가 이빨을 드러내며 몸을 낮췄다.
그것을 본 경호는 염력을 이용해서 바닥에 있는 돌멩이들을 띄우고는 마력을 불어넣기 시작했다.
새하얀 마력이 돌멩이를 감싸 번쩍이며 묵직한 기운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검에 마력을 불어넣어 검기를 만들면 마력검기라 하니 이것은 마력석기 정도로 부르면 될 것 같았다.
“자아, 이번엔 꽤 아플 거야.”
크아앙!
불여우가 땅을 박차며 빠르게 날아왔다.
물론 새하얀 빛을 뿌리는 돌멩이가 조금 더 빨랐다.
퍼벅! 퍼버벅! 퍽! 퍼벅! 퍽! 퍽!
십여 개의 새하얀 빛 덩이가 다양한 각도로 날아가 불여우의 전신을 두들겼다.
케에에엥.
공중에 떠서 한참을 흠씬 두들겨 맞은 불여우가 그대로 바닥에 떨어져 숨을 헐떡거렸다.
경호가 그런 불여우를 보다 바닥에 손을 뻗자 제법 굵은 나뭇가지 하나가 딸려와 손에 쥐어졌다.
툭 치면 부러질 것 같은 그런 나뭇가지였다.
하지만 그것이 경호의 손에 들린 이상 그냥 그런 나뭇가지가 아니게 됐다.
신화급 무기인 용아검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바닥을 구르던 나뭇가지도 경호의 손에 들리면 태산도 쪼갤 위력을 낼 수 있었다.
‘용아검을 쓰고 싶지만 괜히 힘 조절하면서 싸우면 그게 더 손해다.’
이 정도면 온 힘을 다해도 될 듯싶었다.
앙! 앙!
뒤에서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지켜보던 흰둥이가 경호와 불여우 사이로 달려와 앞발을 좌우로 펼쳤다.
-경호 님! 그냥 여우구슬만 가져가면 안 되겠습니까? 정말 이러면 큰일 납니다.
“아니 여우구슬만 가져갈 수 없는 이유가 있어서 그런다고. 자칫하면 마수화가 진행될 수도 있는 녀석이라 확실히 마기를 제거해야 해. 그러려면 제압을 해야 하고.”
평소 속없이 행동하는 둥글둥글한 성격의 경호였지만 마수가 될 가능성을 본 이상 물러설 수 없었다.
특히나 재난종을 뛰어넘는, 멸망종 최상급 수준의 마수가 될 가능성이 다분한 녀석이었다.
“최대한 안 다치게 할 거야. 다시 말하지만 여우구슬이 문제가 아니라니까. 저대로 마기에 절어서 마수로 변질되면 그땐 후회해도 늦어!”
-그때 경호 님이 나서서….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말고!”
-하아. 울피야. 미안하다.
경호가 나뭇가지에 마력을 일으켜 새하얀 마력검기를 둘렀다.
이미 ‘울피’라는 저 불여우는 뇌수 깊숙이 마기로 가득 찬 모습이었다.
흰둥이가 눈물이 가득 고인 눈으로 경호를 올려다봤다.
-끝까지 절 지켜주었던 녀석입니다. 제발 너무 심하게 다루지만 말아 주십시오.
“알았어! 알았다고!”
경호는 괜히 휘말릴 수도 있기에 흰둥이의 수혈을 짚었다.
투욱.
잠든 흰둥이를 바위 뒤편에 내려놓은 경호가 울피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크아아아아아아앙!
울피의 몸에서 엄청난 기운이 뻗어 나오기 시작했다.
***
‘살아야 한다. 살아서 ‘카니스’를 지키고 지구를 구해야 한다.’
내가 누군지 여기가 어딘지 모든 것이 흐릿하고 모호했지만 이것 하나만은 깊이 새겨져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세상은 온통 큰불이라도 난 것처럼 새빨개 보였다.
우웍! 우어억!
또 어디선가 나타난 마수들이 자신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살아야 한다. 살아서 카니스를 지키고 지구를 구해야 한다.’
공격하는 마수를 죽이고 그들의 살을 씹었다.
머리가 화끈해진다.
내가 누군지 이곳이 어딘지 더욱 흐릿해지는 느낌이다.
하지만 이렇게 생살을 씹어 삼켜서라도 살아남아야 했다.
그게 ‘카니스’를 지키고 지구를 구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니까.
그리고 그게 내가 유일하게 기억하고 있는 나의 사명이니까.
그런데 언제나 드는 궁금증이 있었다.
도대체 ‘카니스’가 누구지?
그때였다.
처음 느껴보는 섬뜩한 기운이 느껴졌다.
