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5화
카앙! 카아앙!
귀청을 울리는 섬뜩한 소리에 호돈은 고개를 들었다.
소리가 난 그곳에서 바닥을 철거하며 나왔던 동파이프 더미가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호돈은 멈칫거렸다.
분명 지금 당장 달려가 미호를 구해야 한다고 감정은 뜨겁게 호소하고 있었다.
하지만 한편으로 달려갔다 괜히 아까운 목숨만 날린다며 차가운 이성이 호돈의 다리를 꽉 붙들어 매고 있었다.
“어! 꺄아아아!”
미호가 눈을 질끈 감으며 비명을 질렀다.
미호의 비명에 호돈의 차가운 이성이 날아갔다.
타다닥!
경호가 염력을 사용하여 파이프 더미를 막으려다 달려가는 호돈의 모습에 손을 멈추고는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미호를 향해 달려가던 호돈이 소리쳤다.
“미호 씨! 미호 씨!”
미호가 질끈 감았던 눈을 떴다.
고개를 마구 가로 젓는 미호를 보며 호돈은 환하게 웃으며 그녀를 밀쳐냈다.
“안 돼! 아저씨!”
호돈이 튕겨 나가는 미호를 보며 자신의 죽음을 예감한 순간.
‘으윽. 뭐야?’
갑자기 온몸에 기름을 뿌리고 불이라도 붙인 듯 뜨겁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허헉!”
호돈은 온몸이 타들어 가는 느낌에 정신이 없었다.
“커억!”
꼼짝없이 죽는다는 생각을 하던 호돈은 갑자기 아랫배에서부터 올라오는 상쾌하면서도 시원한 느낌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저 단순한 상쾌함이 아니었다.
‘힘, 처음 느껴보는 엄청난 힘이 느껴진다!’
하지만 쏟아져 내려오는 파이프 더미는 이미 코앞이었다.
“으아아아아아!”
호돈이 소리를 지르며 몸을 웅크렸다.
콰아아아아앙!
엄청난 굉음과 함께 호돈의 모습이 사라지고 그 위로 동파이프만 어지러이 쌓였다.
바닥에 쓰러져 있던 미호가 비틀거리며 일어나 파이프 더미로 달려갔다.
“아저씨! 아저씨! 죽으면 안 돼! 아저씨!”
미호가 엉엉 울음을 터트리며 파이프 더미를 마구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날카로운 파이프에 손이 베이고 피가 스며 나왔지만 미호는 멈추지 않았다.
“호돈아! 호돈아!”
“감독님!”
현장 인부들이 철거 장비를 들고 달려왔다.
“아가씨. 비켜봐요!”
손이 엉망이 된 미호가 뒤로 물러났다.
인부들이 달라붙어 산더미처럼 쌓인 파이프를 빠른 속도로 치우기 시작했다.
“서둘러!”
금세 쌓여있던 파이프 더미가 모두 치워졌다.
“뭐! 뭐야!”
가장 앞서 파이프를 빼내던 인부 하나가 놀란 표정으로 소리를 질렀다.
“잠시만요! 아저씨!”
미호가 인부들을 밀치며 호돈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어! 아저… 오빠?”
그리고 그곳에는 처음 보는 굉장히 잘생긴 남성이 잠이 든 것처럼 쓰러져 있었다.
***
“형님. 여긴가 봅니다.”
성원과 미호의 합동 공격을 당한 경호는 결국 호돈의 병문안을 가게 됐다.
드르륵.
문을 열자 침대에 누워 TV를 보고 있는 호돈이 눈에 들어왔다.
“호돈이형! 괜ㅊ…. 누구세요?”
성원이 호돈을 향해 인사를 하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접니다. 길드장님.”
“네에? 누구….”
호돈의 외모는 부모도 못 알아볼 정도로 완전하게 변해있었다.
‘최고의 성형은 다이어트’라는 말은 정말 호돈을 위해 존재하는 말처럼 보였다.
경호도 호돈을 보며 퉁퉁하면서도 인상이 나쁘지 않다는 생각은 했었는데 지금 보니 연예인 수준의 외모를 살 속 깊은 곳에 숨기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호, 호돈이 형?”
“맞다니까요.”
성원이 찬찬히 뜯어 보니 얼굴에 확실히 호돈의 생김새가 남아 있었다.
