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화] 최후의 석탈해 (3)
츠츠츠츠츳―!
강우는 마력을 최대한으로 끌어 올리며 지상으로 낙하하는 화염의 새를 향해 검을 겨누었다.
탐욕스럽게 아가리를 쩍 벌린 놈은 맹금류의 외양을 하고 있는데, 한눈에 봐도 그 크기가 무지막지했다.
단번에 가르지 못한다면 지상은 <사이트 스톤> 속 용암지대처럼 변해 버릴 터였다.
세상의 마지막이 왜 마그마로 들끓었는지 깨닫게 되는 순간이었다.
‘일격에 가른다.’
그런데 강우가 막 정신을 집중하려던 그때였다.
옆에 있던 황한수가 대뜸 그의 팔을 붙잡더니, 지친 기색으로 거칠게 숨을 고르며 말했다.
“안 돼. 지금의 넌 석탈해를 막을 수 없어. 놈은 세상의 끝을 보고 온 놈이다. 나와는 차원이 달라.”
“…그래서 어쩌라는 거지? 가만히 지켜보다 죽으란 소린가?”
강우의 물음에 황한수가 결연한 표정으로 답했다.
“날… 삼켜라.”
황 노인의 죽음을 목격했기 때문일까?
불과 수십 분 전까지만 해도 자신을 못 잡아먹어 안달이던 황한수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자 사뭇 묘한 기분이 들었다.
황한수가 여전히 지상을 향해 작렬하는 불새를 보며 말을 이었다.
“이 시간선의 모두가 사라졌다. 그런데도 나와 네가 남았다면, 정답은 하나지. 제기랄, 결국엔 이렇게 되는군.”
그가 어쩔 수 없다는 듯한 말투로 이야기했다.
“난 네놈이 싫다. 이유가 어찌 됐든, 네놈이 할아버지와 내 가족을 죽였다는 건 변함없는 사실이야. 하지만 지금은… 저 꼴사나운 입꼬리를 찢어 놓지 않고서는 제대로 눈조차 감지 못하겠다.”
‘꼴사나운 입꼬리’란 당연히 석탈해를 일컫는 말이었다.
놈은 여전한 미소로 지상의 최후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치 받아 볼 테면 받아 보라는 듯.
“이 모든 게 오수의 안배일 테지. 재수 없긴 해도 놈이 신은 신인 모양이야, 결국엔 모든 게 놈의 계획대로 되는 걸 보면. 서둘러라. 석탈해가 여기서 탈출하면 할아버지의 희생도 헛된 것이 될 테니까. 그건 절대 사절이다.”
황한수는 더 할 말이 많아 보였지만, 그러기엔 시간이 부족했다.
“그러니까 네놈은 네 할 일을 해라. 난 내 할 일을 할 테니. 만약 할아버지의 희생마저 헛되이 한다면, 지옥 끝까지라도 찾아가서 그 목구멍에 검을 쑤셔 넣겠다. 결코 빈말이 아니야.”
어느새 수킬로미터 위까지 하강한 불새가 기괴한 울음소리로 포효하고, 뜨겁게 불타는 깃털이 용암처럼 뚝뚝 흘러내렸다.
보는 것만으로도 눈알이 녹아 버릴 듯 엄청난 화기였다.
온통 붉은빛 불지옥으로 탈바꿈한 세상 속에서 황한수가 쓰게 웃었다.
“시발, 제물이라니……. 인생 한 번 좆같네.”
“…….”
하지만 강우는 물끄러미 바라볼 뿐, 그의 피를 흡수하지 않았다.
이미 오수와는 다른 길을 가기로 마음먹은 강우는 황한수를 희생시킬 생각이 없기 때문이었다.
누군가의 죽음을 양분 삼아 살아가는 건, 이미 앞선 경험으로도 충분했다.
멸망 속에서 삶을 보낸 죽음의 기사가, 늘 제 곁을 지키던 장혜진이, 손자를 위해 목숨을 바친 황 노인이…….
그것이 자의든 타의든, 강우는 더 이상 누군가의 죽음을 이용하고 싶지 않았다.
그의 입술이 달싹였다.
“나의 싸움에 더 이상의 제물은 필요 없다.”
콰과과과과!
