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화] 희생 (4)
보랏빛 일렁거림.
박도진은 어느 순간부터 나타나 자신을 향해 뻗어 있는 손을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보라색 피부를 가진 손은 마치 도깨비불처럼 허공에 둥둥 떠 있는데, 언제가 본 마물의 손과도 비슷했다.
‘인간이길 포기한다고…….’
박도진은 그 의미를 정확히 알지 못했으나, 한 가지만은 분명하게 깨달을 수 있었다.
지금 눈앞에 아른거리는 저 괴이한 손을 붙잡는 순간, 자신은 더 이상 딸과 함께할 수 없을 거란 사실을.
하지만 지금으로선 달리 떠오르는 방법이 없었다.
불과 몇 합이지만, 박도진은 길문과 자신의 격차를 확실하게 느꼈다.
지금 저 손을 잡지 않으면, 자신뿐만 아니라 여기 있는 사람 모두가 죽게 될 터.
박도진은 만약 자기 하나의 희생으로 이들을 살릴 수만 있다면, 그보다 좋은 가성비도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간 권기한의 밑에서 무고한 사람들을 죽여 온 자신은 살인마였다.
살인마의 손으로 사람들을 살릴 수 있다니, 그보다 감사한 일이 어디 있을까.
박도진은 보랏빛 불길에 마치 홀린 듯 서서히 손을 뻗었다.
― 수영이를 부탁합니다.
다행히 이미 수영이는 황 노인에게 부탁해 놓았다.
성인이 될 때까지 돌봐 달라고.
만약 자신이 없더라도 검계는 약속대로 그녀를 책임져 줄 테고, 강우와 유아라도 나 몰라라 할 사람들이 아니니 뒷걱정은 없었다.
다만, 아빠가 사라졌다는 걸 듣게 될 수영이의 마음만이 걱정될 뿐.
‘…내 딸 수영이.’
그런데 박도진의 손이 악마의 손에 막 닿으려던 그때였다.
찰싹!
“정신 차려, 이 새끼야! 눈깔 똑바로 떠!”
돌연 청익이 그의 뺨을 후려쳤다.
물론 박도진의 의중을 알고 때린 건 아니었다.
단지 눈의 초점이 흐려진 것을 보고 놀라 반사적으로 쳤을 뿐.
다소 과격하기까지 한 행동이지만, 효과는 확실했다.
정신이 번쩍 든 박도진은 얼얼한 뺨을 느끼며 청익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환영은 사라진 상태였다.
잠시 허공과 청익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던 박도진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감사합니다.”
“……?”
청익은 뺨을 맞고도 자신에게 감사를 표하는 박도진을 이상하게 쳐다봤지만, 굳이 이유를 묻진 않았다.
그보다는 당장 달려와 이쪽의 목을 베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길문 쪽이 더 문제였으니까.
지금 생각해야 할 건 그뿐이다.
놈이 곧장 달려들지 않고 늦장을 피우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저 새끼… 완전 괴물이야. 여기서 죽으면 우리도 독일 대통령처럼 목이 잘려 방송에 나갈 거다. 수영이한테 그걸 보게 할 생각은 아니지?”
“…….”
“제길, 사부는 저런 새끼를 어떻게 물리친 거지?”
호공은 사도 중에서도 전투 능력으로만 따지면 최하위에 속했으나, 그걸 청익이 알 까닭이 없었다.
서유리와 김민정의 표정도 좋지 않았다.
특히나 이번 작전을 꾸린 서유리의 마음은 이곳의 그 누구보다도 무거웠다.
4차 각성자가 셋에 마법계 각성자인 자신까지 합세해도 상대하지 못하는 적이라니.
‘사도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도 더 엄청난 자들이야.’
실제로 사도와 싸워 보는 건 서유리도 처음이지만, 그녀는 과거 이승우의 폭주 때를 기준으로 적의 전투력을 유추했다.
사도를 당시 이승우를 조금 웃도는 정도의 실력자라고, 그렇게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결과론적으로 그건 완전한 오판이었다.
각성자들이 상당한 성장을 이뤘음에도 불구하고 놈들의 강함은 상상을 초월했다.
아무리 계산해 봐도 자신들은 놈들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저런 자들을 한강우 씨는 홀로…….’
박도진의 말에 의하면, 강우는 혼자 셋이 넘는 사도를 처리했다고 한다.
그때는 잘 와닿지 않았지만, 적을 실제로 마주한 지금, 서유리는 새삼 강우가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지 여실히 깨달았다.
“뭐야? 벌써 끝이야?”
그때, 여전히 움직이지 않는 각성자들을 보며 길문이 하, 코웃음을 쳤다.
“기세 좋게 나타나서는 벌써 끝이냐고?”
길문은 황당하다는 얼굴로 저벅저벅 걸어 나왔다.
청익이 서둘러 박도진의 앞을 막아서는 가운데, 서유리와 김민정도 당장 공격할 기세로 각자의 무기를 쥐었다.
