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2화
-형님. 저 정말로 교육기관을 만들어 보려고요.
“그래. 응원한다. 안 그래도 TV에 기자회견 하는 거 나오네. 저거 벌써 10번은 본 거 같은데.”
-나름 특종이니까요.
각성자 교육기관을 만들든 말든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래서요. 형님 식당이 있는 골목 있잖아요.
상관없는 것에서 조금 더 근접해 온다는 느낌을 받은 나는 살짝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어, 골목은 왜?”
-특별거주지역은 사실상 개발하기가 어렵잖아요.
“그, 그래서.”
-그 골목 일대를 정부와 이야기해서 칼날표범 사체를 건네는 조건으로 저희 신화길드에서 몽땅 구매했습니다.
“뭐?”
-우선 교육기관은 정부 허가 받아야 하는 것들이 많아 바로 공사는 착수하기 힘들어서요.
“어. 다행이…. 아니, 그래서.”
-우선 길드 사무실부터 옮기려고요.
“사람이 많아지는 건 딱 질색인데.”
슬슬 짜증이 올라오며 입에서 나도 모르게 혼잣말이 흘러나왔다.
-네? 아, 아니에요. 형님, 식당이 있는 골목은 그대로 보존할 생각입니다.
별로 위안이 되지 않는 말이었다.
-그 주변을 몽땅 샀으니까요. 어쨌든 내일부터 신화건설에서 골목 주변을 정리하고 길드 사무실 공사 들어갈 건데. 함바집 운영 한번 안 해보시렵니까? 점심만 해주시면 되는데요. 우선 철거 공사는 규모가 크지 않아서 30인분 정도만 해주시면 됩니다.
함바집.
건설현장에 지은 인부들의 식사를 해결해주기 위한 식당을 일컫는 말이었다.
“함바집을 하라고?”
-아니 그냥 점심에 30인분 정도만 해주세요. 저희 쪽에서 주방 보조 1명 파견해드리겠습니다. 비용도 저희가 지원해드릴게요.
점심만 30인분, 거기에 주방 보조 파견까지. 절대 나쁜 조건은 아니었다. 하지만.
“아, 귀찮은데! 난 그냥 지금이 딱 좋다고.”
하고 싶은 요리나 하면서 어쩌다 오는 손님이나 좀 받고 저녁에는 다현이랑 술이나 한잔하는 딱 그 정도의 삶.
-그럼. 다음에 또 뵐게요! 형님, 사랑해요!
하여간 넉살은 좋은 녀석이었다.
***
‘칼날표범 한방 사건’이라 부르는 그 일로 세상은 발칵 뒤집혔다.
C급 헌터가 칼날표범을 잡은 것도 엄청난 일이었지만 갑작스럽게 새로운 특성을 깨달은 것은 더욱 놀라운 일이었다.
거기다 덤으로 수호천사까지.
어쨌든 이 사건을 계기로 C급 각성자도 특성을 제대로 깨닫기만 한다면 최상급 각성자 수준으로 강해질 수 있다는 희망의 메시지가 세상에 퍼졌다.
이제 전 세계 헌터기관들은 각성자의 숨겨진 특성을 찾는 것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성원 역시 마찬가지였다.
“자네에게 엊그제 아들놈이 찾아와 재미있는 이야기를 했다고 내가 말했던가?”
“음. 벌써 세 번째 하고 계십니다.”
“하하하. 그랬나? 어쨌든 헌터도 특성을 제대로 찾아 교육받는다면 더욱 강해질 수 있다면서 교육기관을 만들고 싶다고 하더군. 정말 좋은 생각 같은데. 자네는 어떤가?”
건용이 푸근한 아빠 미소를 지으며 옆에 서 있는 차원수 경호팀장에게 물었다.
“그것도 세 번째 대답하고 있지만 다시 말씀드리자면 정말 괜찮은 생각 같습니다. 이번 일을 계기로 도련님께서 정말 많이 성장하신 것 같습니다.”
“그래, 그 말도 맞지. 하지만 나는 다른 원인도 있다고 생각하네.”
원수는 단순하게 경호만 담당하는 그런 인물이 아니었다.
대격변 이후 A급 각성자로 각성하며 경호팀장까지 겸임하고 있을 뿐 사실 이건용 회장이 신화 그룹을 시작할 때부터 지금까지 30여 년을 함께한 최측근이자 가족 같은 인물이었다.
“다른 원인이요?”
“그래. 요즘 주변에 새로운 사람들이 생기면서 더욱 발전하고 있다는 그런 생각이 들어.”
