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화] 검은 태양 (2)
신홍이 석탈해의 소재를 실토하는 데에는 그리 얼마 걸리지 않았다.
털썩―
약속대로 놈의 목을 벤 강우는 그 피를 흡수하며 주변의 어둠을 둘러보았다.
<사이트 스톤>을 통해 5차 각성의 경지에 들어서게 되면서 강우는 여러 능력을 얻게 되었는데, 이 공간도 그중 하나였다.
외부와 완전히 차단된 암흑.
적에게 공포를 제공하는 데 있어 안성맞춤인 공간이었다.
‘쓸 만하군.’
신홍의 피를 모두 빨아들인 강우는 곧 어둠을 거둬들였다.
그가 다시 현실로 돌아왔을 땐, 레비아탄을 제외한 주요 각성자 모두가 주변으로 몰려와 있었다.
도봉팔과 김인표가 강우를 신기한 듯 바라보는 가운데, 길문의 곁에 선 청익이 놈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이놈은 어쩔 테냐?”
<역(力)>의 중압감에 눌린 길문은 여전히 발버둥을 치는 중이었다.
현재 강우의 성장을 고려하면 <역(力)>을 사용하자마자 압사해 죽을 줄 알았는데, 지금까지 버틴 걸 보면 예상보다 길문의 실력이 뛰어났던 모양이다.
무심히 놈을 내려다보던 강우가 입을 열었다.
“죽여야겠지.”
“이익!”
길문이 더욱 몸부림을 쳤지만, 부질없는 일이었다.
곧 곤충 인간의 목덜미로 청익의 검이 찔러 들어가자, 부들대던 움직임이 멎었다.
길문의 목숨을 거둔 청익이 검을 찌른 자세 그대로 강우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괜찮으면 이놈의 목 좀 빌리자. 갚아 줄 게 있어.”
청익은 길문이 독일에서 한 것처럼 놈의 목을 잘라 전 세계에 방영할 거라고 했다.
한국의 승리도 알리고, 여전히 고전 중인 세계 곳곳의 각성자들의 사기도 올릴 만한 좋은 방법이었다.
“…편할 대로.”
사도의 시신을 어떻게 처리하는가는 강우의 관심사 밖이었으므로, 그는 청익의 의견에 별다른 이의 없이 수긍했다.
대신 묵묵히 길문의 피 소량을 <진(眞)피바라기>에게 먹였다.
짧은 흡혈을 마친 강우에게 다가온 건 다름 아닌 서유리였다.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강우는 그녀가 그간 가장 고생이 많았으리란 걸 알 수 있었다.
오래된 피로로 핼쑥해진 얼굴만 봐도 근거는 충분했다.
“고생이 많았군.”
“그랬는데…….”
“그랬는데?”
서유리가 바짝 말라비틀어진 신홍과 청익에 의해 목이 잘린 길문의 시신을 보며 말했다.
“그동안 목숨 걸고 헤매던 일이 누군가에 의해 단번에 해결되니 조금 기분이 묘하네요.”
얼마나 소리를 질렀는지, 서유리의 입에선 예전에 듣지 못한 쇳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러나 힘겨운 목소리와 달리 그녀는 웃고 있었다.
그간의 마음고생만큼 그녀의 눈시울이 붉었다.
“다행이에요, 정말.”
“…….”
누구보다 마음고생이 심했을 서유리다.
한 나라를 짊어진다는 것.
수천만의 목숨을 책임진다는 것.
그건 그만큼 막중하고 부담스러운 일이니까.
“길드장님.”
그때, 스톰의 부길드장 장민철이 서유리의 곁으로 다가왔다.
서유리 외에는 그 누구에게도 고개를 숙이지 않는다는 장민철은 강우와 눈이 마주치자 조용히 허리를 굽혀 정중히 인사했다.
다행히 그도 살아남은 모양이다.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인사를 받은 강우는 서유리를 그에게 맡겼다.
비록 몇 시간에 불과하겠지만, 그녀에게도 휴식이 필요할 터였다.
아직 전쟁은 끝나지 않았고, 설사 전쟁이 끝난다고 해도 그녀는 할 일이 많았다.
본래 전쟁이란 뒷수습이 더 어려운 법.
그때까지 서유리는 건재해야만 한다.
그게 바로 리더의 역할이니까.
“한 가지만 부탁하겠다.”
“뭐죠?”
“박도진을 부탁하겠다.”
“박도진 씨를요?”
