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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헌터-173화 (174/186)

[173화] 검은 태양 (6)

최후의 석탈해와 사도들의 등장으로 동부 전선은 순식간에 쑥대밭이 되었다.

화르륵!

신홍의 불길이 양구의 숲을 새빨갛게 태우고, 장창을 든 격(擊)의 사도 길문이 각성자들을 처참하게 살육했으며, 쾌(快)의 사도 가륜이 사방을 누비며 인간들의 아킬레스건을 끊었다.

“사, 살려 줘!”

“끄아악!”

하나하나가 5차 각성자에 달하는 여덟 명의 사도.

레비아탄과 박도진을 위시한 한국의 각성자들이 사력을 다해 막아섰지만, 대재앙 앞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았다.

결국 그들도 다른 각성자들처럼 밀려나 조금씩 피신하기 시작했다.

콰득!

사방에서 피가 솟구치고, 동강 난 팔다리가 장난감처럼 나뒹굴었다.

당장 각성자들이 할 수 있는 건 달아나며 살아남길 기도하는 것뿐.

그나마 레비아탄의 해골병들이 앞을 막아서지 않았더라면, 지금보다 더 많은 사망자가 나왔을 터다.

그때, 연신 화염을 소환하던 신홍이 목이 잘려 누워 있는, 익숙한 시체를 보며 낄낄댔다.

“푸하하! 길문아, 여기 좀 봐라! 네놈 목이 달아났다! 모가지가 없어!”

“미친…… 얼마나 약해 빠졌으면 인간한테 당해? 응? 뭐야? 저건 너 같은데? 맞네! 크크크!”

“뭐?”

신홍과 길문은 서로 자신의 시체를 보며 주거니 받거나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어느새 뒤에서 나타난 역(力)의 사도 석철이 철퇴를 어깨 위로 걸친 채 말했다.

“본래 있던 곳에서나 여기나 나약하기는 마찬가지군.”

대놓고 깔보는 언사에 발끈한 길문이 인상을 구겼다.

“뭐냐, 웅담? 왜 또 시비인데?!”

“하긴, 언제는 네놈이 강한 적이 있었던가?”

“하… 내가 너 그 주둥이 다물라고 했지? 주둥이에 격(擊) 자 좀 새겨줘?”

“크큭, 다물면? 감당은 가능하고? 역(力)!”

쿠구구구궁!

“으악!”

석철이 주먹을 하늘로 들어 올리자, 천지가 경동하며 달아나던 각성자들이 일제히 바닥으로 철퍼덕 자빠졌다.

석철이 어떠냐는 듯 그 광경을 손바닥으로 가리키며 득의양양한 얼굴로 길문에게 말했다.

“봐라, 이 정도는 되어야 탈해 공을 섬기는 사도라고 할 수 있지 않겠냐? 너와 나는 애초부터 급이 달라.”

“하, 그저 권능발인 자식이…….”

“뭐? 권능발? 권능 없이 붙어 볼래, 새꺄?”

석철과 길문이 당장에라도 맞붙을 듯 으르렁대자, 보다 못한 뇌(雷)의 사도 진중이 나섰다.

“다들 지금 그럴 때가 아닌 것 같은데. 저쪽을 봐라.”

“…응?”

진중이 손가락을 들어 뒤편을 가리키자, 석철이 의아하다는 듯 그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오호?”

석철이 작게 입을 벌렸다.

과연, 진중의 말대로 지금은 길문과 티격태격할 때가 아니었다.

그가 입으로 쩝, 소리를 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직 이 시간선은 권능을 감당할 수 있을 때가 아닐 텐데……. 우릴 부른 그놈 때문인가? 그러고 보니 여긴 왜 이렇게 성장이 빨라? 벌써 4차 각성자가 수두룩하잖아?”

석철이 그렇게 평할 만도 했다.

그가 <역(力)>의 권능을 사용했음에도 바닥에 두 발을 붙이고 선 존재가 무려 열이 넘었기 때문이다.

“모두 떨어지지 말아요!”

<공간 전이>로 일행을 대피시킨 서유리가 다급하게 원형의 보호장을 펼친 가운데, 왕린과 오만석이 양옆에서 그녀를 도와 <마력 보호막>을 사용하고 있었다.

그 안에 있는 건 검계와 5대 길드의 주요 인사들이었다.

어느새 주변으로 모여든 사도들이 이쪽을 흥미롭게 바라보는 사이, 보호막 중앙에 자리한 황 노인이 옆에 선 황한수를 불렀다.

“한수야.”

“…예.”

황한수는 여전히 울분이 가시지 않은 얼굴이었다.

