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환용사의 골목식당-20화 (20/335)

#020화

“흐음. 오늘은 안 올 모양이네.”

시계는 어느새 9시를 넘어 10시를 향해가고 있었다.

매일 같이 출근 도장을 찍던 다현은 오지 않을 모양새였다.

“육쏘는 언제나 옳지. 옳아.”

육회를 접시에 담아 소주를 한잔하려고 일어나는 그때.

식당 밖에 차량이 멈추는 소리가 들렸다.

“다현은 아닌데? 아, 저번에 왔던 그 사람들이네.”

문밖에서 느껴지는 마력에 경호가 고개를 갸웃하다 아는 체를 했다.

역시나 경호의 예상대로 문이 열리고 성원과 정수가 들어왔다.

“사장님. 혹시 장사합니까?”

백반집이면 장사를 하지 않을 수도 있는 늦은 시간이었기에 성원이 경호를 보며 물었다.

“물론입니다. 어서 오십시오.”

“다행이네요. 저번에 다녀가고 나서 계속 생각나더라고요.”

흰둥이가 목덜미가 가려운지 뒷발로 탁탁 긁으며 말했다.

-경호 님. 저번에 그 사람들입니다. 왜 그때 재벌이라고 했던 그 사람들요.

500만 원을 밥값으로 받고 나서 경호는 그들의 정체가 내심 궁금했다.

그들이 입은 옷과 타고 온 차량. 그리고 수표를 꺼낼 때 슬쩍 보인 지갑 안 사정까지.

그 어느 것 하나 같이 예사롭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상태창을 통해 이름, 나이, 그리고 각성 수준까지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알아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아니 생각보다 거물급 인물이라 허무할 만큼 쉽게 알아낼 수 있었다.

신화그룹의 둘째 아들이자 신화길드의 길드장인 C급 헌터 이성원과 그의 비서실장인 B급 헌터 박정수.

“그러셨습니까? 정말로 다시 찾아주실 줄 몰랐습니다. 이성원 길드장님.”

경호가 철저하게 자본주의의 미소를 띠며 인사를 건넸다.

성원과 정수는 조금 놀란 표정으로 그런 경호를 쳐다봤다.

“그때는 분명 못 알아보신 것 같았는데. 알고 계셨습니까?”

“아니, 몰랐습니다. 어쩌다 우연히 알게 됐습니다.”

레인보우 식스 같은 엄청난 인지도는 아니지만 나름 재벌 2세이자 대형 길드 마스터로 어느 정도 유명세를 떨치는 성원이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백반 2인분 차려드릴까요?”

정수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혹시 가능하다면 간단한 안주와 소주 좀 부탁해도 되겠습니까?”

“실은 손님이 없어 육회에 소주 한잔하려고 했습니다. 그걸로 드릴까요?”

“아, 죄송합니다. 저희가 방해가 됐군요.”

“아이고. 식당에 손님이 온 게 방해라뇨. 찾아 주셔서 감사하죠. 사실 서글프게 혼술하는 것보다 손님 받는 게 훨씬 즐거운 일입니다.”

“그렇습니까? 그런데 안줏거리로 ‘육회’를 내어주신다고요? 이거 이번에는 얼마를 드리고 가야 하나 고민될 거 같네요.”

김치찌개에 달걀말이로 500만 원을 주고 간 성원이 웃으며 말하자 경호는 농담처럼 들리지 않았다.

“아닙니다. 오늘은 그냥 돈을 받지 않겠습니다. 그냥 편히 드시다 가시죠. 다시 오시면 그냥 한 끼 대접해드리고 싶었습니다. 아, 그리고 국물은 어묵탕 어떠십니까?”

그러자 성원이 격하게 손사래를 쳤다.

“지금 육회랑 어묵탕을 이야기하시면서 장사하는 분이 돈을 안 받는다고 하면 부담스러워서 못 먹습니다. 그러니 그런 말씀 마세요.”

대격변 이후, 육회도 어묵도 고급 한정식집이나 가야 겨우 맛볼 수 있는 그런 요리였다.

