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7화.
“이거 3초 삼겹살 해 먹어도 되겠는데?”
삽에다가 삼겹살을 얹어 숯가마에 넣어 3초 만에 꺼내 먹는 일명 ‘3초 삼겹살.’
예전에 엄마와 숯가마 찜질방 가서 먹은 기억이 떠올라 입에 침이 고였다.
특히나 육즙이 쭉쭉 터져 나오는 그 맛은 정말 환상이었다.
내가 중얼거리자 옆에 있던 솔딘이 고개를 갸웃하며 나에게 물었다.
“삼겹살이 그때 말씀하신 그 고기 말씀하시는 거죠? 근데 3초 만에 먹어야 하는 삼겹살이 따로 있는 겁니까?”
나는 손을 절레절레 흔들며 피식 웃었다.
“아니요. 3초 만에 먹는 건 아니고. 마력 화로를 보니까 갑자기 예전 생각이 나서요. 그러니까 손잡이가 달린 철판에 고기를 깔고….”
내가 설명을 하자 뚝딱뚝딱 삽과 비슷하게 생긴 물건을 만들어 온 솔딘이었다.
그리고 그 위에 흑돼지보다 더 고소하고 쫀득한 맛이 일품인 뿔돼지의 뱃살을 두툼하게 썰어서 얹었다.
“자아, 그럼. 3초만 세보세요.”
***
“솔딘! 계세요?”
삼 일 만에 경호는 ‘이계인 보호구역’을 다시 찾았다.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저녁 무렵 흰둥이와 산책을 핑계로 검은 망치 부족이 사는 곳을 찾은 경호였다.
경계가 제법 삼엄했지만, 경호는 어렵지 않게 들어올 수 있었다.
끼잉.
흰둥이가 속이 울렁거리는지 앞발로 가슴을 두드렸다.
-제발 좀 살살 날아오면 안 되는 겁니까? 어흑.
“어쭈. 이번에 호돈이 길드 복귀 퀘스트 누구 덕으로 성공했지? 이거 나중에 만렙 찍으면 날 아주 헌신짝 버리듯 버릴 기센데. 어?”
경호의 말에 흰둥이가 움찔하고는 꼬리를 내렸다.
그때였다.
“아니 용사님! 아니 아무 연락도 없이 어쩐 일로 찾아오셨습니까?”
여전히 적응하기 어려운 민속촌 느낌의 기와집에서 문이 열리며 솔딘이 나오며 경호에게 인사를 했다.
“언제든 오라고 하셨으면서…. 저 그럼 삐져서 돌아갑니다.”
“하하하. 용사님도. 그럴 리가요. 언제든 환영입니다. 들어오시죠.”
“아니 혹시 공방에 가볼 수 있을까요.”
“공방이요? 물론 가능합니다. 그럼, 지금 가시겠습니까?”
“네. 이야기는 그곳에서 나누도록 하죠.”
-경호 님. 그럼, 저도 테일러 사도를 좀 만나고 와도 되겠습니까?
“그래. 대신 길게 있지 않을 거니까. 너무 늦게 오지 말고.”
-알겠습니다.
흰둥이가 튀어 나가더니 금세 담을 넘어 시선에서 사라졌다.
“용사님. 이쪽입니다.”
구불구불한 돌담길을 지나 조금 걸어가자 화기와 금기, 토기가 묘하게 뒤섞인 기운이 저 멀리서 느껴지기 시작했다.
“저기 저 뒤편에 공방이 있나 보군요.”
조금 앞서 부지런히 걸어가던 솔딘이 깜짝 놀라 경호를 돌아봤다.
“아니 어떻게 그런 것도 아십니까?”
“기운이 느껴지거든요. 정령계에서 느꼈던 바로 그 기운이요. 제가 3초 삼겹살 때문에 자주 공방에 찾아갔잖아요. 그래서 알죠. 그런데 확실히 그때보다 화기가 약하긴 하네요. 금기와 토기는 비슷한 거 같은데.”
“금기는 이곳도 질 좋은 금속이 많아서요. 토기도 흙정령 ‘그레이’가 오면서 충분히 좋아졌고요. 그런데 화기는 확실히 마력 화로를 가동하질 않으니 모이질 않네요. 어디서 불정령이라도 하나 구하면 될 듯도 싶은데….”