실제로 보지는 못했지만, 강우가 할아버지를 죽이는 장면이 계속해서 생생하게 머릿속에서 재생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다른 시간선에서 온 또 다른 자신의 기억인지, 아니면 그저 자신의 상상에 불과한 것인지, 그는 알지 못했다.

황 노인이 물었다.

“그자가 보이느냐?”

황 노인이 말하는 건 또 다른 자신이었다.

황한수는 마지못해 정신을 집중했고, 그자가 자신의 주변에 있음을 감지했다.

하지만 <마력 장벽>이 사라진 지금에도 강우와 그는 보이지 않았다.

마치 다른 세계로 분리된 것처럼.

“주위에 있지만… 보이지는 않아요. 아무래도 다른 차원으로 간 것 같아요.”

“그렇구나.”

황 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는 사이, 석탈해의 명령을 받은 사도들이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한 번은 서유리의 마법으로 견뎌 냈다고 한들, 두 번은 무리였다.

황 노인은 마력 장막 너머로 아까부터 이쪽을 주시하고 있는 석탈해를 바라보았다.

‘…석탈해.’

<심안>을 사용했지만, 당연하게도 놈에게서 볼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결국 황 노인이 할 수 있는 건 단 한 가지뿐이었다.

“한수야.”

“예, 할아버지.”

“미안하구나.”

“예?”

황한수가 말릴 새도 없이 황 노인은 서유리의 보호막 밖으로 나섰다.

[내가 잠시 시간을 끌어 보겠다. 틈을 봐서 최대한 멀리 달아나라.]

“수장님!”

“노, 노인장!”

당황한 모두가 그를 부르는 사이, 황급히 황 노인을 붙잡아 끈 청익이 앞을 가로막았다.

황 노인이 자신을 막아선 오랜 단원을 보며 말했다.

“비켜라. 내 잠시 다녀올 것이다.”

“안 됩니다. 대화가 안 통할 놈들입니다!”

“날 믿어라. 난 아직 죽을 때가 아니다. 내 심안을 몰라서 그러느냐?”

평소라면 황 노인이 모래로 쌀알을 만든다고 해도 믿을 청익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아무리 황 노인이 뛰어난 각성자라고 한들, 저 괴물들 앞에선 수초도 버티지 못하고 갈기갈기 찢겨 나갈 것이다.

평생을 그를 모시기로 한 청익으로서는 결코 두고 볼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도 안 됩니다.”

“비켜라. 더는 말하지 않겠다.”

“안 됩니다. 저는 수장의 호위잖습니까. 같이 가겠습니다.”

“…….”

“그곳이 어디든.”

청익의 표정은 완고했다.

황 노인을 부모 삼아 자라 온 그였다.

만약 그날 공중전화 부스 옆에 있던 그를 황 노인이 거둬 주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청익은 거리나 전전하다 어느 이름 모를 <균열>에서 짐꾼이나 맡아 살아갔을 것이다.

황 노인은 그에게 새로운 삶을 준 존재.

노인과 생사를 함께하는 건 그에게 있어선 당연한 일이었다.

이럴 때를 대비해서 유아라를 키운 게 아니었던가.

“…어쩔 수 없구나.”

결국 황 노인은 청익의 고집을 이기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마지막으로 사랑스러운 손자의 얼굴을 한 번 더 확인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내 새끼.’

황 노인은 그런 손자가 행여라도 슬픔이나 원망에 잠겨 버릴까 하는 생각에 견딜 수가 없었다.

“한수야, 그를 용서해 주거라.”

“할아버지!”

황한수도 따라가겠다며 성화를 부렸지만, 그는 곧 왕린의 신호를 받은 제자들에게 제압돼 옴짝달싹못했다.

“시발! 이거 놔!”

황한수가 몸부림을 치자, 왕린이 그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그러고는 잔뜩 굳은 얼굴로 말했다.

“나설 때 나서라.”

근래 없던, 묵직한 음성이었다.

왕린은 고개를 돌려 황 노인과 시선을 마주했다.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시간이었다.

그 짧은 시간, 떠오르는 말은 별로 없었다.

[고생했수.]

[…한수를 부탁한다.]

그렇게 황 노인과 청익은 보호막을 벗어나 석탈해에게로 향했다.

“뭐야? 저것들이 뭔 개수작이야?”

사도들은 당장에라도 황 노인과 청익을 찢어 죽일 듯했으나, 황 노인의 다음 말이 그들을 멈춰 세웠다.

“전할 말이 있다! 오수의 전언이다!”

