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화] 지옥 (2)
청익은 눈을 떴다.
제일 먼저 보인 건 높은 회색빛 천장, 그다음은 유아라였다.
그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던 그녀가 물었다.
“깨셨어요?”
청익은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정체불명의 폐건물 안, 곁에는 유아라와 박도진이 앉아 있고, 저 구석에는 도봉팔을 비롯한 몇몇 검계 단원들이 침울한 얼굴을 한 채 모여 있었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쥔 채 몸을 들썩이는 황한수도 보였다.
“…….”
청익은 그 광경을 멍하니 지켜보았다.
마치 긴 잠을 잔 것처럼 정신을 멍하고 몸이 나른했다.
뭔가 중요한 걸 잊은 것 같은데…….
그는 자신이 왜 이곳에 누워 있는가를 떠올리기 위해 기억을 가다듬었다.
‘동부 전선을 지키는데… 한강우 놈이 나타나고… 석탈해가…….’
그러다 문득 그의 시야에 말라붙은 피딱지로 얼굴이 엉망인 서유리가 보였다.
그녀는 지친 기색이 역력했는데, 옆에선 장민철과 몇몇 스톰 길드원들이 액체형 회복제를 부어 가며 그녀의 상처를 돌보는 중이었다.
청익은 서유리의 얼굴에서 또 다른 얼굴이 오버랩되는 것을 느꼈다.
‘아……!’
뒤늦게 기억을 되찾은 청익이 헐레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주변을 훑었다.
유아라가 그를 말리려 했지만, 박도진이 저지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결국 청익이 소리를 질렀다.
“수장!”
하지만 청익이 아무리 불러도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수, 수장……?!”
왕린도, 한선화와 도봉순도.
모두가 그런 그를 안타깝게 바라보았다.
그제야 청익은 황 노인이 피를 토하며 죽어 가던 순간을 떠올렸다.
자신이 소중하게 감싸 쥔 그 야윈 어깨가, 자신의 가슴을 뜨겁게 적신 그의 피가 여전히 생생했다.
부득, 절로 이가 갈렸다.
“아니야!”
분노에 찬 청익이 대뜸 소리를 질렀다.
수장이 죽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기에.
인간이 영원히 살 수 없다는 것쯤은 그도 잘 안다.
하지만 이런 식은 아니다.
이런 식의 이별은… 단 한 번도 상상해 본 적도 없단 말이다.
“제기랄!”
쾅!
끝내 분을 이기지 못한 청익이 바닥에 있던 잡동사니를 걷어찼다.
검게 그을린 양동이가 그의 마음을 대변하듯 움푹 찌그러지며 바닥을 굴렀지만, 그렇다고 해서 답답한 마음이 풀리진 않았다.
오히려 양동이가 찌그러진 것에 비례해 그의 마음도 더 구겨졌다.
“아니야… 이건… 아니라고…….”
결국 청익의 두 뺨 위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매일 형들에게 맞고 와 질질 짜던 황한수처럼 한 팔로 두 눈을 가린 채 흐느꼈다.
하지만 황한수와 달리 청익에겐 대신 복수를 해 줄 사람이 없었다.
기댈 사람이 없었다.
응석을 부릴 사람이 없었다.
지금껏 그가 기댄 건 황 노인이 유일했기에.
청익의 세계를 지탱하던 거대한 축이 와르르 무너져 산산이 부서지고, 축을 잃은 그의 세계가 눈물과 함께 표류하는 듯했다.
“…….”
청익의 울음소리에 주변은 침울하다 못해 암울해졌다.
결국 보다 못한 왕린이 입을 열었다.
“청익, 이제 그만 울음을 그쳐라.”
좀처럼 보기 힘든 왕린의 진지한 얼굴이지만, 여전히 청익은 울음을 그치지 못했다.
하긴, 십 년이 넘는 세월의 인연을 잃었는데, 어찌 몇 시간 만에 괜찮아질 수 있으랴.
왕린도 황 노인이 청익에게 어떤 의미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녀석에게 있어 삶의 시작이자 전부였으니까.
게다가 청익은 얼마 전 심수련도 잃었다.
그로서는 부모나 다름없는 인연을 단시간에 모두 잃었으니… 그 속이 말이 아닐 터였다.
