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화] 최후의 석탈해 (2)
“감히!”
처음 걸인 황한수의 앞을 가로막은 건 가륜이었다.
놈의 세검이 가슴으로 향하자, 황한수는 그것을 들고 있던 검으로 튕겨 내며 놈을 스쳐 지나갔다.
<쾌(快)>의 권능을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움직임은 가륜을 능가했다.
“이놈!”
뒤늦게 석철이 그의 뒤를 쫓았으나, 그곳에는 강우가 있었다.
콱!
“크윽!”
강우의 공격을 막아 낸 석철의 철퇴가 뒤로 크게 튕겨 나갔다.
고작 단 한 번의 충돌.
하지만 석철은 손목이 떨어져 나가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무슨 힘이……?!’
일평생 힘으로는 밀려나 본 예가 없는 석철이었다.
잔뜩 인상을 쓴 그가 눈앞에 버티고 선 상대를 당황스럽게 바라보는 사이, 강우의 공격이 연거푸 쏟아졌다.
쾅! 쾅! 쾅!
부딪칠 때마다 <진(眞)피바라기>에서 검은 마력이 터지며 엄청난 파괴력을 냈다.
결국 양팔이 전부 터져 나간 석철이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렸다.
터진 근육에서 힘줄과 핏줄이 너덜거리고, 뼈가 훤히 드러났다.
놈이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외쳤다.
“말도 안 된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강우의 검이 또다시 찔러 들어왔다.
양손이 사라졌으니 막아 낼 도리도 없었다.
“제기랄!”
석철이 선택할 수 있는 건 도주뿐이었다.
그는 뒤로 뛰어 꼴사납게 엉덩방아를 찧었다.
평소의 길문이 봤다면 크게 비웃었을 상황이지만, 예상치 못한 결과를 목격한 다른 사도들은 사고가 마비된 듯 움직이지 않았다.
게다가 그런 추태에도 불구하고, 강우는 석철이 그럴 걸 예상이라도 한 듯 어느새 <역(力)>의 힘으로 그의 몸을 옭아매 버렸다.
‘이건……!’
자신이 <역(力)>의 권능에 당하다니.
그것만으로도 이미 실력 차는 증명된 셈이었다.
석칠이 부랴부랴 제 본모습을 끄집어냈으나, 회복할 새도 없이 강우의 <진(眞)피바라기>가 떨어졌다.
강우의 입술이 달싹였다.
“죽어라.”
‘아아……!’
서걱!
명백한 사형선고에 석철의 두 눈이 죽음의 공포로 물들고, 곧 그의 목이 떨어져 나갔다.
“서, 석철 공!”
그 모습을 본 가륜이 아연실색한 얼굴로 소리를 질렀지만, 곧 놈도 동료의 뒤를 따랐다.
어느새 거리를 좁힌 강우가 아무렇지 않게 놈의 목도 간단히 베어 버린 것이다.
목과 분리된 가륜의 머리가 바닥을 허무하게 굴렀다.
“미친!”
뒤늦게 정신을 차린 신홍의 온몸에서 홍염이 일었다.
그러나 그 분노와 다르게 몸은 쉽사리 움직이지 않았다.
삽시간에 사도 둘이 죽어 버린 것이다.
수백 개의 시간선을 격파하면서 사도들의 힘은 행성 하나도 집어삼킬 만한 수준에 이르렀다.
그중에서도 석철은 수위를 다투는 존재.
그런 존재가 손쉽게 목숨을 잃었다.
그들은 본능적으로 강우의 정체를 깨달았다.
“저, 저놈이 오수의 검이다!”
평소 침착하기로 둘째가라면 서운한 호공이 비명 같은 소리를 질렀다.
경기를 일으킨 놈이 서둘러 변이자 부대를 소환하는 사이, 마침내 황한수는 고대하던 석탈해의 앞에 닿았다.
“석탈해!”
놈의 이름을 부르는 황한수의 두 눈이 시뻘겠다.
