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화] 검은 태양 (3)
황한수는 청익과 왕린, 한선화와 도봉팔까지 합류한 뒤에야 가까스로 흥분을 가라앉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분이 완전히 식은 건 아니었다.
그가 여전히 강우를 죽일 듯이 노려보는 가운데, 사건의 주인공인 강우는 입을 다문 채 지휘소 의자에 앉아 있었다.
중재에 나선 건 왕린이었다.
“설명해 봐, 지금 황한수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그러나 강우는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어디서부터 이야기해야 할까.
그는 작은 한숨과 함께 눈앞을 가린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 뭐든 건 다 때가 있다?
이쯤 되고 나니 청익의 말이 마치 복선이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의 말대로… 지금은 진실을 말하기에 너무 늦어 버렸기 때문이다.
진즉에 사실을 밝혔다면, 적어도 황 노인에게만이라도 진실을 밝혔다면, 사태가 이 지경까지 이르지는 않았을지도 몰랐다.
“…….”
하지만 자책은 이미 늦었고, 계속해서 입을 다물고 있을 수도 없었다.
결국 강우는 모두의 시선을 받으며 그날의 기억을 떠올렸다.
석탈해가 검계 척살령을 내리고, 그에 따라 황 노인을 쫓던 그날을.
그의 입술이 서서히 열렸다.
“나는…….”
황 노인의 심장에 검을 찔러 넣은 건 분명 강우 본인이었다.
꼭 석탈해의 명령 때문만은 아니었다.
강우도 이전부터 검계를 탐탁지 않게 여겼을뿐더러, 그런 검계의 수장인 황 노인이 석탈해의 암살을 지시했다는 점이 그의 심기를 건드린 탓이었다.
당시의 강우는 신라, 그 자체라고 불러도 전혀 무색하지 않을 만큼 길드에 녹아 있었다.
그렇기에 황 노인은 그의 철천지원수나 다름없었다.
자신이 따르고 사랑하는 길드장을 죽이려 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
강우는 고개를 들어 어느새 나타나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황 노인과 마주했다.
환영임이 분명하나, 온몸이 피투성인 그를 보고 있자니 그날의 상황이 더욱 생생하게 떠올랐다.
자신의 어깨를 붙잡고 파르르 몸을 떨던 황 노인의 두 손과 서서히 식어 가던 피부, 그리고 삶의 마지막을 앞두고도 흔들림조차 없던 강인한 눈빛까지.
황 노인은 입으로 연신 피를 쏟으면서도 자신이 할 말을 잊지 않았다.
― 불쌍한 놈.
황 노인은 지금의 상황을 예언한 걸까.
그때만 해도 죽어 가는 늙은이의 마지막 도발 정도라 여겼는데… 여기까지 와 보니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강우는 여전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노인의 환영을 보며 담담한 어조로 그날의 일을 계속해서 이야기했다.
그의 이야기가 길어질수록 사람들의 얼굴은 점차 굳어 갔고, 종종 신음을 흘리기도 했다.
“…황 노인은 그렇게 죽었다.”
마침내 강우의 이야기가 다 끝났을 때.
지휘소 안에는 다시 침묵이 맴돌았다.
가장 먼저 입을 연 건 청익이었다.
그가 믿기지 않는 듯한 얼굴로 물었다.
“정말… 네가 수장을 죽였다고? 네 손으로?”
“…그래.”
“허.”
청익이 허탈하게 웃었다.
“수장이 죽고 나서 검계는 완전히 멸망했고?”
“…대부분의 단원은 나와 신라 길드원에 의해 처단되었다. 간신히 달아났다고 한들 얼마 가지 못했겠지. 전국의 각성자들이 그들을 찾느라 눈에 불을 켰으니까. 오히려 신라에 잡힌 것보다 더 처참하게 당했을 거다.”
그들이 어떻게 유린당하다 죽었을지는 누구보다 강우가 더 잘 알았다.
“시발, 뭐, 그런…….”
“수장의 뒤를 이어 황한수가 검계를 맡았지만, 큰 두각을 드러내진 못했다. 그리고 그는…….”
잠시 황한수에게 닿은 강우의 시선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실종됐다. 그 뒤는 알지 못해.”
도무지 믿기지 않는 이야기였다.
모두가 혼란에 빠져 있는 가운데, 보다 못한 유아라가 나섰다.
“지금 다들 어떤 기분이신지 알겠어요. 하지만 그건 모두 과거의 일이에요. 강우 씨가 과거로 돌아오기 전의 일이요.”
자연스럽게 강우의 옆에 선 그녀의 얼굴이 어느새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강우 씨도 피해자였다는 건 이미 스승님도 잘 아시잖아요. 그날, 식탁에서의 대화를 들었으니까요.”
“…….”
청익은 말이 없었다.