“그때 회장님께서 영입하려고 했던 그 젊은이 때문이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그렇게까지 대단해 보이지는 않았는데. 좋게 보신 이유가 따로 있으십니까?”
“모르겠네. 그냥 감이기도 하고. 사실 내 아들이 의형제를 맺었다고 한 인물이라 내가 따로 한번 알아봤네.”
건용이 소탈하고 과감한 성격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그냥 감정대로 움직이는 그런 단순한 인물은 절대로 아니었다.
“재미있게도 10년간 실종 상태였더군. S급 각성자인 다현 양과 친하기도 하고 하여간 재미있는 구석이 있는 친구더군. 궁금한 게 많은 묘한 캐릭터란 말이지.”
“그래서 그 구역에 건설을 허락하신 겁니까?”
“뭐, 사업적으로도 나쁘지 않아서 허락한 거네. 어느 정도 그런 마음도 들어가 있긴 하지만 말이야.”
원수가 놀란 표정으로 건용에게 물었다.
“이거 괜히 질투심이 생기는데요.”
“솔직히 말할까? 나는 자네보다 더 크게 될 인물이라는 느낌을 받았네.”
“회장님. 중년 남성이 삐지면 오래 간다는 거 모르시고 하시는 말씀이십니까?”
원수의 삐죽거리는 말에 건용이 크게 소리 내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그냥 그런 인상을 받았다는 거지. 아무렴 식당사장으로 있는 청년이 자네보다 대단할까. 너무 질투하진 말게. 자네와는 나아갈 결이 다른 사람이니.”
“어쨌든 다행입니다. 성원 도련님을 많이 걱정하지 않으셨습니까.”
“이제 조금 자리를 잡아가는 느낌이 드네. 매번 적자만 내는 길드나 운영하는 녀석이었으니. 하하하. 정말 사람 일은 한 치 앞도 모르는 거라니까. 차 실장은 성원의 내일이 보이나? 그놈이 또 무슨 사고를 치고 또 얼마나 성장할지?”
물론 그 사고를 막기 위해 수호천사가 꽤 고생했다는 걸 건용과 원수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
성원의 수호천사인 경호는 한숨을 푹푹 쉬고 있었고 그의 앞에는 20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귀엽고 생기 넘치게 생긴 여성이 인사를 하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신화F&B에서 파견 나온 정미호라고 합니다. 올해 경상대 호텔조리학과를 졸업했습니다. 한식, 양식, 일식, 제빵 등등 다 잘하니깐 뭐든 시켜주십시오!”
조막만한 얼굴에 밝은 표정이 인상적인 그녀가 아주 씩씩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 그, 그래요.”
10년간 용사 생활을 하며 성격이 아주 많이 바뀌었지만, 기본적으로 경호는 낯가림이 심하고 여전히 소심한 면이 있었다.
“저번에 말한 파견 온다는 아가씨 왔나 봐?”
지숙이 다현과 같이 장을 보고 들어오며 아는 척을 했다.
“경호는 왜 이렇게 얼어있어? 아, 여기 아가씨가 너무 이뻐서 그런가 보다.”
다현은 아닌 척하면서 미호를 훑어보며 묘한 뉘앙스를 풍겼다.
“무슨 소리야. 그냥 처음이라 낯설어서 그렇지. 식당엔 항상 엄마랑 둘이었으니까.”
“옛날에 나도 꽤 도왔었는데. 이거 섭섭하네. 엄마, 안 그래요?”
“그래, 너 실종되기 전에 다현이가 얼마나 많이 도와줬는데. 하여튼 반가워요. 파견 나와 있는 동안 잘 지내봐요.”
“정미호라고 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허리까지 꾸벅 접어가며 아까보다도 더 씩씩하게 인사를 하는 미호였다.
“아이고. 깜짝이야. 조막만한 아가씨가 목소리가 아주 씩씩하네.”
미호가 이렇게까지 기합이 팍 들어간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사실 이런 골목 구석에 있는 식당에 파견 가라고 할 때는 사실 짜증이 나기도 했다.
자신이 누군가? 경상대 호텔조리학과 수석 졸업을 한 수재 중의 수재였다.
그런데 파견 준비 중에 팀장에게 들은 이야기는 그녀를 들뜨게 했다.
-미호 씨. 이번 파견은 회장님이 직접 신경 쓰시는 일이라니까 가서 잘 해요. 그리고 그곳에 이성원 길드장님도 자주 오신다고 하니까 잘 보이도록 하고. 무슨 말인지 알지?