그러나 그 투지가 무색하리만치 석탈해는 간단히 그에게서 벗어났다.
단순히 팔을 휘저은 것만으로도 거리를 벌린 것이다.
황한수는 미끄럼틀을 탄 것처럼 미끄러져 석탈해에게서 멀어졌다.
“이익!”
황한수가 분한 듯 검을 휘둘러 마력을 퍼부었으나, 역시나 최후의 석탈해에게는 닿지 못했다.
아까부터 놈의 곁을 지키고 있던 흑의 사도, 칠야가 서둘러 그 앞을 막아섰기 때문이다.
놈이 손으로 펼친 망토가 순식간에 수미터나 늘어나더니, 황한수의 마력을 전부 막아 내 버렸다.
결국 황한수는 더 달려들기를 포기하고 각성자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황 노인에게로 향했다.
“할아버지!”
불행인지, 다행인지, 황 노인의 숨은 아직 붙어 있었다.
언제나 굳건히 서서 수많은 생명을 구해 온 황 노인.
그러나 지금은 수하의 품에서 서서히 죽어 가는, 유약한 하나의 생명일 뿐이었다.
“한수야…….”
황 노인이 힘겨운 목소리로 사랑하는 손자의 이름을 불렀다.
그게 곁에 있던 20대의 황한수인지, 아니면 어느새 반백 살을 넘긴 중년의 황한수인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황 노인이 두 눈을 감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미 정신이 혼미한 그는 본능적으로 손자의 이름을 중얼거릴 뿐이었다.
그가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무… 미워하지… 말거라. 너무… 괴로워 말거…….”
그것이 끝이었다.
야속하게도 황 노인은 더 이상 숨을 쉬지 못했다.
오수의 예언처럼 그는 죽음의 사신을 머리맡에 둔 채로 손자를 만났고, 그 찰나의 행운만 누린 채 숨을 거뒀다.
“하, 할아버지!”
“할아버지!”
두 명의 손자가 할아버지의 손을 붙잡고 그를 불렀지만, 이미 황 노인의 손은 미동조차 없었다.
그렇게 황 노인은 사랑하는 손자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최후를 맞이했다.
“아아악!”
걸인 황한수가 하늘을 향해 목청껏 울부짖고, 청익과 젊은 황한수가 눈물을 흘렸다.
그 광경을 지켜보는 각성자와 단원들도 입을 꾹 다물었다.
하지만 황 노인의 죽음이 전쟁의 끝을 알리는 건 아니었다.
그의 죽음은 오히려 새로운 전쟁의 서막.
그것이 도화선이 되어 각성자들이 투지를 불태웠다.
기회를 놓치지 않고 오만석이 목청껏 소리를 질렀다.
“모두 일어서라! 물러서지 마라! 최후의 순간까지 싸워라!”
“와아아아!”
각성자들이 마치 봉기한 의병처럼 떼로 함성을 지르며 각자의 마력을 끄집어냈다.
상대가 미래에서 왔든, 하늘에서 왔든, 지금 이 순간, 그런 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지금은 오랜 시간 물심양면으로 그들을 지켜 온 황 노인에 대한 보답의 시간이었다.
“다 죽여라!”
“더는 물러서지 않는다!”
서유리가 서둘러 강화 마법을 사용하는 사이, 박도진을 선두로 한 각성자 무리가 호공의 변이자 부대와 부딪쳤다.
“이 버러지 새끼들!”
“탈해 공! 모조리 도륙을 내겠소!”
사도들도 분개하며 마력을 끌어 올렸다.
하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사도의 권능이 발현되지 않았다.
어느새 강우가 불러낸 <검은 태양> 때문이었다.
붉은 달에 가려져 있던 태양이 다시금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이익… 상관없다! 인간 따위 전부 죽인다!”
“우리가 누군지 보여 줘라!”
곧 한 치 물러섬 없는 전투가 벌어졌다.
