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화] 검은 태양 (5)
쿨럭―!
고통스럽게 울혈을 토한 황한수가 잔뜩 찡그린 얼굴로 자신의 상처를 살폈다.
강우의 공격은 다행히 심장을 비껴갔으나, 그렇다고 해서 멀쩡한 건 아니었다.
왼쪽 가슴 위로 뼈와 살이 훤히 드러난 구멍.
그곳에서 피가 철철 흘렀다.
‘살(殺)이라… 퍽 어울리는 이름이군.’
게다가 기운이 어찌나 강렬했는지, 그것을 받아 내는 것만으로도 온몸의 장기가 죄다 뒤틀린 듯했다.
황한수가 간신히 상체를 일으키는 사이, 저 멀리서 이쪽으로 걸어오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자욱한 먼지 탓에 보이지는 않지만, 상대가 강우라는 걸 깨닫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곳은 자신과 한강우, 단둘만이 존재할 수 있는 세계이니까.
“…….”
더 이상 저항할 힘은 남아 있지 않았다.
황한수는 이미 온몸이 만신창이였다.
몸도, 마음도.
그는 곧 자신의 심장을 찔러 올 상대의 검을 기다리며 품속에서 작은 단검 하나를 꺼내 들었다.
‘그때가 여름이었던가.’
황한수는 그리움이 물씬 묻어나는 눈빛으로 단검의 손잡이를 어루만졌다.
언젠가 청익이 처음으로 검을 가르쳐 주던 날, 그가 유럽에서 사 왔다며 건네준 검이었다.
몸은 힘들어도 성취와 웃음은 끝없이 이어지던 나날들.
수백, 수천 번도 더 넘어진 그날의 기억이 황한수는 여전히 생생했다.
하지만 여전히 살아 숨 쉬는 그날의 기억과 달리 자신의 곁에 남은 건 아무도 없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이미 그들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으니까.
그들은 전부 죽었다.
석탈해와 신라, 그리고 한강우의 손에 의해서.
황한수가 아무리 수천수만의 시간선을 떠돈다고 해도, 수백의 강우와 석탈해를 죽인다고 해도 그가 사랑했던 그들을 다시 만날 순 없었다.
가슴속으로 공허한 바람이 불었다.
그때, 마침 강우가 먼지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
둘은 잠시 말없이 서로를 묵묵히 바라보았다.
그들은 이 새로운 세상 속에서 유일하게 같은 시간선에서 온 존재였다.
각기 다른 이유로 시간선을 넘어왔지만, 목표는 같았다.
바로 ‘복수’.
강우가 황한수보다 무딘 눈빛으로 말했다.
“이제 와서 사과한다고 한들…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겠지.”
“잘 아네. 그러니까 추잡스럽게 굴지 말고 어서 죽여.”
황한수는 정말로 삶에 미련이 없는 얼굴이었다.
강우는 한없이 텅 빈 그 얼굴을 보며 이상함을 느꼈다.
복수를 위해 시간선까지 넘어온 복수자치고는 너무도 쉽게 그것을 포기하는 눈치였기 때문이다.
뒤늦게 그 뜻을 깨달은 강우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여전히 힘겨루기 중인 두 개의 태양.
그중 하나는 자신의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황한수의 것이었다.
“…날 이곳에 가둘 생각이었군.”
강우의 말에 황한수가 씨익, 미소를 보였다.
하지만 통증 탓인지, 그는 얼마 못 가 다시 인상을 찌푸렸다.
퉤, 피가래를 뱉은 그가 말했다.
“크크… 그래. 우리가 어떻게 만났는데 이렇게 헤어지는 건 아쉽잖아?”
“…소용없는 일이다.”
“소용 있는지, 없는지는 내가 알 바 아니고.”
웃음을 흘린 황한수가 꺼낸 것은 담배였다.
담배를 입에 문 그가 한기로 덜덜 떨리는 손으로 간신히 라이터를 들어 불을 붙였다.
“내가 그저 네 뒤꽁무니나 쫓는다고 생각했다면, 큰 오산이야.”
후.
담배 연기가 주변으로 퍼졌다.
강우가 여전히 무정한 눈으로 물었다.
“무슨 속셈이지? 이런 건 시간 때우기에 불과하다.”
“시간 때우기라…….”
자조적으로 중얼거린 황한수가 말했다.
“맞아, 시간 때우기.”
“…무슨 꿍꿍이지?”
“애초부터 내가 널 이길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어. 그랬다면 오수가 날 이곳으로 보내지도 않았겠지. 놈에게 난 네 먹잇감이었을 테니까 말이야.”
“…….”
강우에게서 말이 없자, 황한수의 미소가 더 커졌다.
