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은 헌터-167화 (168/186)

[167화] 걸인검객 (3)

달그락!

콰르르르르―!

레비아탄의 <스켈레톤>이 길문에게 달려드는 가운데, 놈의 공격에 땅이 갈라지며 큰 지진이 일었다.

뼈로 이루어진 <스켈레톤>들은 진동에 취약했다.

길문의 창이 지진을 일으킬 때마다 그들은 속수무책 쓰러지며 몸이 부서졌다.

하지만 언데드의 진정한 무서움은 바로 ‘무한한 생명력’과 ‘집요함’.

해골 병사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일어나 길문에게 덤벼들었다.

어느새 해골의 눈두덩이에서 보랏빛 불꽃이 일렁이고 있었다.

길문이 성가시다는 듯 소리쳤다.

“이 귀찮은 새끼들!”

길문이 창을 휘둘러 <스켈레톤> 십여 마리를 쓸어버렸지만, 상대는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틈을 보일 때마다 쏘아져 오는 마탄과 서유리의 마법도.

쉴 틈 없이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유아라의 검붉은 쐐기도.

“크하하하! 벌써 오금이 저리지 않냐?!”

무작정 돌진해 도끼를 휘두르는 레비아탄의 웃음소리도.

그 모든 게 길문의 신경을 자극하고 있었다.

“오늘이 네놈 제삿날이야!”

콰직!

또한 잊을 만하면 튀어나와 청익이 찔러 대는 <황로의 검>도 위협적이었다.

처음 호공이 당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만 해도 코웃음을 치던 길문이지만, 이쯤 되니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하찮은 인간도 힘을 모으면 제법 위협적인 수준이 된다는 걸 말이다.

‘이크!’

콰과과과―!

어느새 몸을 회복한 박도진의 공격이 아슬아슬하게 길문의 앞을 스쳐 지나갔다.

그와 동시에 쉴 틈도 없이 하늘 위로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스컬 드래곤>이었다.

“감히……!”

길문은 하늘에서 수직 낙하해 아가리를 들이민 <스컬 드래곤>을 향해 창을 찔렀다.

콰르르르!

<스컬 드래곤>의 두개골이 갈라지며 바닥으로 거체의 잔해가 쏟아졌지만, 길문의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어차피 불과 수십 초 후면 놈이 다시 제 몸을 되찾으리란 걸 몇 번의 경험으로 잘 알았기 때문이다.

길문의 두 눈이 좁혀졌다.

‘이놈들…….’

현재 가장 큰 문제는 레비아탄이었다.

확실히 놈이 합류한 뒤로 분위기가 달라졌다.

이계에서 왔다더니… 마력을 다루는 실력이 지구인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저놈만 없어도 할 만할 텐데…….’

하지만 여전히 길문은 자신의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다.

석철이 사라진 이상, 사실상 사도 중에서 가장 강한 건 자신이었으니까.

아무리 본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고 해도 자신이 인간 따위에게 진다는 건 말이 되질 않았다.

그는 슬며시 물러나 기회를 살폈다.

그런데 다시금 격돌이 시작되려던 그때였다.

“길문, 아직도 장난질인가?”

모두는 갑자기 들려오는 목소리에 움직임을 멈추고 하늘을 쳐다봤다.

어느새 길문의 뒤로 나타난 사내가 허공에 떠서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하얀 도포를 입은 사내.

그는 일련의 사건들로 이미 유명세를 얻은 자였다.

화(火)의 사도, 신홍.

자신을 네 번째 사도라 칭하는 저 남자는 차분한 인상과 달리 그 속이 음흉하고 흉포하기 그지없었다.

놈은 산 채로 상대를 불태우길 좋아하는 살인마였으니까.

‘사도가 둘…….’

상대의 정체를 확인한 서유리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길문도 상대하기 벅찬 와중에 신홍까지 나타났다면, 더 이상 희망이 없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현재 레비아탄을 제외하면 그 누구 하나 몸이 성한 자가 없었다.

얼굴만 봐도 모두가 이미 지쳤음은 그리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었다.

한국의 각성자들이 긴장한 얼굴로 서로의 안색을 살피는 사이, 신홍의 존재를 확인한 길문도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뭐냐? 다른 땅덩어리에 있어야 할 놈이 여긴 어쩐 일이야?”

그러자 신홍이 못마땅한 듯 팔짱을 끼며 답했다.

“네놈이 언제까지 한심한 짓거리를 할 생각인지 물으러 왔다.”

“씁…….”

길문은 신홍의 말투가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딱히 반박하진 않았다.

주군의 명령을 받은 지 어언 일주일.

하루면 끝날 전투를 무려 나흘이나 끌었으니, 다른 사도들이 불만을 품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아무리 각자의 재량이 크다 한들, 기본적으로 석탈해를 따르는 자들.