곳곳에 생성된 차원의 틈에서 마물들이 쏟아져 나오는 가운데, 레비아탄의 <스켈레톤> 부대가 달그락 소리를 내며 적에게 달려들고, 사도들의 손속에 각성자들의 피와 살이 튀었다.
김민정의 마탄이 신홍의 이마를 관통했으며, 사도 아효의 빙결창(氷結槍)이 로드리게의 어깨를 꿰뚫었다.
박도진와 유아라의 공격에 마물들이 양분되고, 진중의 발차기에 각성자 십여 명의 사지가 뜯겨 나갔다.
서유리와 왕린의 마법이 쉴 새 없이 전장의 상공을 번뜩였다.
그리고 그 개판인 전장을 뒤로한 채로 네 사람이 서로와 마주 섰다.
강우와 황한수.
석탈해와 칠야.
대치하던 석탈해가 말했다.
“칠야, 넌 다른 사도들을 도와라.”
“…….”
칠야는 고개를 숙여 보인 뒤, 그 즉시 전장으로 향했다.
움직임이 얼마나 쏜살같은지, 그 신형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마지막 남은 수하를 전쟁터로 보낸 석탈해의 시선이 저 멀리서 다가오는 황금빛 커튼에 닿았다.
그는 이미 세계의 변화를 감지하고 있었다.
지구에서 속속들이 사라지는 기운들.
그 뜻은 명백했다.
“…그런가. 오수는 날 우주로 보내려던 게 아니었군.”
석탈해는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오수의 작전은 석탈해를 우주 밖으로 내보내는 게 아니었다.
이번 시간대의 모두를 다른 우주로 옮기려는 것이지.
황 노인의 희생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
“날 가두려는 속셈이구나.”
돌이켜 보면 실로 엄청난 일이었다.
석탈해 하나를 다른 시간선으로 보내는 것보다 지구의 모든 인류를 다른 시간선으로 보내는 게 더 적은 에너지를 소모한다니 말이다.
강우는 부정하지 않았다.
오수의 계획이 어떻든 그런 건 자신에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는 오직 자신의 길을 갈 뿐이었다.
석탈해를 처리하고, 장혜진이 있는 지옥으로 간다.
그것만이 그가 원하는 바였다.
석탈해의 웃음이 조금 더 커졌다.
“날 이 시간선에 얼마나 가둬 둘 수 있을지 나도 궁금하군.”
탓!
석탈해의 독백은 거기서 끝이었다.
가장 먼저 황한수가 검은 마력을 끌어내며 달려들자, 석탈해 역시 붉은 마력을 내비치며 검을 소환했다.
어느새 놈의 손에 쥐어진 붉은 검.
한때 <태양의 검>이라 불리던 마력 무구였다.
“와라, 오수의 검들이여. 너희가 감히 내게 대적할 수 있는 존재인지, 어디 한번 증명해 보아라.”
“닥쳐라!”
강우보다 석탈해에게 먼저 닿은 황한수의 검이 놈의 머리맡을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석탈해는 별다른 감흥도 없다는 표정으로 그의 공격을 피하고는, 사선으로 검을 올려 그었다.
콰과과과광!
검이 휘둘러졌을 뿐인데, 황한수의 몸에서 커다란 폭발이 일었다.
어느새 온몸이 그을린 황한수가 신음을 흘리며 뒤로 물러서는 가운데, 이번에는 강우의 <진(眞)피바라기>가 검은 불길을 휘날리며 석탈해에게 쇄도했다.
검은 사신과 붉은 사신의 격돌이었다.
검은 태양과 붉은 달이 각자의 창조주를 비추는 가운데, 강우가 놈의 목을 향해 검을 찔렀다.
<살(殺)>.
그러자 석탈해는 팔을 휘둘러 <살(殺)>의 궤적을 바꿔 버렸다.
강우로선 처음 있는 일이었다.
곧 석탈해를 비껴 나간 검은 쐐기가 지상에 수십 킬로짜리 상처를 남겼다.
