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은 헌터-162화 (163/186)

[162화] 희생 (2)

그토록 듣고 싶던 대답.

오리무중이던 장혜진의 행방을 단번에 알려주는 대답이었으나, 강우는 그것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모든… 시간선에서의 소멸?”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네가 닿은 시간선에서의 소멸이지.”

오수의 말은 이랬다.

장혜진은 자신을 희생해 강우를 다른 시간선으로 보냈고, 그 대가로 강우가 향하는 시간선의 장혜진은 소멸한다.

그것은 일종의 저주였다.

강우가 그 어떤 시간선에 접어들지라도 둘은 결코 만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녀의 바람대로 넌 이렇게 무사하고, 그 시간선을 벗어나 세상에서 잊혔다. 오해 자체가 사라진 셈이지.”

장혜진이 지금의 강우를 보고 만족했을지는 알 수 없지만, 오수는 그녀와의 약속을 제 방식대로 이행했다.

그리고 그 대가로 모든 장혜진의 삶을 앗아 갔다.

“하지만 네가 아는 장혜진이 다른 장혜진의 삶까지 결정지을 순 없다. 결국 그녀는 자신이 태어나기 전의 시간선에 도달해 자기 자신을 죽여야만 했다. 새로운 분기점이 필요했지. 지금 네가 있는 시간선은 그녀가 자기 자신을 스스로 찔러 죽인 이후의 시간선이다. 무수한 갈래 속에서 이제 그 여자는 찾아볼 수 없어.”

오수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강우의 폐부를 찌르다 못해 후벼 파고 있었다.

“장혜진은 그 뒤로 영혼이 되어 세상에 남았다. 영혼은 육신과 달라서 있어야 할 자리가 따로 있어. 하지만 그녀는 네 곁을 택했다. 이제는…… 없지만. 쉼터에서 줄곧 너만 보고 있더군. 떠나는 표정이 그리 나빠 보이지는 않았다.”

“쉼터에서…라고?”

“그래, 네가 지낸 그 집에서. 넌 삼 일 내내 그 여자와 함께 있었다.”

결국 짐짓 쓸데없어 보이던 쉼터에서의 3일은 강우와 영원한 작별을 앞둔 장혜진에게 주는 오수의 마지막 선물이었다.

그럼 그때 떠난 반딧불이는…….

강우의 뺨으로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계속해서 흘러내렸다.

양 볼 위로 눈물의 뜨거움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왜 내게 말해 주지 않았지?”

“그건 내 원칙에 위배되는 일이다. 그녀의 혼이 널 따라다닌 것도 편법이지만 묵과했지. 하지만 그 이상은 안 돼. 안타까움을 따지자면, 이 세상엔 너 외에도 수많은 존재가 있다. 형평성을 위해서라도 난 중립을 지켜야만 해.”

중립이라고…….

빌어먹을, 강우는 자신도 모르게 욕을 중얼거렸다.

“이제… 그녀는 어떻게 되지?”

“대개 영혼은 낙원이라 불리는 파라다이스로 가게 된다. 물론, 모두가 그런 건 아니지만. 때가 지난 영혼은 낙원으로 갈 수 없어. 대신 일명 지옥이라 불리는 곳에 영원히 갇혀 살게 된다.”

“레비아탄이 말한 그곳 말인가?”

“그래.”

짙은 절망이 강우의 가슴을 물들이고 불태웠다.

마치 마음속에 검은 비가 내리는 듯했다.

사방이 검은 얼룩이었다.

장혜진은 쾌활한 성격이지만, 겁이 많았다.

그런 그녀가 지옥에서 살게 되다니… 그것도 고작 자기 같은 이기적인 놈 때문에 말이다.

강우가 고개를 들어 오수를 쳐다봤다.

“…물려 다오.”

“불가하다.”

“물려 줘.”

“불가해.”

“물려 달라고, 이 새끼야!”

잔뜩 흥분한 강우가 앞으로 튀어나가 <피바라기>를 휘둘렀지만, 그의 공격은 오수에게 닿지 못했다.