주군의 명령 수행을 지체하는 건 그리 보기 좋은 광경은 아니었다.

한풀 기세를 죽인 길문이 말했다.

“난 혹여나 그자가 나타날까 싶었던 거다.”

“…….”

잠시 그런 길문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신홍이 팔짱을 풀었다.

“안 그래도 조금 전 그자가 나타났다는 연락을 받았다.”

“뭐?”

예상치 못한 희소식에 길문이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신홍이 말하는 그자란, 분명 자신이 기다리던 그자일 테니까.

놈이 잔뜩 흥분한 얼굴로 물었다.

“뭐야? 언제? 지금 어디 있어?!”

“나도 보고만 받았을 뿐이다. 어쩌면 이곳으로 오고 있을지도 모르지.”

“하!”

“그러니까 이제 쓸데없는 짓거리는 그만두고 서둘러 끝내라. 놈은 진중과 가륜도 모자라서 석철까지 죽인 놈이다. 어쩌면 우리 둘이 함께 싸워야 할지도 모른다.”

“무슨 소리!”

길문이 버럭 성질을 부렸다.

“그자는 내가 직접 잡는다! 넌 지켜나 보고 있어!”

“글쎄… 이런 조무래기들로 시간을 허비하는 걸 보면 그리 믿음직스럽지 못한데.”

“하! 헛소린 집어치워. 내 당장 끝내 줄 테니.”

“…….”

신홍은 더 말하려다 그만두었다.

어느새 길문의 눈빛이 달라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건 놈이 무언가 결심했을 때 보이는 눈빛이었다.

사도 중 저 눈빛을 막을 수 있는 건 석철이 유일했으나, 이미 그는 죽고 없었다.

즉, 저 눈빛을 한 길문을 막을 존재는 아무도 없다는 뜻이었다.

‘후…….’

신홍이 한숨을 내쉬는 가운데, 그들의 대화를 들은 한국 각성자들 사이에서도 술렁임이 일었다.

청익이 작게 중얼거렸다.

“저놈들이 말하는 게 지금 한강우 말하는 거 맞지? 강우가 돌아왔다는 거지?”

그 이름을 들은 유아라의 입술도 파르르 떨렸다.

‘돌아왔어.’

북한의 <균열>에서 강우에게 고백한 이후로 단 한 번도 그를 만나지 못한 유아라였다.

혹여 자신의 고백이 부담스러워 사라진 건 아닐까.

한때는 그의 행방불명이 자신 때문이 아닐까 자책한 적도 있었다.

그런 그가 돌아왔다.

그게 어떤 의미인지는 모르겠으나, 유아라는 가슴속을 뜨겁게 울리는 격정을 애써 집어삼켰다.

박도진도, 서유리도, 김민정도.

모두가 비슷한 감정이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기뻐한 건 다름 아닌 레비아탄이었다.

“내 최강의 파트너가 돌아왔단 말인가! 네놈들은 이제 다 뒈졌다! 크하하하하!”

그가 가슴을 활짝 편 채 하늘을 향해 크게 웃어재꼈다.

하지만 아무리 강우가 돌아왔다고 한들, 여전히 그들의 목숨이 바람 앞의 촛불임은 변함없는 사실이었다.

더 감격할 새도 없이, 길문이 땅에 창을 처박았다.

“모두 집중하십시오!”

박도진이 경고하는 사이, 길문의 몸이 변화하고 있었다.

두껍던 얼굴이 점차 딱딱하게 굳어지고, 그 위로 하나의 작은 뿔이 솟았다.

팽창한 근육에 옷이 찢겨 나가고 그 안에서 투구게의 것과 비슷한 피부가 튀어나왔으며, 온몸이 새하얗게 물들었다.

흡사 곤충 인간과도 같은 외양이었다.

온통 갑각으로 둘러싸인 가슴 아래로 얇은 허리가 또 다른 껍질에 의해 보호받고 있었으며, 그 틈새로 투명한 체액이 줄줄 흘러내렸다.

그 기이한 광경에 모두가 입을 꾹 다문 사이, 마침내 모든 변신을 끝낸 길문이 붉은 눈을 번뜩이며 말했다.

[이제 장난은 끝이다.]

불과 목소리만 들었을 뿐인데 김민정은 온몸이 딱딱하게 굳어 오는 것을 느꼈다.

두려움.

4차 각성자가 된 이후로 처음 느껴 보는 감정이었다.

‘저게 사도의 진짜 모습…….’

상태는 다른 각성자도 마찬가지였다.

“모두 정신 차려!”

[크크큭…….]

길문이 저벅저벅 걸어오는 걸 보면서도 그들은 그 시선에 옭아 매인 듯 도무지 움직일 줄 몰랐다.

그나마 제정신을 유지하는 건 박도진과 청익, 그리고 레비아탄뿐이었다.