솔딘이 말을 흐리며 은근한 눈빛으로 경호를 쳐다봤다.
“저도 불정령은 어디 있는지 모르겠군요. 흙정령도 세계수 때문에 생긴 거니까요. 언제고 불정령과 계약하면 꼭 전해드리죠.”
“아유. 그런 뜻으로 말씀드린 건 아닙니다.”
“에이. 티가 얼마나 났는데요.”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걷다 보니 어느새 후끈한 열기가 풍겨 나오는 커다란 창고 같은 외관의 건물이 나타났다.
곳곳에 모루가 있고 대장용 망치나 쇳덩이들이 군데군데 놓여있는 평범해 보이는 공방 안은 무척이나 더웠다.
“그래도 여긴 언제나 후덥지근하군요.”
화기가 부족하다고 해도 드워프의 공방에 있는 화로의 심부 열기는 5000도가 넘었기 때문에 공방 안 온도도 80도 가까이 됐다.
“용사님이니까 후덥지근하다고 표현하지요. 보통 사람은 이곳 근처에도 뜨거워서 못 들어옵니다.”
경호가 고개를 끄덕이며 마력을 끌어올려 열기를 차단했다.
“후우. 이제 좀 낫네요. 아, 이거 받으세요.”
경호는 아공간을 열어서 2m는 될 법한 커다란 칼날을 꺼내 솔딘에게 건넸다.
자신의 키에 두 배는 될 법한 커다란 칼날을 이리저리 훑어보던 솔딘이 경호에게 물었다.
“흐음. 저도 처음 보는 금속인데. 도대체 뭡니까?”
“아, 칼날표범을 모르시죠?”
칼날표범은 맛이 없기에 정령계에 있을 때도 딱히 시체를 가지고 온 적이 없어 솔딘도 본적이 없었다.
“들어본 적은 있습니다. 아, 그럼. 이게….”
“네. 이번 신화길드에서 잡은 칼날표범에서 나온 겁니다.”
정확히 말하면 성원과 정수가 정신없는 틈을 타서 경호가 하나 슬쩍 한 거였다.
“혹시 이걸로 물건 좀 만들어주실 수 있습니까?”
“흐음.”
솔딘이 칼날을 잡아 손가락으로 튕겨봤다.
티이잉!
사이다를 마신 것 같은 상쾌한 소리가 칼날에서 울려 퍼졌지만 솔딘의 표정은 마치 고구마 몇 개를 억지로 삼킨 듯한 표정이었다.
“솔딘. 왜 그러세요?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혹시 만드시려고 하는 것이 검입니까?”
경호는 고개를 저었다.
“방패를 만들고 싶습니다. 그 어떤 것도 막을 수 있는 아주 단단한 방패요.”
경호는 언제나 수호천사 역할을 하며 뒤치다꺼리를 하고픈 마음이 없었다.
‘다현과 성원이 원딜을, 정수가 근딜을 맡는다고 해도 제대로 된 탱커가 없어.’
그래서 경호는 호돈을 탱딜로 키우기로 했다.
뭐, 본인의 의사 따위는 경호에게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검이면 칼날만 다듬는 수준에서 어떻게든 해결이 될 것 같은데. 방패는 좀 문제가 있습니다.”
“아니 전설급 장비도 뚝딱 만들 수 있는 장인께서 왜 그런 약한 소리를 하십니까. 그때 그 각궁 수준만 돼도 충분합니다.”
“그때도 말씀드렸다시피 마력 화로가 없이는 이 정도 금속을 녹일 수 없습니다. 마도공학 기술이 뛰어난 아티팩트 업체를 찾아가셔야 가능할 겁니다.”
“그런 곳에선 이걸 녹일 순 있어도 솔딘처럼 작품을 만들진 못하지 않습니까.”
“솔직히 그렇긴 하지요. 아직 지구인의 대장기술은 부족한 부분이 많으니까요. 그리고 가격도 수십억은 넘게 내셔야 할 거고요.”
“수십억이요? 마도구도 아니고 그냥 장비 제작도 그렇게 돈이 많이 듭니까?”
“그것도 싼 편이지요. 마도구라면 수백억입니다.”
