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9화
육회.
광장시장에 단골집이 있을 정도로 난 육회를 좋아했다.
“아, 육회 먹고 싶다.”
마수의 고기는 손질을 잘해서 독기와 마기를 잘 제거하면 소나 돼지보다 훌륭한 요리 재료가 된다.
하지만 육질이 질긴 편이라 생으로 먹기 힘들다는 단점이 있었다.
한마디로 마수고기는 육회를 만들기 적합하지 않은 고기였다.
육회 먹는 것을 반쯤 포기하고 있을 즈음에 만난 ‘강철뿔양’이라는 마수.
양처럼 털이 복슬복슬하게 난 거대한 물소 같은 녀석이었다.
생긴 건 딱 봐도 질기고 누린내 나게 생겼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엉덩이 부위를 얇게 저며서 맛을 봤다.
“어? 이거!”
그날, 나는 소고기보다 고소하고 양고기보다 진한 맛을 내는 육회에 딱 어울리는 인생 고기를 찾을 수 있었다.
“후우. 소주 한잔하고 싶네.”
***
신화길드에게 갑자기 소멸한 리스폰 던전에 대한 자료를 받은 헌터본부는 즉각 분석에 나섰다.
자료는 이미 완벽하게 정리가 된 상태였기에 분석에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았다.
다만 그 자료의 내용 중 문제가 될 만한 것이 있었다.
“이것 참. 머리 아프구먼.”
날카로운 인상의 중년 남성이 관자놀이를 손으로 꾹꾹 누르며 말했다.
“그러니까 리스폰 던전이 소멸할 때 뿜어진 마력 파동이 흑염마룡 사건 때와 같다 이거지?”
던전관리국의 국장 최현성은 분석 1팀의 김민호 팀장이 가져온 서류를 보며 물었다.
흑염마룡 사건.
경호가 귀환했을 때 날려버린 균열은 공식적으로 그 원인이 불명이라 본부에서 한동안 큰 이슈였다.
그래서 그 원인을 찾기 위해 마력 파동 같은 정보를 분석했었던 본부였다.
“그렇습니다. 그때의 파동과 일치했습니다.”
그렇다면 흑염마룡 사건처럼 신화길드가 구매한 리스폰 던전도 그 원인을 알기 어렵다는 뜻이었다.
현성이 엄지로 관자놀이를 꾹꾹 눌러가며 손에 들린 보고서와 김민호 팀장을 번갈아 가며 쳐다봤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알고 있겠지?”
“네?”
민호가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현성에게 되물었다.
“이런 거 보면 참 헛똑똑이라니까. ‘네?’가 아니라 바로 ‘삭제하겠습니다.’ 이렇게 나와야지. 지금, 내 말 무슨 말인지 모르겠나?”
“하지만 그렇게 되면 흑염마룡 균열이 사라진….”
“아니. 아니지. 그건 내가 원하는 대답이 아니야.”
현성의 말에 입을 굳게 다물고 난처한 표정을 짓던 민호가 어렵사리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바로 삭제하겠습니다.”
“그래, 흑염마룡 균열에 대한 관련 자료 모두 날려. 지금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니까. 그냥 백업 중에 실수라고 하고. 내가 어떻게든 막아줄 테니.”
“그렇게 하겠습니다.”
민호의 표정을 보던 현성이 피식 웃었다.
“이봐, 우리가 받은 돈이 5000억이야. 우리가 아무리 대격변의 시대를 살고 있지만 5000억은 그리 적은 돈이 아니라고. 그리고 그 돈은 이미 모두 예산에 잡혔어. 그런데 그걸 다 뱉어내자고? 아마 우리 둘 다 모가지 내놔야 할 걸? 난 그러기 싫은데. 자네는 아닌가봐?”
“아닙니다.”
“그런데 그런 표정 지으면 어떡하나. 이거 나만 나쁜 놈 같잖아.”
현성의 말에 민호가 표정을 풀며 고개를 숙였다.
“죄, 죄송합니다.”
“알았으면 가 봐. 가서 자료나 깔끔하게 정리하라고.”
“알겠습니다.”
민호가 사무실을 나가자 현성은 그런 그의 태도에 혀를 찼다.
“하여간 요즘 젊은것들은 생각이 짧아, 생각이. 쯧쯧쯧.”
***
던전관리국 실무자들과 신화길드는 며칠째 협상을 진행하고 있었다.
물론 서로 평행을 달리는 주장 때문에 당연하게도 협상은 단 한걸음의 진척이 없었고 그저 시간만 끌고 있었다.
신화 길드는 공략 한번 못하고 자연 소멸했으니 금액을 돌려달라는 입장이었고, 던전관리국은 그에 대한 정확한 증거가 없다는 말만 되풀이할 뿐이었다.
그렇게 시간만 끌던 협상은 최현성 국장이 협상 대표로 협상장에 모습을 나타내면서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성원은 새롭게 협상장에 나타난 현성을 보며 피곤이 역력한 표정을 지었다.