성원의 목소리가 단호하고 표정까지 진지해서 경호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앉아서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경호는 주방으로 들어와 냄비에 물을 채워 불에 올렸다.

보통 어묵탕이라고 하면 멸치와 다시마로 육수부터 내야 맛이 나지만 시 서펜트와 크라켄을 으깨서 만든 어묵은 그냥 맹물에 끓여도 깊고 진한 맛이 우러나기 때문에 그럴 필요가 없었다.

물이 끓자 어묵을 몇 장 꺼내 듬성듬성 썰어 냄비에 넣었다.

그리고 배를 채 썰어 접시에 깔고는 양념에 재어둔 강철뿔양의 고기를 꺼내서 푸짐하게 얹었다.

마지막으로 노른자만 분리해서 육회 위에 올리고 어묵이 들어간 냄비에는 얇게 썬 붉은 고추 몇 개와 싱싱한 쑥갓을 손질해 조금 썰어 넣었다.

물론 음식에서 맛이 가장 중요하다고 하지만 선홍빛 육회와 샛노란 노른자, 붉은 고추와 푸른 쑥갓의 선명한 색의 대비가 너무 예뻤다.

술장고에서 소주를 꺼내 육회와 어묵탕을 담은 쟁반에 올려 상 위에 올렸다.

“우와.”

성원은 육회와 어묵탕의 어마어마한 비주얼을 보며 감탄을 터뜨렸고 정수 또한 그 모습에 입을 쩍하고 벌렸다.

대충 보기에도 이런 골목식당에서 나올 비주얼은 절대 아니었기에 둘은 놀란 얼굴로 멍하게 육회와 어묵탕을 번갈아 쳐다보기만 했다.

“노른자를 터뜨려서 고기와 채 썬 배와 잘 섞어 드시면 됩니다. 어묵탕은 앞에 있는 초간장에 찍어 드시고요. 그럼, 맛있게 드세요.”

경호가 먹는 법을 알려주고 주방 입구 쪽으로 가서 앉았다.

앙앙!

그때 흰둥이가 애절한 눈빛으로 경호의 무릎을 살살 긁었다.

-경호 님. 저기 재벌 2세한테 퀘스트가 떴습니다! 공유할 테니 도와주십시오.

-나 피곤하다. 술도 한잔하려다가 못해서 더! 더! 더! 피곤해!

-제발 한번만 도와주시면 안 됩니까? 어려운 퀘스트도 아닙니다.

-안 어려우면 니가 하세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경호의 눈앞으로 퀘스트 메시지가 떠올랐다.

[소원성취 퀘스트 (공유) : 머리 아파 죽겠네! / 이성원]

-A급 던전을 어떻게 공략하지?!

-조언을 통해 해결 방법을 찾으면 카르마 500만이 지급됩니다.

퀘스트 정보를 모두 본 경호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흰둥아. 이건 내가 도와줘서 해결될 문제가 아닌데?

-저는 시도조차 할 수 없는 퀘스트니까 그렇죠. 제발 한 번만 도와주십시오.

경호의 말도, 흰둥이의 말도 맞는 말이었다.

A급 던전이 뭔지도 모르는, 던전 공략에 대해 완전 문외한인 경호가 길드장인 성원에게 조언을 해서 해결 방법을 찾게 도와준다는 거 자체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물론 흰둥이가 성원에게 말을 걸어 조언을 해주는 것은 그것보다 더 말도 안 되는 일이었기에 고민할 가치도 없었다.

-제발 부탁드립니다.

흰둥이가 애원하며 경호의 발목에 매달렸다.

-경호 님. 제가 밧줄에 매달린 채 크라켄 이빨 개수나 세던 것을 기억하시지요? 결계 없이 시 서펜트의 혓바닥에 감겨있던 것은 또 어떻고요!

-그래서 화내는 거야? 지금 나한테? 퀘스트를 도와줄 유일한 사람인데?