어쩌면 손자인 황한수보다도 더.
하지만 계속 울고만 있을 순 없는 노릇이다.
왕린이라고 황 노인의 죽음이 아무렇지도 않은 건 아니나, 그는 엄연한 현실주의자였다.
죽은 자와 달리 산 자에겐 나름대로 할 일이 있다.
그가 청익을 뒤로한 채 말을 꺼냈다.
“수장은 죽었다, 우리를 위해서. 덕분에 우리는 살았지.”
이미 황한수에게 사건의 경위를 전해 들은 그들이었다.
지구에 살던 사람들은 이 정체불명의 땅으로 강제 <텔레포트> 되었고, 조릭과 투움바의 증언으로 의해 이곳이 석탈해에게 멸망당한 시간선 중 하나라는 걸 알았다.
이 폐건물도 투움바가 알려 준 장소였다.
다행히 그들이 유랑한 <사이트 스톤>의 땅과 이곳은 유사한 점이 많았다.
― 여기서 계속 북쪽으로 올라가면 생명체가 살 수 있는 땅이 있다. 우리가 기억하는 곳과 같다면 말이지.
이미 그들은 레비아탄의 <스컬 드래곤>을 타고 인류가 살아갈 새로운 땅을 찾아 나선 터였다.
왕린의 말은 계속됐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된 건 아니다. 우리는 정체불명의 땅에 떨어졌고, 여전히 적이 남아 있는지 아닌지도 알 수 없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남았는지는 중요하지 않아. 지금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를 고민해야 할 때다.”
게다가 지구에서 강제로 <텔레포트>된 건 비단 한국인들뿐만이 아니었다.
이곳으로 오면서 그들은 이미 새로운 무리와 우연히 마주쳤는데, 물어보니 그들의 국적은 우크라이나였다.
그들도 황금빛 커튼을 목격하고 이곳으로 왔다고 했다.
또한 용암지대에서 멀리 떨어진 오른편에서는 오동 길드의 것이라 추정되는 마력탄이 크게 터졌다.
만약 왕린의 추론이 맞다면, 전 세계 사람 모두가 이 멸망 이후의 땅으로 소환된 것이다.
이제부터는 그들과 힘을 합쳐 새로운 세계에서 살아갈 방도를 찾아야만 했다.
이대로 말라 죽기만 기다릴 생각이 아니라면 말이다.
“다들 이의가 없다면, 우리의 결정권자는 계속해서 서유리 길드장이 맡는다. 원래 한국의 총사령관이었으니 크게 문제는 없겠지. 이미 그녀는 자신의 자격을 충분히 증명해 냈다.”
“…….”
왕린의 단호한 선언에 서유리는 뭔가 반박할 말이 있어 보였으나, 굳이 입을 열진 않았다.
현재는 모두가 혼란한 상태다.
이왕이면 지휘부는 계속 유지되는 게 속 편했다.
“계속해서 우리를 맡아 주시겠습니까?”
서유리도 자신의 역할을 잘 알았다.
고개를 끄덕인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왕린의 옆에 섰다.
이곳은 지구와 달리 마력의 농도가 아주 짙었다.
그나마 전 세계에 브레이크가 일어나면서 비각성자도 마력에 대한 면역이 조금 생기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위험에서 벗어나게 된 건 아니었다.
비각성자도 <텔레포트>된 이상, 그들은 살아갈 방도를 찾아야 했다.
서유리가 모두를 둘러보며 말했다.
“우리는 끝까지 살아남을 것입니다.”
그때였다.
밖이 소란스럽다 싶더니, 이내 단원 하나가 뛰어 들어오며 외쳤다.
“레비아탄 님이 돌아오셨습니다!”
* * *
<스컬 드래곤>의 머리 위에서 여유롭게 뛰어내린 레비아탄과 달리 조릭은 등뼈에서 굴러 떨어져 우당탕 바닥을 굴렀다.
여전히 적응되지 않는 이동 수단이었다.
“쳇, 확실히 요즘 들어 멋이 안 산다니까.”
투움바가 조릭의 투덜거림에 고개를 가로젓는 사이, 서유리와 왕린을 비롯한 지휘부가 도착했다.