“국장님. 이제야 오셨네요. 솔직히 국장님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협상 진행이 도저히 안 돼서 말이죠.”
“지금 강철뿔양 균열로 처리할 일이 좀 많아서 늦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이제라도 오셨으니 감사합니다. 알고 계시겠지만 지금까지 리스폰 던전이 자연 소멸된 경우가 없으니 비교 데이터가 없지 않습니까. 저희 사례가 최초입니다. 그러니 증거가 부족하다는 말 자체가 어불성설입니다. 이걸 보시면 저희가 개입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성원이 내민 자료를 본 현성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이미 충분히 검토했습니다. 저희 측에서도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현성도 무조건 ‘NO’를 외치며 시간을 끌 생각이 아니었다.
흑염마룡 균열 사건과 리스폰 균열 소멸 사건 같은 일이 계속 터진다면 결국 누군가 연관성을 찾아낼 수도 있었다.
그러면 곤란했다.
‘불가역적인 계약을 맺으려면 먹음직스러워 보이면서도 우리에게 손해가 되지 않는 것을 던져줘야지.’
그렇기에 현성은 신화길드가 뿌리치기 힘든 제법 그럴싸한 제안을 준비한 상태였다.
성원은 이미 며칠간 계속된 마라톤협상으로 지칠 대로 지친 상태였다.
그런 성원을 보며 현성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죄송합니다. 시간만 끄는 협상으로 피곤하셨죠? 제가 윗선에 결재를 모두 받아왔으니 빨리 결론을 내리도록 하죠. 사실 최초의 리스폰 던전에 대한 양도권 거래였던 만큼 저 또한 이 문제가 좋게 마무리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말입니다. 이러면 어떻겠습니까?”
현성이 제시한 조건은 앞으로 10년간 회색지대에서 출몰하는 ‘A급’ 던전을 연 10회 무상으로 공략할 수 있도록 해준다는 것이었다.
“후우, 국장님. 저희 길드 사정 아시지 않습니까?”
“최대한 양보한 조건입니다. 이 정도면 정말 괜찮은 조건이지 않습니까.”
“A급 던전은 솔직히….”
“A급 던전이니까 가능한 조건입니다. B급 던전은 저희도 물량이 달리는 물건이니까요.”
성원은 마른 침을 삼켰다.
조건 자체는 훌륭하지만 신화길드 입장에서 받아들이기 어려운 조건이기도 했다.
‘과연 우리 길드가 A급 던전을 공략할 수 있을까?’
지금 당장은 절대로 불가능했다.
하지만 장고 끝에 결국 성원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알겠습니다. 국장님.”
***
어둑어둑한 저녁.
시계를 보니 어느새 9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지숙이 기지개를 켜며 하품을 했다.
“아들. 오늘도 좀 더 있다가 잘 거야?”
사실 저녁이 되면 사람이 찾지 않는 골목이기에 이 시간에 가게를 지키고 있는 것은 쓸모없는 짓이었다.
분명 며칠 전까지만 해도 그랬다.
그런데 요즘 늦은 저녁 다현의 출현이 잦았고 경호는 그런 그녀에게 떡볶이를 만들어 줬다.
그런 둘의 시간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던 지숙은 그래서 9시 정도만 되면 피곤해서 쉰다며 방으로 들어갔다.
“어, 조금 더 가게 보다가 잘게.”
“그럼. 엄마는 먼저 잘게. 아들. 수고해.”
“응. 엄마. 잘 자요.”
다현이 오든 말든 경호는 육회를 만들어 가볍게 소주 한잔하고 잘 생각이었다.
사실 ‘육회’는 만들기 쉽지만 맛있기 어려운 요리 중 하나였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육회를 만들어 먹기보다 사 먹는 걸 더 선호했다.
하지만 다현을 구하러 갔다가 가져온 강철뿔양의 고기가 있기에 경호는 걱정하지 않았다.
“이건 특별한 양념을 안 해도 입에서 살살 녹으니까.”
보통의 고기라면 도축하고 사후경직 때문에 숙성과정을 거치는 것이 중요하지만 강철뿔양의 고기는 마비를 일으키는 독기를 제거하는 것이 더 중요했다.
아공간을 연 경호는 손을 넣어 강철뿔양의 뿔을 꺼내 잡아 끝부분을 조금 부러뜨렸다.
강철보다 훨씬 더 단단하기에 특수한 장비가 있어야 자를 수 있는 강철뿔양의 뿔이지만 경호는 마치 수수깡처럼 가볍게 부러뜨렸다.
독기를 빼내는 방법은 다양하지만 고기의 육질을 부드럽게 해주면서 그러한 효과를 내는 것은 경호가 아는 한 강철뿔양의 뿔이 유일했다.
손가락 크기의 뿔을 손에 쥐고 힘을 줬다.
꾸드득. 꾸득.
손을 펴자 밀가루처럼 곱게 부스러진 강철뿔양의 뿔가루를 고깃덩이에 슥슥 발랐다.
