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화] 전쟁 (7)
동부 전선에는 비장한 전운이 감도는 중이었다.
서유리는 사도 ‘길문’이 온다는 소식에 한국의 정예 대부분을 이곳으로 집중시켰다.
단, 각성자의 숫자는 최소화했다.
어차피 다수가 있어 봐야 효율은 떨어지고, 피해만 더 커질 뿐이란 걸 잘 알기 때문이다.
길문쯤 되는 실력자를 상대하려면, 차라리 최정예 몇 명으로 싸움을 벌이는 게 더 낫다는 게 그녀의 생각이었다.
“모두 모이셨나요?”
진지에서 모두를 기다리는 서유리의 얼굴은 피로가 가득했다.
전쟁 발발 이후로 그녀의 취침 시간은 하루 두 시간을 채 넘기지 못했다.
짬짬이 눈을 붙이는 것으로 간신히 버티고 있었으나, 그것도 하루 이틀이지, 네 달이 넘어가자 그녀의 체력도 점점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다.
만약 각성자 연구소에서 만든 <특수 각성제>가 없었다면, 이미 쓰러져도 골백번은 더 쓰러졌을 터.
지금 그녀를 움직이는 건 물처럼 마시는 각성제와 모두를 지켜야 한다는 집념이었다.
“지금부터 현재 상황 브리핑을 시작하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유리는 결코 나약한 모습을 보이거나 업무를 미루지 않았다.
오히려 두 눈에 더 힘을 주고 뜬 채 악착같이 제 할 일을 해냈다.
“오늘 새벽, 북한에서 마물들이 남하하는 장면이 관측됐습니다. 숫자는 대략 4천입니다.”
비록 이번에 호공이라는 예외가 있긴 했으나, 그전까지의 사도들은 홀로 다니는 예가 없었다.
적게는 수백에서, 많게는 수만까지.
놈들은 마물들을 수하처럼 거느리고 다녔다.
아마 인간의 군대처럼 놈들에게도 거느리는 군단이 따로 있는 듯했다.
“사실이다.”
츠츠츳!
서유리가 고개를 돌려 쳐다보자, 왕린은 마법을 펼쳐 자신이 목격한 적의 행보를 보여 주었다.
허공에 작게 그려진 원 속에서 마물들이 걸어가는 것이 보였다.
지상을 가득 메운 수천의 마물이 으르렁거리고 포효하며 성큼성큼 남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소리는 들리지 않지만, 상황을 인지하기에는 충분했다.
“잡것들이… 꽤나 모였군.”
김인표가 팔짱을 낀 채 중얼거리자, 다른 이들도 동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곧 마법 영상이 사라지자, 서유리가 말을 이었다.
“다들 아시겠지만, 격(擊)의 사도라 불리는 길문은 창을 무기로 쓰는 자입니다. 이번 전투에서 가장 중요한 건 바로 그자의 발을 묶는 것. 그런 다음, 저와 오만석 길드장님의 마법을 포함한 모든 총공세를 퍼부을 생각입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절대로 적이 동부 전선을 넘게 해서는 안 됩니다. 이곳이 무너지면 원주까지 밀려날 각오를 해야 해요. 그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서울과 경기권도 위험해지겠죠.”
서울, 경기도 지역까지 밀려나면 현재 대부분의 인프라가 집중된 세종시도 안전하다고 볼 수 없었다.
이야기를 듣는 모두의 표정이 어두운 가운데, 서유리는 한 가지 희소식을 전했다.
“이번 전투에는 살성(殺聲)과 히데타도 참가합니다.”
“…삼신성이?”
전혀 예상치 못한 소식에 오만석과 로드리게를 포함한 각성자들이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어엿한 마물 사냥꾼이 된 김민정은 뛰어난 저격수였다.
강우의 추천으로 좀 더 일찍 총을 든 게 신의 한 수였다고나 할까.
어느덧 4차 각성자가 된 그녀는 백발백중의 명사수로 마물들을 처리해 나갔는데, 지금까지 해치운 보스급 상급 마물만 열 마리가 넘었다.
그때, 잠자코 듣고 있던 청익이 물었다.
“히데타가 도착하는 건 언제입니까?”
“안 그래도 이곳에 오기 전, 그가 출발 직전이라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늦어도 오늘 저녁까지는 올 겁니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청익은 고개를 끄덕였다.
심수련의 죽음으로 인해 평소 같지 않게 예민해진 청익이었다.