청익이 멈춰 서라는 듯 길문에게 검을 겨누며 말했다.
“아직 안 끝났다, 이 새끼야.”
다행히 허풍이 먹혔는지, 길문은 걸음을 멈췄다.
하지만 놈의 얼굴에 걸린 건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그렇지? 그래야지. 이렇게 포기해 버리면 여태껏 기다린 내가 너무 허무하잖아?”
“기다…렸다고?”
“그래. 내가 왜 너희를 바로 목을 베지 않고 지금까지 상대해 줬는지 알아? 혹시나 그자가 나타날까 해서다.”
청익은 길문이 말하는 ‘그자’가 누군지 단번에 알아차렸다.
“녀석을 기다렸다는 뜻이냐?”
“그럼 누구겠어? 설마 너희가 날 기다리게 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 건 아니지?”
길문은 내심 강우와의 대결을 기대하는 중이었다.
과거, 석철과 라이벌 관계에 있던 길문은 그가 죽었다는 소식에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아무리 금제(禁制)가 풀리기 전이라지만, 석철이 인간에게 죽임을 당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사도를 사냥하는 인간이라고?
그런 게 존재할 수 있는 건가?
길문은 제 눈으로 확인하기 전까지는 그 사실을 인정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일이 이 지경이 돼도 나타나질 않는 걸 보니… 네놈들은 그자에게 별로 중요한 존재는 아닌 듯하군.”
길문의 말에 청익은 입술을 깨물었다.
강우가 오지 않았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었다.
녀석이 아니면, 자신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말하는 길문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였다.
아무리 강우가 강하다고 한들, 이 세상을 지키는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여기 선 모두가 이 땅을 터전 삼아 살아가는 자들.
오히려 강우가 미래에서 왔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 땅의 진정한 주인은 자신들이었다.
그리고 제 땅은 주인이 지켜야 하는 것.
청익은 다시금 자신의 푸른 기운을 끌어내며 말했다.
“녀석이 우릴 어떻게 생각하든, 그런 건 우리에게 중요하지 않아.”
길문은 청익의 기세가 달라졌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래 봐야 뿜어내는 마력의 양이 조금 상승한 수준.
길문이 여전히 비웃음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그럼 뭐가 중요하지?”
“중요한 건 우리가 녀석을 믿고 있다는 거지. 녀석은 언제나 그랬듯 지가 꼴릴 때 나타날 거고, 그 순간, 너희 마물 새끼들은 전부 뒈지는 거야. 그 자식, 존나 세졌거든.”
그 말에 길문은 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풉! 결국 그자가 너희의 희망이란 거 아니냐? 내 말과 다를 게 뭐지?”
“아니. 달라.”
청익의 <황로의 검>에서 검푸른 불길이 치솟았다.
“넌 그 자식이 나타나기 전에 죽을 테니까. 장담하건대, 넌 오늘 내 손에 죽는다.”
콰드드드드드―!
청익의 손에 푸른 수인이 맺히나 싶더니, 삽시간에 쏘아진 푸른 파도가 성난 쓰나미처럼 길문을 덮쳤다.
마력으로 서둘러 몸을 보호한 길문이 고개를 들었을 때, 이미 청익은 <은신>으로 모습을 감춘 뒤였다.
“크크크! 그래, 얼마나 대단한 걸 보여 주나 지켜보마!”
길문이 청익의 완벽한 <은신>에 미소 짓는 사이, 서유리와 김민정도 각자의 마력을 온몸에 둘렀다.
서유리가 슬쩍 전장 쪽을 살펴보니, 다행히 마물들은 전투에 집중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진영의 옆을 지키고 있어야 할 레비아탄의 <스컬 드래곤>이 전장의 상공을 날아다니고 있었다.
아무래도 오만석이 적의 시선을 끌기 위해 어떠한 결정을 내린 게 분명했다.
‘서둘러야 해.’
그가 벌어 준 귀중한 시간을 허비할 순 없다.
어느새 지팡이까지 내려놓은 서유리는 양손에 <빙결 마법>을 펼치며 빠르게 생각을 정리했다.
박도진이 회복된다고 해서 길문을 이길 수 있을 것 같진 않았다.
그렇다면 방법은 둘이었다.
하나는 이대로 물러나 다음 기회를 노리는 것.
그러나 길문을 상대로 그들이 무사하게 달아날 확률은 희박해 보이므로 서유리는 자연스럽게 두 번째 방법을 택했다.
‘이쪽의 숫자를 늘린다.’
넷으로 상대할 수 없다면 다섯이서, 다섯으로도 안 된다면 여섯이서 상대하면 그만이었다.
물론 전투에 집중 중인 각성자들을 빼내기는 쉽지 않겠지만, 지금으로서 남은 방법은 그것뿐이었다.
마침 레비아탄도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듯했다.
‘레비아탄과 김인표 길드장.’