분명 그는 강우가 실토한 과거 이야기를 엿들었고, 그것을 수장에게 보고했다.
강우는 분명한 피해자였다.
“모든 건 석탈해, 그자의 간계였어요. 지금의 강우 씨는… 그걸 바로잡기 위해 온 거고요.”
청익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유아라의 말에 조금 힘이 실렸다.
“맞습니다.”
박도진도 그녀의 의견에 동의했다.
“과거는… 과거일 뿐입니다. 스스로가 과오를 잊지 않고 그 빚을 갚기 위해 계속 노력하며 살아간다면, 우린 그것을 비난하거나 막을 권리가 없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과거의 과오가 사라진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지만 제가 보아 온 마스터는 단 한시도 과거의 짐에서 벗어난 적이 없습니다.”
“동감이에요.”
뒤늦게 강우의 사정을 알게 된 서유리와 김민정도 그들의 뒤에 섰고, 오만석과 로드리게도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를 옮겼다.
예전의 그들을 강우가 구했듯이, 그들 또한 그를 적극적으로 보호할 생각이었다.
설사 상대가 지금껏 자신에게 우호적이던 자들이라 해도.
하지만 여전히 황한수의 얼굴은 싸늘했다.
그가 빈정대는 말투로 중얼거렸다.
“…바로잡는다고?”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바로잡은 게 아니에요. 더 망쳐 버린 거지.”
“그게 무슨 뜻이에요?”
유아라의 물음에 황한수가 답했다.
“지금 이곳으로 최후의 석탈해가 오고 있어요.”
“최후의… 석탈해?”
유아라가 의미를 묻는 표정으로 바라봤지만, 강우는 입을 열지 않았다.
어차피 황한수가 이어서 말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황한수가 말했다.
“한강우처럼 미래에서 온 석탈해예요. 미래에서 왔으니 당연히 무지막지하게 강할 테고, 놈이 다다르는 순간, 이 땅은 멸망할 거예요. 본래 이 세상에는 무수한 시간선이 존재하는데…… 제기랄.”
설명하기를 포기한 황한수가 성가시다는 표정을 지었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니고, 이 세계로 그 괴물 석탈해가 오고 있다는 거예요. 이 세상 그 누구도 상대 못 할 괴물이요. 한강우는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기 위해 돌아온 게 아니에요. 단순히 자신의 복수를 위해서 온 거지. 지금 이 땅은 고작 그 전쟁터에 불과하고요. 놈에게 우린 그저 전쟁을 대비한 준비물에 불과해요! 우리를 철저하게 이용하고 농락한 거라고요!”
다시금 흥분한 황한수가 씩씩대고, 그 모습을 바라보던 왕린이 강우에게 물었다.
“그게… 사실이냐?”
강우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자, 지휘소 안에 탄식이 일었다.
청익이 얼떨떨한 얼굴로 물었다.
“그러니까… 지금 지구에 석탈해보다 더한 괴물이 오고 있다는 거지?”
“맞아요. 결국엔 이번에도 우리는 죽게 될 거예요. 바로 저놈의 사사로운 복수 하나 때문에.”
석탈해와의 전쟁으로 이미 전 세계가 흉흉한 상황이다.
이런 때에 그보다 더 강한 적의 등장이라니.
결코 좋은 소식이 아니었다.
눈살을 찌푸린 왕린이 뒤늦게 한 가지 의문을 갖고 황한수를 쳐다봤다.
“그런데 넌 그걸 어떻게 알았지?”
“그게…….”
머뭇대던 황한수가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
“저도 잘 모르겠어요. 갑자기 머릿속으로 알 수 없는 기억이 밀려 들어왔어요. 미래에 죽은 제 기억 같기도 한데… 정확하게는 몰라요.”
“기억 주입이라… 대체 뭐가 뭔지 모르겠군.”
왕린은 잠시 황한수의 기억을 읽어 볼까도 생각했지만, 곧 포기했다.
기억을 읽는 마법은 대상자와 사용자 모두에게 치명적인 부작용이 발생할 수도 있거니와, 아무 때나 시도할 정도로 간단하지 않기 때문이다.
“제기랄, 뭐가 어떻게 돼 가는 거야?”
도봉팔도, 오만석과 로드리게, 한선화도…….
강우와 황한수를 제외한 모두의 얼굴이 혼란스러웠다.
그런데 그때였다.
“대한족의 전사들이여, 어서 나와 봐라!”
지휘소 밖에서 레비아탄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장 먼저 튀어 나간 건 다름 아닌 강우였다.
밖에서 느껴지는 기운이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한강우!”
놀란 황한수와 다른 사람들이 황급히 그 뒤를 쫓는 가운데, 강우는 지휘소 밖에 가만히 선 채 상공을 주시하는 중이었다.
츠츠츠츳―!
전장의 상공이 갈라지며 검은 구멍이 생성되고 있었다.