세 사람이 서둘러 막아섰지만, 길문의 압도적인 기세 앞에 무력했다.

<격(擊)>.

콱!

아까 박도진이 당했을 때와는 차원이 다른 공격이었다.

세 남자는 신음조차 내지 못한 채 뒤로 나자빠졌고, 멍석말이라도 당한 듯 온몸의 뼈가 마디마디 끊어질 듯 아팠다.

“우라질! 이게 뭔……!”

레비아탄도 처음 느껴 보는 감각에 충격을 받은 눈치였다.

길문이 그 모습을 보며 웃었다.

“이제야 알겠냐? 내가 여태껏 네놈들과 놀아줬다는 걸?”

“길문! 시간이 없다!”

“이런, 씨! 알겠다고!”

거들먹거리던 길문은 신홍의 재촉에 신경질을 부리더니, 들고 있던 창을 바닥에 집어 던졌다.

그러고는 팔을 허공에 휘저었다.

그러자 그의 손에서 창보다도 더 예리해 보이는, 뾰족한 무언가가 불쑥 튀어나왔다.

“더 즐기고 싶지만, 아쉽게도 재촉하는 놈이 있어서 말이야. 모두 지옥으로 보내 주마.”

“자, 잠깐!”

레비아탄이 서둘러 일어났지만, 이미 길문의 손에는 눈부시게 하얀 마력이 맺힌 상태였다.

놈이 크게 웃으며 소리쳤다.

“크하하! 다 죽어라!”

눈앞에서 쏟아지는 빛에 결사대는 죽음을 예감했다.

레비아탄이 부랴부랴 뼈 방패를 소환했으나, 저 공격을 버텨 낼 확률은 제로였다.

그런데 절체절명의 순간.

“……?!”

콰과과과과과―!

갑작스러운 충돌과 함께 자신만만해하던 길문의 손이 뒤로 크게 튕겨 나갔다.

“뭐야?!”

놀란 길문이 서둘러 자세를 가다듬는 사이, 그의 기감에 불길한 기운이 감지되기 시작했다.

그것은 악마였다.

온몸이 보랏빛 불길에 휩싸인 악마가 비대해진 손을 바닥에 늘어뜨린 채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너……!”

쉽게 말을 뱉지 못하는 길문처럼 모두가 휘둥그레진 눈으로 박도진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미 인간이라 부를 수 없는 존재.

그의 보랏빛 피부가 부풀었다 줄어들기를 계속해서 반복하고 있었다.

박도진이 길문을 마주한 채 짧은 한마디를 뱉었다.

“모두 물러서십시오.”

“박도진 씨…….”

팟!

유아라가 말을 걸기 위해 한 걸음 다가갔지만, 이미 그는 길문을 향해 튀어 나간 뒤였다.

콰드드득!

콰과과과과!

길문과 박도진의 격돌에 양구의 숲에 거센 폭풍이 일었다.

“피, 피해!”

청익은 뿌리째 뽑혀 날아오는 나무와 바위를 피해 일행을 뒤로 이끌었다.

그 앞을 막아선 건 어느새 나타난 신홍이었다.

놈이 짜증 난다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일이 자꾸 지체되는군…….”

화르륵!

신홍의 손바닥에서 불길이 일었다.

상대의 숨이 끊기기 전까진 꺼지지 않는다는 <지옥불>이었다.

이미 지칠 대로 지친 일행이 저 불길을 견뎌 낼 수 있을까?

‘아니. 내가 막아야 해.’

서유리가 서둘러 빙벽 마법을 펼치며 중얼거렸다.

“모두 돌아가서 퇴각하세요. 오늘부로 동부 전선은 포기합니다.”

“서유리 길드장……!”

“내가 보내준다는 말을 했던가?”

서유리의 말에 콧방귀를 뀐 신홍의 팔을 휘저으려던 찰나.

기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

신홍은 무언가를 느끼곤 서둘러 몸을 돌려 반대편을 바라봤다.

하지만 달라진 건 없었다.

여전히 마물들은 각성자들과 치열한 싸움을 벌이고 있었으며, 사방에서 비명과 고함이 터져 나왔다.

‘뭐지?’

그러나 분명 무언가가 달라졌다.

이상함을 느낀 신홍이 하늘을 올려다보는 순간.

유아라도 같은 것을 발견하곤 손가락을 들었다.

“저거…….”

그녀는 이미 한 차례 경험한 것이었다.

치열한 전장을 검게 물들이는 그림자.

검을 휘두르던 각성자도, 포효하던 마물들도 모두 일제히 움직임을 멈추고 하늘을 쳐다보았다.

그것은 하늘에 뜬 또 하나의 태양이었다.

레비아탄의 두 눈이 검은빛으로 물들었다.

“전우여…….”

검게 이글거리는 검은 태양이 동부 전선에 떠 있었다.

검은 헌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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