서유리는 양팔을 하늘로 뻗어 손에 맺힌 <빙결의 포>를 쏘아 냈다.
“어디로 쏘는 거냐?”
영문을 알지 못한 길문이 인상을 찌푸리는 사이, 하늘로 높이 치솟은 얼음덩어리가 깨지며 사방으로 퍼져 내렸다.
하지만 단순한 얼음 조각들이 아니었다.
산산이 부서진 얼음들이 서유리의 마력에 의해 조종당하며 두 개의 형상을 만들어 냈다.
하나는 독종의 마크인 검의 형상이고, 다른 하나는 드래곤의 두개골 모양이었다.
오만석이라면 충분히 알아들을 듯했다.
“오호, 아군을 부르는 거냐? 좋다!”
길문은 서유리의 조치를 오히려 환영했다.
그는 일대일 전투만큼이나 다대일 전투도 즐기는 편이었기 때문이다.
제 자신의 강함을 과시하는 데 다수와의 싸움만큼 좋은 수단도 없었다.
카아아악!
신호가 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스컬 드래곤>이 이쪽으로 날아오는 게 보였다.
팽팽한 전장에서 주요 전력을 둘이나 제외한다는 건 도박이나 다름없었다.
아군이 무너지면 길문을 처리한다고 해도 동부 전선은 끝이었으니까.
게다가 사도는 길문 하나만이 아니었다.
그들은 길문을 막고도 또다시 새로운 싸움을 준비해야 했다.
하지만 서유리는 이번 싸움에 모든 걸 걸었다.
더 이상 뒤가 없음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길문을 쓰러뜨리지 못하면, 한국은 더 이상 버텨 내지 못해.’
사도라고 무한한 존재는 아닐 것이다.
만약 길문이 죽으면 마물의 분산으로 타국의 전선이 헐거워질 테고, 그만큼 서로를 도울 여력이 생겨날 것이다.
오늘날 히데타가 자신들을 돕기 위해 온 것처럼 말이다.
‘한국만 지켜서는 안 돼. 모두가 살아야 한다.’
콰직!
탕! 탕! 탕!
어느새 모습을 드러낸 청익이 길문을 공격하고, 김민정이 틈틈이 놈을 견제했다.
<스컬 드래곤>은 그 틈을 타 바닥으로 하강했다.
덕분에 몇몇 마물이 전장을 이탈해 이쪽으로 달려왔지만, 미처 다가오기도 전에 바닥에서 생성된 <해골병>에게 둘러싸여 발이 묶였다.
“크크크, 진즉에 나 망자왕을 불렀어야지!”
<스컬 드래곤>의 머리에서 펄쩍 뛰어내린 레비아탄이 큰 소리로 웃으며 자신의 도끼를 치켜들었다.
뒤이어 드래곤의 몸에서 내린 건 다름 아닌 유아라였다.
몸이 반쯤 회복된 박도진이 절뚝절뚝 다가와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어째서 유아라 씨가 온 겁니까?! 당신은 마스터가 올 때까지 기다리기로 하지 않았습니까!”
“언제까지요?! 지금 히데타가 씨는 일본으로 돌아갔어요! 김인표 씨는 올 여력이 안 돼요!”
유아라의 말에 서유리도 당황을 감추지 못했다.
“히데타가… 어째서요?”
“정확하게는 몰라도 그쪽 전선에 문제가 생긴 모양이에요!”
시간은 더 촉박해졌다.
서유리는 곧장 몸을 돌려 길문 쪽을 가리켰다.
“당장 저자를 쓰러뜨려야 해요!”
“이제야 모두 모였냐!”
챙!
청익의 기습을 막아 내던 길문이 버럭 소리를 지르더니, 자신의 마력을 가감 없이 방출했다.
콰과과과과!
“큭!”
마력의 파동에 한참이나 밀려난 청익이 두 무릎을 부여잡은 채 간신히 균형을 잡고, 숲을 때린 돌풍에 모두가 팔을 들어 얼굴을 보호했다.
고작 마력을 정면으로 마주했을 뿐인데도 온몸이 후들거렸다.
이게 바로 사도의 진면목.
모두는 이제부터가 진짜 싸움임을 깨달았다.
오직 한 사람.
망자왕 레비아탄만 제외하고.
“크크크… 제법 강한 놈이구나! 하지만 네놈은 내 파트너에 비하면 발가락의 때에도 미치지 못한다! 어떠냐?! 지금이라도 내 가랑이 사이를 긴다면 내 사령으로 삼아 주마!”
“미친놈! 상황 판단을 못 하는 걸 보니 네놈이 그 이계 출신 전사로구나!”
콰과과과!
앞으로 튀어 나간 레비아탄의 도끼와 길문의 창이 부딪쳤다.
누군가는 목숨을, 누군가는 자신의 신념을, 누군가는 자존심을 건 전투가 시작되었다.
검은 헌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