미호는 자신이 어떻게 해야 이쁨을 받을지 아는 똑똑한 여성이었다.
“엄마, 저 저녁 먹으러 와도 괜찮죠?”
“당연하지. 그걸 말이라고. 왜 점심도 먹고 가지.”
“점심 약속도 있어요. 그럼, 엄마 너무 무리하지 말고 쉬엄쉬엄하세요.”
다현이 가게를 나가고 지숙이 장을 본 것들을 꺼냈다.
그것을 보던 미호가 밝은 목소리로 지숙에게 물었다.
“사장님! 오늘 메인은 돈가슨가요?”
“미호 씨가 눈썰미가 좋네. 함바집 메뉴는 뭐니 뭐니 해도 든든하게 차리는 게 좋으니 돈가스를 메인으로 두고 나물 반찬에 느끼할 수도 있으니 칼칼한 김치콩나물국 끓이려고.”
짝짝짝.
미호가 손뼉을 치며 환하게 웃었다.
“역시 실전 경험을 이길 수는 없다니까요. 저보다 메뉴 밸런스를 잡는 게 더 좋으세요. 돈가스에 스프보다는 확실히 칼칼한 김치콩나물국이 좋을 거 같아요.”
“그런가?”
“그럼요. 사장님. 그럼, 제가 돈가스랑 김치콩나물국을 하고 손맛이 필요한 나물은 사장님이 해주실래요?”
“그럴까?”
“어, 내가 돈가스는 할 수 있….”
뒤늦게 경호가 슬쩍 대화에 끼어들려고 했지만 지숙과 미호는 이미 둘만의 세계에 깊숙하게 들어가 있는 상태였다.
“사장님. 어서 들어가요.”
“그래. 빨리 준비하자.”
쿵짝이 맞아 깔깔거리며 주방에 들어가는 지숙과 미호를 보며 경호는 왠지 모를 소외감을 느꼈다.
괜히 구석에서 졸고 있는 흰둥이를 손가락을 쿡쿡 찌르며 괴롭혔다.
끼잉!
-경호 님. 왜 그러세요? 지금 점심 준비할 때 아닌가요?
“그래. 엄마가 즐거우면 된 거지.”
흰둥이의 물음에 뚱딴지같은 대답을 하는 경호였다.
-경호 님. 그게 무슨 말입니까?
“그나저나 어젯밤에 나가서는 오늘 새벽에 들어오는 거 같던데?”
역시나 경호는 흰둥이의 물음에 또 다른 질문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아셨군요. 네. 테일러에게 갔다 왔습니다. 다행히 사도에 대해서 흔쾌히 수락했습니다. 이제 테일러가 강해지고 카르마를 쌓으면 저도 영향을 받습니다. 물론 반대로 테일러도 영향을 받고요.
“테일러 정도면 마력만 좀 키우면 쓸만하겠던데 잘 해봐.”
-안 그래도 어제 갈 때 달빛초 좀 가지고 갔습니다. 경호 님에게 다시 한번 감사 인사 전해달라고 하더…. 앗. 이건.
주방에서 고소한 기름 냄새가 풍겨 나오기 시작했다.
돈가스가 튀겨지고 있는 냄새였다.
-엄청 맛있는 냄샌데요?
“명문대 호텔조리학과 출신이니 돈가스 정도는 당연히 잘 만들겠지.”
입을 툭 내밀고 투덜거리는 모습에 눈치가 바닥에 깔린 흰둥이도 충분히 경호가 심술이 난 상태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경호 님은 파견 나온 직원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네요.
“아니 그건 아닌데. 앞으로 홀만 담당하게 생겼으니 좀 그렇긴 하네.”
경호도 쓸데없는 투정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고 주방 자체도 크지 않아 3명이 요리하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것 역시 잘 알고 있었다.
“형님!”
경호가 흰둥이를 안고 괜히 투덜거리고 있는 그때 한껏 상기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성원이 왔냐?”
성원이 정수와 다른 인부들을 이끌고 식당을 찾았다.
“형님. 저와 정수까지 32인분 주문해도 되겠습니까?”
보통은 현장인부가 갑, 함바집이 을이라는 포지션이지만, 성원이라는 존재가 충분히 설명을 했기에 인부들도 다들 경호와 지숙의 눈치는 살피는 형편이었다.
“다들 앉으세요.”
원래는 테이블이 6개뿐이라 30명이 동시에 식사할 수 없는 구조였다.