“형! 이게 어떻게. 파이프 더미에 깔렸다던데! 얼굴을 심하게 다쳐서 전신성형이라도 한 거…. 아니 그럴 시간도 없었잖아!”
사고 난 지 1시간이 채 지나지 않은 상황이었다.
“멀쩡한데 길드장님에게 괜한 걱정만 끼쳤네요.”
“그게 무슨 소리예요. 그리고 내가 사적으로는 볼 때는 그냥 성원이라고 부르라니까. 형, 또 길드장이라고 그러면서 존댓말 쓰네.”
“미안.”
성원에게 사과를 한 호돈이 경호와 미호를 쳐다봤다.
“저 때문에 두 분도 괜히 찾아오셨네요. 죄송해요.”
호돈은 반창고 투성인 미호의 손을 보며 다시 한번 사과했다.
“미호 씨. 들어보니 저 때문에 손을 다쳤다고요. 죄송해요. 손이 보물인 요리산데.”
“그게 무슨 소리예요. 저를 구하려다 다치신 분이.”
미호가 그렁그렁한 눈빛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죠. 제가 쓸데없는 소리를 해서. 그곳에 계시지 않았으면 애초에 일어나지도 않았을 일인데요.”
경호는 정말 호돈이 답답할 정도로 착한 위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더 마음에 들기도 했다.
성원이 그런 호돈에게 물었다.
“그나저나 형 어떻게 된 거야? 파이프 더미에 깔리고도 꽤 멀쩡하잖아. 아니 멀쩡한데? 거기다 이 외모는 뭐고? 아, 물론 크게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지만….”
C급 각성자 수준에서 절대로 살아남을 수 없는 사고였기에 모두가 기적이라고 입을 모았다.
물론 기적이 아닌 ‘압축’ 특성 덕분이라는 것은 경호만 알고 있었다.
“나도 정확히는 모르겠어. 그게….”
잠시 머리를 긁적이며 뜸을 들인 호돈이 성원을 쳐다봤다.
“성원아. 아무래도 나 새로운 특성을 찾아낸 것 같아.”
“외모가 갑자기 이렇게 변한 거 보면 확실히 뭐가 생긴 거 같긴 한데.”
성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한번 호돈을 훑어봤다.
다시 봐도 어제의 호돈과 너무나 다른 비주얼에 어색하다는 생각을 했다.
“만약 내 생각이 맞다면 어쩌면 살찌는 것도 특성이었나 봐.”
“엥? 뭐?”
“왜 내가 예전에 이야기한 적 있었잖아. 나는 정말 물만 먹어도 살찐다고. 기억나?”
“기억은 나지. 그런데 그거야 내 주변에 살찐 사람들은 다 그런 소리 하니까 형도 그러려니 했지.”
비만 특성자는 물만 먹어도, 아니 숨만 쉬어도 살이 쪘다. 그것도 굉장히 많이.
그래서 경호도 호돈을 처음 봤을 때 생각보다 날씬한 모습에 꽤 놀라기도 했었다.
“그렇긴 하지. 그런데 이거 봐.”
호돈이 환자복을 걷어서 팔뚝을 드러냈다.
두툼했던 팔뚝이 반쪽이 돼 있었다.
“뭔데? 형.”
그때 팔뚝이 꿈틀하더니 부피가 줄어들며 근육이 더욱 선명해졌다.
“어억! 이거 뭐야!”
‘압축’이었다.
“뭐야? 설마 새로 얻은 특성이라는 게 다이어트인거야?”
“비슷한 느낌이긴 하지. 다시 봐봐.”
팔뚝 부위에 마력이 넘실거리더니 피부색이 어둡게 변했다.
성원이 그런 변화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이거 변이 특성이잖아!”
호돈이 고개를 저었다.
“보기는 비슷하지만 내가 느끼는 느낌은 달라. 그러니까 몸을 줄이면 그 안에 힘이 뭉쳐지는 것이 느껴지거든. 그것을 바탕으로 여러 가지 힘을 쓸 수 있어. 이렇게 변이라던가. 아니면….”
호돈이 주변을 살피다 침대 옆 탁상 위에 동전을 잡고는.
꾸지직!
양손으로 동전을 찢었다.
단순히 힘이 세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런 거도 가능해.”
이번에는 경호도 조금 놀랐다.
연소라는 특성이 지방이라는 나무를 태우는 장작불이라면 압축은 땔감을 나무에서 휘발유로 바꿔주는 역할을 했다.