물리적인 접촉에 구애받지 않는 <영체화> 마법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우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검을 휘둘렀다.

현재 그는 바벨탑에서 석탈해에게 무력하게 당하던 그날보다 더 참혹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무언가… 잘못되었다.

자신이 원한 건 이런 게 아니었는데.

그 부질없는 공격 속에서 오수가 말했다.

“이미 지나간 일이다. 넌 복수를 택했고, 그녀는 널 택했다. 이제 와서 돌이킬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

강우가 울분에 차 소리를 질렀다.

가슴이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져 피가 철철 흐르는 듯했다.

분노로 몸을 떨던 그가 마지막 희망을 품고 이야기했다.

“그럼 날 지옥으로 보내라.”

분명 레비아탄은 오수가 그를 지옥으로 보내 훈련시켰다고 했다.

그렇다면 자신도 그럴 수 있을 터였다.

장혜진을 데려올 수만 있다면, 그곳이 지옥이라도 못 갈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오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불가하다.”

“어째서?”

“넌 내게 빚을 졌다. 그 빚을 갚아야만 해. 그전까지 내가 해 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젠장!”

강우가 다시금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세상 그 누구도 보지 못한 모습이었다.

그가 이를 부득 갈며 말했다.

“약속해라. 내가 최후의 석탈해를 죽이면, 날 그 지옥이라는 곳으로 보내 준다고.”

“…….”

“내가 장혜진 대신 그곳에서 살아도 좋다. 그게 안 된다면, 나 역시도 그곳에서 살게 해 줘. 이렇게 부탁하겠다.”

오수는 묵묵히 자신을 향해 고개 숙인 남자를 지켜보았다.

그동안 오수는 강우의 행보를 하나하나 눈여겨보았고, 그 여정을 아는 이상 관심을 두지 않으려야 안 둘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간의 경험을 살리자면, 남자가 이토록 감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건 회귀 이후 처음 보는 일.

강우에게 장혜진이라는 존재가 가지는 의미는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도 훨씬 더 컸던 모양이다.

“확답할 순 없다. 하지만 가능하다면… 고려해 보지.”

“…….”

강우는 입을 다물었다.

마음이 여려 벌레 하나 잡지 못해 항상 자신을 부르던 장혜진이었다.

그런 그녀가 그 여리디여린 손으로 스스로를 찔러 죽일 때 느낀 감정이란 과연 어떤 것일까.

그녀는 제 자신을 찔러 죽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바로 지척에서 자신을 보면서 말 한마디 건네지 못하는 답답함이란 과연 어떤 것일까.

강우는 장혜진이 느꼈을 무수한 감정을 떠올리려 애썼다.

아니, 떠올려야만 했다.

그게 그녀의 희생에 보답하는 유일한 길이니까.

강우의 기세가 변했다.

흥분 탓에 성난 파도처럼 요동치던 감정이 태풍의 눈에 들어선 것처럼 차분해졌다.

그가 입을 열었다.

“최후의 석탈해는 어디에 있지?”

“여전히 시간선을 넘어 이곳으로 오는 중이다. 놈도 이곳에 네가 있다는 걸 알아. 네가 더 크기 전에 싹을 자르고 싶겠지. 놈은 이미 상당한 수의 시간선과 석탈해를 삼켰다.”

상대가 얼마나 강하느냐 따위는 지금 강우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껏 그는 자신보다 강한 적들을 숱하게 상대해 왔으니까.

그리고 여기까지 살아남았다.

사랑하는 자의 희생을 밟고서까지.

“나가겠다.”

“…….”

오수도 더 이상의 대화가 무의미함을 알기에 순순히 포털 쪽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포털이 강우의 앞까지 <텔레포트>했다.

“나가라. 나가서 사이트 스톤을 부수어라. 지금 느낀 네 분노를 세상에 토해 내라.”

강우는 오수의 말대로 했다.

그는 포털을 넘었고, 그와 동시에 시야가 변했다.

“…왔는가.”

강우가 처음 발견한 건 다름 아닌 황 노인이었다.

<사이트 스톤> 앞에서 노인이 기다리고 있었다.