그녀의 희생으로 호공은 큰 타격을 입고 도망쳤다고 들었지만, 그 사실이 청익에게 위안이 되는 건 아니었다.
‘사부… 그게 마지막이 될 줄 누가 알았겠수.’
그가 심수련을 직접 만난 건 이승우를 상대할 때가 마지막이었다.
이왕 세상에 나온 김에 종종 보게 될 줄 알았는데…….
이렇게 허망하게 갈 줄 누가 알았겠는가.
청익은 헛헛함을 느끼며 동부 전선에서 이쪽으로 넘어온 유아라와 박도진을 슬쩍 쳐다봤다.
자신도 자신이지만, 심수련의 죽음을 눈앞에서 목격한 그들의 충격도 클 터였다.
역시나 두 사람의 표정은 굳을 대로 굳어 도무지 풀어질 줄 몰랐다.
“브리핑은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레인저분들은 여전히 경계에 집중해 주시고, 전투원분들은 각자 정비에 힘써 주세요. 왕린 씨는 전선 강화를 도와주시고요.”
“알겠다.”
서유리는 할 말을 모두 마치고 밖으로 나갔다.
이제 천막에 남은 건 모두 아홉 명이었다.
청익, 오만석과 로드리게, 유아라와 박도진, 도봉팔, 왕린, 독종 길드장 김인표, 성심 길드장 임보라.
대한민국에서 내로라하는 강자들이 사도 하나를 막기 위해 모두 모인 셈이었다.
과연 자신들은 길문을 막을 수 있을까.
아무도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 * *
히데타는 노을이 질 때 즈음 도착했다.
그는 총 여섯 명의 수하를 데리고 왔는데, 하나같이 빼어난 기세를 뿜어내는 자들이었다.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당연히 와야 할 일입니다.”
서유리의 감사 인사에 히데타는 겸손하게 대답했다.
확실히 강우에게 패한 뒤로 그의 성격은 다소 달라져 있었다.
항상 날이 서 있던 성격이 좀 누그러졌다고나 할까.
천외천(天外天)을 확인한 이후로 그는 자신의 트레이트마크라 할 수 있는 냉소와 날카로움을 버리고 겸손함을 취했다.
물론, 일본을 대표하는 최강자가 단지 강우와의 인연 때문에 한국을 도우러 온 건 아니었다.
현재 오동 길드가 일본의 전선을 잘 유지하고 있다지만, 한국이 무너져서는 안전을 장담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되면 언제 등 뒤에서 적이 날아들지 모를 일.
한국으로서도, 일본으로서도 양국은 좋든 싫든 존망을 함께해야 하는 지리적 위치에 있었다.
“주변을 조금 둘러보고 싶군요.”
“그러시죠. 이쪽으로. 직접 안내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히데타와 서유리는 길문을 맞이하게 될 양구의 숲쪽으로 걸어갔다.
캉! 캉! 캉!
주변은 전쟁 준비가 한창이었다.
왕린과 제자들이 혹시 모를 위험에 대비해 거대한 보호막을 생성하고, 청익과 유아라를 위시한 암살자 무리는 기습 연습을, 오만석과 그 길드원들은 각종 함정과 참호를 준비하느라 한창이었다.
히데타는 그 모든 준비를 눈여겨봤으나, 정작 정신은 딴 곳에 쏠려 있었다.
잠시 망설이던 그가 서유리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런데… 혹시 그분은 아직 소식이 없으십니까?”
서유리는 히데타가 말하는 ‘그분’이 누군지 즉각 알아차렸다.
브레이크가 발생한 그날부터 히데타는 종종 연락해 ‘그’에 대한 소식을 묻곤 했으니까.
그녀가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렇군요.”
히데타도 서유리를 따라 고개를 끄덕였다.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동시에 묻어 나오는 반응이었다.
분명 히테다도 자신과 비슷한 생각을 하는 게 분명했다.
만약 한강우가 있었다면 상황은 달라졌을 거라고.
그들은 불과 한 주먹으로 최고위 각성자를 제압하던 강우의 모습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게 목격자의 입장이든, 당사자의 입장에서든.
“대체 어디로 가신 걸까요?”
“…그러게요. 저도 좀 알고 싶어요.”
둘은 씁쓸하게 웃었다.
그들은 <사이트 스톤>에 대해 알지 못하므로, 강우가 언젠가 돌아온다는 점도 알지 못했다.
그들에게 있어 강우는 그야말로 행방불명, 그 자체.