강우는 박도진을 불러, 남아 있는 야수병의 피를 주입했다.
정확하게는 박도진의 혈액형으로 변환된 석철의 피였다.
처음 느껴 보는 강한 피의 기운에 박도진이 움찔하는 사이, 그 모습을 기이하게 보는 서유리에게 강우가 말했다.
“각성자 연구소에서 흑혈병에 대해 조사해 주면 좋겠군.”
“흑혈병…….”
“박도진이 자세히 설명해 줄 거다.”
“…알겠어요.”
다행히 석철의 피가 효과가 있었는지, 박도진의 변이가 다소 누그러지는 게 보였다.
“당분간은 휴식에만 전념해라.”
“…알겠습니다, 마스터.”
박도진은 군말 없이 고개를 숙였고, 강우는 마지막으로 유아라를 쳐다보았다.
“…….”
둘은 한동안 아무런 말 없이 서로의 눈을 응시했다.
그리고 유아라의 눈가가 촉촉해지나 싶던 찰나.
갑자기 다가온 그녀가 강우를 덥석 끌어안았다.
강우도 굳이 뿌리치지 않고 그런 그녀를 가만두었다.
품에 안긴 그녀의 어깨가 작게 들썩이고 있었다.
[고마워요, 돌아와 줘서.]
소리 없는 대화였지만, 강우는 유아라의 목소리가 똑똑히 들리는 듯했다.
이윽고 한참을 안겨 있던 그녀가 떨어졌다.
그녀는 주변의 시선을 의식했는지 서둘러 눈물을 훔친 뒤, 여전히 전투 중인 전장 쪽으로 걸어갔다.
두 남녀의 눈치를 살피던 김민정도 슬금슬금 그녀의 뒤를 따랐다.
“크하하하핫!”
레비아탄의 호쾌한 웃음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오고 있었다.
그는 두 사도가 사라진 전장을 지배하고 있었는데, 검은 태양에 힘입은 <스켈레톤>과 <스컬 드래곤>의 공격에 마물들이 속수무책 쓰러지는 중이었다.
카아아악!
레비아탄의 웃음, 해골병들이 달그락거리는 소리, 각성자들의 고함와 마물들의 아우성이 합쳐져 전장은 온통 시끄러웠다.
길고 긴 동부 전선에서의 전투가 한국의 승리로 마무리되는 순간이었다.
그때, 다가온 청익이 유아라 쪽을 향해 슬쩍 턱짓하며 물었다.
“포옹이 끝이야? 안 잡을 거냐?”
그러나 강우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북한에서의 일 이후로 유아라와 한 번 대화는 해 봐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아직은 아니었다.
여전히 석탈해는 살아 있고, 세계는 전쟁 중이며, 지금 이 순간에도 시간선을 집어삼키려는 최후의 석탈해가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늘 그랬듯, 지금은 사사로운 감정에 시간을 소모할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청익의 생각은 다른 듯했다.
“내가 이런 말 하는 게 조금 주제넘을 수도 있는데… 인마, 뭐든 건 다 때가 있다? 나 좋다고 할 때 냉큼 잡아채야지, 나중엔 후회해도 늦어.”
“주제넘다. 듣기 싫군.”
“…응. 미안.”
청익은 단호한 강우의 말에 이번에도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였다.
‘얼떨떨하네.’
승리가 간절하던 전투에서 승리했지만, 여전히 청익은 그 사실이 제대로 와닿지 않았다.
현실 감각이 떨어진다고 해야 할까.
불과 수십 분 전까지만 해도 죽음이 턱 끝까지 닥쳐 있었는데, 지금은 농담 따먹기나 하고 있다니…….
흡사 술에 취한 기분이었다.
‘이 녀석이랑 있으면 기분이 이상하다니까.’
청익이 강우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사이, 강우는 저 멀리서 마물들을 마무리하고 있는 유아라의 등을 주시했다.
― 뭐든 건 다 때가 있다?
어쩌면 청익의 말대로 지금이 가장 적당한 때일지도 모른다.
그간 고마웠다고 말할 순간 말이다.
최후의 석탈해가 언제 올지 모르는 지금, 어쩌면 이번이 그녀와 대화할 마지막 기회일지도.
‘여전히… 익숙하지 않군.’
강우는 자신의 감정에서 어색함을 느꼈다.
누군가의 감정을 신경 쓴다는 것.
그건 여전히 그에게 있어 곤란한 일이었다.