어느새 불새는 1킬로미터 남짓까지 가까워져 있었다.
엄청난 열풍에 수풀과 지면이 녹아내리고, 심지어 들끓었다.
“난 오수를 따르지 않는다. 놈들이 신이라면, 난 인간이다. 인간에겐 인간만의 길이 있다.”
“뭐? 그딴 헛소리할 때가 아니야! 지금 네 신념 따위는 중요하지 않아! 내가 말했지! 할아버지의 희생을 헛되이 하면 죽여 버리겠다고!”
영문 모르는 황한수가 다급한 얼굴로 소리를 질렀지만, 강우의 눈빛엔 일말의 흔들림조차 없었다.
“아니. 중요하다. 그게 내가 이곳에 서 있는 이유니까. 여기서 내가 굴복하면 살아남은 자들이 다시 오수의 뜻을 따라야 한다. 여기서 그 고리를 끊겠다.”
강우는 자신의 검을 고쳐 쥐었다.
“나는 더 이상 놈들에게 끌려 다니지 않아.”
오수라는 신의 뜻에 이끌려 다니는 건 이제 지긋지긋했다.
석탈해와 오수 같은 신적 존재에 의해 일상이 파괴되고, 세계의 운명이 좌지우지되는 것 역시 지겨웠다.
강우는 <진(眞)피바라기>에 가지고 있는 모든 마력을 쏟아부었다.
콰르르르르!
검 끝에서 치솟은 검은 마력이 수미터까지 늘어나고, 검날에서 검은 스파크가 뱀 같은 소리를 내며 쉴 새 없이 번뜩였다.
“나는 신이 없어도 되는 세상을 원한다. 신의 자비를 구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을 원한다. 더는 세상이 놈들에게 놀아나게 두지 않겠다.”
“미친…….”
황한수가 마치 종말을 목격한 듯한 얼굴로 불새를 멍하니 바라보는 사이, 강우의 몸에서 검은 마력이 더 강하게 불타올랐다.
그것은 거대한 사신의 형상이었다.
온통 검은 화염에 둘러싸인 사신.
검은 사신과 강우가 동시에 입을 열었다.
“그걸 내가 해내겠다.”
탑에서 만난 인연들이 강우의 머릿속에서 쉴 새 없이 재생되고 있었다.
숲에서 어른들 대신 복수를 벌이려던 아이들이.
죄책감을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를 섬에 가둔 낚시꾼이.
자유를 찾아 고군분투하던 소년들이.
반복해서 멸망하는 세계를 지키던 검은 기사가.
최후까지 자신의 곁을 지키다 날아간 반딧불이.
강우는 그 모두를 심상에 그렸다.
자신의 검은 그들의 생명을 먹고 자란 검이었다.
이 순간을 위해 희생된 자들의 회한이 담긴 검이었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신의 뜻에 의해 희생을 강요당한 자들의 검이었다.
그들의 한(恨)을 고스란히 먹고 자란 검은 지독하리만큼 고독했고, 어두웠으며, 끝내 표출되지 못한 분노로 차갑게 들끓었다.
강우가 하려는 건 그 한(恨)의 표출.
자신은 오수의 검이 아닌, 그 뒤에서 살기 위해 발버둥친 자들의 검이었다.
마침내 그의 손이 움직였다.
콰르르르르릉―!
검의 궤적에 따라 시간이 멈추고, 공간이 찢어졌다.
시공마저 가른 그의 검 앞에서 불새는 우스우리만큼 쉽게 갈라졌다.
두 갈래로 찢겨 나간 몸체가 수천 개의 불티가 되어 흩어지는 사이, 강우의 검은 마침내 하늘마저 쪼개었다.
쩌어어어어억!
그가 가른 하늘 너머로 무수한 별들이 찬란하게 빛나며 지상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날을 위해 얼마나 많은 생명이 희생되었던가.
오수가 마주한 모든 죽음이, 최후의 석탈해가 없앤 모든 생명이, 벌어진 하늘의 틈으로 그들의 싸움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자 석탈해가 처음으로 호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다소 경망스럽기까지 한 웃음이었다.
“크하하하핫! 그래! 너희들이 보고 있었구나!”
별들을 확인한 석탈해의 얼굴이 광기로 번뜩였다.