경호는 수십억을 가지고 있지도 않지만 만약 있더라도 굳이 그런 곳을 찾아가서 마음에 들지도 않은 물건을 만들고 싶지도 않았다.
-경호 님. 아직 안 끝나셨습니까?
그때 흰둥이가 테일러의 어깨에 올라탄 채 공방으로 들어왔다.
“경호 님. 잘 지내셨습니까? 크릉.”
저번보다 마력이 강해지고 덩치도 더욱 커진 테일러가 경호를 보며 인사를 했다.
“오, 확실히 사도가 돼서 그런지 훨씬 강해지셨네요.”
“감사합니다. 크릉.”
타닥.
-그런데 경호 님. 아까 밖에서 들어보니 수십억 어쩌고 하시던데. 무슨 이야깁니까?
흰둥이가 공방 안을 두리번거리며 경호에게 물었다.
“아니 호돈이한테 방패나 하나 만들어 주려고 했는데 화로의 출력이 약해서 힘들다고 하네.”
끼잉.
흰둥이가 작은 앞발을 들어 턱을 괴며 나름 진지하게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물론 그 모습은 엄청나게 귀여웠다.
-그거면 화로의 출력을 높일 수 있을 텐데. 그곳에 아직 있을지 모르겠네요.
“뭔데?”
-경호 님. 아닙니다.
“아니긴 뭐가 아닌지 들어나 봅시다. 흰둥 씨.”
-정말 아닌데요.
“그러니까 흰둥 씨. 들어보게 말해보라니까요.”
-아, 그게 철원 쪽에 불여우 한 마리가 살고 있거든요. 상태가 좀 많이 안 좋긴 하지만.
“불여우? 그건 신수잖아? 신수 다 사라졌다며.”
화염을 다루는 불여우는 유명한 신수종 중 하나였기에 당연히 경호도 잘 알고 있었다.
-정확히는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아직도 강한 녀석 중 몇몇이 마기 때문에 이지를 상실한 채 살아가고 있죠. 특히나 그 불여우, ‘울피’는 저의 제 1사도이자 가장 가까운 동료였기에 더 마음이 쓰이는 녀석입니다.
대격변이 터지고 각성 시스템이 정착되기 전, 수호신을 비롯한 모든 신수들은 마수 군단과 목숨을 건 혈투를 벌였다.
그 결과 대부분은 신력을 잃고 미물로 돌아갔지만 강대한 녀석들은 죽지 않고 살아남아 있었다.
물론 정상은 아니었지만.
“그러니까 그런 녀석들이 남아 있었단 말이지? 그런데 불여우를 화로의 출력을 높이는 데 쓸 수 있나?”
-불여우의 구슬이면 충분히 가능할 거 같은데요.
“아. 여우구슬이 있구나.”
여우구슬.
불을 다루는 불여우의 기운이 응축된 여우구슬이라면 가능할 것도 같았다.
“하지만 그게 그냥 가서 ‘구슬 내놔.’ 한다고 주는 물건도 아닌데. 가능할까? 내가 지금 상태로 불여우를 상대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
-경호 님. 그래서 그냥 조금 더 지켜보다….
“그럼, 가볼까? 가서 우선 상태나 한번 보지. 뭐.”
뭔가에 꽂히면 자체 노이즈캔슬링을 해버리는 경호를 보며 흰둥이는 자신이 괜한 말을 했구나 자책을 했다.
텁.
“그러니까 어디라고?”
경호가 흰둥이의 목덜미를 잡아 들며 솔딘과 테일러에게 눈인사를 했다.
-그게 다음에 가시….
“어디라고?”
-9시 방향으로 쭉 달리세요. 제가 멈추라고 할 때까지요.
말을 마친 흰둥이가 눈을 질끈 감았다.
조금이라도 멀미를 덜 하기 위한 나름의 방법이었다.
***
어둑어둑한 철원의 백마고지.
이곳은 한국전쟁 때 격심한 포격으로 엉망이 된 그때보다 훨씬 망가져 있는 상태였다.
크르르르르르.
-죽인다. 죽인다. 죽인다.
백마고지의 정상에는 검붉은 불꽃이 넘실거리는 거대한 무언가가 무시무시한 기운을 피워내고 있었다.
멀리서 보기에는 워낙 커서 마치 산불이라도 난 거처럼 보였다.