“그리고 널 이길 생각도 없었고. 나는 그저 온 세상이 망하길 원할 뿐이야. 너도, 세상도.”
무슨 뜻일까.
강우는 그 의중을 즉각 파악하기 어려웠다.
“하고 싶은 말을 제대로 해라.”
“내가 이곳에 오면서 꽤 많은 힌트를 남겼다, 이 말이야. 가령 이 시간선으로 오고 싶어 하는 손님을 위해서?”
“너…….”
그제야 강우는 황한수가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깨달았다.
“…이곳으로 최후의 석탈해를 불렀나?”
황한수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맞아. 이곳을 찾을 힌트를 여기저기 던져 놨지. 아마도 내가 닿은 시간선에 놈도 닿는다면… 금세 알아채겠지.”
강우는 어째서 그런 짓을 했느냐는 따위의 멍청한 질문은 하지 않았다.
그의 목표는 명확했으니까.
― 나는 그저 온 세상이 망하길 원할 뿐이야. 너도, 세상도.
황한수가 원하는 건 파멸(破滅)이었다.
그가 이야기를 계속했다.
“곧 최후의 석탈해가 이 땅에 도달할 거다. 그리고 넌 이곳에 남아 나와 함께 이 세상의 멸망을 지켜봐야 해.”
황한수는 진심으로 세상의 멸망을 원하는 듯했다.
그가 비웃음 가득한 얼굴로 한마디를 더 보탰다.
“바로 여기서 말이지.”
황한수가 만든 이 세계는 그야말로 감옥이었다.
오직 한강우 한 사람만을 위해 만든 감옥.
강우는 예상보다 견고한 세상을 보며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현재 황한수는 자신을 이곳에 가둬 놓고, 최후의 석탈해가 이곳 시간선을 망쳐 버리는 걸 구경할 생각이었다.
“넌 이곳에서 나갈 수 없어. 내가 죽으면… 이 세계도 영원해지거든. 우습지? 죽음으로 완성되는 세계라니. 너와 나에게 정말 딱 맞지 않냐?”
황한수는 이젠 아예 바닥에 벌러덩 누워 버렸고, 강우는 그를 무시한 채 이곳을 벗어날 방도를 찾았다.
마음이 급했다.
정말로 최후의 석탈해가 온다면, 밖에 있는 사람들은 전부 죽을 테니까.
잠시 고민하던 강우는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뭐 하는 거야?”
그것은 주사기였다.
황한수가 미심쩍게 바라보는 사이, 강우는 주사를 강제로 그에게 투약했다.
“놔, 시발!”
힘껏 몸부림쳤으나, 부상당한 그가 강우의 근력을 이겨 내기엔 무리였다.
주사를 다 놓은 강우가 말했다.
“우린 이곳에서 죽을 수 없다. 할 일이 많으니까.”
황한수는 강우의 얼굴에서 알 수 없는 두려움을 느꼈다.
* * *
동부 전선에 거센 폭풍이 일었다.
콰과과과광―!
“으아악!”
“제기랄! 다들 물러서라!”
왕린이 서둘러 각성자 연구소에서 가져온 <마력 장벽>을 치는 사이, 살아남은 각성자들은 황급히 전선을 이탈했다.
쿠구구구구!
반투명한 하늘빛 장벽이 크게 흔들렸다.
반경 1.5킬로미터짜리 장벽 안은 이미 온통 가득한 먼지로 인해 안이 들여다보이지도 않았다.
왕린이 잔뜩 핏발 선 얼굴로 장벽에 마력을 쏟아부으며 소리쳤다.
“존나 힘드네!”
마물의 남하를 막으려고 준비한 장벽이 이제는 강우와 황한수의 전장을 최소한으로 국한하는 데 쓰이고 있었다.
사도와 수천의 마물을 상대할 때도 굳건하던 장벽이 고작 두 사람의 싸움에 금방이라도 깨질 듯 진동했다.
쿵! 쿵!
아슬아슬한 힘겨루기 속에서 왕린의 제자들은 장벽에 균열이 생길 때마다 부랴부랴 달려가 그곳을 보수하기 바빴다.
여전히 장벽이 위태롭게 흔들리는 가운데, 어느새 다가온 청익이 외쳤다.
“방금 도봉순한테 연락받았다! CCTV 확인했더니, 석탈해와 사도를 죽인 게 황한수가 맞단다! 제길,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냐?!”
그러자 왕린도 신경질 난 얼굴로 소리를 질렀다.
“난들 아냐?! 나도 궁금해서 대가리가 깨질 지경이다!”
이미 황 노인을 통해 걸인검객이 미래에서 온 황한수라는 걸 인지한 그들이었다.