콰드드드득―!
강우는 포기하지 않고 또다시 검을 휘둘렀다.
기운을 차린 황한수도 합류해 거기에 검을 더했지만, 둘의 협공에도 석탈해는 여유로웠다.
놈이 눈앞을 스치는 검을 불길을 보며 중얼거렸다.
“너희에게 감히 죽음을 나누어 주었는가.”
캉!
이미 <검은 고리>를 최대치로 생성한 상태이지만, 강우의 검은 허무하리만치 쉽게 막혔다.
석탈해가 손을 휘저어 <진(眞)피바라기>를 튕겨 내자 검은 불길마저 사그라들었다.
“하지만 아직은 어설퍼.”
콰과과과과―!
삽시간에 쇄도한 붉은 폭풍이 강우와 황한수를 강타했다.
사납게 불어닥친 열풍(熱風)에선 짙은 피비린내가 묻어 나왔다.
강우는 전신이 타들어 가는 듯한 통증을 느끼며 이를 악물었다.
상대와의 격차가 어마어마했다.
언뜻 보니 황한수도 놈의 마력을 맞아 고전 중이었다.
이미 강우와의 전투로 그는 상당수의 마력을 소모한 상태.
지금 두 발을 바닥에 붙이고 선 것만 해도 대단한 일이었다.
그의 코와 입에서 붉은 핏물이 줄줄 흐르고, 열풍에 말라 그대로 입가와 턱에 덕지덕지 말라붙었다.
그러는 사이, 점차 거리를 좁혀 오던 황금빛 커튼이 이 전장에도 닿았다.
저 멀리 서 왕린의 <전음>이 들려왔다.
[가, 각성자들이 사라진다! 제기랄! 대체 또 무슨 일이 벌어지려는 거…….]
왕린의 말은 다 이어지지 못했다.
그도 곧 황금빛 기둥에 휩싸여 사라져 버린 것이다.
[마스터!]
[강우 씨!]
[한강우……!]
[하, 한강우 님!]
그 뒤로도 끝맺음을 맺지 못한 몇 개의 <전음>들이 강우의 귓가를 울렸다.
그 끝은 고요였다.
방금 전까지 사투를 벌이던 존재는 모두 사라져 이곳에 남은 건 세 사람에 불과했다.
어느새 열풍도 사라진 상태.
석탈해가 황금빛 커튼만 하늘거리는 주변을 둘러보며 아쉬운 듯 이야기했다.
“안타깝게도 구경꾼들이 모두 사라졌군.”
“…….”
그러나 그들의 싸움에 구경꾼은 필요하지 않았다.
“더 보여 줄 게 없다면, 다시 내 차례로구나.”
석탈해는 여전히 웃음을 머금은 얼굴로 검을 들었다.
그러자 검에서 홍염이 피어오르고, 하늘에 떠 있던 붉은 달도 뜨겁게 달아올라 불길이 일었다.
그 뜨거운 기운에 지상이 녹아내렸다.
놈을 <태양왕>이라 불리게 계기가 된 광경이었다.
진실은 아이러니하게도 ‘달’이었으나, 세상은 그 어폐에 전혀 개의치 않았다.
달이든 태양이든, 그 파괴력 앞에선 그 어떤 표현도 중요하지 않았으니까.
콰르르르릉!
석탈해의 부름에 응하듯 하늘이 격동하더니, 곧 구름마저 붉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그야말로 지옥이었다.
온 천지에 시뻘건 핏물이 뚝뚝 떨어졌다.
기적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곧 구름들이 뭉쳐져 한 마리의 불새가 태어났다.
온몸이 홍염으로 불타오르는, 거대한 새.
놈이 가소롭다는 듯 지상을 향해 크게 날갯짓하며 포효했다.
“어디 한번 받아 보아라.”
곧 석탈해의 검을 따라 불새가 떨어졌다.
검은 헌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