그때 경호를 부르는 성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사장님! 혹시 괜찮으시면 같이 한잔하시겠습니까?”

“아. 네? 아니 그….”

끼잉! 끼잉!

-앞으로 경호 님의 갯지렁이로 살아가겠습니다! 제발! 제발!

흰둥이가 바지춤을 부여잡고 애잔한 눈빛으로 경호를 올려다봤다.

“…래도 되겠습니까?”

“네. 어차피 한잔하실 생각이셨는데 저희랑 같이 한잔하시죠?”

경호가 성원을 바라보며 역시나 자본주의의 미소를 담아서 환하게 웃었다.

-경호 님. 감사합니다. 500만 카르마를 그냥 날릴 순 없잖습니까. 그냥 시도만 해주세요. 아무 말이나 하다 보면 얻어걸릴지 누가 압니까.

-그래. 알았어. 갯지렁이야.

경호가 바지춤에 달라붙은 흰둥이를 털어내고 소주 한 병과 잔을 챙겨 식탁에 가서 앉았다.

경호가 자리에 앉자 성원이 엄지를 치켜세웠다.

“사장님! 이거 고소하고 진한 게 투뿔 한우보다 더 맛있는데요? 몇 점 집어먹고 정신을 차려보니 소주 1병이 증발했네요.”

그의 말처럼 투뿔 한우도 감히 강철뿔양 앞에서는 비교 대상이 되기 어려웠다.

“입맛에 맞으시니 다행입니다.”

성원이 소주를 건네받아 자리에 앉은 경호에게 술을 따랐다.

“이것도 큰 인연이니 정식으로 소개를 드리겠습니다. 이성원이라고 합니다. 올해로 32살 먹었습니다.”

그리고는 성원이 정수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저는 비서실장인 박정수입니다. 나이는 30입니다.”

그러고는 둘은 기대하는 눈빛으로 경호를 쳐다봤다.

“저는 최경홉니다. 나이는 35입니다.”

“에엑?”

“네에?”

한참 동생이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오히려 경호의 나이가 한참이나 더 많았다.

경호가 원래 동안이었다기보단 용사가 되면서 노화가 늦춰지며 생긴 결과였다.

다현도 괜히 자기가 늙어 보인다며 경호를 볼 때마다 짜증을 부리는 것 중 하나였다.

“생각보다 훨씬 나이가 많으시네요. 사장님.”

“길드장님도 젊으십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새로운 인연을 위하여 우리 짠 한번 할까요?”

성원의 말에 경호도 웃으며 잔을 들어 잔을 부딪쳤다.

짜앙.

경호는 입에 털어 넣은 소주가 달게 느껴졌다.

10년 만에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은 생각보다 기분 좋은 일이었다.

-경호 님. 혹시 퀘스트를 잊으신 건 아니시죠?

물론 그냥 먹고 즐기기 위한 자리는 아니었다.

“길드장님. 그런데 혹시 걱정거리라도 있으신가요? 저번에도 안색이 조금 어두워 보이셨는데. 오늘은 그때보다 더 수심이 가득한 얼굴이네요.”

“이게 참, 사실 맛있는 음식을 먹어서 이제 기분이 좋아졌는데도 그런 게 티가 좀 나는가 보네요. 사실 길드에 좀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러니….”

정수가 뜨악한 표정으로

“길드장님!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아니 뭐. 어차피 공표될 문제 아닌가? 작은 일도 아니고. 여기 계신 사장님이 며칠 먼저 알게 된다고 큰일 날 일은 아니잖아. 안 그래?”

사실 신화길드가 리스폰 던전을 계약한 일은 사회적으로 꽤 큰 뉴스였기에 소멸 사실도 숨길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단지 헌터본부와 완전히 마무리 되지 않은 시점이라 언론공개를 하면 안 되는 것이긴 했다.

하지만 이런 골목식당 사장에게까지 숨길 이야기는 아니었다.

“아,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겁니다. 사장님. 사실 언론사 기자신데 정체를 숨기고 식당을 운영하고 계신 건 아니시지요?”

