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화] 지옥 (4)
표류(漂流).
현재 강우의 상태를 그보다 더 정확하게 묘사하는 단어는 없었다.
장혜진과의 이별 이후로 그는 줄곧 멍하니 우주를 부유했다.
― 즐겁게 살아 줘. 행복하게 살아 줘. 과거가 아닌 지금에서 행복을 찾아 줘. 그게 내 마지막 소원이야. 난 이제 더는 자기를 볼 수 없지만…….
그녀와 나눈 마지막 대화만이 그의 머릿속을 채운 생각의 전부였다.
― 안녕, 내 사랑.
장혜진의 목소리가 여전히 선명하게 귓가에 맴돌았다.
그녀가 향기가, 온기가, 숨결이.
그 모든 것이 그의 심장 깊숙한 곳에 여전히 남아 있었다.
* * *
표류 88일째.
강우는 그 뒤로도 몇 개의 꿈을 더 꾸었다.
아니, 꿈이 아니었다.
그건 현실이자 미지의 세계였다.
그는 두 번째 꿈에서 본래 세상으로 돌아가 석철을 베었고, 세 번째 꿈에서 호공의 사지를 잘랐으며, 네 번째에는 자신을 쫓던 각성자들을 도륙 냈다.
도망자 신세이기만 하던 과거와는 달랐다.
그는 수만, 수십만 명의 각성자들의 사지를 끊었다.
그들이 지르는 비명이, 그들이 흘리는 선혈이 온 천지를 뒤덮었으나 강우는 아무런 감흥도 느끼지 못했다.
그저 그는 기계적으로 눈앞의 생명을 베고 또 베었다.
그의 검 앞에서 수만의 인형이 검은 연기가 되어 산화했다.
* * *
표류 192일째.
강우는 비로소 석탈해를 만났다.
― 어떻게… 된 거지? 네가 어찌 여길…….
석탈해는 강우의 부활을 믿지 못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강우는 놈이 그랬듯이,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았다.
그저 놈의 뼈를 마디 하나하나 끊어 가며 고통을 안겨 주었다.
놈은 5차 각성자의 수준에 달하는 괴물이지만, 이미 강우는 각성의 차수에 구애받지 않는 경지에 올라 있었다.
― 이, 이건 말도 안 돼!
석탈해가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강우의 공격을 감당할 수 없었고, 강우에게 속수무책 유린당했다.
― 어찌 인간 따위가 감히……!
생전 처음 느껴 보는 무력함.
두 눈이 시뻘겋게 충혈된 놈이 온몸의 구멍이란 구멍에서 모두 피를 흘리며 저주를 퍼부었으나, 강우는 끝까지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석탈해는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한 채 답답함 속에서 생을 마무리했다.
강우는 숨이 끊어진 놈의 시신을 한참 동안 내려다보았다.
“…….”
그토록 바라 마지않던 복수의 끝에는 침묵과 고요만이 남았다.
* * *
표류 381일째.
강우는 석탈해의 만행을 세상에 폭로했다.
그는 바벨탑에서 놈의 배신을 막았으며, 최후의 전장이라 불리던 바벨탑은 안전하게 클리어되었다.
인류를 배신한 석탈해는 강우에게 제압되었고, 사도들도 색출되어 모조리 죽임을 당했다.
유일하게 호공이 달아났지만, 놈은 곧 강우의 기운을 전수받은 각성자들에게 붙잡혀 사지가 뜯겨 죽었다.
하지만 세계의 구원에도 불구하고, 강우에겐 그 모든 것이 무의미했다.
* * *
표류 701일째.
강우는 <데스 나이트>가 그토록 간절히 바라던 홍련과 재회하는 것을 목격했다.
자신이 지켜보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그들은 한동안 부둥켜안은 채 가만히 있었다.
들썩이는 어깨와 등만이 두 남녀의 심정을 드러낼 뿐이었다.
강우는 그들이 세계의 별이 되는 과정을 끝까지 지켜보며, 처음으로 가슴에 새로운 감정이 피어나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여전히 그의 심장은 한겨울의 호수처럼 꽁꽁 얼어붙어 냉기가 맴돌았다.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 희미한 고동 소리만이 어렴풋이 들려왔을 뿐.
* * *
표류 1,222일째.
강우는 어느 순간부터 더 이상 꿈꾸기도 포기한 채 우주에 몸을 맡겼다.
꿈을 반복할수록 공허함만 더욱 커졌기 때문이다.
꿈을 꾸지 않는 방법은 간단했다.
잠을 자지 않는 것.
무언가를 견디고 버티는 것만은 자신이 있기에,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스르륵.
하지만 강우는 알지 못했다.
어느새 그의 몸이 까만 어둠에 둘러싸여 서서히 형태를 잃어 가고 있다는 걸.
그는 점차 어둠, 그 자체가 되어 우주의 한 부분이 되어 가고 있었다.
* * *
표류 1,833일째.
― 강■ ■, ■아■■.