“균…열?”
누군가가 중얼거렸지만, 그건 <균열>이 아니었다.
검은색 <포털>이었다.
사람들이 정체불명의 구멍을 불길하게 바라보는 사이, 그 안에서 붉은 머리카락이 불쑥 튀어나왔다.
“앗?!”
놀란 각성자들이 검은 <포털>을 향해 무기를 겨누었지만, 안면만 튀어나온 머리는 미동조차 없었다.
게다가 그는 몇몇 이들에게는 익숙한 얼굴이었다.
“석탈해…….”
그의 얼굴을 확인한 왕린이 중얼거리고, 그 정체를 아는 각성자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강우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여타 각성자들과 다르게, 그는 석탈해의 얼굴에서 싸늘한 죽음의 냄새를 맡았다.
그토록 고대하길 바라던 적의 등장이나, 강우가 바라던 상황은 아니었다.
그때, 포털 속에서 둥근 무언가가 튀어나와 바닥을 굴렀다.
통, 통, 통…….
그것은 머리였다.
흑발을 길게 늘어뜨린 사내의 머리.
그는 일격에 당한 듯 눈조차 감지 못한 상태였는데, 잘린 지 얼마 되지 않은 듯 여전히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사이, <포털>로 얼굴만 내밀고 있던 석탈해가 앞으로 나왔다.
하지만 놈에게는 몸통이 없었다.
머리 뒤로 나온 건 또 다른 사람의 팔이었다.
잘린 석탈해의 머리끄덩이를 우악스럽게 움켜쥔 사내.
각성자들이 경악한 얼굴로 사내를 쳐다보는 사이, 그 뒤로 황 노인이 걸어 나왔다.
“수장!”
“하, 할아버지!”
청익과 황한수가 서둘러 <포털> 앞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강우의 시선은 여전히 노인이 아닌 중년 사내에게 닿아 있었다.
낯익은 얼굴.
‘…그런가.’
그가 황한수임을 깨닫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아마도 황한수에게 미래의 기억이 주입된 데에는 저자의 존재가 영향을 미친 듯했다.
그사이, 중년 사내와 황 노인이 서서히 지상으로 내려왔다.
“할아버지!”
“…한수야.”
황 노인은 애타게 달려온 손자의 어깨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러고는 저 멀리 선 강우를 쳐다보았다.
“…….”
강우도, 황 노인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입을 연 건 중년의 황한수였다.
“드디어 만나는구나.”
그가 바닥에 석탈해의 머리를 던지며 말했다.
“한강우.”
상대가 장검을 겨누는 사이, 어느새 강우의 손에도 <진(眞)피바라기>가 소환되어 있었다.
‘황한수.’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실종된 황한수는 자신처럼 시간선을 넘어온 듯했다.
그 목적은… 아무래도 자신인 듯하고.
“모두 물러서라.”
강우는 주변을 물리며 천천히 중년의 황한수에게로 걸어갔다.
가는 길에 황 노인의 시선이 느껴졌으나 애써 무시했다.
지금은 그와 대화할 차례가 아니었다.
이윽고 황한수의 몇 걸음 앞에 선 강우가 말했다.
“복수를 하러 왔군.”
“그래.”
중년의 황한수는 부정하지 않았다.
할아버지와 검계의 복수를 하기 위해 수십 년씩이나 시간선을 떠돈 그였다.
새로운 시간선에 닿았을 때, 그가 가장 먼저 한 건 단연 한강우를 찾아 죽이는 것이었다.
때로는 목을 베어 죽이기도, 때로는 산 채로 심장을 끄집어내기고, 때로는 모진 고문으로 죽여 왔다.
하지만 그럴수록 황한수의 공허함은 커져만 갔다.
그들은 진짜 자신의 원수가 아니었으니까.
아무리 살을 베고 고문을 가해도 그들은 자신을 기억하지 못했다.
할아버지의 죽음을 기억하지 못했다.
그런 건 복수가 아니었다.
‘진짜 한강우를 찾아야 한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그토록 바라던 자신의 원수를 눈앞에서 마주했다.
“각오는 됐나?”
“각오라…….”
강우가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황한수는 자신에게 검을 겨눌 자격이 충분했다.
하지만 아직은 아니었다.
자신에겐 할 일이 있다.
“아직은 죽어 줄 수 없다.”
“…유감이군.”
콰득!
황한수의 두 눈이 빛나나 싶더니, 그의 검이 수천 갈래로 찢어졌다.
이한 길드장 권기한이 쓰던 <참살검>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무수한 숫자의 검 줄기가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황한수가 그 수천의 검격 속에서 말했다.
“나도 더는 널 살려 둘 생각이 없는데.”
촤르르륵!
곧 수천 개의 검 줄기가 강우에게로 쇄도했다.
검은 헌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