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화] 희생 (1)
계단의 끝은 가까워 보이면서도 멀었다.
쉼터를 떠난 강우는 약 스무 시간 남짓을 더 오른 뒤에야 다다를 수 있었다.
나선형 계단의 끝.
그곳에는 거대한 공터와 함께 저 멀리 하나의 파란빛 포털이 보였다.
“…….”
기대와 달리 보잘것없는 장소였다.
잠시 물끄러미 지켜보던 강우는 천천히 그곳을 향해 걸었다.
포털은 <균열>의 입구와 크게 다를 것 없어 보였다.
하지만 발을 들여도 어쩐 일인지 포털은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았다.
역시나 그냥 내보내 주는 법은 없는 듯했다.
“…이렇게 계속 시간을 끄는 것도 이젠 슬슬 신물이 날 지경이다.”
강우가 중얼거리자, 비소로 뒤편에서 새로운 기척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예상대로 그는 오수였다.
평범한 일상복 차림새의 오수가 우두커니 서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본체 오수일까?
강우는 눈앞에 나타난 상대를 가만히 응시한 채 경계를 거두지 않았다.
“본체인가?”
“…그래.”
상대는 순순히 자신의 정체를 인정했지만, 강우의 눈빛은 여전히 매서웠다.
“어떻게 증명할 수 있지?”
“…….”
잠시간 침묵하던 오수가 손을 들었다.
츠츠츠츳!
그러자 미약한 스파크가 허공에 동그라미를 그렸다.
일정한 공간을 비춰 주는 <영상 마법>이었다.
마법계 각성자 중에서도 집중력이 좋은 자들만이 사용 가능한 최고급 마법.
본체 오수가 그린 동그라미 속으로 아직도 싸움을 벌이는 어린 오수들이 보였다.
― 가로막는 건 모두 없애!
― 이 싸움의 승자는 우리다!
― 자유를 찾아서!
아이들이 목청이 터져라 지르는 고함이 귓가에 생생하게 들려오고, 그들이 흘리는 피가 선명하게 보였다.
자신이 어디에서 왔고, 왜 이런 상황에 부닥치게 됐는지 모르는 아이들.
강우가 떠나온 뒤에도 아이들은 그에 대한 대답을 얻기 위해 투쟁을 계속하고 있었다.
오수의 마법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는 돌연 원 속으로 팔을 집어넣었다.
그러고는 그곳에서 한 소년을 움켜잡았다.
― 어, 엇?!
― 노, 놈들이 사술을 쓴다!
대뜸 허공에서 튀어나온 대형 팔에 아이들이 기겁하며 비명을 질렀다.
몇몇은 용기 있게 팔을 공격했지만, 친구를 구하기는커녕 미약한 충격조차 주지 못했다.
결국 소년은 허무하게 오수의 손에 붙잡혀 끌려 나왔다.
<영상 마법>에 이은 <공간 왜곡>, <차원 이동> 등 여러 마법이 혼합된 결과였다.
“여, 여긴…….”
<영상 마법>이 소멸하는 가운데, 오수의 손길에 이끌려 나온 소년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주변을 살폈다.
숱한 전투를 치른 탓에 행색이 엉망이지만, 녀석은 강우도 아는 얼굴이었다.
곧 녀석의 시선이 강우에게 닿았다.
“아저씨?”
강우를 알아본 소년은 바로 ‘탑 밖의 세상’을 홀로 인지하고 있던, 안경 쓴 소년이었다.
『살고 싶어. 우릴 버리지 마.』
강우에게 쪽지를 남긴 바로 그 아이 말이다.
하지만 그동안의 일 때문인지 유약해 보이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날렵한 인상의 소년만이 있을 뿐이었다.
어느새 아이는 두꺼운 책 대신 총자루를 쥐고 있었다.
강우가 해명을 요구하는 얼굴로 본체 오수를 바라보자, 그는 말없이 소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
오수의 얼굴을 올려다본 소년의 목이 눈앞에서 뱀을 마주한 생쥐의 것처럼 뻣뻣하게 굳었다.
마치 못 볼 거라도 본 얼굴이었다.
“넌…….”
소년은 발버둥조차 치지 못했다.
스르르르르―
오수의 손길에 아이는 그대로 산화해 허공으로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자유를 갈망하던 소년은 소원대로 탑을 벗어나는 것과 동시에 소멸해 버렸다.
“이제 증명이 됐나?”
“…….”
강우는 말없이 오수를 노려보았다.
산화한 소년의 불티가 여전히 주변을 떠돌고 있었다.
오수의 입장에서 보면 단순히 자신의 ‘기억’ 중 하나를 소멸시킨 것에 불과할 테지만, 강우의 기분은 그게 아니었다.