저게 강우가 아는 놈의 진짜 얼굴이었다.
― 재밌잖아.
바벨탑에서의 기억이 생생했다.
자신을 비웃던 석철과 호공이, 더 발악해 보라던 놈의 헛소리가 여전히 귓가에 맴돌았다.
황한수는 여러모로 강우와 닮은 점이 많았다.
그토록 발버둥 쳤지만, 여전히 그는 상당 부분을 과거에 얽매여 있었으니까.
하지만…….
강우가 입을 열었다.
“오늘부로 그것들을 전부 지운다.”
콰과과과과과과!
“크윽!”
그의 전신에서 치솟은 검은 불길이 수십 미터까지 불어나며 광풍이 불었다.
황한수마저 한참을 밀려날 만큼 엄청난 바람이었다.
“크하하하하! 재미있구나!”
석탈해는 양팔을 벌린 채 파안대소하며 강우의 다음 공격을 기다렸다.
흩어졌던 불티가 다시 모여들며 또 한 마리의 불새를 이루었다.
이번에는 그 크기가 더 압도적이었다.
한반도를 뒤덮고도 남을 정도로 지대한 몸집.
하늘에 떠오른 수백 킬로미터짜리 불새가 석탈해와 달의 붉은 기운을 빨아들이며 더할 나위 없는 위용을 뽐내었다.
그 아래서 석탈해의 두 눈이 번뜩였다.
“더 보여 봐라! 오수의 검이여!”
최후의 격돌이었다.
강우의 기운과 석탈해의 기운이 맞닿으며 연신 스파크를 일으키고, 온 천지에 날벼락이 내리쳤다.
아까부터 계속 붉게 타오르던 달에도 점차 균열이 생기고 있었다.
두 세계의 충돌에서 발생한 인력으로 해일이 대륙을 집어삼키고, 거센 폭풍이 지상을 뒤집었다.
그야말로 종말의 광경이었다.
강우는 한껏 치켜들었던 검을 다시 한번 지상으로 끌어내렸다.
그러자 그와 동시에 온 별이 비명을 질렀다.
그의 검에 무수한 별들의 염원이 깃들고, 만물의 기운이 녹아들었다.
모든 것이 섞인 그 색은 바로 검은빛이었다.
[……!]
황한수는 별들이 목소리를 내는 광경을 태어나 처음 보았다.
그는 연신 반짝이는 두 눈으로 별들의 폭풍우를 황홀하게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깨달았다.
자신과 대적하던 강우는 진심이 아니었음을.
최후의 석탈해에게 상대가 되지 않으리란 걱정은 기우였다는 걸 말이다.
강우의 뒤에는 자신이 상상조차 하지 못할 무수한 별과 죽음이 함께하고 있었다.
저것이 신의 의지마저 넘어선 자의 진짜 실력.
“아아…….”
별들이 강우의 마력에 반응하며 지상으로 날아들었다.
황한수는 눈부시게 빛나는 별들의 언어를 목격했지만, 그 뜻을 알아들을 순 없었다.
그 아우성 속에서 석탈해도 목소리를 높였다.
“와라!”
콰과과과광!
일순간 검은 태양과 붉은 달 사이에 폭발이 일며 엄청난 섬광이 일었다.
눈이 멀어 버릴 듯한 빛에 황한수가 두 눈을 가리고, 강우는 더욱더 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세상이 전복됐다.
쿠구구구구궁―!
마침내 부서진 건 붉은 달이었다.
검은 태양을 견디지 못한 달이 수천만 개의 조각으로 쪼개져 지상으로 떨어지고, 흔적도 없이 사라진 불새의 울음이 천둥처럼 세계에 메아리쳤다.
그 속에서 낙하하는 검은 인형(人形)은 바로 석탈해였다.
전신이 새까맣게 타 버린 태양왕이 지상으로 곤두박질치고 있었다.
비로소 강우의 검이 오랜 굴레를 찢어발긴 것이다.
“하아… 하아…….”
전력을 다한 강우가 거친 숨을 몰아쉬는 가운데, 하늘의 별들이 석탈해의 추락을 지켜보았다.
신과 인간의 대결.
승자는 다름 아닌 인간이었다.
검은 헌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