장혜진을 제외하면, 지금껏 자신의 감정에만 충실하게 살아온 강우였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그는 어느 순간부터 이번 시간선에서 만난 여러 사람의 감정과 처지를 고려하고 있었다.
장혜진이 준 새로운 삶이다.
그녀가 스스로를 희생하면서 건네준 삶.
그런 일상에서 만난 인연들을 절대 허투루 여기고 싶지 않았다.
“한강우!”
그런데 그때였다.
전장의 상황을 본부에 알리겠다며 사라진 왕린이 허겁지겁 이쪽으로 달려오는 게 보였다.
저 육중한 몸으로 헉헉대며 달려오는 걸 보면, 좋은 일은 아닌 듯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가 어두운 얼굴로 말했다.
“본부에 석탈해가 나타났다.”
‘본부?’
본부라면, 불과 몇 시간 전에 자신이 떠나온 곳이었다.
신홍은 놈이 센트럴 파크에 있다고 했는데… 어느새 한국까지 왔단 말인가.
자신의 귀환한 시점에 등장한 석탈해.
그저 우연의 일치일까?
‘그럴 리 없다.’
그것이 강우의 판단이었다.
그렇다면 놈은 자신이 사이트 스톤에서 나오기만을 기다렸을 확률이 높다.
‘네놈도 날 주목하고 있었구나.’
부아아아아앙!
그런데 손님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저 멀리 이쪽으로 전속력으로 달려오는 SUV 차량이 보였다.
흙먼지를 잔뜩 일으키며 달려온 차량은 위험천만하게 각성자들 사이를 누비며 강우가 있는 곳에 정확히 도착했다.
“음?”
왕린도 예상치 못한 손님의 등장에 석탈해의 출현 사실도 잊은 듯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의 정신을 쏙 빼놓을 존재는 이 세상에 단 한 사람뿐이었다.
조수석에서 한선화가 다급하게 차에서 내리고, 뒤이어 황한수도 내렸다.
그런데 그의 두 눈이 빨간 물감이라도 바른 듯 붉었다.
눈만이 아니라 눈 주변 피부도 마찬가지였다.
“너, 괜찮냐?”
뒤늦게 청익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황한수에게 다가갔지만, 그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황한수의 시선은 온통 강우에게 고정되어 있고, 청익은 그 시선에서 알 수 없는 적대감을 읽었다.
곧 황한수가 성큼성큼 강우를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대뜸 그를 향해 주먹질을 했다.
“이 개새끼야!”
강우는 황한수의 주먹을 피했지만, 그의 공격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화, 황한수!”
“무슨 짓이야, 인마!”
한선화와 청익이 서둘러 말리는 사이에도 그는 계속해서 강우를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여전히 분개에 찬 얼굴로.
“…….”
문득 강우는 황한수의 공격을 피하면서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
어쩐지 그가 자신의 과거를 알아낸 것만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황한수의 입에서 숨기고 싶던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네놈이… 네놈이 할아버지를 죽였어!“
“뭐?”
청익이 무슨 소리냐는 듯 손을 멈춘 사이, 황한수가 주먹을 내질렀다.
하지만 강우는 이번에는 피하지 않았다.
아니, 피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퍽!
황한수의 주먹이 강우의 턱을 때리고, 그의 몸이 뒤로 맥없이 철푸덕 쓰러졌다.
모든 마력을 거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강우 씨!”
저 멀리서 소동을 깨달은 유아라가 달려오는 게 보였다.
강우의 머릿속이 복잡했다.
그러나 미처 생각이 다 정리되기도 전에 황한수가 달려와 그의 배를 걷어찼다.
마력을 거둔 탓인지, 아니면 그간 황한수의 수련이 대단했던 건지…….
그의 발길질이 꽤 묵직했다.
“개자식! 그랬으면서… 그랬으면서 감히 우릴 찾아와?! 사람이라면… 사람이라면 그러면 안 되는 거잖아!”
“…….”
콱! 콱! 콱!
강우는 묵묵히 황한수가 쏟아 내는 무자비한 폭력을 가만히 맞고만 있었다.
상황을 모르는 사람들이 얼떨떨하게 바라보는 사이, 뒤늦게 다가온 박도진과 유아라가 서둘러 황한수의 몸을 붙잡고 말렸다.
하지만 황한수는 계속해서 울분을 토해 냈다.
“다 봤어! 네놈이… 네놈이 우리한테 한 짓을 내가 다 봤다고!”
“…….”
“이 살인자 새끼!”
동부 전선에 적막이 흘렀다.
검은 헌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