게다가 미래의 황한수는 전 세계를 전장으로 몰아넣은 석탈해와 사도의 목도 간단히 베어 버렸다고 했다.
‘한수가 미래에 그렇게나 강해지다니…….’
청익은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충격의 연속이었다.
여전히 황 노인과 황한수가 저 멀리서 대화 중인 사이, 그쪽을 슬쩍 살핀 청익이 입술을 깨물었다.
목이 잘린 채로 나타난 석탈해와 갑자기 둘로 늘어난 황한수.
그리고 세계를 멸망시키기 위해 온다는 또 다른 석탈해.
수장과 검계를 베었다는 한강우.
그 모든 것을 단시간에 이해하기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웠다.
청익이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으며 말했다.
“그럼 이제 뭘 어떡해야 하는 거야?”
“일단 주변 각성자들부터 귀환하라고 해! 여기 있다간 다 뒈질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이미 서유리와 오만석을 위시한 지도부가 각성자들을 대피시키는 중이었다.
청익의 시선을 확인한 왕린이 다시 말했다.
“할 것 없으면 수장한테 묻든가! 내가 네 엄마도 아닌데 왜 나한테 자꾸 묻냐!”
“네가 가장 가까이 있으니까 그렇지!”
“시끄럽고, 얼른 네 엄니한테 가 봐!”
엄마는 수장을 일컫는 말로, 왕린이 청익을 놀릴 때 종종 쓰는 단어였다.
“새끼! 너 잘났다!”
결국 청익은 몸을 돌렸다.
<마력 장벽>이 위태로워 보였으나, 농담할 여유가 있는 걸 보니 당장 무너질 것 같지는 않을 듯했다.
그는 서둘러 황 노인에게로 향했다.
이럴 때 수장의 명령을 받는 게 당연한 일이지만, 그간 하도 자율적으로 활동한 탓에 그 당연한 사실을 잊고 있었다.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저, 저것 좀 보십시오!”
다친 각성자를 부축하던 도봉팔이 갑자기 하늘을 향해 손가락질했다.
그의 경악한 얼굴에서 청익이 불길함을 느끼는 사이, 다른 이들도 창공에 뜬 새로운 구체를 발견했다.
그것은 달이었다.
불길하도록 붉은 보름달.
마치 우주에서 이탈한 것처럼 달이 지구로 떨어지고 있었다.
본능적으로 위험을 느낀 청익의 신경이 곤두섰다.
“우라질… 저건 또 뭐야!”
지상의 모두가 갑작스럽게 강림한 붉은 달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달 안에서 그림자를 발견한 로드리게가 소리쳤다.
“뭐, 뭔가가 있슴니다!”
달이 점차 지상으로 떨어지는 가운데, 청익도 로드리게가 말한 ‘그림자’를 발견했다.
그것은 그림자가 아니었다.
사람이었다.
마치 방금 불속에서 튀어나온 것처럼 행색이 붉은 남자.
황한수에게 목이 잘려 죽은 석탈해였다.
하지만 모두가 그 사실을 인지하기도 전에 위험을 느낀 청익이 목이 터져라 외쳤다.
“모두 피해라!”
하지만 이미 석탈해의 팔이 휘둘러진 뒤였다.
콰과과과과―!
“끄아아아악!”
“크악!”
고작 팔 한 번 휘저었을 뿐이다.
하지만 그 결과는 처참했다.
팔의 궤적대로 대지가 파헤쳐지더니, 그대로 솟구쳐 주변에 있던 각성자 수백을 뒤덮어 버렸다.
수십의 각성자가 제 몸의 수십 배에 달하는 바위에 깔려 절명하고, 미처 피하지 못한 백여 명의 각성자가 크고 작은 부상을 입고 신음했다.
그중에는 부상자를 부축하던 도봉팔과 유아라도 있었다.
도봉팔의 한쪽 다리가 처참하게 으스러지고, 유아라도 다친 듯 오른팔을 붙잡은 채 신음했다.
“봉팔아!”
“유아라 씨!”
청익과 박도진이 각각 두 남녀를 향해 달려갔다.
청익도 비산한 바위에 맞아 어깨가 다쳤지만, 두 사람에 비하면 찰과상에 불과할 정도였다.
그러는 사이, 달과 함께 나타난 석탈해가 서서히 지상에 두 발을 붙였다.
그가 홍염과 같은 두 눈으로 주변을 살피며 말했다.
“…벌레들뿐이군. 정리해라.”
서걱!
그와 동시에 주변에 있던 각성자 둘의 목이 허공을 날았다.
최후의 석탈해.
진정한 악마의 등장이었다.
검은 헌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