그러나 아무리 압축이 좋은 특성이라고 해도 기본 마력이 떨어지는 호돈에게서 저 정도 능력을 발휘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에박! 이거 몸을 날씬하게 만들면서 피부만 단단하게 만드는 게 아닌가 보네.”
성원이 감탄을 하자 호돈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충 해본 것만 근력 및 스피드, 방어와 치유력도 좋아지는 거 같아. 살을 찌워서 압축을 시켜놓으면 언제든 이 힘을 쓸 수 있어.”
호돈의 말에 성원이 경호를 쳐다봤다.
“경호 형님, 오늘부터 호돈이 형에게 스스로에게 미안할 정도의 슈퍼 고칼로리 음식 좀 만들어 주면 안 될까요?”
“엉?”
“그리고 호돈이형은 그 음식들 먹으면서 일주일 안에 인생 최고 몸무게 한번 찍어봅시다.”
성원의 말을 이해한 경호가 피식 웃었다.
“알았다. 안 그래도 예전부터 내장파괴버거 한번 만들어 보고 싶었는데 잘됐네. 그런데 살은 왜 찌우게 하려고?”
“갑자기 생각난 게 있어서요. 세세한 거는 아버지 쪽 사람들이랑 상의해보고 정해지면 이야기해줄게요. 그쪽 사람들이 이런 건 또 잘하니까요.”
“또 뭘 하려고. 이런 뚱딴지같은 소릴 하는 거야.”
“아직은 생각 정리가 안 돼서 말하기 그렇고. 어쨌든 갈까요?”
성원은 한 가지에 꽂히면 죽어도 해야 하는 그런 타입이었다.
경호가 들고 온 도시락 가방을 침대에 올렸다.
“아. 이거. 이거 주려고 따라온 건데 호돈 동생이 너무 잘생겨져서 깜빡했네. 별거는 아니고 전복죽이랑 반찬 좀 쌌어. 퇴원하면 금액 청구할 거니까 빨리 나아.”
“고마워요. 경호 형님.”
“호돈이형. 그럼. 갈게요.”
경호와 성원이 가려는데 미호가 부끄러운 듯 고개를 살짝 숙이고 말했다.
“저기 작은 사장님. 저는 조금만 더 있다 가면 안 될까요?”
경호가 그런 미호를 보며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하루 연차 처리해줄게요.”
“네? 연차요? 하지만 그….”
사실 파견직원인 미호의 연차는 경호가 처리하고 말고 할 영역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냥 쉬라는 말이에요. 오늘은 엄마와 제가 알아서 할 테니까. 그럼. 내일 식당에서 봐요. 성원아. 가자.”
경호는 호돈과 미호가 제법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했다.
***
사건이 있고 일주일이 지났다.
그동안 철거는 거의 완료됐고 이제 본격적으로 길드 하우스를 만들기 위한 작업이 시작되고 있었다.
-형님. 오늘 오실 거죠?
성원이 아침부터 전화를 걸어서는 성화를 부렸다.
“길드 행사에 내가 왜 가.”
-형님. 그렇게 말씀하시면 저 굉장히 섭합니다.
길드 하우스 기공식 자리에 참석해달라는 말이었다.
“귀찮다고. 나중에 개관식 할 때는 꼭 갈게.”
-오늘 중요한 이벤트도 있다고요! 재미있을 거니까. 꼭 오셔서 보세요. 형님, 제발요.
“알았어. 갈게. 10시라고 했지? 흰둥아. 오랜만에 산책이나 하고 오자. 그나저나 호돈이는 길드에 다시 들어간 거야?”
-그것도 오늘 오시면 알 겁니다.
“알았다.”
전화를 마친 경호가 흰둥이를 쳐다보며 물었다.
-흰둥! 퀘스트 아직이지?
-네. 경호 님.
-오늘 뭔가 극적으로 보여줄 게 있나 보네. 기자들도 꽤 올 거니까 말이야.
경호가 흰둥이에게 목줄을 채우며 음식 준비가 한창인 지숙에게 말했다.
“엄마, 나 그럼 흰둥이 데리고 기공식 잠깐 다녀올게요.”
“그래. 다녀와라.”
기공식이 열리는 곳은 행운식당이 있는 골목에서 멀지 않았다.