“당연히 아닙니다. 물론 정체를 숨기고 있긴 합니다.”

경호는 ‘귀환한 용사인데 정체를 숨기고 식당을 운영하는 중입니다.’라는 말은 굳이 입 밖으로 내진 않았다.

“기자만 아니시면 상관없습니다.”

“그런데 도대체 무슨 일인데 그러십니까? 기자라뇨?”

사실 관심도 없는 경호였지만 구석에서 애절한 눈빛으로 주시하고 있는 흰둥이의 모습에 최대한 궁금한 척하며 물었다.

“아니 사실 얼마 전에….”

경호에게 성원은 길드에서 매입한 대학로 구역의 리스폰 던전이 갑자기 소멸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관심이 없던 경호가 리스폰 던전이 소멸했다는 말에 이마를 긁적이며 물었다.

“리스폰 던전이라는 것이 혹시 시간이 지나면 마수가 생성되는, 마법진이 새겨져 있는 던전을 말하는 것인가요?”

“네. 맞습니다. 마법진이 새겨진 마수 소환 던전을 리스폰 던전이라고 부릅니다.”

그제야 경호는 성원의 고민이 자신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는 걸 알아챘다.

바로 자신이 마법진을 부시고 칼날타조를 죽였던 소환 던전이 바로 이들이 말하는 리스폰 던전이기 때문이었다.

“아, 그렇군요. 그걸 매입했다고 했는데 얼마에 사셨길래?”

“꽤 큰돈을 주고 샀지요.”

경호는 큰돈이라는 말에 공짜로 길드 회식을 거하게 제공할까 진지하게 고민하던 순간.

“5000억. 그것도 아버지께 대부분 차용한 돈이지요.”

성원이 직접적인 금액을 언급했다.

케엑. 켁.

경호가 5000억이라는 말에 사레들려 기침을 했다.

“크음. 죄송합니다. 갑자기 사레가 걸려서. 5000억이라 꽤 큰돈이네요.”

최대한 덤덤하게 말했지만 경호는 사실 엄청나게 놀란 상태였다.

5000억.

아무리 별일을 다 겪은 경호지만 저런 감도 오지 않는 천문학적인 금액엔 낯설 수밖에 없었다.

“사실 5000억이 중요하진 않습니다. 적은 돈은 아니지만 그룹 차원에서 투자한 것이고 지금 충분한 보상을 받았으니까요.”

A급 던전에 대한 공략 권한을 주는 것은 사실 리스폰 던전보다 더 좋은 조건이었다.

“그런데 저희 길드에는 A급 헌터가 한 명도 없다는 것이 문제지요. 최소 5명의 A급 헌터는 있어야 A급 던전을 안전하게 공략할 수 있는데 말입니다.”

경호는 A급 헌터가 얼마나 강한지는 몰랐기에 A급 헌터 5명이 있어야 공략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눈앞에 있는 B급 헌터인 정수와 C급 헌터인 성원. 그리고 S급 헌터인 다현의 알고 있기에 그것을 추정할 수는 있었다.

“그럼, 프리랜서로 일하는 상급 각성자를 구해서 공략하면 되지 않습니까?”

“A급 이상의 각성자는 프리랜서가 거의 없습니다. 모두 길드나 정부 소속이죠. 때문에 일당을 주고 그냥 쓰는 것이 아니라 소속된 곳과 계약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몸값이 엄청나죠. 한마디로 적자입니다.”

“그렇군요. 그런데 제가 프리랜서로 일하는 헌터를 한 명 알고 있거든요. 한번 물어볼까요?”

경호는 다현을 떠올리며 성원에게 물었다.

“네? 사장님이 저희 길드에 소개할 만한 프리랜서 헌터를 알고 계시다고요?”

“그렇습니다.”

우우웅! 우우우웅!

그때 손목에 차고 있던 폰에서 진동이 울렸다.

화면에 뜬 발신자 이름을 보고 경호가 피식 웃었다.

-마녀.

하여간 양반은 아닌 모양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