* * *

강우는 <진(眞)피바라기>를 고쳐 쥐었다.

그러고는 있는 힘껏 검을 휘둘러 <균열 찢기>를 시도했다.

5차 각성이 형성한 세계는 <균열>과는 달랐으나, 그 본질은 비슷한 구석이 있었다.

츠츠츠츳!

하지만 기대와 달리 세계는 미세한 상처만 생길 뿐, 길이 열리지는 않았다.

이곳은 시간선을 수십 번도 더 오간 황한수의 세계.

당연히 호락호락할 리 없었다.

황한수가 비웃음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소용없어. 이 세계는 순전히 널 가둬 두기 위해 만들어진 거니까.”

석철의 피가 효과는 있었는지, 황한수의 안색은 아까보다 훨씬 더 나아진 상태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원활하게 움직일 수 있는 상태도 아니라서, 유의미한 회복까지는 적어도 십여 분은 더 걸릴 듯했다.

강우가 주위를 둘러보며 물었다.

“…밖에서 희미하지만 석탈해의 기운이 느껴진다. 아무래도 최후의 석탈해가 온 것 같군.”

말투는 침착하지만, 심장박동 수는 빨라졌다.

그런 강우를 보며 황한수가 씨익, 웃음을 흘렸다.

“그거 잘됐군.”

결국 강우는 더 참지 못하고 그에게로 다가가 멱살을 움켜쥐었다.

“말해라. 여기서 어떻게 하면 나갈 수 있지?”

“몰라. 알아서 나가 보라니까.”

고집스런 눈빛을 보아하니 순순히 입을 열 것 같지 않았다.

나직이 한숨을 흘린 강우가 손을 풀었다.

그러고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나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미안하다.”

“…….”

진심이었다.

강우는 진심으로 황한수에게 사과했다.

한참 동안 그러고 있던 강우가 고개를 들어 어렵게 말을 꺼냈다.

“나는 석탈해를 믿었다. 놈이 들려주는 이상과 보여 주는 행보를 믿었지. 이제 와서 이런 말 해 봐야 소용없다는 거 알아. 하지만 부탁하겠다. 이곳 사람들은 죄가 없다. 날 내보내 다오.”

황한수는 그런 강우를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하지만 수십 년을 묵혀 온 감정이었다.

고작 사과 한 번 따위에 해소될 만큼 그 감정은 가볍지 않았다.

황한수는 강우의 사과에 오히려 더 크게 조소하며 소리쳤다.

“하, 사과? 그렇다면 너도 석탈해한테 사과나 받고 돌아갈 일이지, 왜 그놈들을 쳐 죽이고 있었지? 잘 생각해 봐! 과연 네가 사과로 모든 걸 넘어갈 수 있을지! 너와 내가 다를 게 뭐냐?! 너도 석탈해 하나 잡아 죽이겠다고 이 시간선을 넘어왔잖아!”

대꾸할 수 없을 만치 분명한 사실이었다.

강우와 황한수의 입장은 크게 다를 것도 없었다.

하지만 모든 인간은 자신의 입장에서 이기적이고, 강우 또한 그것을 모르지 않았다.

“네가 석탈해를 죽이고 싶어 하는 것처럼, 나는 온 세상이 망해 버리길 원해! 내 가족이 없는 세상을 난 전부 다 지워 버릴 생각이다!”

설득은 실패했다.

결국 강우는 최후의 패를 꺼내 드는 수밖에 없었다.

“네가 처음 시간선을 넘었을 때를 기억하나?”

“…뭐?”

황한수가 그게 뭔 뚱딴지같은 소리냐는 표정으로 물었다.

“당연히 기억하지! 난 오수를 통해 넘어왔다. 자괴감에 스스로 죽음을 끊으려던 순간, 오수가 날 데려왔지. 내 영혼을 제물로 삼아서 말이야.”

역시.

황한수는 아직 제대로 된 진실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강우가 굳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아니. 그건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틀렸다고?”

“그래. 넌 네 영혼을 바쳐 이곳으로 온 게 아니다. 영혼은 새로운 삶을 살게 된 대가이지, 시간선을 넘는 대가가 아니니까.”

“그게… 무슨 소리지?”

강우가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자신이 장혜진의 영혼을 제물 삼아 시간선을 넘어왔다는 걸 알게 됐을 때의 심정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아마도 황한수 또한 같은 감정을 느끼게 되겠지.

“네 할아버지… 황 노인. 검계의 수장.”

황한수의 동공이 점차 커져 갔다.

“그는 네 곁에 있었다, 줄곧.”

“…뭐라고?”

검은 헌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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