“자아, 그럼. 독기가 빠질 동안 양념을 만들어 볼까?”
커다란 유리그릇에 설탕과 참기름을 넣고는 소금과 후추로 간을 했다.
그리고 독기가 빠지도록 놓아둔 고깃덩이를 도마 위에 올렸다.
아까 발라둔 가루는 이미 흡수돼 보이지 않았다.
“썰기 전에 칼날부터 좀 갈아야겠네.”
칼날이 무뎌진 것을 본 경호가 손에 마력을 끌어올려 엄지와 검지로 칼날을 잡아서는 쓱 훑어냈다.
손가락이 훑고 지나간 칼날은 위험해 보일 정도로 새파란 예기가 돌았다.
“자아, 그럼 썰어볼까?”
어릴 적부터 식당일을 도왔던 경호였기에 원래도 칼질을 꽤 잘했지만 정령계에서 겪은 10년이라는 시간은 경호의 칼질을 하나의 경지로 올려주었다.
괜히 특성에 [검술 LV10]이 있는 게 아니었다.
슥슥.
날이 선 칼날이 지나가자 고기는 마치 기계로 썬 것처럼 일정하게 썰려 나왔다.
금세 모두 포를 떴고 경호는 다시 그것을 일정하게 썰어서 육회로 쓸 길쭉한 형태로 만들었다.
“꽤 양이 되네.”
이렇게 썰어놓고 보니 꽤 많아 보이는 양이었다.
“냉장고에 넣어뒀다가 반찬으로 조금씩 내지. 뭐.”
이제 고기를 양념이 담긴 커다란 유리그릇에 넣고는 손으로 주물러 주었다.
너무 주물러도 고기가 물러지고 육즙이 빠져나오기 때문에 빠르게 양념만 배게끔 가볍게 버무렸다.
달큰하면서 고소한 향이 올라오는 육회를 보며 경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빼냈다.
그러곤 육회 한 점을 집어 입에 넣었다.
씹을 필요도 없었다.
입에 넣자마자 사르르 녹아서 육향만 남기고 사라졌다.
“역시 이 사르르 녹는 이 식감. 양념까지 하니까 이거 완전 미쳤잖아!”
그때 주방 구석에서 구경하고 있던 흰둥이가 코를 킁킁거리며 다가왔다.
그리곤 눈을 껌뻑이며 앞발로 경호를 슬슬 건드렸다.
-경호 님. 그거 맛있습니까?
안 주면 안 될 것 같은 흰둥이의 표정에 경호는 피식 웃었다.
이제 제법 애교 부리는 게 수준급이었다.
“자아. 먹어봐.”
***
검은색 고급 세단이 각성자관리원, 일명 ‘헌터본부’에서 나왔다.
뒷좌석에 기대어 앉은 신화길드의 이성원 길드장은 지끈거리는 두통에 관자놀이를 엄지로 지그시 누르며 한숨을 쉬었다.
“후우. 박 실장. 이렇게 결정해도 되는 걸까?”
차를 몰던 정수는 그런 그를 달래듯 부드럽게 이야기했다.
“길드장 님, 다른 방법이 없지 않습니까. 남들이 보기에는 대단해 보이지만 저희도 결국 그들에게는 을에 불과하니까요. 잘 결정하셨습니다.”
“제기랄.”
성원의 거친 욕설과 함께 무거운 적막이 흘렀다.
정수가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오늘 아침부터 식사 안 하셨지 않았습니까? 이럴 땔수록 잘 챙겨 드셔야 합니다.”
“이래 봬도 나 각성자야. 몇 끼 안 먹었다고 큰일까지 나거나 하진 않아.”
정수의 말처럼 성원은 최종 협상이라 신경이 쓰여 아침부터 지금껏 아무것도 먹지 않은 상태였다.
“배는 안 고파. 아니 솔직히 말하면 배가 고픈지 안 고픈지 잘 모르겠어.”
“그래도 집에 가기 전에 간단하게 식사하시고 들어가시죠.”
“후우. 박 실장. 그럼. 협상도 마무리됐으니 같이 술이나 한잔할까? 어때?”
“알겠습니다. 어디로 모실까요?”
정수의 말에 잠시 고민하던 성원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오늘도 맛있는 거 나오려나? 저번에 거기 있잖아.”
“아. 저번에 그 김치찌개 먹었던 곳 말입니까?”
“그래, 그때 너무 맛있게 먹어서 말이야.”
“알겠습니다. 그럼. 모시겠습니다.”
정수는 룸미러로 성원을 살폈다.
다행히 아까와 달리 살짝 미소를 짓고 있는 것이 아주 조금은 기분이 나아진 듯 보였다.
청와대 뒤편에 있는 헌터본부에서 종묘 옆 골목에 있는 행운식당까지는 금세였다.
스산하기까지 한 골목길을 달리던 차가 불이 켜진 식당 앞에 멈춰 섰다.
“길드장 님, 도착했습니다.”
“수고했어. 그럼, 오늘은 무슨 음식일지 한번 들어가 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