“꿈자리에 오랜만에 자네가 나왔더군. 그래서 혹시나 하고 와 봤는데…….”

강우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사방은 왕린이나 각성자 연구소의 것으로 보이는 잡동사니로 가득했다.

그 시선을 눈치챈 황 노인이 말했다.

“이래 봬도 대한민국에서 가장 안전한 장소라네.”

“…….”

근방에서 느껴지는 기척은 황 노인뿐이었다.

강우가 물었다.

“다들 어디 갔습니까?”

* * *

“이 마물 새끼들아!”

“와아아아!”

동부 전선은 나흘째 밤낮 없는 전투가 한창 진행 중이었다.

왕린의 마법에 관측된 마물의 숫자는 4천 남짓이었으나, 실제로 전선에 닿은 마물은 그 두 배인 8천에 육박했다.

아마도 <소환 마법>을 가진 마물이 있거나, 남하하면서 세를 불린 모양이었다.

“모두 비켜라!”

히데타의 백야검(白夜劍)이 하얀 마력을 뿜어내며 사방으로 냉기를 흘렸다.

콰직!

얼어붙은 마물들에게 거대한 투창이 날아들어 그 몸을 잘게 깨드리고, 미처 해치우지 못한 마물은 둔기를 든 각성자들이 달려들어 부서뜨렸다.

“섬멸(殲滅).”

김인표의 검도 적을 살육하느라 바빴다.

여러 갈래로 뻗어 나간 그의 검이 마물들의 미간과 심장을 찔러 일격에 숨통을 끊었으며, 남겨진 마물을 뒤이어 흑풍대가 처리했다.

“모두 집중해요!”

연신 마법을 펼치며 인간 진영을 지휘하는 서유리의 마법도 대단했다.

그녀의 뒤에는 능력치 향상 위주의 마법을 익힌 오만석이 버티고 서 있었는데, 인간 진영의 주요 각성자들을 지원하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

“이 쌍놈의 새끼들!”

청익과 유아라, 그리고 <치악산 균열> 출신 암살자들도 분투 중이었다.

그들의 임무는 혼란한 전장을 틈 타 거대 마물이나 정예 보스급 마물을 암살하는 것이었고, 그들의 검이 번뜩이는 곳마다 마물이 쿵!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탕!

달그락!

전장에 합류한 살성 김민정도 열심히 적을 저격하고, 한국 진영의 옆구리를 맡은 레비아탄과 해골병들도 쉴 틈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콰과과과과!

하지만 그중에서도 단연 발군은 최전방에 선 박도진이었다.

온몸이 보랏빛 불길로 물든 그는 이미 인간이라 부를 수 없는 모습이었다.

그의 양팔이 휘둘러질 때마다 마물의 몸이 갈려 나가며 피를 쏟았다.

‘…결국 오늘도 나서지 않는 건가.’

일격에 마물 네 마리를 박살 낸 그는 잠시 멈춰 서서 저 멀리 마물 쪽 진영을 살폈다.

숲 한쪽에 자리한 암석 지대에 우뚝 선 건 사도 길문이었다.

놈은 나흘째 여전한 자세로 이쪽을 지켜보고 있었는데, 단 한 번도 전장에 참가하지 않았다.

단지 한 손으로 창을 바닥에 받쳐 들고 있을 뿐이었다.

‘뭔가 기다리는 듯도 하고…….’

서유리도 굳이 길문을 먼저 공격하지 않았다.

놈을 쓰러뜨리는 게 이 전쟁에서 승리하는 길이라는 건 잘 알지만, 잘 막아 내고 있는 현재 굳이 선제공격할 필요는 없었다.

물론, 다른 한편으로는 놈을 처리할 방도를 궁리하는 중이었다.

안 그래도 어젯밤 서유리는 은밀하게 박도진과 청익, 김민정을 불렀다.

― 죄송하지만… 세 분께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어요.

작전은 간단했다.

서유리의 <공간 전이> 마법으로 길문에게 접근하면, 네 사람이서 놈을 상대하는 것.

그야말로 목숨을 건 작전이었다.