잠시이지만 분명히 소년은 자신과 ‘함께’한 존재였다.
그런 존재가 허망하게 죽어 버렸는데 기분이 좋을 리 만무했다.
강우가 다소 날 선 목소리로 말했다.
“역겨운 증명 방식이로군.”
“…그런가. 하지만 아쉽게도 내게는 네 감상이 중요하지 않다.”
그간 탑에서 만난 오수들과 달리 본체 오수는 냉소적이다 못해 상당히 비뚤어진 존재였다.
“내게 중요한 건 오직 이 세상을 지켜보는 것. 시간선이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뻗어 나가게 내버려 두는 것이 내가 할 일이다.”
본체 오수의 눈에선 아무런 감정도 잃을 수 없었다.
마치 이미 죽어 버린 사람의 눈을 보는 듯했다.
“그리고 그걸 망치는 석탈해를 막는 게 바로 내 일이지.”
강우는 담담하게 읊조리는 본체 오수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 물었다.
“의아하군. 그렇다면 막으면 될 일 아닌가.”
“…….”
강우는 본체 오수의 행동이 이해하기 어려웠다.
단순히 비교해 봐도 본체 오수는 자신보다 강했다.
그런데 어째서 그는 자신을 이용해 석탈해를 상대하려 드는가.
처음 오수의 존재를 인지했을 때만 해도 <데스 나이트>와 오수가 이 <사이트 스톤>에 갇혀 있는 존재들인 줄로만 알았다.
그래서 그 밖에서 대신 싸워 줄 존재가 필요한 줄 알았는데…….
하지만 오수의 ‘기억’과 달리 본체 오수는 밖을 자유롭게 오갈 수 있고, 시간선마저도 별다른 페널티 없이 넘나들 수 있는 존재였다.
그런 신적 존재가 어째서 한낱 인간에 불과한 자신의 손을 빌려 석탈해를 없애고자 한단 말인가.
“네 할 일이 석탈해를 막는 일이라면, 그렇게 하면 될 뿐이다. 여기서 한가로이 시간을 때울 게 아니라.”
정곡을 찌르는 강우의 말에 오수는 잠시 말이 없었다.
이윽고 그가 입을 열었다.
“석탈해는 적이지만, 그와 동시에 시간선 안에서 살아가는 존재다.”
“무슨 뜻이지?”
“석탈해의 행보 또한 시간선의 흐름에 지나지 않다는 뜻이지.”
…그런가.
강우는 그제야 오수가 석탈해를 직접 상대하지 못하는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오수는 시간선의 흐름을 지켜보는 존재.
석탈해는 자신의 신적 지위를 포기하고 시간선에 몸소 들어섰고, 오수의 백성이 되었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오수가 석탈해를 저지할 명분은 사라졌다.
석탈해가 무슨 짓을 벌이든, 그건 하나의 시간선 안에서 벌어지는 일.
그 또한 시간선의 여러 가지 중 하나일 뿐이었다.
그것이 오수가 사랑하는 시간선을 잡아먹는 일일지라도.
“우습군. 단지 그러한 이유로 직접 처리하지 못하다니.”
장담하건대, 그러한 오수의 행동은 스스로 세운 규정에 따른 규제일 터였다.
즉, 오수는 자신의 세운 법칙을 어길 수 없어 일을 이 지경까지 가져온 것이다.
그 모든 사정을 깨닫자 강우는 자신도 모르게 실소했다.
“어처구니가 없어.”
“…법칙은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다.”
그러나 정작 오수는 진지했다.
“법칙이 없는 세상은 혼돈이 찾아오기 마련이다. 내가 절대권력을 쥐었다고 해서 제멋대로 행동하게 된다면, 세상은 엉망이 될 거다. 무한하게 뻗어 나가는 시간선을 법칙 없이 다스릴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가?”
강우는 묵묵히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내가 널 선택한 이유도 어느 정도는 그러한 데 있다. 너 또한 네가 세운 규칙에 얽매이는 자니까. 아니 그런가?”
“…….”
강우는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오수의 말대로 강우는 스스로 세운 가치와 신념을 중요시하는 인간이지만, 그처럼 융통성이 아주 없는 편은 아니었다.
진실이 어떻든 강우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석탈해를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나?”
“글쎄. 막아 주길 바라지만, 지금으로선 힘들어 보이는군.”
“나는 이 사이트 스톤을 파괴할 생각이다. 그렇게 되면 네가 세운 탑도 무너지게 되겠지. 네가 원하던 대로.”
“…그렇게 되면 티끌만큼이나마 승산이 있겠군.”