그런데 지난주에 갑자기 성원과 신화건설의 인부 몇이 들이닥치더니 며칠 만에 비어있던 옆 가게를 들어내고는 식당을 순식간에 확장 시켜버렸다.
쪽방이랑 주방을 비롯한 공간들이 전체적으로 넓어졌고 홀은 테이블이 15개나 깔리면서 2배 이상 커졌다.
경호는 고마우면서도 귀찮은 묘한 이중적 감정에 휩싸였다.
“그래, 엄마가 좋아하니 넘어가자.”
물론 성원에게는 다음에도 이렇게 말없이 이러면은 의형제고 자시고 끝이라고 엄포를 놓았다.
“엄마! 손님들 왔어요!”
미호가 확실히 도움이 많이 되는 모양이었다.
금세 가득 담긴 고봉밥과 보기에도 바삭해 보이는 커다란 왕돈가스와 고소한 향이 풍기는 나물무침. 그리고 잘 익은 총각김치와 김치콩나물국이 담긴 쟁반이 트레이에 담겨 나오기 시작했다.
경호가 성원을 비롯한 손님들에게 음식을 주고도 쟁반 하나 남았다.
“엄마, 여기 하나 남았는데?”
“같이 먹어. 엄마랑 여기 미호는 조금 있다 정리하고 먹으면 되니까.”
옆에서 지숙의 말을 들은 성원도 거들었다.
“네. 형님도 여기 와서 같이 먹어요. 안 그래도 현장감독으로 있는 호돈이형 소개해주려고 했어요.”
“형? 누군데?”
경호가 쟁반을 들고 성원과 정수, 그리고 조금 뚱뚱한 체격에 인상이 좋아 보이는 남성이 식사를 하고 있는 자리로 가서 앉았다.
“여기는 현장감독을 맡은 유호돈 형이에요. 저보다 두 살 형님이니 형님한테는 한 살 동생이네요.”
“반갑습니다. 형님. 앞으로 맛있는 음식 부탁드릴게요.”
호돈이 고개를 꾸벅 숙이며 인사를 하자 경호도 같이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했다.
“네.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말씀 편하게 하세요. 형님.”
낯가림이 있는 경호는 요즘 들어 자신에게 너무 많은 동생이 생긴다는 생각을 했지만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게. 호돈 동생.”
“네. 형님.”
“그런데 여기 인부들보다 훨씬 젊은데 현장감독을 맡았네?”
“아, 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호돈이 어색하게 웃으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어떻게 현장감독이랑 형 동생하게 된 거야? 원래 알던 사인가?”
“아. 여기 호돈이 형님이 원래 저희 길드 출신이거든요. 그런데 공격 특성이 없어서 길드에서 반년쯤 있다가 신화건설로 넘어갔어요. 힘이 좋아서 다른 사람들 몇 배나 일을 하거든요.”
한마디로 낙하산 비스무리한 거였다.
“그래?”
경호는 안 그래도 호돈에게 느껴지는 미미한 마력이 내심 궁금하던 차였다.
-흰둥아. 여기 상태창 좀 보여줘.
흰둥이가 입술을 삐죽거렸다.
-경호 님. 저를 무슨 각성자나 아티팩트 감별기로 생각하고 계신 건 아니죠?
-에이. 우리 식당 마스코트인 흰둥이를 내가 얼마나 각별하게 생각하는데. 알지?
<상태창>
이름:유호돈
나이:34
클래스:비만전사[희귀]
레벨:24
[근력-57][민첩-37][체력-52]
[마력-312]
특성:[비만LV2][연소LV2][압축LV1]
카르마:1654(선)
“오, 희귀 등급이었네.”
상태창을 본 경호가 무의식중에 생각을 입 밖으로 뱉어냈다.
“네? 희귀 등급이라뇨?”
“아니야. 아무것도.”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지만 경호의 표정은 재미있는 장난감을 본 아이처럼 싱글거리고 있었다.
-엇! 경호 님. 퀘스트 떴어요!
흰둥이가 공유해준 퀘스트 메시지가 경호의 눈앞에 떠올랐다.
[소원성취 퀘스트 (공유) : 다시 신화길드에서 헌터로 일하고 싶다! / 유호돈]
-특성을 깨달아 신화길드에 다시 들어가게 만들어라.
-신화길드에 헌터로 가입 시 카르마 500만이 지급됩니다.
경호는 호돈의 흥미로운 특성에 걸맞은 퀘스트가 뜨자 미간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뭐. 어쩌라고. 함바집 운영만으로도 지금 충분히 귀찮은 상황이니까. 그런 건 알아서 해라. 알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