단번에 승부를 보지 못할 시, 그들은 놈들의 진영에 갇히게 되는 것이다.

그들을 구출할 인원도 편성했지만, 놈들의 숫자를 고려하면 구하지 못할 확률이 더 높았다.

― 계산상 나흘째 되는 날이 가장 적합한 날이에요.

그게 바로 오늘이었다.

서유리가 예측한 마물의 가장 적으면서도, 이쪽의 힘이 아직 건재한 날.

박도진은 귀에 걸린 통신기를 만지작댔지만, 여전히 그녀는 신호가 없었다.

아직 때가 이르다고 생각한 게 분명했다.

이런 동귀어진식의 결전은 대한민국의 대장을 맡은 그녀로서도 부담되는 일일 터였다.

그녀는 자신의 후임으로 황 노인과 유지태를 택했다.

그때였다.

[박도진 씨! 준비하세요!]

호출을 받은 박도진은 서유리 쪽을 쳐다봤다.

어느새 청익과 함께 서서 이쪽을 바라보는 그녀가 보였다.

콰득!

주변에 선 거대 마물 한 마리의 머리를 움켜쥐어 터뜨린 박도진은 서둘러 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길문과의 싸움.

목숨을 건 사투가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 * *

“히데타 님!”

한창 적을 도륙 내던 히데타는 자신을 다급하게 부르는 수하의 말에 고개를 돌렸다.

다가온 수하의 얼굴이 창백했다.

“무슨 일이냐?”

“본국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본국에서?”

“예! 지금 마츠야마 쪽에 보스급 마물이 대량 등장했답니다!”

“뭐? 마츠야마에?!”

“이대로라면 하루를 버티기 힘들 것 같다고 했습니다!”

히데타의 가슴이 철렁했다.

삼각대를 이룬 일본의 후쿠오카 전선은 한 곳이 무너져도 붕괴하기 쉬웠다.

세 곳이 견고하게 서로를 보완하는 모양새이기 때문이다.

“제기랄…….”

히데타는 낭패스러운 얼굴로 서유리 쪽을 쳐다봤다.

곧 길문과의 싸움이 시작되려는 참이다.

지금 자신이 빠진다면, 그녀의 계산에 착오가 생길 게 분명했다.

“넌 당장 카시오에게 이동 마법을 준비하라고 해! 난 서유리 길드장에게 다녀오겠다!”

“알겠습니다!”

다행히도 오동 길드 측에는 대륙과 대륙도 오갈 수 있는 <이동 마법>을 익힌 마법사가 있었다.

한 번 사용하면 일주일 이상 사용하지 못한다는 단점이 있지만, 히데타는 그 좋은 마법을 쓸 생각을 하면서까지 한국을 도우러 온 것이다.

자신에게 자비를 베풀어 준 강우를 위해서.

“서유리 길드장……!”

하지만 비극은 이제부터가 시작이었다.

히데타가 통신기로 서유리를 막 부르려던 찰나, 그녀의 주위로 마력이 솟구치고 있었다.

“아……!”

히데타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말을 건넬 새도 없이 이미 길문을 상대할 결사대는 <공간 전이>로 사라져 버린 것이다.

[히데타 님! 카시오 준비됐습니다!]

히데타는 수하의 무전에도 한참이나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이를 갈았다.

[히데타 님! 시간이 없습니다!]

“제기랄…….”

설상가상 한국의 통신기마저 사방의 자욱한 마력들에 상했는지 먹통이었다.

잔뜩 깨문 히데타의 입술에서 붉은 선혈이 흘렀다.

나흘간이나 목숨을 걸고 싸웠고, 그 누구보다 먼저 나서 적을 쓰러뜨렸다.

이만하면 충분한 보답이 됐을 터.

아무리 은혜가 중요하다고 한들, 자국을 지키는 것보다 중요한 건 없을 터였다.

그는 빠르게 판단을 내렸다.

이곳에 남은 자들 중 가장 강한 자는…….

“료! 지금 당장 그 야만인 남자와 오만석 길드장을 불러라! 우린 본국으로 돌아간다!”

검은 헌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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