전쟁이 발발한 지 수개월이 지나자, 이제 그들에게 강우라는 희망은 사라지고 없었다.
“가시죠.”
하지만 강우만을 기다리며 주저앉아 있기에는 현재 그들이 처한 상황이 너무나도 좋지 못했다.
그저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수밖에.
곧 상념을 거둔 그들은 다시 전선을 둘러보는 데 시간을 보냈다.
* * *
“…너, 괜찮냐?”
“괜찮아요.”
애써 웃어 보이는 유아라를 보며 청익은 속으로 혀를 찼다.
‘안 괜찮구먼.’
유아라도 한때 <치악산 균열>에서 암살자 수업을 받은 만큼 심수련과는 어느 정도 인연이 있는 셈이었다.
게다가 그들은 한 달 이상 서부 전선에서 함께 싸우지 않았던가.
심수련의 죽음이 아무렇지 않을 리 없었다.
“스승님은… 괜찮으세요?”
“당연히 안 괜찮지.”
“…….”
유아라가 민망한 듯 얼굴을 굳히자 청익은 작게 웃으며 말했다.
“표정 풀어. 사부는 원래 전장에서 죽고 싶다고 했으니까 말이야. 그나저나 사부가 한강우의 기운을 썼다고 하던데, 사실이야?”
“…예.”
유아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강우는 <사이트 스톤>에 들어가기 전, 그동안 모아 둔 <이무기의 비늘>을 전부 박도진과 유아라에게 넘겼다.
도움이 됐으면 하는 마음에서 준 것이지만, 그들이 무사하기를 바라고 주었다는 게 더 알맞았다.
하지만 둘은 그것을 자신들만 갖고 있지 않았다.
혹시 몰라 주변의 몇몇 사람에게 그것을 나눠 준 것이다.
특히나 변이의 힘을 사용하는 박도진는 검은 기운의 효용이 그리 크지 않기에 비늘 대부분을 타인에게 양보했다.
덕분에 검계의 주요 인사들은 대부분 비늘을 하나 이상씩 들고 있었다.
청익이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안 쓴다고 하시더니…….”
마지막으로 통화했을 때만 해도 ‘그런 것 따위 쓸 일 없다’고 호기롭게 외치던 심수련이지만, 제 사람들이 위기에 처하자 결국 자존심을 굽힌 모양이었다.
“…….”
한동안 그들은 침묵을 지켰다.
어쩌면 죽음은 이제부터 시작일지도 몰랐다.
지금까지야 운 좋게 다들 살아남았지만, 이번 싸움은 여태까지 벌인 싸움과는 수준이 달랐다.
무려 사도다.
그것도 그 무용이 확인된 길문.
전투계가 아니라는 호공 혼자서도 심수련을 무력하게 만들었는데, 놈의 능력이 얼마나 대단할지 감히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살아남자.”
대뜸 뱉은 청익의 말에 유아라가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살폈다.
그의 눈빛이 사뭇 비장했다.
“반드시. 적어도 한강우 놈이 돌아오는 건 봐야 하지 않겠어?”
“…물론이에요.”
그제야 유아라도 굳은 얼굴을 풀고 희미하게나마 웃음을 보였다.
하지만 그들은 잘 알고 있었다.
오늘 밤, 이곳에는 무수한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는 걸.
청익도, 유아라도… 생존을 보장받은 이는 아무도 없다.
유아라는 왕린과 제자들이 만든 보호막을 돌아보았다.
보호막을 친 건 전방이 아닌, 그들의 후방이었다.
만약 그들이 패배하더라도 아래 지역에서 새로운 전선을 구축할 시간을 벌어 주려는 것이다.
‘…….’
유아라는 문득 지금의 기분이 팔달산으로 향하던 때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팔달산에서 권 씨 형제를 죽이고 스스로 목숨을 끊을 생각이었다.
그래서일까.
그녀는 동굴에 들어서기 전, 죽음보다 패배가 더 겁난다는 기분이 들었다.
지금의 기분이 딱 그랬다.
죽음보다 패배가 더 두려운 순간.
‘지지 않아.’
유아라는 주먹을 꾹 움켜쥐었다.
버틸 것이다.
어떻게든 버텨서 그 남자가 올 때까지 이 땅을 지킬 것이다.
비록 그게 수개월, 수년 후가 된다고 해도.
이를 악물고 악착같이 지켜 낼 것이다.
그리고 그날 밤.
마침내 길문이 이끄는 수천의 마물이 동부 전선에 닿았다.
검은 헌터