사람 주먹만 한 핏빛 눈동자에는 살기가 줄기줄기 흘러나와 그 흉포함을 더했다.
물론 그런 살기와 흉포함에도 끄떡하지 않는 존재가 있었다.
우웍! 우어억!
고릴라처럼 생긴 위험종 마수인 맨드릴 무리였다.
백마고지를 거칠게 박차며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10여 마리의 맨드릴 무리를 보며 검붉은 불꽃이 감싸고 있는 거대한 존재, 불여우가 새하얀 송곳니를 드러냈다.
키아아아앙!
불여우의 포효와 함께 허공에서 새파랗게 불꽃이 생기기 시작했다.
여우불이었다.
새파란 불꽃이 넘실거리며 불여우 주변을 맴돌자 맨드릴 무리가 주춤거리며 멈춰섰다.
하지만 불여우는 멈출 생각이 없었다.
꼬리를 흔들자 수십 개의 불꽃이 맨드릴 무리를 향해 빛살처럼 날아갔다.
퍼어엉! 펑! 퍼엉!
마치 폭죽이 터지는 듯한 소리를 내며 여우불이 터져 나갔지만, 그 광경은 밤하늘의 폭죽처럼 아름다운 모습은 아니었다.
형체가 제대로 남아 있는 맨드릴이 드물 정도로 여기저기가 터져나가 노린내를 풍기며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불여우가 갑자기 머리를 좌우로 흔들며 괴로워했다.
-살아야 한다. 살아서 카니스를 지키고 지구를 구해야 한다.
킁킁!
-배고파. 먹어야 해. 살아남아야 해.
덥썩! 와작! 와그작!
불여우가 검게 그을린 맨드릴을 거칠게 물어뜯으며 게걸스럽게 배를 채우기 시작했다.
***
-겨, 경호 님! 조, 조금만 천천히 가주세요!
타닥! 탁!
경호는 한 번씩 발을 디딜 때마다 엄청난 속도로 날듯이 뛰어가는 중이었다.
“날아가면 속이 안 좋다고 해서 힘들게 뛰어가는 중인데. 이것도 싫다. 저것도 싫다. 이러면 어쩌라는 거야.”
경호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속도를 조금 늦췄다.
물론 조금 늦춘 속도도 거의 음속에 가까웠기에 흰둥이의 속은 여전히 울렁거렸다.
“그나저나 확실히 흑색지대는 마기가 짙구나.”
철원이 가까워지며 분류상 ‘흑색지대’라고 불리는 곳으로 들어온 상태였다.
경호도 회색지대는 가본 적 있었지만 흑색지대는 처음이라 두리번거리며 신기해했다.
-저, 저쪽입니다. 경호 님. 으윽.
흰둥이가 떨리는 앞발로 힘겹게 백마고지 방향을 가리켰다.
경호는 흰둥이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달려가다 짙어지는 마기에 속도를 늦추며 은신을 펼쳤다.
미리부터 자신의 존재를 상대에게 알려줄 필요는 없었다.
어둑한 주변을 환하게 밝히는 거대한 화염에 휩싸인 존재가 경호의 눈에 들어왔다.
“호오, 맨드릴 무리네. 저것들은 노린내가 너무 심해서 맛이 없어.”
-겨, 경호 님. 설마 저런 것도 드셨습니까?
거대한 고릴라처럼 생긴 맨드릴이었기에 흰둥이가 놀라서 말까지 더듬거렸다.
“처음에는 뭐가 맛있는지 모르니까 닥치는 대로 먹어봤지. 물론 저건 딱 한입 먹고 바로 뱉었어.”
불여우의 화염 공격에 맨드릴 무리가 전멸하는 것을 본 경호가 혀를 내둘렀다.
“호오. 저 정도면 구미호보다 더 강한 거 같은데. 대단하네. 이거 가볍게 볼 상대는 아닌데?”
저 정도의 존재라면 서둘렀다가 은신이 발각될 수도 있었기에 경호는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런데 확실히 맛이 가긴 간 녀석이네.”
-경호 님. 왜요?
“저거 봐.”
흰둥이가 고개를 돌려 불여우가 있는 곳을 쳐다봤다.
-맙소사! 울피야!
맨드릴을 게걸스럽게 뜯어먹는 불여우를 보고 흰둥이가 소리를 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