이미 주변에는 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둘러싼 채 이쪽을 지켜보는 중이었다.
서유리가 물었다.
“어때요? 당신들이 아는 땅이 있던가요?”
그녀의 물음에 조릭이 한껏 우쭐한 얼굴로 외쳤다.
“물론이지! 완전 우리가 봤던 그대로야! 여기서 600킬로미터쯤 걸어가면, 작지만 초지가 나와!”
반대로 투움바의 표정은 심각했다.
“하지만 기껏해야 만 명 정도가 간신히 머물 수준밖에 되지 않는다. 만약 정말로 지구인 모두가 텔레포트됐다면, 훨씬 더 많은 땅이 필요해.”
그의 말에 서유리도 동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절망할 필요는 없었다.
지금부터 하나하나 찾아 나가면 될 테니까.
게다가 이쪽에는 예전부터 마력 정화를 담당하던 각성자가 있고, 수색과 정찰에 특화된 레인저들이 있다.
서유리는 벌써부터 걱정하지 않았다.
“마물은요?”
“크게 문제될 건 없어 보였다.”
이번 대답은 레비아탄이었다.
종종 <스컬 드래곤>을 발견하고 다가오는 마물이 있었으나, 다행히 마력흔이 두 줄을 넘기지 않았다.
고위 마물이 판치는 세상은 아니라는 뜻이었다.
아까부터 묵묵히 듣고 있던 왕린이 팔짱을 끼며 중얼거렸다.
“그럼 이제 문제는 600킬로미터를 어떻게 걸어 가느냐로군.”
현재 이곳에 모인 숫자는 우크라이나인을 포함해 이천 명 남짓.
그들을 이끌고 600킬로미터나 행군하려면 시간도 시간이지만, 물자가 필요했다.
하지만 그들에게 남은 거라곤 동부 전선에서 보관 중이던 식량 조금이 전부.
그마저도 이삼 일이면 동이 날 터다.
하물며 그곳으로 향하면서 더 많은 사람과 만나게 된다면?
식량이 턱없이 부족했다.
그들은 이 뜨거운 용암지대를 걸어가며 갈사(暍死)하든가 아사(餓死)하든가, 둘 중 하나가 될 터였다.
그러자 그 뜻을 헤아린 레비아탄이 해결안을 내놓았다.
“이동은 걱정할 것 없다.”
촤르르르륵!
그의 손길에 따라 바닥에서 수천의 <스켈레톤>이 일어났다.
갑작스러운 <사령술>에 모두가 의아하게 바라보는 가운데, 레비아탄의 마법은 계속됐다.
<스켈레톤>의 관절이 기이하게 재구성되더니, 곧 그들이 합쳐져 열 마리의 <스컬 드래곤>이 탄생한 것이다.
“……!”
레비아탄이 타고 다니는 <스컬 드래곤>보다는 작지만, 한 마리당 백 명은 족히 태울 만한 크기였다.
그제야 그의 의중을 깨달은 사람들의 입이 떡 벌어졌다.
그 반응이 흡족했는지 레비아탄이 하얀 이를 드러내며 씩 웃었다.
“대한족 전사의 최강 콤비이자, 지옥에서 살아 돌아온 산증인인 망자왕, 이 레비아탄 님이 너희들을 친히 그곳까지 데려다줄 테니까 말이다. 움하하하하핫!”
“…….”
몇몇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지만,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딱히 딴지를 거는 사람은 없었다.
신난 레비아탄이 외쳤다.
“가자! 망자왕이 이끄는 산 자의 땅으로!”
그렇게 대이동이 시작되었다.
* * *
레비아탄의 활약으로 이동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인원은 1차, 2차로 나눌 테니, 새치기하지 말고 자신의 순번을 기다려라!”
“체력이 좋고 나이가 젊은 사람은 목과 꼬리에 탑승합니다! 등에 앉을 수 있는 건 노약자뿐입니다!”
서유리를 중심으로 한 스톰 길드원들이 사람들을 지휘하고, 왕린을 위시한 검계가 혹시 모를 위험에 대비해 주변을 경계했다.
폐건물 주변은 다행히도 용암이 덜했지만, 그와 비례해서 안전한 곳을 찾아온 하급 마물이 종종 보였다.