오수는 처음으로 감정이 드러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씁쓸함’이었다.
그가 말했다.
“이미 어느 정도는 깨달았겠지만, 그래도 네게 말해 주어야 할 것이 있다.”
“…….”
강우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지금부터 오수가 할 말이 장혜진에 대한 것임을 직감했기 때문이다.
오수는 다시 담담해진 얼굴로 이야기했다.
“나는 시간선을 지켜보는 존재다. 개입하지 않고 흐름을 감상하는 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지. 그리고 거기에서 일어나는 모든 죽음을 기억한다. 당연한 일이다. 시간선을 지켜본다는 건, 그 땅에서 사는 자들을 모두 지켜본다는 의미이니까. 내가 관망하는 세계를 살아간 존재를 기억하는 건 의무지.”
이미 섬에 살던 오수에게 들은 이야기였다.
오수는 모든 죽음을 기억한다.
그건 오수에게 있어 일종의 사명이었다.
“하지만 내 기억들은 다르다. 내가 탑에 쌓은 기억들에겐 그러한 의무가 없어. 내게 버림받은 순간부터 그들은 그러한 사명에서 벗어나는 거다.”
츠츠츠츳―
오수의 손길에 소멸했던 불티가 다시 모여들었다.
어느새 다시 태어난 소년 오수가 영문을 알 수 없다는 얼굴로 제 몸을 살폈다.
“내게 있어 그들이 무기가 될 수 있다는 걸 깨달은 건 얼마 되지 않았다. 그들은 내 사명을 알고 있으면서, 그 사명에 얽매이지 않는 존재. 그들을 이용하면 얼마든지 시간선에 개입할 수가 있다. 그게 비록 편법이라고 할지라도.”
그게 제 법칙에 발목을 잡혀 고심하던 본체 오수가 떠올린, 석탈해를 상대하는 방법이었다.
바로 자신의 기억을 이용하는 것.
“…엇?”
본체 오수의 손길에 소년 오수는 작별 인사를 나눌 시간도 없이 다시 사라져 버렸다.
아마도 소년들이 싸우던 그 전장으로 떠났을 것이다.
그리고 다시 탑 밖의 세상에 대해 떠들어 대겠지.
“예상대로 그들은 데스 나이트와 공조해 널 이 시간선으로 불러들였다. 단, 새로운 문제가 생겼지.”
강우는 마른침을 삼켰다.
새로운 문제란 바로 ‘제물’이었다.
“시간선을 넘는다는 건 그리 간단하지 않아서, 막대한 희생이 필요하다는 게 내 ‘법칙’이었다. 가령, 시간선을 떠난 존재는 그 세상에서 잊힌다든가, 시간선을 넘어갈 땐 이미 일어나지 않은 미래로는 갈 수 없다든가 하는 것들.”
강우는 더 참지 못하고 물었다.
“그래서… 내가 시간선을 넘어오면서 희생한 건 뭐지?”
“…….”
<데스 나이트>는 장혜진이 자신과 같은 시간선에 있다고 말했다.
이 시간선에 접어든 순간부터 그녀는 줄곧 자신과 함께 있던 것이다.
바로 제 주위에서.
오수의 입술이 열렸다.
“장혜진.”
이미 예상한 대답이지만, 막상 그것을 확인하자 가슴에 검은 연기가 들이찬 듯 먹먹했다.
오수가 말을 이었다.
“네가 바벨탑에서 석탈해에게 배신당하고 얼마 뒤였다. 그녀는 매일 밤 널 위해 기도했지.”
“…….”
“그리고 난 그녀를 찾아갔다.”
영생을 바라던 왕족들을 찾아갔듯이, 오수는 장혜진의 소원을 듣고 그녀를 찾아갔다.
오수는 아무나 찾아가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의 방문에는 항상 ‘목적’이 있었다.
강우가 힘겹게 물었다.
“그녀의… 소원은 뭐였지?”
― 그가 무사하게 해 주세요. 세상이 그에 대한 오해를 풀게 해 주세요.
순간, 장혜진의 음성이 강우의 뇌리에 울려 퍼졌다.
그리운 음성이지만, 그것을 듣자 속이 울렁거리고 구역질이 나올 것만 같았다.
사위가 흔들리고, 참지 못한 눈물이 흘렀다.
“나는 그녀의 소원을 이루어 주었다. 그리고 그 대가는…….”
오수가 뜸을 들이는 사이, 강우는 이미 예견된 사형선고를 기다리는 죄수의 기분을 느꼈다.
이윽고 그의 입이 열렸다.
“모든 시간선에서의 소멸.”
검은 헌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