― 어■■ 있■■?
― ■두■ 당■■ 기■■■ ■■요.
언젠가부터 희미하게 정체불명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어딘가 익숙하기도, 낯설기도 한 목소리.
하지만 알아들을 순 없었다.
강우는 그것을 외면했다.
그렇게 그는 다시 눈을 감았다.
* * *
표류 3,011일째.
슬슬 날짜를 헤아리기가 어려워졌으나, 강우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그 또한 무의미한 일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날짜 세기는 하릴없는 이곳에서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으니까.
그는 이대로 자신이 우주의 먼지가 되어 사라지길 간절하게 바랐다.
이대로 소멸해 버렸으면…….
하지만 소멸하는 건 시간선뿐이었다.
강우는 어느 순간부터 점차 가루가 되어 부서지는 별들을 목격했다.
그건 오수가 소위 ‘시간선’이라 부르던 것이었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어쩌면 오수와 미래의 황한수가 무슨 짓을 꾸미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는 한동안 부서져 흩어지는 별의 조각을 지켜보았다.
* * *
표류 ????일째.
강우는 처음으로 들려오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 강■ 씨… 돌아■요.
― 어디■ 있어■?
― 마■터, 들리■■까?
― 모두■ 당신■ 기■리고 ■■요.
― 한■우! 듣■ 있냐?!
여전히 정확히 알아들을 순 없었으나, 그 목소리만은 확실하게 귀에 익었다.
유아라, 박도진, 청익, 서유리…….
그들이 자신을 향해 무언가를 외치고 있었다.
문득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수천 일 만에 느껴 보는, 새로운 감정이었다.
반가움에 눈을 뜨자, 시간선이 소멸해 어둠뿐인 이 우주에 새로운 빛의 줄기가 생겨나 있었다.
너무나도 가늘어서 살짝만 건드려도 끊어질 것만 같은, 엷은 빛의 실이었다.
살랑.
빛으로 이루어진 오색 실은 강우를 붙잡으려는 듯 연신 주위를 맴돌았지만, 그러기엔 너무나도 연약했다.
강우는 무심코 그곳에 손을 뻗으려다가 움찔하며 손을 멈췄다.
밝게 빛나는 실과 달리 손가락이 사라져 주걱처럼 변해 버린 자신의 손은 시커멨기 때문이다.
괜히 건드려서 이 빛나는 실마저 더럽히는 건 아닐까.
강우는 감히 그것을 만질 생각을 하지 못했다.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빛의 실을 지켜보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어딘가 마음이 따뜻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아직은…….
강우는 그것만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지금의 자신에겐… 이 조그만 빛만으로도 충분한 위안이 되는 듯했으니까.
* * *
표류 ?????일째.
― 강우 씨… 돌아와요.
― 어디에 있어요?
― 마스터, 들리십니까?
― 모두가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요.
― 한강우! 듣고 있냐?!
빛의 줄기가 점차 굵어지더니, 어느 순간부턴 손가락만 한 굵기가 되어 있었다.
그와 비례해서 들려오는 목소리도 선명해졌다.
그중에서도 유독 우렁찬 목소리가 있었는데…….
― 아저씨!
그건 다름 아닌 박수영의 것이었다.
그 쩌렁쩌렁한 울림에 강우는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지었다.
이제 더 이상 이 우주에서의 시간이 고독하지 않았다.
강우는 온종일 그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새로운 사실을 하나 깨달았다.
‘…….’
어느새 빛에 비친 자신의 손이 제 색을 되찾은 것이다.
계속 그들이 목소리에 귀를 귀울인 덕분일까?
어둠으로 빚은 것 같던 강우의 몸이 다시 제 형태를 되찾아 있었다.
그와 동시에 강우는 빛의 실에서 강한 끌림을 느꼈다.
그는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천천히, 아주 천천히 실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하지만 강우는 멈추지 않았다.
얼어붙은 그의 심장에 빛의 따스함이 스며들어 점차 녹아내리고, 쿵, 쿵, 하는 고동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제는 몇 개 남지 않은 별들이 그의 심장 박동 소리에 맞춰 밝게 빛을 발하고 거두기를 반복했다.
마치 그를 응원하는 것처럼.
‘아아…….’
마침내 강우의 손이 빛의 줄기에 닿았을 때.
츠츠츠츠츳!
길게 뻗어 있던 빛의 줄기가 수백 갈래로 나뉘며 그의 몸을 휘감았다.
마치 <사이트 스톤>을 처음 마주했을 때와 같은 반응이었다.
곧 강우의 전신이 형형색색 빛의 줄기로 뒤덮이고, 기분 좋은 따스함이 느껴졌다.
곧 그는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 * *
“여, 여기다!”
‘마계 찾기’ 33일 차.
원정대는 드디어 마계와 지구를 잇는 통로를 발견했다.
이미 식량은 전부 다 떨어지고, 서유리의 <빙결 마법>으로 만든 식수와 왕린의 <환술>도 점차 무의미해져 가던 시점이었다.