‘종묘’라고 불렸던, 지금은 [B-2-다] 구역이라고 부르는 곳이었다.
“역시 신화. 대단하구만. 대단해.”
기자들이 구름떼처럼 몰려있었다.
신화의 이름값이 대단한 것도 있었지만 ‘칼날표범 한방 사건’으로 기자회견을 한 이후 신화길드의 첫 번째 공식 일정이었기 때문인 것도 크게 작용했다.
‘신화길드 하우스 건립공사 기공식’이라 적힌 현수막이 걸린 단상 위에 성원이 올라와 마이크를 잡았다.
“저희 신화길드 하우스 건립공사 기공식 자리를 빛내주시기 위해 찾아주신 신화 그룹의 임직원 여러분. 그리고 가족과 같은 길드원분들. 또 취재를 위해 오신 기자분들. 모두 감사드립니다. 이곳은 과거 조선 시대의 역대 왕과 왕비의 신위를 모셨던 사당이 있던 곳입니다. 한마디로 최고의 명당이라는 말입니다. 대격변으로 우리의 문화유산인 이곳이 파괴….”
축사를 읊어나가던 성원의 말이 어느 순간 핀트를 벗어나기 표류하기 시작했다.
마치 학생들을 모아놓고 일장연설을 하는 교장 선생님 같은 느낌이었다.
“내가 이럴 줄 알았다니까. 좋은 말도 적당히 해야 한다고 그렇게 이야기 드렸는데.”
그런 분위기를 눈치챈 정수가 성원을 향해 손을 저어 신호를 보냈다.
성원이 정수의 신호를 보고는 ‘아차’하는 표정을 지었다.
“아, 그래서 말이죠. 어, 본론부터 말하면 여기 보이는 현수막에 사실은 빗금을 하나 긋고 이렇게 추가하려고 했었습니다. 바로 ‘신화학원’이라고 말이죠.”
갑자기 말투까지 바뀌며 내용이 급반전했다.
“아이고, 형님. 너무 갔어요. 그 내용은 나중에! 나중에! 아니 왜 중간이 없는 건데!”
정수가 얼굴 사이에 손을 들어 ‘중간’이라는 신호를 보내자 다행히 성원이 알아듣고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어쨌든 저희 길드 하우스를 이전하며 더욱 성장해 나갈 것을 여기서 밝히고자 합니다. 인재 선발에 있어 마력 등급보다는 특성을 얼마나 더 잘 활용하는지를 더욱 볼 것이며 앞으로도 A급 던전 공략을 꾸준히 하며 질적인 향상도 도모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조금 두서없이 왔다 갔다 하긴 했지만 준비한 내용을 모두 말할 수 있었다.
이제부터 성원이 준비한 진짜 기자회견이 시작될 순간이었다.
“그럼, 혹시 질의 있으신 분 있으신가요?”
성원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기자들이 손을 들었다.
“저기 두 번째 줄에 계신 분. 네. 말씀하세요.”
“네. 저는 신화일보의 박대길 기자입니다. 우선 길드 하우스 이전을 축하드립니다.”
“아, 신화일보 분이셨군요. 질문하세요.”
“중간에 잠시 신화학원에 대해서 언급하셨는데 그것에 대해서 질문해도 되겠습니까?”
성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사실 오늘 꺼낼 내용은 아니었는데 그렇다고 숨길 이야기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신화학원이라는 것이 혹시 각성자에게 교육을 하는 기관입니까? 그것을 신화길드에서 만들려고 하는 것입니까?”
사설 헌터 교육기관.
성원이 이 자리에서 진정으로 말하고 싶은 내용이었다.
“사실 아직 구체화 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지만 저는 특성 개발을 통해 더 많은 각성자들이 마수와 싸울 힘을 기르는 것이 이 세상을 위한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신화학원이라는 각성자에게 교육을 하는 기관을 만들 법적 절차 같은 것은 문제가 없습니까?”
성원이 기자의 질문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며 입술을 깨물었다.
고민하는 듯한 표정을 애써 연기하며 성원은 준비했던 대답을 말했다.
“그래서 오늘 이 자리를 빌려 기자님들께 부탁드리고자 합니다. 제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은 부디 많은 이들이 이것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도록 기사를 써주시기 바랍니다.”
성원이 마이크에서 입을 떼고는 기자들을 향해 정중하게 허리를 굽혀 인사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