물론, 이미 상당한 경지에 이른 지구인에게 위협이 될 확률은 전무했지만.
“도진 씨는 수영이랑 먼저 가 계세요. 금방 따라갈게요.”
“…미안합니다.”
박도진은 1차 수송자였다.
그는 곧 수영이와 함께 <스컬 드래곤>을 타고 하늘로 떠났다.
“이제 문제는 식량이군.”
1차 수송이 떠난 뒤, 남겨진 왕린이 턱을 괸 채 중얼거렸다.
의견을 묻기 위해 옆을 슬쩍 살폈지만, 황한수와 청익은 여전히 멍한 얼굴이었다.
당장 검계를 주도해야 할 두 사람이 저 지경이니…….
자신이라도 정신을 단단히 차려야만 했다.
‘에휴, 내 팔자야.’
왕린은 황 노인과의 첫 거래 날을 떠올리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는 돈에 의해 움직이는 상인이었다.
하지만 황 노인의 당찬 포부는 그의 마음을 움직였고, 어느새 그의 뜻에 동화되는 데까지 이르렀다.
검계의 단원이 되면 부여한다는 그림, ‘알펜시의 기적’.
알펜시는 황 노인, 왕린, 청익이 모여 소소한 창단식을 한 장소이면서, 동시에 왕린이 검계의 자금을 위해 처분한 첫 부동산의 이름이기도 했다.
그때, 함께 있던 오만석이 의견을 냈다.
“당분간 식량은 마법으로 해결해야 할 것 같습니다.”
“으음, 마법이라…….”
왕린의 특기는 <환술>이다.
며칠 배고픔을 잊게 하는 건 일도 아니지만, 그건 임시방편이자 최후의 수단.
그보다는 좀 더 근본적인 해결책이 필요했다.
왕린이 이번에는 자신의 수양딸에게 물었다.
“연구소에서 식량을 개발한 건 없지?”
그러자 한선화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예. 우리는 마물과 싸울 무기를 만들지, 사람들 먹여 살릴 음식을 만들진 않으니까요.”
“…하긴.”
“일전에 보라가 대전의 명물을 따서 생명의 빵을 만든 적이 있는데, 그게 최초이자 마지막이에요. 그나마 물은 유리 언니의 빙결 마법을 활용하면 해결이 될 것 같은데……. 그마저도 마력 정화 과정을 거쳐야겠지만요.”
“…끙.”
결국 문제는 다시 원점이었다.
그런데 그때.
아까부터 고민하는 얼굴이던 유아라가 말했다.
“이건 갑자기 떠오른 건데요.”
“뭐지?”
그녀의 표정이 어딘가 아리송했다.
“여기는 일명 ‘멸망한’ 세계잖아요?”
“그래서?”
모두가 당연한 말을 내뱉는 유아라를 의아하게 바라보는 사이, 그녀가 여전히 생각 많은 얼굴로 물었다.
“그럼 이곳에 사는 마물들은 여태까지 대체 뭘 먹고 산 걸까요?”
“……?”
왕린과 한선화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질문이었다.
그녀의 말을 들은 모두가 해답을 구하기 위해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눈을 끔뻑였지만, 섣불리 입을 여는 이는 없었다.
생각해 보면 가장 먼저 떠올렸어야 하는 질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언데드 같은 특별한 예도 있지만, 마물도 마계라는 세계를 살아가던 하나의 생명체.
그들도 무언가를 먹고살아야 한다는 건 당연한 일이었으니까.
뒤늦게 깨달음을 얻은 왕린의 눈이 번뜩였다.
“지금 당장 처치한 마물들의 배를 갈라라! 그리고 레비아탄한테 연락을 넣어!”
명령을 받은 검계 단원이 부랴부랴 달려 나가는 사이, 왕린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괜찮으세요?”
서유리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지만, 이미 깊은 생각에 빠진 왕린은 대답하지 않았다.
어쩌면 이 불모지에 가까운 땅에서 엄청난 행운을 마주하게 된 건지도 몰랐다.
이내 잔뜩 흥분한 왕린이 방언 터진 신자처럼 말을 쏟아 냈다.
“마계…… 어쩌면 그 마계라는 땅이 이곳과 연결되어 있을지도 몰라!”
검은 헌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