마물을 잡아먹은 사람들 몇몇이 정체불명의 복통을 호소하며 앓아누웠고, 마력을 정화해 점령지를 넓혀 가야 할 일명 ‘정화’ 각성자들은 사력을 다해 그들을 치료했다.
그야말로 한계에 다다른 시점에 달성한 쾌거였다.
콰르르르르!
레비아탄이 자신의 <마력 무구>인 <망령의 대검>을 휘두르자, 공간이 갈라지며 숨겨져 있던 <균열>이 모습을 드러냈다.
가로세로 각각 300미터에 달하는 초대형 <균열>.
지금껏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거대한 크기의 <균열>이었다.
유아라가 보랏빛 마력으로 일렁이는 불길한 <균열>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여기가… 마계…….”
언뜻 봐도 <균열> 안에선 한 번도 느껴 본 적 없는, 많은 양의 마력이 느껴졌다.
조금 과장을 보태서 석탈해와 강우의 마력을 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조릭이 긴장한 얼굴로 침을 꿀꺽 삼키며 말했다.
“자기들? 이거… 우리가 감당 가능한 걸까? 보기만 해도 숨이 턱 막히는데…….”
뒤늦게 두려움이 든 모양이었다.
하지만 어젯밤 서유리와 왕린이 이제 한계에 다다랐다는 메시지를 보내 온 터.
마계를 제외하면 더 이상 그들에겐 일망의 희망조차 없었다.
조릭과 투움바가 발견한 초지는 이미 여기저기서 찾아온 사람들로 포화 상태였다.
히데타가 데려온 일본인들까지 합하면 만 명을 수용 가능하다던 초지에 벌써 6만 명에 가까운 인원이 기거하고 있었다.
얼마 전, 우울증에서 가까스로 벗어난 청익이 말했다.
“이제는 물러설 곳이 없다. 여기가 아니면 우린 그대로 전멸이야.”
“동감이에요.”
김민정도 고개를 끄덕였다.
이대로라면 초지에서 내분이 일어날지도 모르는 일.
인류의 희망이던 땅이 지옥으로 변하는 건 순식간일 터다.
초지에 남겨 두고 온 가족을 위해서라도 서둘러 새로운 물자와 땅을 확보해야만 했다.
“들어가자.”
선두는 당연하게도 마계 출신인 레비아탄이었다.
그의 뒤에 청익과 유아라가 서고, 이어서 황한수와 조릭, 최후방엔 김민정이 자리했다.
그런데 그들이 막 <균열>에 들어서려던 찰나였다.
쿠구구구구!
“뭐, 뭐야?!”
갑작스러운 진동에 조릭이 기겁하며 폴짝 뛰고, 나머지 사람들은 서둘러 전투 자세를 취하며 엄청난 마력이 전해져 오는 <균열> 쪽을 주시했다.
그들이 들어가려던 마계 속에서 되레 무언가가 나오고 있었다.
레비아탄이 잔뜩 굳은 얼굴로 외쳤다.
“모두 물러서!”
원정대가 서둘러 <균열>에서 멀어지는 사이, 그곳에서 여유롭게 걸어 나온 건 기괴하게 생긴 배불뚝이였다.
흡사 <변종 노움>을 닮은 거구의 마물이 한 손에는 대형 도끼, 다른 한 손에는 낯익은 황금빛 단검을 든 채 원정대를 보며 씩, 웃었다.
물론 웃었다고 해도 비대한 살에 파묻혀 입가가 씰룩인 게 전부였지만.
가장 먼저 놈이 든 단검의 정체를 떠올린 유아라가 놀란 얼굴로 중얼거렸다.
“저건… 그거 아니에요?”
“맞다. 녀석의 검이다.”
청익이 응수하며 자신의 마력을 끄집어냈다.
눈앞에 괴물이 든 검.
그건 다름 아닌, 일전에 강우가 좀비에게서 빼앗은 ‘말하는 단검’이었다.
[■■■ ■?]
[■■ ■■■?]
기괴한 배불뚝이 괴물이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몇 번 중얼거리더니, 마침내 찾았다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인간? 네놈들이 아직도 살아 있었나?]
놈이 든 검의 이름은 <피바라기>.
잠시 저 먼 발치를 둘러본 <피바라기>가 괴물의 입을 빌려 말했다.
[오호, 정말로 인간들이 생겨났구나.]
“조심해!”
콰과과광!
모두가 긴장한 얼굴로 정체불명의 적을 경계하는 사이, 놈의 공격이 시작됐다.
괴물의 발길질에 바닥에서 용암이 솟구치고, 곧 비대하던 놈의 몸이 더욱 크게 불어나기 시작했다.
놈의 목소리가 온 천지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뭐, 좋다! 이유가 어찌 됐든 새로운 마계의 왕, 이 피바라기가 네놈들을 왕국의 새로운 식민으로 삼아 주마!]
검은 헌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