보이는 것은 분명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분명 엄청나게 강대하고 무시무시한 존재가 저 아래에서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보이지 않으나 보이는 것보다 더 선명하게 느껴졌다.
크르르르르르.
‘마수가 아닌데?’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존재는 분명 마수가 아니었다.
“오. 제법이네. 은신을 쓰고 기척까지 최대한 줄인 상태로 접근한 거였는데.”
마수가 아니라는 점은 평소와 달랐지만 어차피 죽여야 할 대상이라는 것은 평소와 같았다.
‘죽인다. 그리고 난 살아남아 카니스를 지키고 지구를 구한다.’
느껴지는 기운이 아까 덤벼들었던 마수와 비교도 하기 어려울 정도로 강했기에 더욱 강력한 여우불을 일으켰다.
‘가라! 그리고 죽어라!’
퍼버벙! 퍼벙! 퍼엉!
엉청난 폭음과 함께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분명 강한 존재였지만 방심했는지 자신의 공격을 피하지 못했다.
‘이번에도 난 살아남았다.’
그런데.
“야, 상대가 말하고 있는데 바로 선빵 먼저 날리는 건 좀 너무한 거 아니냐?”
이해할 수 없는 말을 건네는 상대는 멀쩡해 보였다.
여우불에 맞은 상대가 저렇게 멀쩡한 경우는 처음이었다.
그것도 자신이 특별히 최선을 다해 만든 여우불이었다.
키이이이이이익!
‘어!’
상대가 사라졌다.
아니 옆이다.
몸을 급하게 틀었지만 모든 힘을 흘려내진 못했다.
퍼억!
옆구리에서 내장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다.
케에엥!
바닥을 한참이나 구르고 나서야 멈췄다.
다리가 후들거리고 골이 흔들렸다.
그런데.
‘묘하게 상쾌하다.’
세상이 온통 붉어지고 나서 처음 느껴보는 그런 이상한 기분이었다.
‘죽여야 해. 난 살아남아 카니스를 지키고 지구를 구해야 한다.’
크르르르르르.
힘겹게 몸을 일으켜 자세를 낮췄다.
강대한 기운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래 봤자 앞발보다 작은 존재일 뿐이었다.
여우불이 안 통한다면 한입에 씹어 삼키면 그만이었다.
크아앙!
크게 소리치며 빠르게 몸을 날렸다.
‘저것들은…. 크악!’
퍼벅! 퍼버벅! 퍽! 퍼벅! 퍽! 퍽!
새하얀 빛 덩이가 날아와 전신을 두들겼다.
케에에엥.
뼈가 부러지고 근육이 찢어졌다.
아팠다. 너무나 아팠다.
‘그런데 왜 이렇게 시원하지. 왜 이렇게 상쾌한 기분이 드는 거지?’
새빨갛던 세상이 아주 조금 제 색깔을 찾았다.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
몰랐는데 아주 조그만, 자신의 발톱 크기 정도의 새하얀 털뭉치도 있었다.
‘여우구슬? 뭐지? 날 걱정해주는 건가?’
저 털뭉치가 하는 말을 모두 이해할 수 없었지만 분명 날 걱정해주는 것 같았다.
그리고 자신을 공격한 존재는 그런 털뭉치에게 화를 내고 있었다.
‘울피?’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저 털뭉치가 ‘울피’라는 말을 하니 가슴이 답답해졌다.
배고픈 감정도 아니었고 아프거나 졸리거나 화나는 감정도 아니었다.
잊고 있었지만 분명 알고 있던 감정이었다.
‘그리움.’
그때 갑자기 새하얀 털을 가진 거대한 존재가 살아있는 듯 생생한 모습으로 머릿속에 떠올랐다.
‘카니스? 카니스!’
벼락이 치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온몸에 세포가 살아 움직이는 느낌이 들고 흐릿했던 시야가 맑아졌다.
-끝까지 절 지켜주었던 녀석입니다. 제발 너무 심하게 다루지만 말아 주십시오.
‘아악.’
울피는 갑자기 머리가 깨질 듯 아파왔다.
‘울피! 그래. 내가 바로 카니스 님의 가장 사랑받는 사도, 내가 바로 울피였어!’
가슴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솟구쳐 올라오는 것이 느껴졌다.
그때 경호가 흰둥이의 수혈을 짚는 모습이 울피의 눈에 들어왔다.
경호가 흰둥이의 목을 누르니 바로 축 늘어졌다.
‘감히! 나의 카니스 님에게 무슨 짓을 한 거냐! 죽인다! 인간!’
크아아아아아아앙!
울피가 크게 포효했다.
우우우우우우웅!
엄청난 기운이 울피의 전신을 휘감았고, 타오르던 검붉은 불길이 더욱 크게 타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